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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출범 – 민변, 인권변호사의 역사를 잇다

민변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인권 변호 또는 민권 변론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인권변호사 1세대라고 해야 할 이병린 변호사에서 시작하여 이돈명(전 조선대 총장), 한승헌(전 감사원장), 조준희(전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 등이 1970년대 유신 시기 시국사건 변론을 주로 담당해 왔고, 80년대에는 조영래, 이상수, 박성민, 박원순 등‘2세대’변호사들이 시국사건 변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망원동 수재사건과 구로동맹파업 사건 공동변론을 계기로 1986년 5월 19일「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강신옥, 고영구(전 국정원장), 유현석, 이돈명, 이돈희(대법관 역임), 이해진, 조준희, 최영도, 하경철(전 헌법재판관), 한승헌, 홍성우, 황인철, 김동현, 김상철, 박성민, 박용일, 박원순, 서예교, 안영도, 유영혁, 이상수, 조영래, 하죽봉, 박연철, 박인제, 박찬주, 최병모, 김충진 변호사 등이 참여하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를 통해 인권변론 활동을 확대하면서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등 5공 몰락을 초래한 주요사건을 변론하고 사회 쟁점화 하였다. 위 활동 중에 회원 중 이돈명 변호사(이부영 은닉), 이상수 변호사(대우조선 이석규 사망사건 참가-장례식 방해, 1987년 8월), 노무현 변호사(부산 가두집회-집시법 위반, 1987년 9월)는 구속되기도 하였다. 1987년 대선에서 5•18 광주학살의 주범이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인 1988년에는 젊은 변호사들을 중심으로“자주•민주•통일을 목표로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한 부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자 한「청년변호사회(청변)」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에는 이석태, 김형태, 조용환, 유남영, 박용석, 임희택, 손광운 변호사가 참여하였고 기존 정법회의 멤버였던 박원순, 임재연, 이원영, 박인제, 이양원, 백승헌 변호사도 같이 하였다.

이렇게 조금은 다른 경로로 만들어진 ‘정법회’와 ‘청변’은 몇 차례의 논의를 통하여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통합활동이 필요하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88년 5월 28일 베어스 타운에서 51명의 회원으로 민변이 출범하였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라는 이름을 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영래 변호사의 제안이었다. 민변은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한 최초의 법조부문운동단체로서, 신구세대가 뜻을 같이 함으로써 ‘명망성’과 ‘활동성’을 결합할 수 있었으며, 변호사업무의 개별 분산적 성격으로부터 오는 단점을 극복하고 조직적이고 지속적 대응이 가능하게 되었다.

출범 초기 – 혼돈의 시기, 독재 잔재 청산에 뛰어들다

1988년 민변이 출범한 시기는 여전히 1980년 반란과 국민을 학살한 주체들의 6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가며 국민들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고 있던 시기였고, 모임은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았다.

출범하자마자 박종철, 권인숙 사건 등 시국사건 변론 요청이 폭주하였고, 임수경•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 등 조력이 필요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사노맹,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사건 등 계속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변론하였고, 윤석양 보안사 민간인 사찰 양심선언, 1991년 시위•분신 정국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서는 변론 활동 외에 진실 발견을 위한 노력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동시에 법률전문가로서의 특성을 살려 권위주의시대의 악법을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되었던 민가협, 인의협 등 사회운동 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양심수 석방 등 현안에 대한 대처 못지않게 제도개혁을 위한 대외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김영삼 정부의 출범 후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 속에서도 여전히 다수의 악법이 유지되었고 공안기관에 의한 인권, 자유의 탄압 사례가 이어졌다. 민변은 1993년 안기부의 간첩사건 조작 진상조사, 1994년 『한국사회의 이해』저자들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사건 등 문민정부의 이름 아래 자행되는 반민주적 잔재를 고발하고 척결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도, 변화된 사회 속에서 새로운 과제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하였다. 양심수 변론을 계속하면서도 연구 활동이나 다른 단체와의 연대를 통한 여론 형성, 대안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각 분과를 통한 연구, 의견 발표 등에도 주력하게 된 것이다.

1995년부터는 형식적으로나마 진행되었던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주춤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권위주의적 행태가 드러나고 군부독재의 과거를 청산하는 움직임도 좌절되는 일이 생겼다. 민변은 과거를 청산해야 할 중대한 기회라고 인식하여 검찰의 5.18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함과 동시에 5•18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1996년 12월 26일 여당의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초유의 변호사 철야농성을 벌이고 대국민 홍보책자 『독재의 망령을 파헤치며』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90년대 후반 – 진보적 법률전문가단체로의 모색에 나서다

1997년 12월,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헌정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가 실현되고 형식적인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시국사건 변론이 민변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고, 우리사회가 개혁적, 진보적인 법률가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내적으로도 매년 30~40명의 신입회원 가입으로 300여 명으로 증가한 회원들의 관심영역이 다양해졌다. 외적으로는 변호사 업무환경의 변화와 함께 민변 외에도 다양한 시민단체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변화와 역할 다양화의 요구에 따라 민변은 인권단체로서의 위상을 유지 강화하면서 그 역량을 최대한 결집할 수 있는 분야로서 공익소송활동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민변은 주요 상임위원회로 공익소송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을 이석태 회원으로 하여 김포공항 소음피해 소송, 흡연 피해자 집단소송, 수해 피해 주민들 집단소송 등 다양한 공익소송을 진행하였다.

시민사회의 성장은 2002년 총선에서 ‘총선 시민연대’의 결성과 혁혁한 활동 성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민변은 선거법 개정 연구와 헌법소원, 공천무효확인 소송 등 법률적 지원을 함으로써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시민사회 속의 전문가 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가 공언한 인권법 제정과 인권기구 설치가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공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인권법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1년부터는 인권주간 행사의 하나로 한국 인권보고대회를 개최하여 사회 각 분야의 인권상황을 아우름으로써 ‘인권’이 일상적 주류 담론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2000년대 – 사회개혁의 일선에 서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변 회원이기도 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2004년 대통령 탄핵 사태로 개혁세력이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석의 과반수를 점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과거보다 많은 수의 회원들이 국회로 진출하고 공직에 임명되어 정치에 직접 참여하면서 독립적인 시민단체로서의 민변의 위상에 대하여 우려와 함께 내외에서 많은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개혁세력의 국회 과반수 달성으로 과거 독재정권시절의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적 법제도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졌고,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과 과거청산작업에 대해 전사회적으로 치열한 공방이 진행되었으며, 사법개혁위원회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통해 형사소송법 개정, 국민 참여 재판제도 도입, 법학전문대학원 설립 등 각종 사법제도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입법, 과거청산, 사법개혁 등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변은 진보적 전문가단체로서 구체적 대안을 개발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동시에 한미 FTA와 쇠고기 수입 졸속협상, 비정규직법 제정, 이랜드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해고에 반대하고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에서 촉발된 삼성그룹 비자금 조성 및 불법로비 사건의 고소•고발을 주도하는 등 민변의 목소리와 법률적 조력이 필요한 현안에 적극 대응하였다.

스물을 넘긴 민변 – 민변, 쉼없는 걸음을 다시 내딛다

2008년으로 민변은 스무 돌을 맞이하였다. 출범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 그 성과와 미진한 부분들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변화하는 사회를 정확히 분석하고 사회가 민변에 요구하는 바를 찾아 단체의 위상과 활동 방향을 재정립해 나가고자 한 시기였다. 창립 20주년을 맞는 민변은 인권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법률이 정의롭고 사법은 공정한 사회를 위해 인권옹호와 침해 감시, 입법청원과 제안, 사법감시와 공익소송,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 소수자보호와 국제연대 등 활동에 더욱 매진하고자 하였다. 또한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연구와 조사활동에도 보다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하여 시스템을 정비하고 상근변호사 제도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2008년, 우리 사회는 80년대 민주화운동만큼 다시금 끓어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으로 촉발된 전 국민적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뜨거운 요구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민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에 대해 10만 명을 국민청구인단으로 하는 헌법소원을 진행하였다. 아울러 촛불집회 현장에서 인권침해 감시활동, 연행자를 위한 변호인 접견과 함께 수백 명의 국민을 위한 무료변론을 진행하였다.

정부가 내세우는 ‘법과 원칙’ 속에 많은 평범한 국민이 피의자로, 전과자로 내몰렸으며,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 등 무소불위의 권한남용과 정부 추종적 행태로 인하여 지속적인 사법감시를 수행할 수 있는 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민변은 비합리적인 정부의 일련의 행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으며, 그 시간동안 정부의 인권침해활동에 대항하는 가장 바쁜 단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회원 천명의 시대 – 역행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다

2015년, 제28차 정기총회에서 민변은 회원 천명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28년의 시간동안 민변은 한결같은 길을 걸어오며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국민들은 이러한 민변에 지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사무처 및 위원회 등 조직의 체계와 구성을 정비하고, 각 조직의 전문성과 역량강화를 통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공익소송 및 변론을 위한 상담 시스템을 개선하여 현장성 및 조직적 대응능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사법연수생 및 로스쿨생들에 대한 민변 소개의 장을 지속적으로 마련하고,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통하여 세대 간 소통에도 힘썼다.

2010년을 전후로 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급격히 퇴보하고 있으며, 민변은 그 역행하는 흐름에 기꺼이 대항하여 앞을 바라보고 있다. 2009년 용산참사사건에 대한 변론활동, 2010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문제에 대한 유엔 진정활동을 하였다. 2011년에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 희망버스에의 참여 및 변론, 한미 FTA 반대 활동, 무상급식 주민투표과정에의 참여, 일본 위안부 문제에 대응하였으며, 2012년 ‘나꼼수’ 표현의 자유 사건에 참여하여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논하였다.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는 1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참사’에 그친 채 현재진행형이고, 민변은 유례없는 정권의 탄압을 받고 있다. 그러나 민변은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부터 특위를 구성하여 유가족을 지원하고 제대로 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해 동조 단식에 나서는 등 사상 최악의 참사에 대응하여 진상규명과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렇게 민변은,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자(민변회칙 제3조)’ 회원 1,000명의 뜻을 묵직하게 더하여 앞을 바라보고자 한다. 민변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