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조지훈 변호사를 만나다.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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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조지훈 변호사님인데요. 자기 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조지훈 저는 연수원 38기이고 현재 법무법인 다산에서 일하고 있는 조지훈입니다.

 

김지미 조변호사님에 대해서 찾아봤더니 처음엔 전자계산학과를 다니시다가 다시 법대를 들어가셨더라구요.

 

조지훈 네. 처음엔 수원에 있는 경기대 전자계산학과에 들어갔었는데요, 들어가고 나서 학과공부는 전혀 안하고 동아리 생활만 하다가 3학년 때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4학년인 96년도에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면서 연세대 투쟁, 그것 때문에 구속이 됐었어요. 1996년 8월에 구속이 돼서 99년 2월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6개월 정도 있었죠. 민변 다른 선배님들에 비하면 아주 짧은 기간이었죠.

 

김지미 1심에서는 실형을 받으셨던 거죠?

 

조지훈 네. 실형 1년 받았었어요. 그때 변호해주셨던 분이 해마루에 계신 박세경 변호사님이에요.

 

김지미 우리 회원 중에 그런 분들이 있어요. 민변의 변론을 받다가 민변 회원이 되신(웃음).

 

조지훈 그런 인연이 있었죠. 출소하고 났더니 제적이 되어 있어서 군대를 공익근무요원으로 다니면서 수능 공부를 했어요.

 

김지미 법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직접 재판의 과정도 겪어보고 그러면서 필요성을 느끼셨던 거에요?

 

조지훈 공대 출신이고 한겨레 신문 정도만 보던 때인데, 형사절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전혀 예견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내가 어떤 지위인지도 전혀 몰랐고. 그게 좀 컸었던 것 같아요.

김지미 되게 답답했을 것 같아요.

 

조지훈 네. 그때는 경찰한테 엄청 맞았어요. 끌려갈 때도 맞고, 경찰서에서도 엄청 맞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왜 계속 맞고 있었나(웃음). 저는 연대 안이 아니고 밖에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가다가 연행됐던 거죠. 신촌 지하철역에서 연행돼서 교차로까지 맞으면서 왔었어요.

 

김지미 가담 정도에 비해서 형이 많이 나온 것 같네요(웃음). 1심에서 1년이 나왔으면.

 

조지훈 그때는 모든 걸 직책으로 판단해서 총학생회 부회장이라는 게 컸죠.

 

김지미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동아리였어요?

 

조지훈 민속연구회라고. 탈패였는데요. 탈춤이나 장구나 이런 것들은 전혀 못치고(웃음) 그래서 형들이 이상한 거 쥐어주면서 그냥 너는 앞에 나가라, 그러면서 인생이 어떻게 보면 꼬인거죠.

 

김지미 그러다가 한양대 법대는 언제 들어가신 거에요?

 

조지훈 00학번이요. 27살에 들어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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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군대까지 다녀오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시 가게 됐는데 특히나 이과생이 법학이라는 학문에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아요.

 

조지훈 저는 적응하는 데만 1년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대규모 강의도 경험이 없고, 1년 반 정도는 내가 왜 여기에 왔나하는 생각을 했죠.

 

김지미 늦은 나이에 법대를 가신 건 당연히 고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한양대에 가서는 학생운동이나 이런 쪽에는 관여 안하셨어요?

 

조지훈 그 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어요. 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들하고 같이 고시공부를 했죠.

 

김지미 적응이 너무 어려웠다 라고 하는 것 치고는 2004년에 졸업을 하시고, 2006년에 합격을 하신 거니까 비교적 단기간에 붙었다고 볼 수 있는데, 공부 열심히 하셨나봐요.

 

조지훈 운이 좋았어요. 04년에 졸업하고 그 다음해에 1차, 그 다음해에 2차를 붙었으니까요.

 

김지미 조변호사님이 38기 노동법학회장이잖아요. 제가 37기 노동법학회였는데, 38기 노동법학회장이 굉장히 훈남이다 라는 소문이 있었어요(웃음).

 

조지훈 그런 잘못된 소문이.(웃음)

 

김지미 학생 때 가지고 있었던 지향을 이어가는 의미에서 학회활동을 하신 거겠네요.

 

조지훈 연수원 가서 다들 그렇겠지만 연수원 공부가 많이 안 맞았어요. 연수원 공부에 매달리기에는 나이도 많았고. 그리고 저희 학회에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김지미 노동법학회가 맥이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회원 중에도 예전부터 열심히 활동하시던 분들은 다 노동법학회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노동법학회 맥이 끊긴 게 참 안타까워요. 연수원 수료 후에 바로 다산으로 들어가신 거죠?

 

조지훈 네. 제가 다니던 경기대가 수원에 있었고 그래서 그때 사건이 터지면 대부분 다산에서 변론을 해 주셨어요. 우연찮게 저희 노동법학회 지도교수님이셨던 노정희 교수님이 또 다산 출신이세요.

 

김지미 변호사님이 활동하시는 걸 보니 ‘인권재단 사람’ 감사도 하시고 약간 특색있는 게 성남에 있는 ‘이로운재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시고 지금까지 이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계시던데 이로운 재단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조지훈 아름다운 재단이 전국단위의 재단이라면 이로운 재단은 지역 재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그런 재단이 각 카운티마다 있어서 큰 역할을 하는데요, 그런 걸 모태삼아서 지역에서 기부와 나눔을, 아름다운 재단의 지역판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시작을 하게 된 거죠.

 

김지미 여기에는 어떻게 처음부터 참여를 하시게 된 거에요?

 

조지훈 저희 집이 성남이에요. 거기에서 지역 시민사회단체 분들을 만나면서 같이 하게 됐죠.

 

김지미 ‘이로운재단’은 지금 잘 운영이 되고 있는가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이런 모토로 운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어쨌든 기부문화가 굉장히 취약하잖아요. 그리고 지역에서만 기반해서 활동을 하면 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조지훈 아직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일단 성남에 기업들이 많잖아요. 판교테크노밸리나 이런 곳에 있는 기업들한테 기부를 받고 있고 그 다음에 성남시와 같이 거버넌스를 형성해서 만들어 가려고 하는 단계예요. 그래서 지금은 청년 문제를 지역재단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공모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얼마 전에 성남시에서 청년수당 주겠다는 얘기도 한참 이슈가 됐었고, 성남에서 청년문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네요,

 

조지훈 네. 이런 사업들이 자리를 잡아서 시장이 바뀌더라도 유지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김지미 변호사님 예전 이력도 있고 수혜를 받았던 입장이기도 해서 아무래도 시국사건, 집시, 노동 쪽으로 변론을 많이 하시게 되겠네요.

 

조지훈 네. 그런데 아시겠지만 노동사건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주로 담당을 하셔서. 아무래도 국가보안법 사건, 집시법 사건을 많이 하죠.

 

김지미 국가보안법 사건은 조금 후에 애기를 하기로 하고, 보니까 집단소송을 꽤 하신 것 같더라고요. 비료담합 관련해서 농업인들 대리해서 2만 8천명 규모의 집단소송을 하신 것도 있고, LPG 담합과 관련해서 개인택시 운전자 만 명을 대리해서 집단소송 하신 것도 있고. 집단소송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활성화가 되어 있지 않잖아요. 인용되는 경우도 잘 없고.

 

조지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 집단소송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되게 어려운거죠. 원고 2만 8천명 개별로 입증을 해야 되는 거니까요. 비료담합이면 2만 8천명의 비료 구매량, 손해액 이런 것들이 다 특정이 되어야 해서, LPG 담합도 마찬가지고. 그런 게 너무 어렵고 담합행위에 대해서는 손해액추정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해야 되는데 아직 법원이 다른 민사사건이랑 동일하게 취급을 해요.

 

김지미 담합이 있었다는 결정이 나오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손해입증은 또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조지훈 네. 그냥 일반 민사와 거의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있어서 그런 점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리고 담합 같은 경우는 기업들이 어떻게 대응을 하냐면, 행정소송으로 시간을 무조건 끌어요. 행정소송에서 담합이 맞냐, 안 맞냐 이거 판단 받는 것만도 몇 년이 걸리는 거에요. 그렇게 결정이 되면 다시 민사가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말씀하신 사건들이 2010년. 2011년 사건들인데 아직까지 진행 중이에요.

 

김지미 길고 어려운 싸움을 하고 계시네요. 변호사님 하면 피해갈 수 없는 게 국가보안법 사건일 텐데 특히 내란음모 사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내란음모 사건 변호인단 중에서도 조지훈 변호사님이 제일 고생 많이 했다라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어요. 간사를 맡으셔서 실무를 거의 도맡아 하셨잖아요. 민주변론에 박치현 변호사님이 변론기도 쓰셨는데 그 내용도 굉장히 흥미진진했거든요.

 

조지훈 제가 실무담당을 하게 된 이유가 사건이 수원 남부서라서(웃음). 제 사무실과 되게 가깝고 영장실질심사를 수원지법에서 하고, 그래서 피해갈 수 없었던 거죠. 제 담당 직원은 다음부터 이런 사건 또 오면 회사 나가겠다 이런 얘기를 하고(웃음). 내란음모사건은 진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간사변호사 실무를 제가 하게 됐는데 모두 다 열심히 하셨어요. 김칠준 변호사님도 여러 가지 경험을 했지만 이번처럼 변호인단이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인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요. 저는 이런 대규모 변호인단으로 한 사건은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그게 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워낙 여론이 안 좋았고 저도 처음에는 워낙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아서 언론의 얘기가 맞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증거기록을 다 분석하면서 이게 진짜 아니구나 하는 걸 계속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른바 제보자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증인신문. 그 분은 저도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당기위원장을 했었는데 그 사람이 당기위원이었어요, 김칠준 변호사님은 더 잘 알고. 그래서 그때 신문과정이 뭐랄까 같은 사람인데 완전 다른 사람을 보는..기분이 이상했어요.

그 사람이 김칠준 변호사님하고 저한테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대놓고 그래서 김칠준 변호사님께서 정말 화가 나셔서 큰 소리 치고 그랬었죠. 인간이 저렇게 될 수 있나하는 철학적인 고민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김지미 저랑 같이 사는 사람도 그랬지만 조변호사님도 거의 이혼당할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집에 들어오지를 않으니까(웃음).

 

조지훈 설변호사님이 저한테 한 번 그러던데요. 자기는 그래도 자주 들어가는 거라고, 조변호사는 더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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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말씀하신 것처럼 사건을 직접 하는 사람은 기록을 보면 볼수록 이거 진짜 아니구나 하면서 점점 사건에 빠져들고 어떤 사명감도 생기고 그렇지만 어쨌든 집에 있는 사람은 모르잖아요. 이게 큰 사건이고 언론에도 나오고는 하지만 이해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해를 시키셨어요?

 

조지훈 끝날 때까지 이 재판의 역사적 의미와 무게에 대해서(웃음). 와이프가 경기대에서 학생회 활동 같이 했던 동기에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해는 좀 하죠.

 

김지미 이해 안 되던데요(웃음).

 

조지훈 이해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참는 거죠. 분노를 관리하고 참는 거죠.(웃음)

 

김지미 처음에는 다산에서 쪽잠을 자다가 나중에는 아예 숙소를 잡았잖아요. 그리고 조변호사님하고 설변호사하고 몇 분은 거의 상주하다시피 거기서 지내셨잖아요. 그런 식의 작업을 하는 사건은 저도 처음 봤거든요. 또 변론기를 읽어보면,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리더라도 이름만 올려놓은 사람들이 많고 실질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은 소수인데 이 변호인단은 참여한 사람이 모두가 다 역할을 갖고 일을 했던 유일한 변호단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내용이 있거든요. 어떻게 해서 변호인단이 그렇게 잘 운영이 됐을까요?

 

조지훈 일단 변호인단 구조를 김칠준 변호사님, 천낙붕 변호사님, 심재환 변호사님 이 세 분을 대표단 그룹으로 하고, 저랑 설변호사님이랑 박치현 변호사님이랑 하주희 변호사님 포함해서 5-6명이 실무단 변호사, 그리고 나머지 변호사님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서 그런 체계가 잘 잡혀있었어요. 그리고 대표단 세 분이 잘 이끌어 주셨던 것 같아요.

 

김지미 제가 들은 것 중엔 구글드라이브를 통해서 여러 명이 하나의 서면을 동시에 작업을 했다라고 하던데 이건 윤영태 변호사님의 공이었던 거죠?

 

조지훈 네. 윤영태 변호사님의 역할이 아주 컸어요. 윤변호사님이 IT 쪽으로 아주 해박하셔서 디지털 증거와 관련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김지미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 관련해서 최근에 저도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디지털 증거는 사실 왕재산 사건이나 일심회 사건 같은 국가보안법 사건을 통해서 이론이 정립된 측면이 있거든요. 이번에 내란음모 사건도 녹음파일과 관련해서 치열하게 다투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과 관련해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을 다투는 것이 왜 중요한지 얘기해 주신다면요?

 

조지훈 저도 이전에는 큰 고민 없었는데 국가보안법 사건은 디지털 증거가 많이 나오거든요. 일반사건에서는 파일 같은 디지털 증거 관련해서 다투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다퉈보면 약점이 나오더라고요. 내란음모사건에서도 녹음을 디지털 녹음기로 했는데, 그 중에 2개는 해쉬값 자체가 틀렸어요. 해시값의 동일성이 인정이 안된 거에요. 우리가 동의했으면 그냥 넘어갈 문제인데, 부동의 하니까 해쉬값을 다 맞춰보는 거죠. 그런데 기재된 해시값 자체가 다른 거에요. 그렇게 해서 2개는 증거능력이 인정이 안 되었어요.

 

김지미 해쉬값이 다르다는 건 증거로 낸 파일이 원본과 동일한 파일이라고 볼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검찰에서 그걸 그냥 증거로 냈다는 거죠.

 

조지훈 네. 그런데 기술적인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쉬값 자체가 다른 것은 심각한 결함이잖아요. 이런 것을 발견하려면 디지털 증거는 정말 꼼꼼히 봐야 한다. 많이 문제 됐던 것은 암호를 푸는 복호화 과정인데, 복호화 과정 자체를 통제 안 한 것은 위법하다는 판결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지미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보자면 국가보안법 같은 시국사건을 통해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에 대해서 문제점을 인식하신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최근 카톡이나 국정원 해킹 등 정보인권 관련해서 굵직한 사건들도 생겨서 지금 민변에서 정보인권위원회 준비모임을 하고 있고, 조변호사님도 참여를 하고 계시죠. 그래서 형사사건에서 동영상이나 녹음 파일, 디지털 사진 같은 것들이 증거로 나왔을 때 첫 대응을 이렇게 해야한다는 팁을 알려주신다면.

 

조지훈 처음에 디지털 증거, 녹음파일이나 디지털 사진 이런 거에 대해서 부동의 의견을 밝히면 많은 판사들이 그래요. 그럼 이게 그 현장을 찍지 않았다는 얘기냐. 이게 조작됐다는, 위변조 됐다는 얘기냐. 위변조 되지 않았으면 왜 부동의 하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에요. 그럴 때는 디지털 증거는 본질적으로 조작이나 변개에 아주 취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변조가 되지 않은 증거능력 있는 증거라는 입증을 먼저 검사가 해야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부동의 하는 거다 그렇게 해야 되는 거에요. 동영상을 찍었으면 촬영한 사람, 파일을 저장하고 복사한 사람을 다 불러서 증거의 연속성, 무결성이 지켜졌는지 봐야 하는 거고. 동영상 파일이 해당 캠코더에 저장된 원본이 아니라고 하면 해쉬값에 따라서 연속성이나 동일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거고. 이런 것들을 법정에서 다 밝혀야 되는 거거든요. 그걸 요구해야 해요.

 

김지미 그러면 어떻게 하랴는 얘기냐, 국과수에 보내서 감정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감정 비용을 피고인에게 부담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판사도 있거든요. 그때는 어떤 식의 답변을 해야 할까요?

 

조지훈 만약 녹음파일이라고 한다면 녹음자를 출석시켜야 하고 그것을 다른 디지털 저장 장치에 넘길 때 있었던 사람들이 다 나와야 하는 거죠. 저희 내란음모사건 때 그래서 녹음자들이 다 나왔거든요.

김지미 저도 처음에 디지털 증거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해쉬값이 뭐지? 무결성이 뭐지? 어떻게 하라는 거지? 되게 막연했거든요. 디지털 증거가 증거능력을 가지기 위한 요건에 관해서 짧게 얘기해주시면.

 

조지훈 과정상의 자료의 동일성 인정되어야 되는 것이죠. 수집절차, 복제하는 절차, 그리고 증거로 제출되는 절차. 디지털 파일이라는 것이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0101, 이렇게 이진법으로 되어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위변조가 너무 용이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봉쇄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느냐 그게 요건의 가장 기본 뼈대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어요.

가장 간편한 게 해쉬값을 추츨해서 원본하고 사본의 해쉬값이 같으면 동일성이 인정이 되는데,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녹음자 아니면 경찰이 채증한 거면 채증한 사람, 이걸 또 저장한 사람 각각 다 불러서 이게 무결하게 계속 원본 동일성이 유지되는지가 입증이 되어야지만 증거능력이 있다라는 거죠.

 

김지미 사실 이건 민변 변호사들 아니면 싸울 수가 없는 부분이고, 최근에는 우리 회원들 사이에서도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물어보시는 분들이 꽤 계시거든요.

 

조지훈 왕재산 사건 이후에 천낙붕, 이광철 변호사님 위주로 이런 문제의식이 있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디지털정보위원회 준비모임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이 오시면 많이 배우고 굉장히 유익할거예요. 그리고 지금시기에 굉장히 필요한 작업인 것 같아요. 증거능력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정보인권 관련해서 카톡도 있고 해킹도 있고 사실 산재해 있는데, 민변에 대응할 만한 단위가 없어서 내년에 정식 위원회 발족을 목표로 하고 있고 선배들의 노하우도 배울 수 있는 좋은 모임입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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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내란음모 사건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기록을 보면서 진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하셨는데 1심에서는 모두 유죄가 나왔잖아요. 몇 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엄청 고생을 했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 때 상실감이 굉장히 컸을 것 같아요.

 

조지훈 네. 멘붕상태였죠. 아직도 생생해요. 1심 판결을 법정에 가서 들었고, 김칠준 변호사님이 선고 후에 바로 나와서 그 자리에서 즉흥연설을, 거의 절규를 하셨죠. 그래서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데, 한쪽에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봤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판단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또 한편으로 항소심에서 더 크게 칼을 갈아서 붙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김지미 1심에서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항소심 가서 특별히 더 할 것이 있을까 생각이 언뜻 드는데, 항소심에서 뭔가를 할 만한 게 더 있었나요?

 

조지훈 역사적인 무게도 있지만 기록도 방대하고 증인신문도 저희가 조금 부족했던 게 주5일 재판이었잖아요. 그래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논리체계나 변론의 실질적인 내용이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탁 다가가지 못했던 그 부분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거기에 좀 더 집중을 했던 거였죠.

 

 

김지미 언뜻 생각해 봐도 변호인단은 그렇게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주5일 재판을 하다보니까 정리가 안 되는데, 재판부는 당연히 정리가 안 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이 판결을 그래도 조금 뒤집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더 들었을 것 같아요.

 

조지훈 1심 판결문 자체가 비약이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충분히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내란음모를 인정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음모를 깨는데 있어서, 윤영태 변호사님이 아이디어를 주셔서 음모에 관한 하급심 판결을 다 뒤졌어요. ‘음모’자 들어가는 모든 하급심 판결을 다 뽑아서 그거를 의견서로 제출했죠. 그게 음모부분에 대해서 법리적으로 깨는 근거가 됐고, 또 하나는 일본에 이른바 삼무판결, 예전 오키나와 투쟁 때 했던 음모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판결들이 많아서 그걸 조사해서 제출했어요. 그게 법리적으로 큰 근거가 됐었죠.

 

김지미 그런데 항소심에서 내란음모는 무죄가 됐지만 내란선동은 유죄가 됐단 말이죠. 모르는 사람이 듣더라도 내란음모는 무죄고 내란선동은 유죄라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게 결국에는 대법원까지 확정이 돼서 그 사건은 종결이 됐는데, 그런 엄청난 큰 사건을 끝내고 났을 때의 감회랄까 이제는 정리가 좀 되셨나요?

 

조지훈 개인적으로 쭉 정리해 볼 시간은 없었는데, 그 이후에 계속 재판을 하다보면 문득문득 내가 많이 좀 성장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재판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 그 다음에 변론기술이라면 기술 이런 것들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데 문득문득 이런 큰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가졌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김지미 변호사라는 직업이 혼자서 하는 직업이잖아요. 보통은 내가 혼자 서면 쓰고 혼자 재판 나가고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 변호인단 활동을 하면 배우는 것도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의 변론 스타일이나 증인신문 할 때 태도 이런 것들 보면서도 굉장히 많은 공부가 될 것 같거든요.

 

조지훈 설변호사님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증인신문을 능숙하게 잘 하시더라고요.

 

김지미 마치 제가 이 대답을 유도한 것 같네요.(웃음). 그럼 이쯤에서 피해갈 수 없는 개인사를 또 여쭤보면. 아까 살짝 사모님하고 학생시절에 만났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조지훈 네. 알게 된 건 94,5년도부터 알게 됐는데, 결혼은 2006년도에 했지요.

 

김지미 2006년이요? 2차 시험을 본 해이신 것 같은데요.

 

조지훈 2차 시험 보기 1달 전에 결혼을 했어요.

 

김지미 시험보기 한 달 전에요? 시험을 포기하셨나요(웃음)?

 

조지훈 많은 사람들이 제 청첩장을 보고 얘는 포기했구나 이렇게 봤죠.

 

김지미 2차 시험을 끝내고 했어도 됐을 텐데..아무래도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겠네요.(웃음)

 

조지훈 우리 첫째요.(웃음) 첫째 딸 생일이 2006년 10월 11일인데, 그 다음날 2차 발표가 있었어요. 복덩이죠. 산부인과에서 와이프랑 있어서 저는 합격자 명단도 못 봤어요. 신림동에 있는 후배가 됐다고 알려줘서 알았죠.

 

김지미 출산과 합격 중 어느 쪽에 더 마음을 졸이셨어요? 예정일이 거의 같았을 텐데.

 

조지훈 제 와이프가 출산 전에 너무 아팠어요. 저희가 참 무식해서 자연분만 좋다고 그래서 늙은 거는 생각지도 않고 그거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거에요. 그래서 아프다고 하는데 산부인과 가면 안 좋다고 해서. 엄청 고생했어요. 출산하기 몇 주 전부터 일어나지 못했어요. 출산하고도 6개월 동안 못 일어났어요 골반 쪽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서 출산하러 갈 때도 친구들 불러서 들고 이동하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2차 발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김지미 그렇게 무사히 아이도 태어나고 다음날 바로 합격도 하고 진짜 복덩이네요. 아이가.

 

조지훈 요즘 말을 참 안 들어서(웃음).

 

김지미 2006년이면 지금 10살 됐겠네요. 그럼 아이는 1명이신가요?

 

조지훈 저희 사무실 이름이 다산이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하느라 2010년에 둘째를 낳았지요. 저희 사무실은 변호사님들도 다 다산이에요(웃음).

 

김지미 사모님은 학교 때 알고는 지냈지만 본격적으로 사귄 건 그때는 아니었나 봐요?

 

조지훈 제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때쯤부터 해서 연애를 10년 정도 했어요. 제 공부 뒷바라지를 지금의 와이프가 해 줬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제가 꼼짝을 못해요. 뒷바라지 다 해줬더니 당신이 지금은 뭐라도 된 줄 아냐? 부터 해서 나없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말이야 막 이래요(웃음).

 

김지미 변호사님들 인터뷰 하다보면 사모님들 훌륭하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오세범 변호사님은 사모님을 가리켜서 ‘장비’같다고 표현하셨어요.(웃음) 그러면 사모님은 변호사님의 성인 이후의 거의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네요.

 

조지훈 네.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잘 공개하지 않아요(웃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입 뻥끗하면 너는 끝난다 이러고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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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저희 회원행사에 한 번 같이 오시죠(웃음). 변호사님은 지금 정보인권모임 말고는 위원회 활동을 특별히 하시진 않으시죠?

 

조지훈 네. 수료하고 노동법학회장 출신이라서 노동위원회 해야 된다 이런 얘기 들었었는데 사무실이 수원이라 모임에 참석하는 게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디지털정보인권위에 주력을 하려고 하고 있어요.

 

김지미 어느덧 7년차 중견변호사가 되셨는데 요즘 정세가 참 암울하잖아요. 이럴 때 민변이 이런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지훈 7년차 중견변호사인데, 저희 다산에서는 아직도 막내에요. 제 후임이 오세범 변호사님이라(웃음). 제 주위에 지인들이 제가 민변 회원이라고 하면 그것 자체로 되게 높이, 아 정말 고생 많다 이렇게 해주는 분들이 많거든요. 시민들이 민변에 바라는 요구는 되게 높은 것 같아요. 특히 지금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민변이 한 발 더 치고나가는 역할을 해야 되지 않나.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더 뭔가 시민들의 쌓인 분노를 어떤 지식인의 목소리, 전문가의 호소 이런 것을 모아서 반 발짝씩이라도 더 치고 나갈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내란음모, 정당해산을 쭉 다 겪었잖아요. 내란음모 할 때 어떤 변호사님이 내란음모까지 터졌으면 재네들 다 한 거다, 이보다 더 할 게 있겠나 했는데 정당해산까지 갔잖아요. 지금 정권은 로드맵이 있는데 저도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대부분이 김대중, 노무현 10년의 역사가 있는데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거다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한홍구 교수님이 하신 얘기 중에 예전에 국정원 과거사위 할 때 자기 밑에서 열심히 도와준 담당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유우성 사건에서 증거 위조한 과장이라는 거에요. 정말 우리가 잘못한 게 이 정도 하면 청산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환상이었다. 인적 청산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무지했거나 너무 방관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냉철한 진단인 것 같아요.

 

김지미 민변의 역할이 커질수록 어쨌든 회원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조변호사님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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