[통일위원회]독일 통일 기행

2016-08-24

2016. 6. 24.~7.1. 푸르지만 습한 초여름 날씨와 지친 일상, 수심가득해지는 사건, 사고를 뒤로하고 우리는 떠났습니다. 무작정 떠나는 심정으로 떠났습니다. 그 동안 통일기행은 몸은 백두산, 마음은 북녘 땅을 향했었습니다. 이번에는 새로운 기획을 했습니다다.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루어 낸 독일에서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자는 기대와 각오로 독일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민변 독일통일기행단은 총 29명의 민변회원과 가족들로 구성되어 7일간의 꿈같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제 그 아름답고 놀라웠던 추억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래는 총 5명이 날짜별로 기행문을 작성하고 이를 편집하였습니다.

편집_김용민 변호사

 

 

첫째 날

양승봉 변호사

 

아까워서 빨리 쓰고 싶지 않았던 기행문을 씁니다. 쓰다 보니 다시 즐거워지네요.

2016. 6. 24. 세계는 영국의 블렉시트로, 우리 통일위는 탈북자 종업원 인신구제 문제로 어수선했지만 우리는 떠납니다. 바야흐로 통일기행, 하나 된 통일을 배우자…그리고 신나게 놀자

12시 전후 삼삼오오 공항에 도착해 티겟팅을 하고 출국장으로 향합니다. 여유있게 식사를 하고 오후 2시 30분 경 비행기에 오릅니다. 아…10시간이 훌쩍 넘는 긴 시간입니다. 각자 취향에 맞게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아델을 듣습니다. 7살 먹은 정윤이는 만화영화를 반복해서 봅니다.

마침내 프랑크푸르트 도착. 먼저 도착하신 심재환 변호사님과 반갑게 조우하고 우리는 베를린 환승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프랑크푸르트 공항 여기저기를 구경합니다. 그런데 독일 비행기도 연착을 하네요. 그것도 1시간 가까이, 8시 45분 비행기가 9시 30분이 넘어 출발을 하는 후진국형 공항의 경험을 합니다. 베를린에 도착한 후 수하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또 상당한 시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변호사님들 투덜거리면서도 그리 싫지 않은 느낌입니다. 너네도 참..

바깥에는 우리를 가이드하기로 하였던 홍성구 박사님을 대신해 젊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네요. 그날 독일은 엄청난 폭우와 돌풍 때문에 철도가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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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항에 도착해서

경험상 공항과 출구는 그 나라만의 독특한 향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 공항은 별다른 향기가 없었네요… 생각해보니 저는 주로 동남아를 경험했었다는..

독일은 선선하다는 사전지식이 무색하게 생각보다 후덥지근했습니다.

버스로 이동하여 드디어 숙소로 갑니다. nh호텔… 키를 받고 새벽 1시를 넘겨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도 회식을 했다는 분들이 있었다는 소문이..

 

 

둘째 날

양승봉 변호사

설렘 때문인지 일찍 일어났네요..7살 먹은 정윤이도 일찍 일어납니다.

함께 강가를 걷고 다리를 건너갑니다. 다리 중간에는 술병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옛 추억이 생각나 불쾌함 보다 왠지 친근했네요.

정윤이는 호수의 기러기들을 좋아합니다. 자그마한 호텔이지만 정갈하고 꽃들도 아기자기 이뻤습니다. 산책 후 조식을 하고 버스를 기다립니다. 아이들이 재미나게 뛰어노네요.

홍성구 박사님과 박사님의 훈남 아들 주찬군이 우리의 가이드입니다. 첫인상이 좋습니다. 처음으로 독일 시내를 가로질러 구경을 합니다. 강변을 따라 예쁜 공원과 멀리 보이는 호수 옆 가게, 곳곳에 있는 멋진 그림들이 운치가 있었네요. 여기가 설마 라인강은 아니겠지.. 무지와 행복지수가 가끔은 비례하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을 총기획한 김용민 변호사의 진행으로 모두 자기소개를 하였습니다. 한분씩 재미있게 자신을 소개하고 제일 끝에 앉았던 제가 소개를 마치는 순간 정확히 독일 여행의 1탄, 제국의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변호사님들 시간 하나는 잘 지킵니다.

아 누가 독일 여름 날씨가 초가을 날씨라고 했던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더운 날이었고 가장 많이 본 날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입장 불가였습니다. 주찬군이 돌보는 사이 우리는 한참을 땡볕에서 기다리다 들어갑니다. 너무 더웠네요.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는 제국의회에 대하여 간단히 옮깁니다.(복사가 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옮겨적었음을 왼손이 알게 알립니다.)

 

독일제국의 첫 의회 의사당이었던 건물이다.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건축가 파울 발로트가 1884년에서 1894년까지 10년에 걸쳐 건축했다.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베를린 중심가의 티어가르텐 지역에 위치한다. 1918년까지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됐다. 1933년 2월에 발생한 큰 화재로 크게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 건물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집중적인 포화를 맞았다. 독일 분단 시절 서독에 속해 있었다. 건물의 파손 정도가 심했던데다 서독의 수도가 베를린에서 본으로 옮겨지면서 이 건물도 사용되지 않게 됐다.

1961년에서 1964년까지 건축가인 파울 바움가르텐의 지휘로 새건축이 이루어졌다.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인 독일통일 의식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지면서 독일 역사에 다시 등장했다. 통일 다음 날 독일 국회의원들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 건물에서 모임을 가졌다. 독일 통일 이후 19991년에서 1999년에 걸쳐 다시 한 번 전체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1999년 재건축이 완료된 이후부터 독일 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베를린 시내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리로 된 돔이 있다.

-두산백과, 제국의회 의사당

의회에 들어가서 홍 박사님으로부터 제국의회 구성과 자리 배치 등 간단한 설명을 듣고 의회에서 진행되는 독일말 설명을 귀동냥합니다. 알아먹지 못하고 들었는데 의회 내부는 일견만 했어도 충분했다는 느낌입니다.

설명을 듣고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옥상에서 주변 전망을 시원하게 둘러보고 유리 돔 내부를 천천히 올라가 사방을 관망합니다. 350만 인구의 베를린 시내가 한눈에 조망됩니다. 유리 돔에서 의회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 구조가 신선했습니다.

제국 의회를제국의회를 구경하고 내려와 아이들과 합류합니다.

우리는 베를린의 상징인 평화의 문으로 향합니다. 평화의 문을 가는 도중 길 위에 그려져 있는 하얀 선에 대해 설명 듣습니다. 철거된 베를린 장벽의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탈출하다 사망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안내 표지도 보였습니다.

평화의 문은 1788~1791년에 프로이센의 개선문으로 세워졌는데 3년 뒤에 평화를 상징하는 2륜 4두마차가 지붕 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4두 마차가 수난을 좀 겪었는데 나폴레옹이 1806년에 파리로 떼어가 버렸고 1814년에 독일이 승전하고 다시 찾아 와 문 위에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이 문은 제2차 대전 때 크게 파괴된 후 1957년부터 8년에 걸쳐 복원 공사를 하고 2009년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 때는 마라톤과 경보경기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 되었다니 독일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평화의 문 주변엔 미국과 프랑스 대사관 등이 있었습니다. 멋있는 문이었고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구경을 마치고 식당으로 갑니다. 아…시원한 생맥주. 맛있는 음식인데 아이들은 거의 먹지 못합니다.

맛난 식사를 마치고 슈타지로 향합니다. 슈타지-통일 전 동독 비밀경찰 조직. 공포의 장소. 10만의 슈타지가 동독 1,600만을 감시하였다고 합니다. 도,감청 장치를 비롯해 국민을 감시하는 여러 장비…그리고 당시 사무실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을 억압하는 정부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슈타지를 본 후 베를린 장벽으로 이동합니다. 이제는 옛 추억으로 남은 장벽, 온갖 그림으로 장식된 벽을 구경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벽 뒷부분 팔레스타인의 실상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더 가슴아팠습니다. 포화로 인하여 무너진 건물과 상처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진행 중인 현실임이 안타까웠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로 이동합니다. 유로 2016이 한참이었는데 광장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였네요.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서독을 오가는 관문으로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진 후 1990년 6월 22일 철거되었다가 재현된 곳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나누어 관리를 한 곳이지요. 옛 장소에 관광객들을 상대로 모델이 되어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체크포인트 옆에 위치한 박물관 견학을 합니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기 위해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더라구요.

견학을 마치고 유대인 추모비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거의 6시가 다 되어가는 약간 늦은 시간…2,711개 관모양의 돌을 세우고 630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곳입니다. 폴란드에서만 33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내부로 들어가 그때 자행된 학살을 목도하면 절로 숙연해집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기억하고자 하는 독일인들의 노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추모를 하고 이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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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하모닉 연주회

 

이후 각자 도생을 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관람팀. 도시 배회 및 유람을 하는 일명 독립파.. 그리고 모셔온 아이들로 인해 귀가를 할 수 밖에 없는 호텔 귀가팀. 저는 사랑하는 딸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복귀합니다. 일명 ‘민변판 어버이 연합’이 결성되었지요.

호텔로 들어와 어버이 연합끼리 한잔하려고 했지만 다들 어린이들을 돌보느라 회합을 못했습니다. 근데, 우리의 정윤이 지친 저에게 산책을 나가자고 합니다. 체력 짱입니다요. 정윤이를 데리고 아침에 구경했던 곳과 정반대 쪽을 향해 걸어 갑니다. 지하철 역 근처의 대형 슈퍼로 들어가 구경을 하고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어요. 잘못 골랐는지 맛이 텁텁합니다.

그날 매우 알찬 일정이었습니다. 노곤하였네요.

 

 

셋째 날

 

하주희 변호사

 

“통일은 지금까지 보다는 더 나은, 다른 삶을 준비하는 것”

어제 베를린은 너무 뜨거운 날씨 탓 이었는지 분단의 비극이 무엇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나쁘진 않았지만, 독일의 다른 도시와 판이한 분위기였고, 무언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 오늘 둘러본 독일의 오래된 도시들은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매력적이었다.

# 오전에 들른 포츠담 상수시 궁전. 프랑스어로 ‘번민이 없다’는 뜻이라는데, 엄청나게 ‘긴’ 궁전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번민을 잊기에 충분했다. 성안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넓은 분수와 넓게 뻗은 정원과 산책로, 그리고 작은 연못만으로도. 이곳에서 볼테르 등 당대의 문인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궁전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쭉 뻗은 숲길을 지나면 신 궁전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꽤 먼 길이라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태양신이 그려진 뭔가 오래된 가구 가게에 있을 법한 청동의 궁전 입구까지 모든 것이 ‘이상한 나라’로 빨려 들어온 듯한 몽환적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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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쎄실리엔 호프. 독일에서는 호프가 마당을 의미하고, 그 의미가 조금씩 변하여 쇼핑몰 등에도 호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쎄실리엔 호프는 맥주를 파는 곳이 아니라 정원이 딸린 작은 성입니다.

 

# 포츠담에서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쎄실리엔 호프. 마지막 황태자 빌헬름 3세의 황태자비인 세실이 머물 던 성인데, 포츠담회담이 열린 장소로 유명하다. 아담한 성과 뒤쪽의 정원, 앞쪽은 눈부시게 푸른 잔디와 호수. 한없이 사색에 잠겨야만 할 것 같은 호수는 역시 ‘이 세상’이 아닌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성안은 1945년 포츠담 회담 당시를 재연해 두었다. 다행히 한국어 안내가 있어 상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 선언이라고 배웠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었고, 당시 패전 독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위주로 설명되어 있었다. 재밌었던 건 당시 참여했던 미국의 투르먼,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 후에 결합한 스탈린의 언어습관, 회담 태도 등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한 부분이었는데 스탈린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태도를 보였는지하는 얘기도 있었다. 당시 대표들이 사용했던 가구나 필기도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포츠담 선언 전문을 아무리 살펴도 조선의 독립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가 없는데 당시 강대국들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왜 포츠담 선언이 조선의 독립을 확인한 선언이라고 배우는지 의아했다.

독일에 이렇게 궁전이 많았는지는 미처 몰랐고, 나의 두 딸이 힘든 일정 속에서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말로만 듣던 궁전이 곳곳에 있는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리와 백조.

# 포츠담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라이프치히는 뭔가 내가 항상 상상하던 유럽 그 자체였다. 오랜 거리와 고풍스러운 교회, 자전거, 노천카페, 바흐의 동상. 뭔가 샤랄라한 음악을 배경으로 여유 있게 걸어 다녀야 할 것 같은.

다만 놀라운 것은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들, 괴테, 니체, 슈만, 바그너, 심지어 현재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도 다녔다는 라이프치히대학이 달랑 건물 하나였다는 것. 지나고 보니 독일의 대학은 우리 대학처럼 울타리 안에 넓은 캠퍼스를 가진 그런 곳이 아니라 도시 일부로서 건물들이 길가에 있는, 쓰여 있지 않으면 대학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독일의 대학이야말로 등록금도 없고 모두에게 열린 기회의 공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런 면에서 거리와 혼연일체(?)로 있는 것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파워 여행가인 김남근 변호사님의 안내로 간 독일연방행정법원까지. 알차게도 돌아보았다. 아, 한가지 당황했던 것은 독일에는 아이스 커피가 거의 없었다. 꽤 더운 날씨라 아이스 커피를 사려고 들어가면 어디서든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 흑. 알고 보니 독일은 ‘아이스’를 아이스크림이라는 독일식 영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의 두 번째 여행지에서의 가장 큰 느낌은 베를린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통일 기행답게 분단의 흔적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으로 여겨졌다. 우리에게도 분단을 극복하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나은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넷째 날

한혜정 변호사

 

독일 통일 기행에서 돌아온 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렸다. 여름휴가를 포기하고 선택한 독일여행이기에, 절반 이상이 휴가를 떠난 사무실에서 “독일에서 좋았잖아, 남들 일할 때 놀았잖아”라며 스스로를 달래는 중이다.

더위에 들락날락하는 정신줄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시작하는, 독일 통일 기행 4일차 복기!

2016. 6. 27. 오전 8:30, 우리는 플라우엔(Plauen)의 숙소를 떠나 뫼들라로이트로 향했다.

뫼들라로이트(Mödlareuth) 국경박물관

하나의 마을이 동·서독으로 분단되어, ‘리틀 베를린’이라 불리는 뫼들라로이트. 뫼들라로이트 분단의 역사는 16세기,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실개천 ‘탄바흐’를 중심으로 한쪽은 바이로이트 변경백령(변경백은 시골백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다른 한쪽은 로이쓰 슐라이츠 백작령으로 나뉘면서 시작됐다. 근대에 와서 마을의 동쪽은 튀링엔 주에, 서쪽은 바이에른 주에 속하게 되면서 분단의 역사가 지속됐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튀링엔 주 뫼들라로이트는 소비에트령에, 바이에른 주 뫼들라로이트는 미국령에 귀속되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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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들라로이트(Mödlareuth) 국경박물관

처음에는 통행증이 있어야만 동·서를 통행할 수 있게 하더니, 바리케이드를 세워 자동차의 출입을 통제하고, 2m 높이의 판자 울타리를 세웠다. 그리고 1966년, 높이 3~4m, 길이 700m의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국경박물관에서는 뫼들라로이트가 분단되었다가 다시 통일되는 과정에 관한 짧은 영화를 상영한다. 포크레인으로 장벽을 철거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환호하는 사람들, 철거된 장벽 일부를 가져다 실제 장벽의 일부였다는 확인 도장을 받는 사람들. 이미 베를린에서 장벽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으며 상당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이 장면에서 크게 웃었다.

우리가 휴전선 철조망에 리본을 달아 관광 상품으로 판매하는 날은 과연 언제쯤이 될까?

12:30경 뉘른베르크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 때마다 빠질 수 없는 건 역시 독일 맥주. 독일에 가면 맥주가 물보다 싸다고들 하는데, 이는 농담이 아니었다. 독일은 세계에서 물값이 제일 비싼 나라라고 한다.

점심식사 후, 성 로렌츠 교회가 있는 로렌츠 광장을 시작으로 쾨니히 거리를 지나 뉘른베르크의 중심광장인 중앙 마르크트 광장까지 걸었다. 쾨니히 거리 중간에는 페그니츠 강을 건너는 짧은 다리가 있는데,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성령양로원(과거에는 양로원이었으나 현재는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의 풍경이 근사했다. 우리는 양로원 건물을 배경으로 저마다 인생 샷을 건지기 위해 잠시나마 예술혼을 불태웠다.

중앙 마르크트 광장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한글로 ‘김밥’이라 쓰인 흰색 푸드트럭. 해외에서 한글을 만나게 되면 왜 그리 반가운지. 광장에는 꽃과 과일을 파는 노점이 즐비했는데, 딱 먹기 좋은 모양으로 진화(?)한 독일의 복숭아가 특히 맛있었다. 광장에는 Schöner Brunnen(아름다운 분수)이라는 분수가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가림막에 가려 실물을 볼 수 없었다. 독일 여행 중에는 유독 보수공사 중인 건물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독일인의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Memorium Nürnberger Prozesse)

 

전범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작았고, 교도소 역시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전범재판이 열렸던 606호 법정에서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차례 중범죄를 대상으로 한 형사재판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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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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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법정

 

재판이 끝나기 전에 암살 혹은 자살로 피고인이 사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재판 기간 내내 피고인들에 대한 철저한 보안과 감시가 이루어졌다. 살아서 법정에 도착한 피고인들은 제일 먼저 자신이 유죄인지 아니면 무죄인지 질문을 받았는데, 이 질문에서 자신이 유죄임을 시인하는 피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의 기소사유는 ➀ 공격형 전쟁의 기획, ➁ 침략전쟁의 시행, ➂ 전쟁 중 벌어진 구체적인 범죄행위, ➃ 기본적 인간성에 대한 도전과 범죄행위 이상의 네 가지였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반인도적인 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규정하고 전쟁 중 범죄를 행한 ‘개인’을 실제로 처벌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교수 : 사회는 우리 생각처럼 도덕심에 의해 돌아가지 않아. 법이 모든 걸 좌우하지. 단지 아우슈비츠에서 일했다고 유죄는 아니야. 아우슈비츠에서 일한 8천 명 중 19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중 6명이 살인죄야. 살인을 입증하려면 동기를 입증해야 해. 그게 법이지. 문제는 잘못의 유무가 아니라 적법성이야. 현재의 법이 아닌 당시의 법을 따라야…

학생 : 그건 좀…(Isn’t that…)

교수 : 뭔가?

학생 : …편협하잖아요?(…narrow?)

교수 : 맞아, 법이란 편협한 거야. 반면에 사람을 죽인 자들이 가책을 느낄 진 모르는 일이지.

 

판사 :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까?

한나 : 뻔하잖아요. 이유야 뻔하죠. 우린 열 수 없었어요.

판사 : 왜죠?

한나 : 감시원이니까요. 우리의 일은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것이었어요. 그들을 도망치게 할 순 없었어요.

판사 : 그렇군요. 수감자들이 도망치면 당신들이 대신 사형당할 테니까.

한나 : 아뇨.

판사 : 그럼 왜죠?

한나 : 문을 열면 아수라장이 될 텐데 어떻게 질서를 유지해요? 수감자들 감시가 우리 임무였어요.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에는 1·2차 전범재판 이후 1960년대 중반 독일이 자체적으로 진행한 전범재판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용한 대화는 재판을 방청한 하이델베르크 로스쿨의 교수와 학생이 나눈 대화, 그리고 전쟁 중 나치에 복역한 죄로 재판을 받게 된 여주인공과 판사가 나눈 대화 일부다. 영화는 ‘한나’라는 여자와 한 소년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상부의 명령에 따르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죄의식도 없이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른 개개인의 책임에 대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단의 소송전략은 ➀ 피고인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➁ 이미 사망한 히틀러, 괴벨스, 히믈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피고인들이 상부의 명령을 따른 것은 그 당시 법에 저촉되는 행위가 아니었음에도 이를 처벌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주요 논거 중 하나였다.

이러한 주장이 법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범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독일국민 역시 동의하고 있었고, 실제로 제1차 전범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피고인이 추후 독일 자국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그 과정과 결과에서 보여준 의의와 한계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일본의 과거청산 문제와 우리 국군의 베트남전 전쟁범죄 문제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뮌헨(München)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 덕에 전혜린을 알게 됐고, 뮌헨은 나에게 전혜린의 도시였다. 그 덕에 내가 뮌헨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1950년대 중반 안개 자욱한 도시에 간간이 레몬 빛 가스등이 켜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레오폴드 거리-개선문-루드비히 거리를 통과하면서 처음 본 뮌헨의 인상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실제로 뮌헨은 독일 내에서도 부유하기로 유명한 바이에른 주의 주도로 BMW의 본사가 있기도 하다. BMW는 ‘Bayerische Motoren Werke(바이에른 자동차 회사)‘의 약자로 군더더기 없이 패기 넘치는 작명 센스를 보여주고 있다.

본격적인 뮌헨 여행은 이자르 게이트에서 시작됐다. 구시청사를 지나 마리엔 광장에 도착하여 처음 본 ‘신 시청사’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은 오래된 모습으로 우리를 압도했다. 내부까지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현재에도 시청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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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신 시청사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맥줏집이라는, ‘호프브로이하우스’는 ‘왕실 양조장’이라는 뜻이다. 내부에는 1000cc가 넘는 잔을 가볍게 들고 마시는 손님, 그냥 구경삼아 들어 온 관광객, 그러거나 말거나 일 하느라 정신없는 종업원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그 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 경쟁적으로 흥겨운 밴드의 음악으로 꽉 차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그 자리를 떠났건만, 너무 일찍 문을 닫는 바람에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의 맥주 한 잔>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뮌헨에 밤이 찾아왔다. 레몬 빛 가스등은 볼 수 없었지만, 어둠의 내린 뮌헨의 밤거리에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었다. 독일 기행단 내부에 소규모 뮌헨 원정대가 꾸려졌다. 다시 이자르 게이트를 시작으로 마리엔 광장 – 성 미하엘 교회 – 칼 광장을 지나 현재 행정법원으로 쓰이고 있는 유스티츠 궁전까지, 뮌헨의 밤거리를 원정대와 함께 걸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거리를 지나다니는 젊은이들의 개성도, 취기도 함께 짙어졌다. 그리고 하루의 마무리는 역시 독일 맥주!

바이에른에는 다음과 같은 낭만적인 말이 있다.

 

“맥주는 마시는 것, 물은 손 씻는 것”

 

 

다섯째 날

 

양승봉 변호사

전날 저녁 그 유명한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바로 앞 맥줏집에서 맥주를 먹었더랍니다.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맥주 맛을 못 봐 비교는 어렵지만 바로 앞집의 맥주 역시 맛이 좋았습니다.

처음으로 버스가 아닌 택시를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귀가하였지요 운전사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에티오피아 출신이고 6·25 때 참전을 했었다면서 남과 북을 아는 체했어요. 그런데 그 젊은이는 곧장 김정일과 김정은도 아닌..‘김일쑹..머치 비어 크레이지’를 수차례 반복하더라구요. 씁쓸했습니다.

오늘은 뮌헨 레지던츠 왕궁 방문을 하는 일정으로 시작합니다.

버스 안에서 홍 박사님은 바이에른 지역이 전 독일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을 하시며 독일에서 맥주는 마시는 것…. 물은 손 닦는 것이라는 설명도 하십니다. 물 오염은 세균처리를 하지만 석회가 있어서 맥주로 음료를 대신한다는 말씀…. 그리고독일인의 인상은 예의 바르고. 공손하며. 아들이 아버지 이름을 부를 정도로 허물이 없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격식과 나름 따지는 격식이 있어 명령에 충실한 국민성의 면이 있다. 이러한 특성이 히틀러의 등장이 가능하게 하기도 했다는 등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지던츠 궁전은 3부분을 통합한 궁전인데 ‘궁전+보물관+오페라극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화려함이 대단하였습니다. 구경보다는 뛰어노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중에 얘들은 이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해봅니다.

궁전 구경을 마치고 독일 복숭아도 먹으면서 BMW 전시관으로 이동을 합니다. 폭스바겐이 최대 판매를 하는 업체인데 그 폭스바겐이 미국에서 가스배출 조작으로 12조를 보상하기로 하였음에도 미국 외에는 보상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는다는(우리 내부 기준이 너무 약하다는 비판도 하며) 성토를 한 후 BMW 전시관과 기념품 판매점을 돌아봅니다. 멋진 차들이 많습니다. 아이들도 멋진 차를 골라 탑승을 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알테 피나코텍이라는 현대 미술관을 구경합니다.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던 대가들의 웅장한 그림을 저는 너무나 간단히 스킵하고 나왔습니다. 명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멋지다며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옵니다. 오디오 가이드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무지와 무관심은 정비례합니다.

미술관 앞 잔디밭에 드러누워 망중한을 보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연인들이 사슴처럼 부비며 일광욕을 하는 장면이 눈에 뜁니다. 대담하게 웃옷을 벗으면서 옷을 갈아입는 여인도 있었지요. 자연스럽고 멋졌습니다. 많이.

시장합니다. 베트남 식당으로 가서 맛나게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오버암마가우로 이동합니다. 오버암마가우로 이동하면서 독일에 도착한지 4일 만에 처음으로 산을 보았습니다. 오버암마가우로 가는 길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절로 편안해집니다.

오버암마가우는 예수 수난극으로 유명합니다. 1600년대 흑사병이 창궐한 후 온 마을 사람들이 기도하여 더는 흑사병으로 고통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감사의 의미로 1634년 초연된 이후 1680년 이후 10년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수난극을 재연한다고 합니다. 현재는 약 2,400명 정도의 마을 사람들이 수난극에 참여한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수난극 감상도 한 번 해야 하는데. 곳곳에 아름다운 벽화…. 그리고 이쁜 집. 여기도 경치가 아주 이쁩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오늘의 숙소로 이동합니다. 너무나 멋집니다. 멋진 호수에서 다이빙하며 노는 젊은이들을 보았네요. 내려서 같이 다이빙하고 싶습니다.

멋진 골짜기를 지나면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논쟁을 이재화 변호사님 주도로 오랫동안 하였습니다. 저게 눈이냐 석회냐……. 올라가서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간이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석회가 섞인 눈이라고 봅니다요. ㅎ

소박한 국경을 지나 오늘의 숙소에 도착합니다. 이쁜 집입니다. 마을 곳곳을 구경하지 못한 것이 억울할 정도입니다. 아이들은 뒤뜰 정원에서 서양 아이들과 섞여서 신나게 뛰어놉니다.

그날 저녁 함께 모여서 맥주도 마시고 가벼운 소회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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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호텔에서의 즐거운 저녁식사

 

 

여섯째 날

박수빈

슈방가우 & 보덴제

 

전날 밤 오스트리아(오지리)에서의 즐거운 만찬을 즐기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또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오스트리아에서 하룻밤을 보낸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다. 숙소 앞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푸르러서 후반부로 접어든 여행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오늘은 그 유명한 백조의 성에 가는 날이다. 버스를 타고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국경을 건너서, 푸르른 창밖을 감상하다 보니 순식간에 슈방가우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된, 말로만 듣던 노이슈반슈타이성을 볼 수 있었다.

 

'백조의 성'으로 알려진 노이슈반슈타인 성
‘백조의 성’으로 알려진 노이슈반슈타인 성

수많은 엽서와 광고에서 봐오던 외관이라 익숙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만난 노이슈반슈타이성은 훨씬 더 장엄해 보였다. 성 아래에 있는 호수도, 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발견한 나무로 둘러싸인 길목도, 그리고 성 자체도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겉모습과 다르게 다소 슬픈 루트비히 2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라 그런지 왠지 높이 솟아 있는 성의 모습이 아련해 보이기도 했다. 이 성을 지었을 당시의 루트비히 2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훗날에 이렇게 큰 관광지가 되어 있을 줄은 상상이나 했을까 등의 생각을 하며 성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굉장히 중세틱했던 겉모습과 달리 성 내부에서는 난방, 전화, 그리고 화장실 등 근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외관만큼이나 내부의 모습 또한 정말 화려하며 아름다웠고, 한국어 음성 지원이 되는 가이드가 있어서 더더욱 좋았다. 이곳에서는 하이델베르크 다음으로 한국인과 중국인 관광객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서양사를 배우면서 주거문명사를 잠시 접했던 경험이 있는데, 과시와 체면이 중요했던 당대 궁정사회에서 요리와 식사 등 가사에 관련된 일은 하인의 일로 치부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부엌은 주인의 공간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고, 건축사에서 건축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배웠는데 실제로 부엌이 성을 나가는 통로 지하 구석진 곳에 위치되어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성을 찬찬히 돌아보니 겉모습만 봤을 때는 몰랐던,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한 후, 중세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루트비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또 노이슈반슈타이성을 왜 중세의 문화 왕국을 기리는 기념비적인 성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호수에서 흔히 보이는 백조
호수에서 흔히 보이는 백조

노이슈반슈타이성과 호벤슈방가우의 외관을 감상한 후 보덴제로 이동했다. 도착해서 맛있는 밥을 먹는데 쌀의 모습이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점 하나에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식사 후 린다우섬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맑은 호수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등대와 아기자기한 마을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이곳이 마치 ‘독일의 베니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맑은 물과 어우러지는 푸르른 하늘의 모습을 실컷 담아둔 후 숙소로 향했는데, 저녁을 먹으러 간 지중해식 식당은 꽤 만족스러웠다. 내부 인테리어를 그럴싸하게 꾸며두기도 했고, 무엇보다 연어 요리가 일품이었다. 식사 도중 설창일 변호사님을 필두로 다음 기행 참가 서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함께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컵라면을 먹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노이슈반슈타이성에서 린다우섬까지, 푸르다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렸던 하루였다.

 

 

마지막 날

천서영

 

나골트에서 하이델베르그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여 보통 8시 30분에 집합하는 시간을 30분 당겨서 8시에 출발하였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나골트 시내를 산책하였는데 조용한 시골마을이라서 한적하고 조용하다. 상점들은 저녁 8시면 모두 문을 닫는다. 조그만 극장이 하나 있었는데 미국 영화랑 독일 영화를 번갈아 상영을 하였는데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상영한다고 한다. 젊은 엄마 한 분이 극장의 간판에 직접 손으로 글자를 붙이고 있었다. 그 옆에 아이들이 엄마를 돕고 있었다. 이 젊은 엄마가 혼자서 극장을 운영하는 것 같았다. 술집들은 밤 열한시까지 연다고 되어 있었다. 열한시가 넘어도 손님이 있으면 영업시간을 연장해서 늦은 밤에도 술집 영업은 계속한다.

나골트에서 하이델베르그까지 가는 길은 독일의 검은 숲이라는 ‘슈바르츠발트’ 지역이 한없이 이어진다. 슈바르츠발트는 독일남서부 일대의 거대한 숲지역이다.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거대한 검은 숲을 보고서 아주 쓸모없는 지역이라고 하여 정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은 검은 숲 지역에서도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일이 망해도 숲에서 생산하는 나무만 수출하여도 독일 전체 국민을 30년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슈바르츠발트 지역에서 기억할 사람으로 헤르만 헤세가 있다. 그의 저서 ‘수레바퀴 아래에서’는 나골트의 강가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헤르만 헤세는 고향인 칼스루에 그리고 나골트 등 슈바르츠발트를 사랑한 작가라 한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시골 마을은 경치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게 보인다. 가이드 홍승구 박사님은 독일 연방제에 대하여 장점을 설명하면서 동부 독일은 베를린, 라이프치히 등 대도시 인구집중 현상이 있으나 서부 독일 지역에서는 연방제의 장점이 잘 나타나서 16개 지방정부가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농촌에서도 일자리가 충분하므로 젊은 사람들이 대도시로 집중하는 경향이 덜 나타난다 한다.

하이델베르크는 인구 15만 명에 불과한데 연간 관광객이 500만 명에 이르는 독일 제1의 관광도시이다. 괴테, 휠덜린, 하이네, 헤르만 헤세 등 유명한 작가들과 철학자들을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1850년에 설립되었고 3만 명의 학생이 있다.

대개 관광도시로서 유명하게 된 계기는 관광지에는 좋은 내용의 스토리를 가지는 곳이기 때문이란다. 하이네의 시를 스토리로 하여 로렐라이의 언덕이 유명해졌듯이 하이델베르크의 고성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었다. 이곳은 괴테의 고향은 아니지만 괴테를 사랑하였던 귀족 여인 마리안느가 괴테를 사랑하고 이별하면서 애절하게 써놓은 글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고 그 글을 비석에 써놓은 비문이 있다.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1300년대에 지어진 이래로 성주는 16명이 이어져 오는데 그 성주 중에서 사냥을 좋아하는 어떤 성주의 왕비가 애인이 생겼단다. 그 애인이 왕비가 밀애를 즐기다가 성주에게 발각되는 찰나 성의 꼭대기에서 떨어졌는데 그때 생긴 발자국이 있다. 관광객은 그 발자국과 자신의 발자국을 맞추는데 맞으면 그 사람은 바람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조심해야 한단다. 조영선 변호사님이 맞추어 보니 위 발자국과 맞았다. 한편, ‘사랑의 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성주가 영국에서 시집온 왕비가 향수병에 걸려 있어서 왕비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의 선물로 하룻밤 동안에 갑자기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지나가면 바람기가 없는 배우자를 만난다고 하고 바람기 있는 사람은 이곳을 지나가면 바람기가 없어진다고 한다. 한혜정 변호사님은 바람기 없는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의미로 갔다 왔는데 바람기 있는 발자국의 주인공인 조영선 변호사님은 이곳에 가시면 원상복귀가 되는데 아쉽게도 거부하였다.

고성 좌측 건물에는 천사의 문양이 있다. 이 건물을 건축하는 동안에 건축사의 어린 두 아들이 건물에서 놀다가 떨어져 죽어서 건축사가 시름에 겨워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 아들이 밤에 천사로 나타나서 아버지를 격려해주면서 화환을 걸어주었다고 해서 그 천사 2명을 문양으로 새겨 넣었다고 하는 애절한 이야기이다. 건물 안에는 22만 리터의 커다란 술통이 있는데 웅장하다.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배경으로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배경으로

 

점심은 한식당에서 하였는데 소주 한 병이 2만 원으로 비싼 것만 기억난다. 이후 한 시간한시간 정도 쇼핑을 하고 출발하여 1시간 20분 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였다. 관세 환급 절차로 오랜 시간이 지체되었고 티케팅은 좌석이 없이 배정되어서 나중에 입장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비행시간은 9시간 40분 걸렸다. 갈 때는 10시간 40분으로 한 시간이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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