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오형제’ 김지형 전 대법관과 함께 한 노동 판례 읽기

2015-02-10

‘독수리 오형제’ 김지형 전 대법관과 함께 한 노동 판례 읽기

 – 심재섭 회원

2015. 2 4. 수요일 저녁 6시에 노동위원회의 수요모임이 있었습니다. 모임이 시작할 무렵 ‘평소보다 참석자가 조금 적은가?’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6시 50분, 모임이 끝날 때에는 이미 비어 있는 자리가 없었고, 7시에 예정된 김지형 전 대법관님의 초청 강연은 예상대로 대회의실이 꽉 찬 상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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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대 위원장님의 소개가 끝나고 김지형 전 대법관님의 말씀이 시작되자, 저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 시절의 습관에 이끌려 강의실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강의실의 모든 인원이 앞에 있는 강사의 시선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다른 강연을 많이 참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 강연은 학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앞쪽 좌석에는 김선수 변호사님을 비롯하여 선배 변호사님들이, 뒤쪽에는 젊은 후배 변호사님들이 자리하고 계셨고, 모두 대법관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나이와 무관하게 초롱초롱한 변호사님들의 눈망울에 ‘멋있다’는 느낌, 그리고 감히 ‘귀엽다’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다시 대법관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해 10월, 심포지움에서 기조연설을 하시던 대법관님을 멀리서 뵈었을 때는 단지 목소리 톤이 낮아서 좀 졸리다 하는 정도의 인상이었는데, 이번 강연에서 다시 뵈니 이미지가 많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인자한 웃음이겠지요. 가수 송창식님을 닮은 그 소탈한 웃음에 매료되었는지, 예의 톤이 낮은 목소리도 다정다감하고 부드럽게만 느껴졌습니다.

 적당히 분위기를 파악하고 대법관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니, ‘독수리 오형제’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대법원에 있을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법원 판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해 주시는 중에 나온 단어였지요. 다행히 제가 아주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강연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법관님이 대법원에 있을 당시, 그러니까 ‘이용훈 코트’에는 소위 ‘독수리 오형제’로 불리는 진보적인 성향의 대법관 다섯이 있었다, 성향도 비슷하고 이야기도 잘 통해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는데, 모두 퇴임한 지금은 날지 못하는 새, ‘타조 오형제’라고 스스로를 칭하곤 한다는 이야기, 대법원에는 재판연구관이 있는데, 전속연구관은 사노비, 공동연구관은 공노비라고 농담을 할 만큼 업무량이 많다는 이야기 등은 자칫 딱딱할 수 있는 강연 내용을 한결 부드럽고 재미있게 만들었습니다.

강연에서 말씀하신 많은 내용들 중 지금 제 기억에는 ‘대법원의 노동법 판례는 논증 자체가 없거나, 있더라도 정합성이 결여된 경우가 있으니 대법원 판례를 금과옥조로 여길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실 강의 제목만 보고서 기존의 판례들에 녹아 있는 논증 과정을 설명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었던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법대에 입학하고 대법원 판례의 문장들을 처음 보았을 때 정말 많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문장이 길어 읽기에 힘이 들기도 하거니와 이런 내용으로 과연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그냥 훌륭하신 판사님들이 척 보고 이렇다 결정을 내린 이후에 그에 맞게 말을 짜 맞춘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치기어린 신입생의 불만들 말입니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제게 대법원 판례는 그냥 달달 외워야 하는 것이었고, 이는 연수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지금 준비서면을 쓰면서도 대법원 판례는 일단 가져다 인용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대법원 판례를 만들기도 하신 분이 위와 같이 말씀을 하시니 아주, 정말 조금의 배신감(?)과 함께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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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님께서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문제점을 가진 판례들을 지적하여 주셨는데, ‘논증의 부재’와 관련된 판례를 인용하겠습니다.

① (a)업무수행성이라 함은 사용자의 지배 또는 관리하에서 이루어지는 당해 근로자의 업무수행 및 그에 수반되는 통상적인 활동과정에서 재해의 원인이 발생한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b)출퇴근 중의 근로자는 일반적으로 사용자의 지배 또는 관리하에 있다고 볼 수 없고

 

② 비록 (c)출퇴근이 노무의 제공이라는 업무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d)일반적으로 출퇴근 방법과 경로의 선택이 근로자에게 유보되어 있어 (e)통상 사업주의 지배, 관리하에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①은 1993년도의 출퇴근 재해 관련 대법원 판례입니다. (a) 부분은 업무수행성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것이고, (b) 부분은 출퇴근이 업무수행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나타낸 것인데, (b)와 같이 판단을 한 근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인식했는지, 대법원은 1999년 이후에는 ②와 같은 판례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c) 부분에서와 같이 출퇴근이 업무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d)의 사실만 가지고서 업무관련성을 부정하고 (e)와 같은 결론을 바로 이끌어 낸 것이 과연 제대로 논증 과정을 거친 것이라 할 수는 없지요. 출퇴근 방법과 경로의 선택이 근로자에게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이 출퇴근이 업무와의 관련성이 없다는 결론의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증의 부재라는 외에도 대법원 판례, 특히 노동법 판례에는 사용자측의 소위 ‘무자력 항변’이 통한다는 비판을 하셨습니다. 사용자의 책임 영역인 경영 악화로 인한 위험을 노동자가 부담하게 되는 모양새가 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노동법의 지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씀이셨지요. 사용자는 경영상의 사정을 내세우기만 하면 정리해고까지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저 유명한 쌍용차 대법원 판결 역시도, 대법원이 전체 법질서에서 노동법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어디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불행한 결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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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님께서는 또 ‘지금 당신에게 출퇴근 재해에 까지 보험금을 지급하게 되면, 결국 산재보험 자체의 재정적 위기를 초래하여 오히려 장기적으로 근로자 전체의 복리를 해’한다는 취지의 판례에 대하여는 진정성이 없는 말장난이라는 비판을 하신 것도 기억이 나는군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내용들, 그리고 기억은 하지만 제 수준으로는 이해하지 못한 더 많은 내용들, 강연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서 이야기 되었던 발전적인(그러나 제가 이해하기엔 어려웠던) 논의들을 이 지면에 다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판례는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바뀌어야 할 판례는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왔다는 점에서 이번 강연은 저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대법관님이 ‘독수리 오형제’를 말씀하시면서, 대법관 다섯이라는 숫자에 대하여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다섯이라는 숫자로 법정 의견을 만들 수는 없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숫자였다고 말이지요. 지금의 대법원에 비하면 정말 ‘호시절’이었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독수리를 퇴직한 타조’ 대법관님이 여전히 전과 같은 마음을 품고 그 길을 계속 가고 있으며, 우리 민변의 많은 선배님들이 길을 계속 만들어 가고 계시니, 논리적 정합성으로 무장되어 노동인권을 정당하게 보장하는 많은 대법원 판례가 쌓여 있는 미래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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