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르네상스맨, ‘버트런드 러셀’을 꿈꾸다. 박찬운 교수 인터뷰

2015-02-25

 

연구실 입구에 붙어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는 순간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과의 만남은 뭔가 색다를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연구실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다양한 주제의 예술작품들과 책장에 빽빽하게 꽂힌 인문서적들은 그러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변호사로서의 삶을 살다가 현재는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인권법을 가르치고 있는 박찬운 교수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배너 최종

 

 

박종훈 갑자기 인터뷰를 요청 드렸는데 이렇게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변 회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셨지만, 아무래도 학계로 오신지 꽤 되어서 생소한 분들도 있을 것 같아 민변 회원분들에게 간략한 자기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찬운 1984년 사법시험 26회로 합격했고, 연수원을 16기로 졸업(1987년)했지요. 군대를 갔다 온 다음 변호사로 바로 개업을 했지요. 그게 1990년 3월 2일이었으니 어느새 25년 전이군요.

 

박종훈 그러면 변호사가 된 이후에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박찬운 민변에 가입한 것은 1991년이었어요. 당시에 민변 회원 수가 50명 조금 넘은 상태였었는데, 그 때 내 연수원 동기 몇 명(윤기원, 안상운 변호사 등)이 민변에 가입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었어요. 그 사건이 뭐냐면, 그 당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 박승서 변호사라고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 퇴진운동을 하게 됐어요. 그게 1987년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이 있어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강민창인데, 이 사람이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잖습니까. 그런데 박승서 변호사가 이 사람을 변호했던 거에요. 일반 변호사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권옹호기관인 변협의 수장이 그런 사건을 맡았던 사람이란 것은 당시 분위기상 용납이 안 되었어요.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1990년 가을에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비분강개해서 대한변협 회장이 그런 변호를 했던 사람이라면 변협 회장 자격이 없으니 퇴진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지요. 성명문을 내가 쓰고 전국에 있는 변호사들을 규합했어요. 성명 참여하는 변호사들이 그 때 108명이 가담했는데, 물론 그 분들은 우리 민변의 변호사들이었고, 민변 변호사의 주장에 동조하는 다른 변호사들이었어요.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연수원 동기인 민변 친구들이 민변에 들어와서 같이 활동하자라는 권유가 있었지요.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1991년 초에 민변에 가입하게 됐지요.

 

박종훈 민변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특히 젊은 변호사들이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박찬운 민변 가입 후 나도 다른 회원과 다름없이 민변에서 활동을 했는데 처음에는 양심수를 변호하는 등의 활동을 좀 했지요. 그런데 내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제연대활동이었어요. 나는 민변의 국제연대활동의 초창기 멤버 중의 하나였습니다. 민변의 국제연대 활동은, 여러분들 잘 알다시피, 노무현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했던 천정배 변호사와 현 서울 시장인 박원순 변호사가 처음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이 조용환 변호사지요. 민변이 본격적으로 국제연대활동을 하게 된 때가 1992년경입니다. 1992년에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약칭 자유권규약) 가입에 따른 정부보고서 검토가 제네바에서 있었어요. 그 때 민변이 중심이 되어 그 검토를 맡았던 유엔 인권위원회(UN Human Rights Committee)에 반박보고서를 제출하지요. 그 반박보고서를 제출할 때 지금 지평에 있는 조용환 변호사가 책임을 맡았어요. 나는 그 당시에 아 저런 활동이 민변에서 가능하구나 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자극을 받았지요. 그 이후 나도 저런 분야에 활동을 좀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본격적으로 국제인권법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1996년 미국유학을 가게 된 계기가 됐고, 후에 학위를 받고, 결국 학교에 오게 된 계기가 됐지요. 이런 과정 중에 자유권 규약 정부보고서 두 번째 검토가 제네바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때 민변에서 반박보고서 등을 제출하고 현지 로비를 하는 것은, 당시 국제연대위원장이었던 내가 중심이 되어 했지요. 그게 1999년의 일이군요. 그 외에 국제연대활동과 관련이 있지만 민변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난민지원 활동이었어요. 우리나라의 난민지원 활동 처음 문을 연 것이 민변이었고, 내가 민변의 국제연대위원장을 할 때 처음 시작을 했어요. 나는 국제연대위원장을 그만 두고 난 다음에도 한 동안 난민지원위원회라는 임시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으로서 활동을 했어요. 그 시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난민인정이 있었지요.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 행정소송도 제기했습니다. 저는 최초의 대리인이 되기도 했지요.

 

박종훈 아, 국제연대위원장을 맡으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시다가 변호사를 휴업하게 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박찬운 2005년 초에 국가인권위원회로 가게 되면서 변호사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어요. 국가인권위원회에 가서 인권정책국장을 하다가 2006년 가을에 학교로 와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권법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강의하는 그런 상황을 하고 있죠. 내가 자기소개를 정말 간략하게 하려고 했는데, 길어져 버렸네요. 선생의 단점입니다.(웃음)

 

박종훈 그거야 교수님께서 워낙 하신 일이 많으셔가지고(웃음)

 

박찬운 그건 아니고… 그래도 특별히 1/10로 줄이려고 했는데…(웃음)

수정

 

박종훈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변호사는 누구나 다 인권변호사다.” 즉, 소위 말하는 인권변호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라면 다 인권을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사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로스쿨에 진학을 하면서 자기소개서에 인권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많이들 적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권변호사의 롤모델을 찾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변호사를 꿈꾸는 젊은이를 위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인권법을 전공하는 법조인이 되었는지 간단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박찬운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어릴 때부터 그 분야 전문가가 되겠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나는 아주 어릴 때는 두 분야 중에 한 분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어렴풋한 꿈은 있었어요. 하나는 역사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내가 사실 역사를 좋아해요. 내가 요즘 쓴 교양서들이 대부분 다 역사와 관련된 책이에요. 그 다음 두 번째가 법률가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법률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좀 있었죠. 법률가를 하게 되면 뭔가 좀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정도라고나 할까? 물론 내가 어릴 때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 되겠다고 많은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법률가가 되면 여러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마 내 어릴 때부터의 성장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종훈 어릴 때 집안에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가요?

 

박찬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뭐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보다 우리 집안은 한국사회의 좌우대립의 희생양이었어요. 그래서 가족사를 보면 한국전쟁 이후에 아주 어려운 삶을 살아 왔지요. 우리 외가는 우리 고향에서 아주 유명한 좌익이었고, 우리 아버지는 전쟁 중 국군의 장교이었어요. 그런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한편으론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또 다른 면으로는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마음속에 계속 내재되어 왔어요. 나는 우리 사회를 결코 호의적으로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우리 근현대사가 대단히 부정적인 역사로 얼룩졌다고 어린 시절부터 생각을 해왔는데, 이 부정적인 역사의 원인이 도대체 뭐냐를 고민하게 되었죠.

 

박종훈 그러면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부정적 근현대사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박찬운 그것은 역시 지식인들의 책임이 참 크다는 겁니다. 지식인들이 진실을 보지 못했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래서 법률가가 된다면 최소한 내가 어떤 진실을 밝히고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데 조금은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어릴 때의 성장배경과 함께 조금씩 싹터 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러다가 대학을 자연스럽게 법대를 진학하게 되고 또 사법시험을 공부하게 됐죠. 나는 대학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특별하게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이 고시공부에 매진했어요. 그것이 내가 조기에 사법시험을 합격할 수 있었던 계기였었고, 또 아주 젊은 날부터 법률가가 될 수 있었던 큰 배경이었지요.

 

박종훈 그러한 배경이 오히려 사법시험에 빨리 합격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박찬운 자랑할 것은 아니에요. 사실 나는 민변에 가입을 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마음부담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그게 뭘까요? 나는 학교 다닐 때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게 항상 부담감이 있어요. 나는 학창시절 오로지 공부만 했잖습니까. 그것도 남들이 보면 출세하기 위한 고시 공부 말입니다. 나는 누구처럼 젊을 때 감옥에 가본 것도 아니고 또 제적을 당해 본 경험도 없어요. 우리 시대는 그런 사람들 많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학생들 데모가 엄청났었는데 그 데모 대열에 앞장서서 파출소 한 번 끌려가 본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바깥에서 학생들 데모할 때 골방에서 공부한 사람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거기서 오는 어떤 마음의 짐이 굉장히 컸죠.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그 당시에도 마음속에서는 조금 참자. 조금 시간을 기다려 달라. 이런 마음의 약속을 사실 많이 했었죠. 그런 마음의 부채를 내가 변호사가 된 다음에 조금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민변에 가입하게 되고, 그 약속을 지금까지도 지켜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뭐 상황에 따라서는 흔들리기도 했고, 또 부족한 부분도 있고, 또 결과적으로는 내가 좀 나약했다, 이렇게 또 반성할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박종훈 소위 말하는 ‘운동권’ 경험이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마음의 짐이 있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고 그 후로는 인권에 대하여 일관된 길을 걸어오셨잖아요? 그런데 교수님처럼 어린 시절에 힘들었던 경험들을 겪었다고 해서 세상에 대하여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꿈꾸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면 힘든 과정에서 뭔가 성취를 얻어낸 만큼 그 성취에 매몰되어서 쭉 그것을 탐하는 길로 가는 경우가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박찬운 예, 그런 차이는 분명히 존재해요. 어릴 때 성장배경이 굉장히 어렵게 산 사람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지위를 얻고 돈을 벌게 되면 과거를 아주 의도적으로 잊으려고 해요. 반면에 그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자기의 내면을 심화시키고 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뭔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후자는 드물어요. 내가 후자에 속한다고 감히 말하기는 부끄럽기도 하고 또 어렵기도 한데, 적어도 인생의 목표를 후자에 두고 살려고 노력은 했지요. 최소한 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회·나라·세계라고 하는 나 자신 바깥의 문제들을 매우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기고 살고자 노력해 온 것은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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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예. 제26회 사법고시 합격자 수가 300여명밖에 안 되었고, 그리고 젊은 나이에 합격한, 소위 말하는 소년등과를 하셨잖아요? 그러면 합격자도 얼마 안 되고 이런 와중에 다른 길이 아니라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변호사로서 한 길을 쭉 걸어 오셨는데 그런 초심을 다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으셨나요?

 

박찬운 아, 그것은요. 민변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고 봐요. 민변이 없다면 지금의 저는 있지 않았을 겁니다. 좀 역사를 이야기해야겠네요. 음, 우리 시대에 들어와 우리보다 한 10년 위에 선배들하고 조금 다른 면이 좀 있어요. 나보다 10년 위에 있는 분들까지만 하더라도 변호사 생활은 우리하고는 많이 달랐어요. 그 분들은 100명이면 거의 99명은 사법시험 합격하고 관직에 간 다음, 그리고 적당할 때 나와서 돈을 버는 변호사가 되었지요. 그리고 그 중에서 인권변호사라는 분들, 소위 1세대 인권변호사라고 할 수 있는 분들도 지금 젊은 변호사 분들과는 사뭇 달랐어요. 지금은 사실 젊은 변호사들이 인권변호사라고 하는 타이틀만을 가지고 살기는 대단히 힘든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나보다 한 10년 선배 변호사들 지금 나이가 한 60대 중반에서 70대 넘으신 분들은 인권변호를 하셨지만 그 개인의 삶을 보면 굉장히 유복합니다. 그 당시 변호사 수가 워낙 적었거든요. 내가 변호사 개업할 때 통계를 보니까 전국 개업변호사 수가 1921명이더라고요. 그런데 2014년 말 현재 16,000명이에요. 비교할 수가 없죠. 8배 차이가 나요. 그런데 80년대 초에 변호사 생활 하신 분들 기준으로 하면 그 당시에 변호사 수는 전국에 900명밖에 안됐어요. 그러니까 그 분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해도 한편에서는 돈 벌 수 있는 사건들이 널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변호사로서 경제적인 문제를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요. 저희들 세대는 그에 비하면 못하지만 지금 변호사들에 비하면 또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여하튼 나보다 10여 년 이상 선배인 변호사들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세계에서 사신 분이었지만 그런 분들 중에서도 인권 변호 하신 분들이 적잖이 있었어요. 하지만 70년대, 80년 대 초까지만 해도 이런 분들이 특별히 어떤 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하진 않았어요.

 

박종훈 그때는 변호사들이 굳이 뭉칠만한 동기가 적었다는 것인가요?

 

박찬운 그때는 그냥 단기 필마해도 됐지요. 워낙 변호사들의 prestige가 높기 때문에 아무리 독재시절이라 할지라도, 물론 강신옥 변호사라던가 이런 분들 예외는 있었지만, 변호사까지 잡아가는 일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 분들이 대부분 관직에서 있었잖아요. 검사출신, 판사 출신 뭐 이런 거니까, 세상 어딜 가도 별로 두려운 것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우리 때가 소위 300명 세대입니다. 1981년부터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300명으로 늘어났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이 때부터 변호사 사회가 바뀌기 시작해요. 연수원 13기 같은 경우 300명 중에서 관직에 가지 않고 막 바로 변호사가 된 사람들이 7,80명 돼요. 관직을 경험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어요. 관존민비 사상이 아직도 있는 우리나라에서 관에서 일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목에 좀 힘이 들어가는 사람이 되게 되어 있어요. 변호사를 해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변호사 업으로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의 선배 변호사들 하고는 캐릭터가 굉장히 다른 것이에요. 관에서 일을 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 사회에 친근할 수밖에 없죠. 그게 바로 300명 세대부터 나타난 특징이에요. 이 300명 세대의 변호사 중에서는 아주 특출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아까 말한 천정배 변호사, 조용환 변호사, 김선수 변호사, 다들 사법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하고, 자신이 원하면 공직으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노동변호를 한다든가 하면서 당시에 시민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변호사상을 만들었거든요.

 

박종훈 그 때 민변이라는 조직의 역할이 있었겠군요.

 

박찬운 그렇죠. 새로운 변호사상이 형성됨과 동시에 민변이라는 조직이 생겨가지고 인권변호라든가 이런 데에 좀 관심 있던 사람들이 집단화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과거에는 아까도 이야기 했다시피, 그냥 단기 필마로서 인권변호를 할 수가 있었던 시절이었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그러한 관직 경험이 없는 변호사들이 나와 새로운 형태의 변호업무를 하면서, 그런 일들이 혼자서 하기는 대단히 힘들다는 생각을 갖게 됐겠죠? 그럴 때 동료들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조직을 만들었죠. 그러니까 그러한 조직이 뒤에 딱 있으니까 얼마나 든든합니까.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들끼리 모여서 서로 협력하면서 일할 수 있는 상황이 80년 후반, 90년대 초서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나도 거기에 합류하게 된 것이고요. 만약 민변이라고 하는 조직이 없었다면 나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의 선배 변호사들과 같은 모습으로 갔든지,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든지 했겠지요.

 

박종훈 민변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신 것 같은데요.

 

박찬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굉장히 변호사의 물질적 기반은 취약해져가요. 70년대 변호사와 80년대 변호사들은 물질적 기반이 아주 좋았지요. 지금은 물질적 기반이 아주 취약하지요. 때문에 인권변호라든가 소수자·약자에 대한 변호를 해야겠다고 하는 생각을 사실 갖기 어려운 상황이 됐어요. 맹자말씀에 “항산에 항심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최소한의 물직적 기반이 갖춰져야 정의로운 마음, 도덕적인 마음 이런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너는 도덕적으로 생활해야 돼. 너는 양심적으로 생활해야 돼.” 백날 이야기 해봐도 소용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요즘 청년 변호사들에겐 굉장히 와 닿는 이야기일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렇게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중요한 것이 동료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고 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해요. 그래서 그 조직을 통해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지원하고 해야지요, 그래야 비로소 그러한 활동들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지요. 그냥 혼자서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라는 것은 불가능하죠. 세상에 완벽한 조직은 있을 수 없으니까 민변 설립 이후 오늘까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민변에도 여러 가지 과오가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인권옹호의 의지가 있는 변호사들에겐 정말 큰 힘이 되는 조직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도 거기에 합류한 것이 지금 조금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지요.

 

박종훈 지금 하신 말씀이 청년 변호사들한테 많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주제를 조금 바꾸어서요, 학자로서의 교수님의 모습을 여쭤보고자 합니다. 실무 법조인들도 논문을 작성하고 책을 집필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실무와 학계 간에는 경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한창 실무에 종사하시던 교수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학계로 들어오게 되신 것인지요?

 

박찬운 내가 왜 이런 길을 가게 됐는가하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내가 민변에 들어간 91년도 당시 50명 조금 넘는 변호사가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까, 다들 나름대로 똑똑하고, 그리고 다들 나보다 뭔가 법률가로서 전문성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 당시 굉장히 내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했어요. 나도 뭔가 전문성이라는 것을 갖춰야 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차에 아까 이야기했던 국제 인권 분야에 업무를 하게 되었지요. 물론 그것은 당시 돈하고는 특별하게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죠. 당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물질적 기반이 지금하고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요. 내가 먹고는 살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낮에는 사무실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가지고 돈을 벌자. 그리고 저녁에는 민변에 가서 세상을 위해서 일하자. 물론 그 당시도 먹고 사는 문제가 아주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하고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게 양립이 가능했지요. 그래서 내 주된 관심은 사무실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보다 민변에서의 활동을 어떻게 하면 내 나름대로의 영역을 좀 구축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었어요. 그것이 바로 국제인권이었죠. 국제인권이라고 하는 분야가 그 당시에 아주 초창기고 개척기였기 때문에 국내에 특별한 자료 같은 게 없었어요. 변협에서 나오는 <인권과 정의> 같은 데에 외국에 갔다 온 분들이 글을 좀 쓴 게 전부였지요. 읽어보면 참고는 되는데 뭐랄까요 좀 부족해요 조금 더 알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박종훈 공부라고 한다면?

 

박찬운 1990년대 초 일본어 공부를 한참 하고 있었어요. 일본어 공부를 통해 일본 변호사들의 활동을 하나씩 보게 됐어요. 일본 변호사연합회에서 나오는 <자유와 정의>라고 하는 월간지가 있는데 이걸 매월 구독을 하게 됐어요. 내가 거기서 아 이건 우리나라에서 좀 필요하다 하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번역하거나 그것을 소개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일이 92년도에 일본의 당번변호사 제도라고 하는 것을 우리나라에 당직변호사 제도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꿔서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서울변호사회에 당직변호사 제도라고 하는 것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내가 일본을 왔다 갔다 하게 됐어요. 일본에는 이미 그 당시에 국제인권법이라는 제목의 책도 나오고 특히 변호사들이 중심이 되어 이러 저러한 글들을 많이 썼더라고요. 그런 것을 통해 많이 공부를 했지요.

 

박종훈 일본어 공부를 한 것이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네요.(웃음)

 

박찬운 내가 국제인권을 공부하면서 1993년도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에 행형제도연구소위원회라고 하는 것을 제안을 해서 만들었어요. 인권위원회 산하에다가 말입니다. 내가 그 소위원회 간사를 맡았어요. 그래서 내가 일본을 왕래하면서 얻은 자료를 가지고 책을 한 권 쓰게 됩니다. 그게 『국제인권원칙과 한국의 행형』 이라고 하는 책이지요. 나와 김선수 변호사가 논문을 각각 쓰고, 행형관련 국제인권 기준을 번역했지요. 이 번역에는 지금 목포에서 활동하는 박승옥 변호사, 법무법인 원에서 활동하는 유선영 변호사도 함께 참여하지요. 나름으론 역사적인 책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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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아 보기만 해도 오래된 책의 빛깔이 그 역사를 증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박찬운 그리고 3년 뒤인 1996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국제인권법을 일본이 아닌 그 발상지에서 직접 배우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일본을 통해서 배우는 국제인권법은 일본적 시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간혹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유럽 거쳐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98년도 12월 달이에요. 그 때부터 다시 변호사를 하면서 민변에서 국제연대 부문을 책임지게 되었고 또 자유권규약 제 2차 검토회의 로비활동도 내 책임 아래 진행되게 되었지요. 그리고 아까 말한 난민지원 활동 등을 하게 되었고, 또 그런 과정 속에서 조금 더 공부를 심화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학위과정에 들어가게 돼요. 어떻게 보면 practice를 중심으로 하는 변호사의 업무에서 점점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대학에 나가 강의를 시작했고, 토론회에 단골로 불려갔고, 또 글을 쓰기 시작했죠. 이런 생활을 하다가 2004년경부터는 법률가로서의 내 인생을 다시 설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차에 민변 대표를 역임하신 최영도 변호사님이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가시는 바람에 저 또한 그분의 천거로 인권위의 인권정책국장으로 가게 된 것이지요. 그 때로부터 변호사를 휴업을 하게 되었고,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국가인권위원회를 나오면서 변호사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로 왔는데, 그것도 9년이 되었어요. 참 세월이 빠르군요.

 

박종훈 교수님께서 집필하신 책들을 보면 정말 분야의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일반적인 학술을 다룬 교과서나전문학술지 성격이 강한 책, 더 나아가서는 최근에는 소위 말하는 대중서적까지, 이렇게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에 손을 뻗칠 수 있는 원동력이 있는 건가요?

 

박찬운 법학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이 마찬가지인데, 우리 대한민국의 학문은 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전문성이라고 하는 미명아래 너무나 세분화 되어 있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통합적 이해를 못해요. 이런 문제를 법학 분야로 좁혀보면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오로지 자기 전문분야라고 하면서 헌법, 민법, 형법 공부하고, 판례 찾아보고… 그게 전부인 경우가 많아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법률 공부할수록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지지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식인이라면, 어떠한 전공을 했다 하더라도, 만나서 한 30분, 1시간은 전공이 달라도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우리가 교양이 있어야 해요. 교양이라는 것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거든요. 모든 학문의 기본을 우리가 갖추고 나서 각 영역으로 세분화 됐을 때 그 세분화 된 전문적 영역이 보편성을 갖추면서 서로 소통할 수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현실은 보편성의 도구인 교양이라고 하는 분야가 아주 취약하다보니까 문제가 생겨요. 학생들이 처음서부터 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니까 자기가 배운 전문적인 지식이 사회에 어떻게 쓰여야 될지, 또 사회의 다른 영역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될지 이것을 못하는 경향이 나타나요. 나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크게 느껴요. 그래서 내 자신이 조금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 덕에, 전공불문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지금도 많이 읽고 있지요.

 

박종훈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이나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비판하시는 것 같은데요? “도쿄대생은 왜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이 생각나기도 하구요.

 

박찬운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지적풍토가 세계에서 가장 후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법률가, 변호사를 사회적 의사라고 하잖습니까. 의사들을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는 physical doctor라고 하면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질병을 고치는 social doctor란 말이죠. 그런 social doctor가 되려면 말 그대로 세상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해요.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에 대한 이해 이런 것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헌법·민법·형법, 소송법 교과서만으로는 불가능해요. 교육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목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교육체계는, 특히 법학은 교양을 가르치지 않잖아요? 교양은 학생들이 알아서하고, 학교(법대 혹은 로스쿨)에서는 그런 것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 전문적인 교육만 하겠다는 것이에요. 우리 법학 교과서를 보세요. 교과서에 교양적 부분이 거의 없죠? 원래 법학에서도 교양적 부분은 대개 법학 책 서론에 나오는 법이고 총론에 나오는 법이지만, 서론과 총론은 한 두 페이지에 불과해요. 그 마저도 여기저기에 나와 있는 것을 짜깁기 한 경우가 많아서 우리가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법학에만 몰입한 사람들의 특징은 매우 비교양적이라는 것이에요. 교양이 풍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있는데, 법률가들과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말하는 것은 법률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밥 맛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박종훈 결국 그것은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법조인의 상과 맞닿아 있겠군요.

 

박찬운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법률가들 대부분은 세상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법률가가 되는 것이지요. 이게 참 문제라고 생각해요. 로스쿨을 만든 이유 중에 그런 문제도 큰 비중을 차지했지요. 요즘에 판사들을 초년 법률가들 중에서 뽑지 않고 일정 경력을 갖춘 변호사 중에서 뽑겠다고 하는 것이 법조일원화인데, 이 법조일원화를 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 사회적 경험을 쌓은 사람을 법관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이유도 사회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기존의 법률가들한테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 법률가들이 스스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서는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을 능력이 되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생각들을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해왔는데 변호사시절에는 깊이 있게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어요. 9년 전 마침 학교로 오다보니까,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변호사들보다는 시간이 많지 않겠어요? 하루 온종일 내가 할 수 있는 게 오로지 책 읽고, 글 쓰는 것 아니겠어요? 시간이 되는대로 책 읽고, 생각을 하다 보니, 그것들을 좀 풀어내고 싶더군요. 자기만 알면 뭐합니까. 내가 아는 것들을 시간이 지나면 나도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잊기 전에 좀 정리를 한다는 차원에서 대중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박종훈 예, 최근에 워낙 많은 책을 저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찬운 최근에 1년에 1권씩 낸다는 목표로 2011년서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어요. 이미 3권 냈지요. 올해도 상반기 중에 한권이 나올 겁니다. 첫 번째 교양서는 2011년에 낸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명저 강의』인데, 이것은 이 시대에 꼭 읽으면 좋을 명저들을 소개하고 이들 책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내용으로 글을 쓴 것이지요.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것을 책으로 냈죠. 연재 당시 조회수가 다 합쳐가지고 100만 조회가 넘었어요. 굉장했죠. 아이쿠…내 자랑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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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100만 조회면 충분히 자랑할 만하시죠.(웃음)

 

박찬운 그리고 두 번째는 『문명과의 대화』 라는 책인데, 내가 사실 좀 여행을 좀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일·이집트·페르시아·실크로드·앙코르와트를 갔다 오고 난 다음에 이 책을 썼어요. 이게 나름대로 2013년 문광부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어요. 그리고 작년에 내놓은 것이 『로마문명 한국에 오다』인데, 사실 지난 10년간 내가 제일 많이 독서한 것이 로마역사와 관련된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내가 여행한 것과 결합 시켰지요. 여기 사진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이 사진들이 거의 다 내가 찍은 사진들이에요. 로마역사를 설명하면서 내가 여행했던 것들을 다 집어넣은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는 열정을 바쳤던 책이에요.

 

박종훈 그러면 현재는 집필하고 있는 책은 없으신가요?

 

박찬운 조만간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책을 하나 내요. 빈센트 반 고흐 책을 내겠다라고 결심한 것은 얼마 안 된 일인데, 내가 페이스북에 작년 가을부터 3달 동안 아주 열심히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연재했어요. 처음에는 연재할 생각 없이 그림 몇 점을 그냥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가면서 아, 이거 좀 본격적으로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정말 열심히 글을 썼어요. 그냥 막 쓴 것은 아니고 매 회 자료 연구를 하고, 글을 쓴 것이지요. 그게 무려 49회를 연재했어요. 그래서 그걸 이번 겨울방학에 다시 정리해서 2주 전에 출판사에 보냈어요. 아마 빠르면 올 상반기에 400~500 페이지 정도 되는 두툼한 책이 나올 것 같아요.

 

박종훈 페이스북 이야기가 나와서, 안 그래도 질문을 드리려고 했는데, 교수님의 페이스북 사용법은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박찬운 많은 분들이 대부분 굉장히 짧은 글을 SNS에다가 띄우고 소통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 안 해요. 내 타임라인에 와서 보면 아시겠지만 나는 한 번 쓰면 최하 원고지 200자 기준 5매이고, 대부분 원고지 20매-30매 가까이 써요. 아마 이제까지 이런 글을 100회 이상썼을 겁니다. 작년 한 해만 원고지 1,300매 이상을 썼어요. 사실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게 어려워요. 나는 개인적인 사적인 공간으로 페이스북을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나는 내 글이 바로 신문에 나가도 괜찮은 글들만 올리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를 주목하는 기자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요.(웃음)

 

박종훈 그렇다면 교수님한테 SNS 공간은 어떤 곳인지요?

 

박찬운 페이스북에 글을 쓰는 것은 대중에게 내 생각을 알리는 매체로서 지금 활용하고 있어요. 내가 신문사에다가 글 보내고 하면 이게 몇 단계를 거쳐야지 되잖아요. 그런데 페이스북은 내가 기자요, 신문사 데스크 편집국장이지요. 내가 혼자 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수 있잖아요. 이걸 인터넷 신문이라고 한다면 인터넷 신문 게시를 내 스스로 결정할 수가 있으니까요. 대중과의 소통 중에서 이렇게 신속한 것은 없잖아요. 인터넷 언론도 절차가 꽤 있어요. 시민기자로서 기사를 올리면 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거든. 내가 원할 때마다 바로바로 기사화하기가 힘들어요.

 

박종훈 그래서 대중과의 소통의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 페이스북에 글을 연재하는 방식인가요?

 

박찬운 그렇죠. 페이스북은 나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어요. 나 스스로 편집하고, 나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게시할 수 있는 이런 특성이 있어서, 대중과의 소통의 장으로서는 굉장히 참 재미있어요. 처음에 페이스북 친구가 100여명 정도에서 시작을 했는데, 지금은 1,300명이 넘었어요. 지난 한 해 동안 순수하게 나한테 친구요청이 온 것이 1,200명 정도가 됐어요. 사실 친구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관리가 힘들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 수락해 주는 것도 귀찮을 때도 있어요.(웃음) 어떤 사람들은 나한테 쪽지까지 보내서 친구 수락해달라고 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나는 웬만하면 다 수락을 해 주죠. 하여튼 SNS를 통해서 내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대중과의 소통을 하고 있어요. 지금으로서는 아직 실험 단계인데 페이스북을 통해서 어떤 정도의 대화가 가능할 지에 대해서 조금 더 두고 보려고 해요.

 

박종훈 그러면 인터뷰를 슬슬 마무리하기 전에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최근에 민변에 힘든 일들이 많은데, 민변을 향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과 그와 더불어서 지금의 시국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찬운 민변은 사실은 지금 1,000명에 육박하는 조직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민변을 과거처럼 일사분란하게 운영하기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회원 수 4-500명 때부터 이런 문제를 계속 논의를 해왔죠. 민변의 회원 1,000명이란 수는 내가 변호사가 처음 되었을 때 우리 서울지방변호사회보다도 더 큰 조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큰 조직이 됐는데, 어떻게 그 회원들의 생각이 동일하겠어요. 그래서 민변의 운영방안에 대해서도 필시 여러 생각의 조류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 생각의 조류를 잘 묶어내는 것이 필요하지요. 예를 들어 노동위원회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활동에 독자성도 있고, 또 조직력도 갖추고 있지요. 그런 식으로 관심분야가 유사한 사람들끼리 민변 내부에서 서로 이합집산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또 시간이 점점 지나면 민변이 큰 umbrella 조직처럼 될 가능성도 있죠. 그런 것들을 대비해야 될 것 같아요. 앞으로 1,000명, 2,000명이 되는 것을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데, 그러한 조직으로 확대되는 상황 속에서도 민변이 나름대로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야기했다시피 민변은 우리 한국 민주주의에서 굉장히 중요한 법률가 단체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돼요. 그런 부분에서는 굉장히 자긍심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최근에 제가 페이스북에도 간단히 썼지만 민변을 이야기 하지 않고는 한국의 민주화를 이야기 할 수 없어요. 지난 20년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민변의 변호사들이 활동하지 않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지금까지 올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지금의 민주주의는 상당 부분이 사법적 방법에 의해 쟁취되는 것 아닙니까. 소송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들을 대부분 누가 해왔습니까? 민변 변호사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민변도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죠. 민변 회원들은 자긍심 갖고 우리 한국 민주주의의 첨병 역할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의 희망입니다. 다만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민변의 조직 운영을 어떻게 시대에 맞게끔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부단히 내부적으로 토론하고, 거기에 걸 맞는 조직운영을 했으면 좋겠는 것이지요. 최근에 민변을 향한 노골적인 공격들이, 특히 박근혜 정부 하에서 아주 노골화되고 있는데, 잘 대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국면을 아주 잘 슬기롭게 버텨내야 합니다. 지금 보세요. 두 번에 걸친 보수 정권 하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동력이 떨어지고 있지요. 여기에서 변호사들의 역할이 커요. 단지 민변의 이름으로만 어떤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회단체·시민단체에 민변 회원들이 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거기에서 그들 단체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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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보니 칠판에 “알고 싶고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라고 적혀있네요. 교수님을 잘 보여주는 말 같은데, 실제로 교수님을 소개한 기사 중에는 교수님을 가리켜서 ‘르네상스맨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더라구요. 이런 끊임없는 지적호기심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박찬운 어디에서 읽었는데, 르네상스가 뭐냐고 누군가 물어봤을 때, “알고 싶고,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르네상스라고 하는 건 바로 알고 싶고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저 역시 알고 싶고,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으니 르네상스맨입니다. 내가 뭘 많이 알고,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건 뭐 변호사다, 법률가다 이런 걸 떠나서 한 사회의 지식인으로 산다고 할 때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요. 끊임없이 자기를 재구성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연구실에 찾아오는 학생들한테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박종훈 ‘알고 싶고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라’, 멋진 말씀 같은데요. 그 외에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박찬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면 나는 우리 젊은 세대들한테 할 수만 있다면 꼭 2가지를 많이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여행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행이 꼭 돈이 많은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물론 극빈한 상황에서의 여행은 힘들겠죠. 그렇지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여행은 많이 할 수 있는 사람과 여행을 아예 못하는 사람으로 나눠질 수 있어요. 여행을 하게 되면, 우리 머릿속에 항상 비교의 대상이 생깁니다. 비교의 대상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삶을 굉장히 겸허하게 만들어요. 길거리에서 뭘 하나를 보더라도 머릿속에 다른 사회의 모습들이 들어오잖습니까. 그러면 저것이 옳고 그르고, 또 혹은 저것이 좋고 나쁘고, 혹은 우리가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야될까 저런 방향으로 갈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집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판단을 할 때 굉장히 도움이 되지요. 또한 그것은 인생을 굉장히 풍요롭게 만들죠. 할 수 있다면 가급적 여행을 많이 가십시오. 어디를 가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종훈 여행을 많이 하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요?

 

박찬운 두 번째, 끊임없이 탐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탐구함에 있어 여행과 함께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독서입니다. 독서를 통해서 많은 간접경험을 해 나가야 되는 것이죠. 평상시에는 독서를 많이 하고 또 때때로 여행을 통해 그 독서한 것을 직접 확인하는 삶을 계속 살다 보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의 품격이 계속 올라갈 거예요. 품격이라고 하는 것은 옷을 잘 입는다고 해서 품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보면 압니다. 얼굴을 보면 압니다. 그 사람의 품격이라고 하는 것은 성형수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독서를 많이 하고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얼굴만 봐도 알아요. 그래서 그 두 가지를 가급적 많이 하면서 자기를 내적으로 강화시키고, 내적으로 강화된 자기 인격을 스스로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세상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멋진 삶이 아닌가 합니다.

 

박종훈 저도 교수님 말씀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웃음) 그런데 책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한 사람의 사진과 글귀가 있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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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운 아, 제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에 대한 얘기를 빼먹었네요. 나는 학기 초가 되면 다음과 같은 버트런드 러셀의 말로 수업을 시작해요.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이 말은 러셀이 나이 90이 넘어 쓴 러셀 자서전의 서문에 나오는 첫 문장이에요. 이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래 러셀처럼 살아보라’, ‘당신과 이 나라에 희망이 보인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어요. 금세기 미국의 지성이자 양심으로 불리는 노암 촘스키 또한 러셀의 3가지 열정은 바로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연구실에도 러셀의 이 말을 붙여 놓았다고 해요. 나는 버트런드 러셀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내가 그를 제대로 안 때로부터 ‘나는 러셀처럼 살다가, 러셀처럼 죽고 싶다’는 꿈을 간직해 왔고, 그렇게 살고 싶네요.

 

박종훈 교수님 오늘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박찬운 나는 뭐 그냥 대학교수니까 특별하게 큰 욕심 없는데, 앞으로 할 수만 있으면 60세 정도에 조기퇴직을 하고, 그 다음에는 여행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한 10년만 말입니다. 여행지를 안내하는 투어 가이드를 하면서 글을 쓰는 게 목표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여러 책을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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