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공감, 실천 그리고 변화’ 김하나 변호사 인터뷰

2015-02-10

이번 인터뷰에서는 ‘염세적’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세상을 싫어하고 모든 일을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 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염세’와는 정반대로 나와 내 이웃(해외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이웃이 되겠네요^^)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상큼, 발랄 그녀 김하나 변호사를 만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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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일단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릴게요.

 

김하나 저는 전남대 법대를 나왔고, 그 다음에 전남대 로스쿨을 들어갔어요. 그리고 2012년도에 졸업해서 바로 법무법인 국민에서 일하다가 작년에 그만두고 해우 법률사무소에 개업을 했죠.

 

김지미 김하나 변호사가 03학번이죠? 애초에 법조인의 꿈을 꾸고 법대에 간 거에요?

 

김하나 네. 그런데 그 때는 꿈이 있었다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엄마가 가라고 해서 갔어요.

 

김지미 어머니는 공부를 잘하는 맏딸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게 있으셨나 봐요.

 

김하나 그런 게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엄마 말씀도 잘 듣는 편이었고 굳이 거역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갔어요.

 

김지미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다 이런 거 하나쯤은 다 있잖아요.

 

김하나 저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질풍노도의 시기였어요. 제가 반항을 밖으로 하진 못했는데 약간 염세주의적인 게 있어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안 좋게 봤어요. 꿈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고 생각해서 좋은 칼럼 보면 작가도 되고 싶었다가, 신문기사 보면 기자도 되고 싶었다가, 외교관이 되고 싶기도 했다가 약간 자기 맘대로 뒤죽박죽이었어요.

 

김지미 막상 법대를 갔을 때 이게 내 적성에 맞다, 내가 진짜 이 길로 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던가요?

 

김하나 전혀 아니었죠. 공부를 할 때는 법학이 주는 어떤 파괴력이나 영향력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어린 나이에 판례 하나에서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읽기란 쉽지 않잖아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저는 사실은 외무고시 준비를 잠깐 했었어요.

 

김지미 외무고시에는 어떤 매력을 느꼈어요?

 

김하나 한국을 뜰 수 있다는 것에 제일 먼저 매력을 느꼈어요. 진심이에요.

 

김지미 한국사회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싫었어요?

 

김하나 제가 약간 염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어떤 특히 바꿀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꼈을 때. 그 중에서도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한계를 느꼈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이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 살아보고 싶고 느껴보고 싶고 경험하고 싶고. 특히 진짜 학문이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외국에서 일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게 제일 커요.

 

김지미 그러다가 로스쿨 1기로 들어가잖아요. 로스쿨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라 사시를 준비 안하고 로스쿨을 간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김하나 그때도 기회비용에 대한 생각이 컸어요. 집이 부유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시공부를 하는데 대한 불안감이 항상 있죠. 쉽게 말해서 내가 그래도 변호사시험을 합격하면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준비하는 거랑 언제 합격 할지 모르는 상황은 많이 다르잖아요. 저는 로스쿨이 도입된다는 것만 알았지 언제 처음 시작되는지도 몰랐는데 아버지가 이런 게 있다더라고 말씀해주셨고 기회비용이나 매몰비용을 생각했을 때 뭔가 준비한다면 로스쿨 준비하는 게 낫겠다라고 해서 준비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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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법대를 다닐 때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었다든지 아니면 꼭 운동권은 아니더라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요즘엔 꽤 있던데 김변호사는 어느쪽이었어요?

 

김하나 저는 운동권학생이었어요. 전대 법대에 진보법학을 일궈가는 사람들이라는 그런 활동을 했었어요. ‘진보법학’이라는 학술지를 내고 저희끼리 학습도 하고 공부도 하고. 1학년 때부터 약간 삐딱했던 것도 있고, 나는 대학 가면 운동은 꼭 해야지 그런 게 있었어요.

 

김지미 그런 것 치고는 김하나 변호사는 졸업하고 그 다음해에 바로 로스쿨 입학을 했어요. 사실은 공백기가 없는 거 같은데 약간 자기 할 일은 챙겨가면서 하고 싶은 것도 하고 그런 스타일인가 봐요?

 

김하나 그런가 봐요.(웃음) 아무래도 맏딸의 책임감이 어디에 가진 않는 것 같은 게 어쨌든 집에서 계속 주는 학비로 공부를 해왔고 저는 알바를 안했거든요. 그러니까 집에 죄송한 것도 있고 그래서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떨어지지 않은 정도의 성적은 받아놨고. 외무고시는 항상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영어 공부는 대학교 저학년 때부터 쭉 해왔었거든요. 그래서 토익은 어렵지 않게 했고, 리트도 초창기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철학과 교수님 수업을 굉장히 감명 깊게 들었는데 그러면서 글쓰기에 대해 좀 빠졌던 때가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수업들이 다 연결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들어가게 된 것 같아요.

 

김지미 전남대 로스쿨 다닐 때 인권법연구회 부회장을 했네요. 사회나 인권에 대한 관심을 로스쿨 가서도 계속 유지를 한 거 같은데 김하나 변호사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인권분야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김하나 저는 국제인권이에요. 쉽게 말하면 전쟁평화운동이기도 하고.. 그런데 저는 국경을 넘어가면서까지 할 용기는 안 나고 기아구조나 흔히 국제 NGO 단체들이 한다고 했을 때 상상이 되는 그런 일들에 관심 있었고, 실무를 하고 싶은 욕심은 있었죠. 제가 일을 그만두고 필리핀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김기남 변호사가 있던 ‘평화의 친구들’이라는 단체에서 잠깐 있었어요. 바탄이라고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인데 국제구호단체가 한 번 왔다 간 다음에는 이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생계지원과 관련된 일을 하거든요. 김기남 변호사가 주로 그런 일을 했었죠.

 

김지미 다시 앞으로 조금 돌아오면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변호사가 되고 민변 가입도 했잖아요. 민변은 언제 어떤 경위로 알게 됐어요?

 

김하나 민변을 알게 된 계기는 글쎄요..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진짜 내 손에 월급이 들어오는 실무실습이 끝난 이후에 민변이랑 녹색당에 바로 가입했어요. 처음에 법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라는 거에 대한 물음이 있었어요. 뭘 해야 되는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 수 있는 곳이 민변 밖에 없다고 그 때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로스쿨 동기인 김종보 변호사가 민변에 있는 것도 컸죠.

 

김지미 아까 외무고시 얘기도 했고 국제인권 얘기도 했고 해외에서 일을 하고 싶은 바램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지금 김 변호사가 국제연대위 활동을 하는 건 일맥상통한다고 보이는데 노동위 활동도 못지않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하나 제가 학교 다닐 때 학술지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노동자들의 삶을 책으로는 많이 봤어요. 그리고 가장 가깝게는 저희 아버지가 노동자이셨기 때문에 그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이 저는 멀지 않았어요. 그리고 학교 다닐 때나 시험을 볼 때도 저는 노동법을 선택을 했는데 그게 내가 노동변호사가 돼야지 이게 아니라 저는 그 지식이 필요했어요. 그 지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구요.

 

김지미 아까 염세적이다라고 했는데 염세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이 꼭 상충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민변 활동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는 것 같아요.

 

김하나 저 염세적이에요.(웃음) 그런데 제가 법인에서 일할 때는 활동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눈에 보이는 게 주말에 투쟁나간다거나 이런 거였기 때문에 그게 쉬웠어요. 그리고 그렇게라도 하면 그 다음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나는 것 같고 그랬어요.

 

김지미 김하나 변호사를 검색해 보면 기사가 두 개 정도 나와요. 저년차 변호사들은 정보가 없어서 좀 힘들어요 우리가(웃음). 그 중 하나가 외환은행 관련해서 시민단체인 금융정의연대 회원으로 인터뷰 한 게 있던데요.

 

김하나 금융정의연대는 제가 회원으로 있는데 민변 이광철변호사님도 공동대표이신 걸로 알고 있어요. 카드사 개인정보유출, 대부업 광고 퇴출운동, 론스타 사건 관련 고소고발 등 금융공공성에 가치를 두고 금융분야에 관련된 문제가 터졌을 때 집약적으로 대응하는 시민단체예요. 해우에 들어오면서 연이 되어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 하나 둘씩 지식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자문도 하게 되었어요

 

김지미 또 특이한 게 작년 여름쯤인가?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금산사 템플스테이를 간 게 불교신문에 났더라구요 사진까지 아주 커다랗게~(웃음) 이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이거 굉장히 새로웠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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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제가 불교신자에요.(웃음) 그게 사람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남의 인생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는 시점이 있잖아요. 템플스테이를 어떻게 보면 가벼운 마음으로 갔어요. 그 때 해고 노동자 분들이랑 같이 가서 1박을 하는 거였는데 밤에 어떤 스님이 사회를 보시고 약간 문화제 식으로 행사를 했었어요.

 

김지미 그 불교계의 김제동이라고 하는 일감 스님?

 

김하나 네~(웃음) 그분이 사회를 보시고 해고 노동자분들이랑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에는 어색해서 이러고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절이라는 공간이 특수해서 그랬는지 어느 순간 그 해고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들의 삶이 훅 와 닿은 거에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하셨던 순간도 있었고, 어떤 분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는데 아이랑 같이 이야기를 듣고 즐기는 모습이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더라고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염세적이라도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해고노동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템플스테이를 같이 하는 이 자리에 아이들이 함께 와서 이 공감대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성한 아이들도 나중에 정말 특출나게 개천에서 용 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다시 비정규직이나 이런 걸 세습할 수도 있다는 그 단면이, 그 방 한 공간에서 되게 입체적으로 저한테 다가온 거에요. 그래서 그 날을 계기로 또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김지미 지금 국제연대위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김하나 변호사님. 맞죠?

 

김하나 노력은 하고 있어요.(웃음)

 

김지미 3월에 유엔인권이사회에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외무고시 준비하면서도 영어공부를 쭉 해왔다는 얘기도 들었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영어수준이 상당하다고 하고 페북을 잠깐 봤더니 한국친구들보다 외국친구들이 더 많고..(웃음)

 

김하나 아~그거는 진짜 아니에요.

 

김지미 영어에 대해서 울렁증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영어 공부팁을 좀 가르쳐 주시죠.

 

김하나 저는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에요. 팁을 말할 정도의 그건 아니구요 그냥 노력을 하려고는 해요. 그리고 어렸을 때 외국인 친구가 있었어요. 학원에서 만난 친구였나. 암튼 어렸을 때 걔랑 이야기 하려면 영어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러웠어요. 예를 들면 학원을 가야되는데 2개를 갈 수 없어 하나를 가야된다고 하면 전 영어학원을 갔어요. 그러니까 영어를 함으로써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많아진다는 걸 그냥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것 같아요.

 

김지미 그래도 유엔인권이사회에 김기남 변호사하고 같이 가잖아요. 이게 국제회의에 갈 정도면 사실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회의를 가겠다고 자원한 거 아닌가요?

 

김하나 그런데 생활영어고 솔직히 국제회의는 저도 부담이 많이 되요. 그래서 기대보다 걱정이 많아요. 할 일이 엄청 많더라구요. 너무 낯설고 겁나요. 사실은.

 

김지미 유엔인권이사회에 민변 국제연대위원회가 가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김하나 저희가 주로 어필을 하고 싶은 부분은 민변소속 변호사에 대한 징계개시신청, 정당해산사건, 국가보안법 폐지 이 3가지 이구요. 이 이슈들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해서 oral statement를 하는 것과 약 10명의 특별보고관을 개별적으로 만나는 것, 이 2가지예요. 그 전에 written statement를 작성해서 제출하기도 할 거구요.

 

김지미 첫 직장이 법무법인 국민이었다가 작년에 나왔죠. 사실은 저년차 변호사로서 소속되어 있다는라는 안정감이 있을 텐데 과감히 뿌리치고 나온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까요?

 

김하나 제가 성격이 안 좋아요.(웃음) 그런데 저는 어떤 사람이 너무 힘든데 남들도 다 힘들다는 논리로 내 힘든 걸 정당화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감정이 너무 지나치게 소모되는 사건들을 많이 하다보니까 제가 주로 했던 부분은 이혼이나 가족간의 재산 분쟁, 그 다음에 잘 안 받아지는 공사대금 뭐 이런 거. 그 다음에 이 전 변호사님 퇴사하시면서 안 풀리는 사건들이 한 번에 저한테 오고 하는 이 일련의 과정들이 있으면서 단기간에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체감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또 회사가 가족적인 분위기였는데 분사무소로 혼자 가 있으면서 그런 것들을 더 직접적으로 집약적으로 체험을 했죠. 그렇지만 제가 3년차까지 거기서 일을 했으니까 이게 안정감을 주는 것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주말에 딱 누워 있는데 진짜 천장이 무너져서 내일 회사를 안갔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에 이렇게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딱 그만 두겠다고 이야기를 했죠.

 

김지미 그런데 변호사를 그만두는 게 아닌 이상은 특히나 개업을 하게 되면 당장은 하기 싫은 사건도 억지로 해야 되는 경우가 오히려 개업변호사 초기 때는 더 할 수 있고 그런 업무 스트레스는 계속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김하나 그때는 이 일만 그만 두면 됐기 때문에 이 일을 그만두면 그 고통이 없어질 거라는 착각을 했죠. 그냥 딱 눈감고 도피하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개업을 할 생각은 그 당시에는 없었어요. 취업을 하거나 장사를 할 생각이었어요. 아직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을 해보고 싶었는데. 사람도 많이 만나고 단기간에 많이 배울 수도 있는 일이 장사인 것 같아서. 아이템도 나름 있었어요. 그러다 제가 쉬는 기간에 평화의 친구들이란 단체에서 일도 해보고 그 다음에 한 달 동안 동남아 배낭여행을 해봤었거든요. 여행을 하면서 그 동안 모르고 살았던 게 하나 있구나 라고 느낀 게 있었어요. 나는 왜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무게감이나 사명감을 느끼지 않고 다른 일들로만 회피하려고 했는가.. 그 당시에는 솔직히 법조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된다는 의무감 같은 게 많지 않았어요.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할 사명이다라는 류의 느낌을 받아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일들이 주어지고 제가 도와주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나면서 사명감 명예감 의무감이라는 단어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고 또 다른 사회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되니까 문제점이 많고 그 안에서 내가 무언가를 해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김지미 국민을 그만두고 해우에 개업을 하기까지 몇 개월 있었던 거잖아요. 그 사이에 필린핀도 가고 동남아 배낭여행을 한 달 정도 갔다 왔다는 거죠?

 

김하나 필리핀에서 6주 있으면서 평화의 친구들이라는 NGO단체에서 일을 좀 했었고 그 이후에 동남아 배낭여행을 한 달 반 정도 혼자서 다녀왔어요.

 

김지미 어디 어디 갔었어요?

 

김하나 국제연대위 아시아인권팀 일정 때문에 미얀마 갔었고요, 그 다음에 태국을 그냥 쭉 다 돌았어요. 보라카이 이런 데 놀러도 갔었고. 태국이 재미있었어요. 치앙마이부터 저 밑에 있는 꼬싸멧까지 싹 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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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태국이 작년에 굉장히 시끄러웠었는데 분쟁지역같은 데를 혼자서 배낭여행 하는 거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어요?

 

김하나 없었어요. 제가 조금 둔한 것도 있고. 여행지에서도 좀 무서운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한국에서도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고 그냥 남들이 하지 마라는 것 안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김지미 배낭여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나 장면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김하나 미얀마의 바간이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바간이라는 도시자체가 어떤 왕조 시기의 탑들이 엄청 많아요. 그냥 도시자체가 탑무덤처럼. 탑 하나를 세우면 기부금 내는 것처럼 좋은 데를 갈 수 있다는 그게 있대요. 그곳에서 높은 곳에서 일출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김지미 여행하면서 의무감이나 사명감이라는 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라고 했는데. 사실은 여행을 한다고 해서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것 같지는 않고 어떤 경험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김하나 저는 동남아 다니면서 너무 화가 났어요. 마치 동남아는 유럽인들이 놀고 가는 놀이터 같은 느낌인거에요. 그리고 그게 사실이고요. 굉장히 싸잖아요. 한국인한테도 싼데 유럽인들은 얼마나 싸겠어요. 그런데 특히 태국이 너무나 많은 외국인들이 오고 모든 사업자체가 관광산업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거의 주체가 아니라 항상 객체인 거죠. 그 모습들을 보면서 이 사회는 굉장히 모순된 사회다라고 외국인이지만 되게 화가 많이 나는 거에요. 그리고 뭐 장난삼아 외국인들이 이러쿵 저러쿵 필리핀이나 태국사회에 대해서 비하하는 듯한 관념들을 엿볼 수가 있었고요. 그런데 뭐 외국이니까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어느 순간에 이거를 자꾸 경험을 하다 보니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우리 사회에서 너는 뭘 했는데. 너가 뭘 했는데 너네 사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거에 대해서 혼자 다니면 시간이 많으니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그런 단면을 보면서 우리사회도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거기서 나에게 시한이 주어진다면 이거는 진짜 아니기 때문에 바꾸고 싶다 생각이 들었어요.

 

김지미 장기간이라면 장기간일 수 있는 여행을 마치고 와서 신변의 변화가 확 있었잖아요. 소속변호사에서 개업하는 사업자의 지위에 오게 됐는데. 처음에 아까 그랬잖아요. 처음부터 개업을 할 생각은 없었다. 개업으로 확 튼 이유는 있어요?

 

김하나 개업을 할 생각을 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확 넓어지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와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가 조율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아지더라고요. 그러다 우연찮게 해우에 방이 빌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서 거기 들어가게 됐어요.

 

김지미 지금 해우에 권영국변호사님, 류하경변호사님, 김하나변호사님 이렇게 3명이 있잖아요. 그 3명의 구성원 중에 2명이 재판을 받고 있고 징계 신청이 되어 있고. 그래서 어쩌면 이 사무실을 내가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 되는 거 아닌가하는 위기의식이 있지 않은가요? 내가 잘 못 들어왔구나.(웃음)

 

김하나 지금은 없어요.

 

김지미 처음엔 있었단 말이네요.(웃음)

 

김하나 처음에도 없었어요.(웃음) 혹시 진짜 현실화 되면 모르겠지만. 둔해서 계산이 안빨라요. 권변호사님 같은 경우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분이라는 거에 대해서 옛날부터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분이었고. 하경오빠는 같이 또 저의 후배님이셔요. 그래서 초반에 하경 오빠 변시 끝나고 술 먹으면서 또 친해졌죠. 술 이거 좋아하니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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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그런데 너무 편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으니까 선택을 하는데 오랜 시간은 안 걸렸어요. 특히 권변호사님 같은 경우는 정말 옆에서 많이 배워요. 강단이 있으신 부분 같은 거요. 저는 좋으면 좋고 싫어도 좋고 약간 그런 게 있는데 어른으로서 배울 점이 참 많아요.

 

김지미 김하나 변호사가 올해 31살이 됐어요. 본격적인 30대인데. 요즘 그 나이에 취준생들도 굉장히 많고 진로를 못 정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데 20대 때 변호사가 돼서 이제 30대 초반인데도 벌써 4년차 변호사가 됐단 말이죠. 요즘에는 흔히 30대가 최고의 전성기다라고 얘기하는데 앞으로 나의 10년에 대한 계획이랄까 나는 30대를 이렇게 보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있어요?

 

김하나 저는 계획성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10년에 대한 계획은 없어요. 그런데 우선은 저는 해우에 오래 있고 싶어요. 처음에 개업을 시작했을 때 제가 인지도가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쉽게 말하면 여자이고, 어리고. 누가 저를 믿고 사건을 들이 밀겠어요. 그런데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서 저도 제 인생을 투자한 셈 치고 개업을 시작한 거거든요. 그런데 해우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그게 10년이라면 10년 적어도 향후 5년까지는 해우에서 버티고 싶어요. 버틴다는 게 경제적으로든 아니면 업무적으로든. 사람이 한 단계 뛰려면 그만큼 주위에서 압박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해우가 딱 좋아요. 업무가 주는 강도가 그렇고 그리고 이거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심리적인 부분도 그렇고. 저는 해우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 그냥 해우의 평범한 변호사로 향후 10년 이어가는 게 제 목표에요.

 

김지미 이제 막바지인데 국제연대위를 광고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드릴게요. 사람들에게 국제연대위에 오세요, 이런 이런 점이 좋습니다.

 

김하나 아~준비해올걸. 우리 위원장님은 나 진짜 이뻐해야 돼.(웃음) 국제연대위원회는 다른 위원회하고 달라요. 어떤 점에서 다르냐면 지적으로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위원회에요. 지금 국제연대위원회의 활동이 티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내적인 사안에 대해서 국제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역할은 국제연대위가 하고 있고, 하려고 노력을 해요. 이번에 정당해산이나 민변 징계 같은 경우, 민변 징계 같은 경우를 예로 들면 진정 형식으로 국제절차에 서류가 들어 간 걸로 제가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게 진입장벽은 높지만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우고 싶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게 욕심이 들게 해요. 저희 국제연대위는 또 한국변호사와 미국변호사가 함께 할 수 있는 소송이나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계속 생각을 해내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 안에 아시아인권팀이 있는데 국제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나 이런 부분을 국제연대위가 하고 있다면 아시아인권팀은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인권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국제연대위 안에 있는 팀이에요. 그런데 작년에는 미얀마 헌법 관련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미얀마 내부에서 헌법 개정을 하지 않으면 군부독재를 연속할 수 있는 체계, 헌법체계 자체가 이미 박혀져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많이 호소를 했어요. 저희가 영문을 번역해 가면서 처음에 미얀마 헌법 공부를 했고 그 다음에 국내에서 국제심포지엄도 같이 하고. 그리고 제가 미얀마에 가서 직접 책으로만 봤던 현실이 무엇인지를 봤는데 그 일련의 과정들이 참 재미있답니다. 저희가 진짜 놀랬던 게 미얀마에 가서 한 분쟁지역을 갔는데 이슬람과 불교도가 충돌했던 지역인데 그 피해자들이랑 직접 면담을 하는데 여자분 3분이 앉아계시는데 이 분은 아들이 자기 눈앞에서 맞아죽었어요. 뭐 어떤 분은 남편이 찔려죽었어요. 어떤 분은 손자 아들 자기 남편 3대가 죽었다는 거에요. 그 날 밤에 동시에 . 이런 일들을 듣는데 너무 비현실적인거에요. 아직도 세상이 이런 데가 있구나. 그런데 이런 데가 너무 많은데 우리는 다른 나라 일이라서 약간 영화 보듯이 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죠.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딱 내 일처럼 와닿지 않았는데 미얀마를 가기 전에 헌법공부를 하고 미얀마 변호사 2분 초대해서 심포지엄도 하고 그리고 이 사업을 그대로 미얀마에 가서 각 단체들을 만나서 그 나라의 민주화운동 마치 우리나라 80년대를 보는 것 같은 그런 거를 보니까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같이 하실 수 있답니다.

 

김지미 이 어색한 맺음은 뭐죠?(웃음) 나는 영어를 잘 못해서 국제연대위에 가기가 주저돼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김하나 저희 영어 많이 안 써요. 진짜로. 그런데 이 부분은 있죠. 개인 진정이나 이런 거는 저도 못해요. 왜냐하면 아카데믹하게 로스쿨 다니시면서 이렇게 하신 분하고 what’s up? 이런 거 배운 사람들하고 차원이 다르니까. 저도 지금도 같이 공부한다고 하면 하나하나 다 찾아가면서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저희 내부에도 영어를 정말 여행 영어만 하시는 분들이 더 많아요. 미국 변호사님들 빼고는 대부분 그래요.

 

김지미 이제 인터뷰를 마칠까 하는데 회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 주세요.

 

김하나 요즘에 민변이 많이 힘들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같이 한다는 생각으로 잠깐 잘 버텼으면 좋겠어요. 저는 멋있는 말 이런 것 보다 지금 약간 주춤 할 수밖에 없는 시기인 것 같고. 특히 후배변호사로서 정도나 범위는 제가 다 알지 못하지만 민변에 대한 공격이라고 일컬어 질만한 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게 진실이건 아니건 허위이건 이걸 떠나서 저희도 ‘민변’이라는 걸 보고 지금까지 왔으니까 민변이라는 조직 안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열심히 생활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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