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산, 노동, 여민, 김선수 변호사를 만나다.

2015-01-13

인터뷰 메인

 

지난 연말 노동위 송년회에서 어떤 변호사님이 김선수변호사님 닮은꼴로 앵그리버드를 꼽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변호사님의 관찰력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선수변호사님을 만나고 나니 앵그리버드와 닮은 것이 눈썹만은 아니더군요. 수줍은 듯 웃으시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고 하면 너무 무례한 걸까요? 조용하지만 쉼 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몸과 마음을 계속 움직여 자신과 주위의 온도를 높이고 계시는 김선수변호사님을 만나보시죠.

 

김지미 작년 1년 정도 정당해산심판 변론을 하셨잖아요. 최근에 그게 끝났는데 선고 이후 한 달이 조금 안된 것 같은데 그 사이 근황이나 최근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좀 알려주세요.

 

김선수 변호사는 항상 자기가 맡고 있는 사건 처리하는 게 일이지요. 정당해산 결정을 분석을 해주는 게 마지막으로 해줘야 될 일인 것 같아서 지난 연말연시에 그 결정에 대한 평석작업을 해서 초안 잡아 오늘 대리인단에게 회람했어요.

 

김지미 평석이 원고지 약 700매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연말연시에 쉬지도 못하셨겠네요.

 

김선수 쉬는 게 1주일에 1번 산에 가면 그게 쉬는 거니까(웃음).

 

김지미 방금 산 이야기 하셨는데 제가 이번 인터뷰 준비하면서 변호사님 검색을 좀 해 보니까 제가 보기에는 변호사님을 관통하는 세 가지 단어를 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중에 하나가 노동이고, 하나가 산이고 그 다음에 여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여민(동락)이라는 말을 처음 봤거든요. 저처럼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민이 무슨 뜻인지 설명을 좀 해주세요.

 

김선수 ‘여민동락(與民同樂)’할 때 ‘여민’은 맹자에 나오는 것이고 ‘더불 여(與)’자를 써서 백성과 함께 같이 즐긴다는 뜻입니다. 사무실에 ‘與民同樂’이라 쓴 액자가 걸려 있는데, ‘여민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할 때 누가 써준 거예요. 내가 쓰는 ‘여민(黎民)’은 ‘여명의 눈동자’의 ‘여명’에 사용되는 ‘여’자로 ‘검을 여(黎)’입니다. 논밭에서 일을 해서 햇볕에 검게 그을린 백성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노동하는 백성, 일반 백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고등학교 은사님께서 ‘호’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다음 블로그 닉네임이 파하로 되어 있는데 ‘깨트릴 파(破)’에 ‘짐 하(荷)’입니다. 그것도 은사님께서 ‘호’로 지어주신 것이고, 그것을 닉네임으로 쓰고 있어요.

 

김지미 네이버에 변호사님 성함 검색하면 업데이트가 안 된 것 같아요. 소속이 여민합동법률사무소로 나오더라고요. 예전 사무실 이름이죠?

 

김선수 여민합동은 2001년부터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장으로 근무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이름입니다. 그 때 여민은 ‘더불 여(與)’자를 썼습니다. 법무법인 시민에 근무하다가 김진 변호사와 함께 나와서 여민합동을 설립했습니다. 강기탁 변호사가 1년 후에 합류하고 셋이 같이 하다가 2005년부터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장으로 2년 근무하고 2007년에 마치고 나오면서 다시 법무법인 시민에 합류했습니다.

 

김지미 별호로 쓰시는 여민은 ‘더불 여(與)’자의 여민은 아닌데 같은 하나의 음이어서 혼합해서 쓰시는 거네요?

 

김선수 제가 법률사무소를 개설할 때 ‘더불 여(與)’자 ‘여민’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김도형 변호사가 아마 ‘검을 여(黎)’자 쓴 ‘여민’을 사무실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불 여(與)’ ‘여민’만이 아니고 ‘검을 여(黎)’ ‘여민’이라는 좋은 단어도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김지미 언뜻 말씀하셨는데 여민이 고등학교 은사님이 변호사님께 지어주신 호라고 되어있던데 저는 그걸 보고 선생님한테 호를 받는 고등학생이 약간 상상이 안 되었어요.

 

김선수 아, 그건 고등학교 때 받은 게 아니고, 2000년 이후에 받은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에요. 윤리과목을 담당하신 ‘김’, ‘창’자 ‘규’자 선생님입니다. 제 막내 동생이 87학번인데, 우리 어머니가 그 선생님께 배우게 하려고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서 결국 우신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선생님께 배웠어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우리 삼형제를 다 주례를 서주셨어요. 고등학교 제자들이 계속 선생님을 찾아뵈었고, 우리 동창이 선생님 맏딸하고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작년 7월에 돌아가셨어요.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 제자들은 물론이고 제자들의 아내와 아이들 이름까지 다 기억하시고 챙겨주셨어요. 그리고 호는 2001년쯤인가 명예퇴직하시고 양평 서종으로 집을 지어서 사모님과 두 분이 내려가셨는데, 그때 쯤 해서 제자들에게 호를 지어주셨습니다.

 

김지미 제가 오해를 했었네요. 저는 고등학생이 호를 받나 이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각별한 사제지간이었거나 아니면 그 선생님한테 변호사님이 아주 특별한 학생이었거나 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김선수 돌아가실 때까지도 계속 찾아뵀던 제자들이 10여명 되는데, 그 10여명 제자와 경우에 따라선 그 제자들의 처에게도 지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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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변호사님의 학창시절, 지금 말씀하셨던 선생님과의 인연도 좋고 고등학생인 김선수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김선수 공부밖에 몰랐습니다(웃음). 초등학교 6학년 때 촌에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적응을 못했습니다. ‘이 사회는 내가 적응하고 살아갈 사회가 못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출가를 해야 하나 생각도 했는데 그럴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다른 거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그래서 그냥 공부만 했지요. 김창규 선생님께서 ‘공부는 학교 도서관에서 해야 된다, 큰 도시락 싸가지고 와서 점심때 반절 먹고 저녁에 반절 먹고 해라’ 하셔서 그대로 따라서 학교도서관에서 대충 9시나 10시까지 하다가 그냥 집에 오고.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김지미 다른 선생님들은 계속 찾아뵙거나 하지 않고 유독 이 선생님만 계속 교류가 있었던 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정말 나의 선생님이 아니라 스승이나 은사다 라고 생각되어질 정도의 어떤 특별한 유대관계가 있었을까요?

 

김선수 선생님께서 제자들한테 그렇게 각별하게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은사님이 제물포고등학교 길영희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우리 선생님이 그분의 애제자였고 선생님도 길영희 선생님을 아주 극진히 모셨어요. 길영희 선생님께서 말년에 수덕사 근처인 충남 덕산에서 가루실학교라고 운영했어요. 우리 고3때인가 몇 사람 거기 데려가 주시기도 하고, 등산도 한두 번 같이 한 기억도 있고, 방학 때 댁에도 불러서 아침에 일어나 맨손체조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부터 분재와 사진 등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제가 좌우명으로 삼는 것은 ‘성자 천지도 성지자 인지도(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 성실함은 하늘의 도리이고, 성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다)인데, 선생님께서 윤리시간에 칠판에 크게 써놓고 강조하신 글입니다.

 

김지미 방금 서울생활 잘 적응 못하고 출가를 해야 하나 뭐 이런 생각까지도 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선생님 통해서 약간 사회에 적응을 하는 그런 변모도 하신건가요?

 

김선수 그건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대학에 들어가면 서클 활동을 꼭 하라고 하셨어요. 그 때 대학가면 선배들이 불러서 언더써클로 안내하였는데, 내가 고등학교 3회 졸업이라 선배 층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학생편람을 찾아보고 거기에 있는 오픈서클 중에서 ‘고전연구회’라는 곳을 서클룸으로 찾아갔어요. 제가 입학할 때는 동양철학, 서양철학, 사회과학 이렇게 세 파트가 있었어요. 나는 동양철학파트 활동을 주로 했는데, 선배하고 『맹자』 강독을 했어요. 나는 동양철학을 공부하려고 그 서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 농활 가고, 1학년 2학기 때 10․26이 났어요. 2학년 될 때 나하고 두 명 정도가 동양철학 파트를 유지하자고 했는데(웃음). 결국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 파트는 없어지고 사회과학파트 하나만 남았지요.

 

김지미 원래 고등학교 시절이나 어렸을 때부터 변호사나 법률가가 되는 게 꿈이셨어요?

 

김선수 그런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김지미 어렸을 때 희망은? 그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김선수 없었어요(웃음).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고나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김지미 그럼 구체적인 목표나 꿈이 없이 그냥 공부만 하신 거예요?

 

김선수 중고등학교 때 다른 재능이 없으니까(웃음). 같이 할 친구도 없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옆 짝하고 1년간 거의 한마디도 안했어요.

 

김지미 짝이 힘들었겠는데요(웃음).

 

김선수 나도 문제이지만 그 친구도 나만큼이나 고지식했던 것 같아요.(웃음). 법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때 성적은 되는 것 같고, 사회에 이렇게 적응 못하면 어떻게 되나 걱정이 앞섰지만 어차피 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해야 할 거면 가장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장으로서 법대에 가서 한 번 부딪혀 보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서클활동을 하면서 『페다고지』니,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 우리 때는 아직 마르크스 원전이 나오기 전이라 이런 책들을 보았어요- 등을 읽으면서 내가 살아왔던 과정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겪은 어려움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였구나, 그리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하겠구나, 그래야만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깨달았습니다. 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개인적인 성향도 있지만 구조적인 요인도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시골에서 빈농으로 생활하다가 자식들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두 분이 다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구조 속에서 내가 그동안 살아왔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구조를 바꾸고 변혁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전연구회 동기들과 함께 매일 같이 공부하고 농활 가고 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소극성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했어요.

 

김지미 특별히 내가 꼭 변호사나 법률가가 되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없으셨는데, 그러면 사법고시를 치고 내가 법률가가 되어야겠다 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김선수 그 생각을 한 건 3학년 1학기 때 강제징집 되어 81년 7월에 입대해서 83년 11월에 제대할 때입니다. 3학년 1학기 다니다가 1학기 못 마치고 입대했다가 제대했습니다. 제대하면서 뭘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동기들 중에는 내가 군대 있는 사이에 데모 주동하고 감옥에 갔다 온 친구들도 있고, 야학 하다가 노동현장에 들어간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제대하는 나에게 같이 야학이나 그쪽 활동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신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이나 선배들한테 물어보니 변호사가 되더라도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해서 노동변호사로 활동하기로 작정하고 83년 11월부터 공부를 시작했던 거죠.

 

김지미 처음부터 나는 노동전문변호사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준비를 하신 건데 사실 노동전문변호사라고 하면 흔히 말하는 출세와는 거리가 멀잖아요. 그런데 변호사님이 사법고시 수석합격 하셨잖아요. 수석합격하면 사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검찰로 가든 법원으로 가든 대형로펌으로 가든 부나 명예나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욕심은 전혀 없으셨어요?

 

김선수 부나 명예나 권력 그게 마음먹는다고 얻어질 것 같지도 않았고(웃음), 수석합격은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난 처음부터 노동변호사가 될 생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약간 해프닝 비슷하게 수석합격이 된 거고(웃음).

 

김지미 수석 합격을 해프닝이라고 하시다니..(웃음)

 

김선수 2차가 8과목인데 총점 1점 차이로 그렇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생각한 게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집에서는 판사나 이런 쪽을 거쳐서 하면 안 되겠느냐 이런 희망이 있었는데, 이미 대학교 때 부모님으로 하여금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시켰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웃음) 진로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한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연수원 마칠 때 ‘김앤장’과 ‘태평양’쪽 사람도 만나봤는데, 거기 들어갔다가는 분위기가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돈이라는 게 내가 한다고 벌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공자가 ‘부라는 게 내가 구해서 구해질 수 있는 거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내가 다 하겠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이런 말을 했어요. 괜히 부나 명예 이런 거 쫓다가는 사람만 우습게 되고 추해질 뿐입니다. 어차피 그럴 거면 내가 좋아하는 거 하다보면 저절로 따라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 자세로 임했습니다.

 

김지미 저절로 따라오던가요?(웃음)

 

김선수 지금까지 별 일 없이 살고 있으니 그 정도면 됐지요.

 

김지미 처음부터 노동전문변호사를 염두에 두고 공부하였다고 하셨고 실제로 지금 27년, 28년 정도 변호사 생활 하시는 동안 노동전문변호사라는 타이틀을 쭉 유지를 하고 계시는데 변호사님에게 있어서 노동이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노동은 나에게 있어서 이거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김선수 내가 이런 질문에 순발력이 떨어지는데(웃음). 우리 사회가 누리는 모든 부와 재화가 다 노동의 산물이고,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게 노동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인간다운 대우를 받아야 그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입니다.

 

김지미 아까 은사님이 주신 호에 ‘검을 여(黎)’자 쓰는 여민이 논밭에서 일해서 검게 그을린 백성이라고 하면 현대로 풀이하면 노동자가 되는 거잖아요. 은사님께서 변호사님이 노동사건을 주로 하는 변호사로 계셨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여민이라는 호를 지어주신 건가요?

 

김선수 그것까지는 글쎄.(웃음) 선생님께서는 내 활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주셨고, 근본주의적인 개혁을 위한 활동을 하라는 주문을 하셨습니다. ‘백범’도 아주 평범한 사람 이런 의미로 같은 의미이지요. 항상 근본을 생각하면서 생활하라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파하 같은 경우는 사회의 짐을 깨도록 더 열심히 살아라 이런 취지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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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처음에 제가 노동, 산, 여민 세 단어가 눈에 띈다고 했는데 변호사님 페이스북을 보면 정말 주초,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매주 산에 가신 사진이 올라오더라고요. 정말 매주 가시는 건가? 정말? 이렇게 보게 되거든요. 정말로 한 주도 안 빠지고 매주말마다 가시는 건가요?

 

김선수 그런 원칙은 세워놨는데 작년에 보니까 몇 번 빠진 것 같아요. 2007년 4월에 사개추위 끝나고 다시 변호사로 복귀하면서 시작한 게 두 가지 있어요. 민변 공부모임하고 산에 다니는 거. 그리고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죠. 2007년 4월에 변호사로 복귀했는데, 보니까 12월 대선에서 정권을 뺏기겠더라고요. 그래서 ‘기초부터 다지자, 처음부터 공부하고 준비하자’ 이런 취지에서 민변공부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5년만 공부하고 다시 일선에서 일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었는데, 지금 10년이 되었고 또 얼마나 공부만 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으니(웃음). 적어도 2주에 책 1권씩은 읽어서 정신적 기초를 다시 다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40대 후반이었으니까 건강관리에 신경 써야 했습니다. 혈압이 좀 높고, 고지혈 있고, 콜레스테롤도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매주 산에 가면 몸에 어떤 변화가 있나 보자’ 하고 시작한 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죠.

 

김지미 2007년부터 지금까지 몇 번 빠진 적은 있지만 어쨌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고 계시는 거군요.

 

김선수 블로그는 정연순 변호사가 알려줘서 단시간에 글쓰기 연습을 하고 생활을 정리하면서 살아가는 연습을 하자 그래서 블로그에 글을 정리해서 올리게 된 겁니다. 산에 갔다 오면 그 날이 넘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정리해서 올리고, 그 날 넘기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왔어요. 페이스북은 등산 마치고 귀가할 때 버스 등에서 올립니다. 등산을 하면서 땀을 쫙 빼줘야 다음 한 주일을 열심히 제대로 보낼 수 있습니다.

 

김지미 몇 년동안 주말마다 집을 비우면 사모님께서 싫어하시진 않나요? (웃음).

 

김선수 애들 어릴 때는 등산은 생각도 못했는데, 40대 후반으로 들면서 애들이 컸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중에서 하루 산에 가고, 대신 다른 하루는 설거지, 청소하고(웃음). 아내는 내가 산과 연애를 한다는 걸 인정해주고 있어요. 주말에 산에 다녀오지 않으면 그 다음 주 풀에 죽은 남편을 보는 것이 안쓰럽겠지요.

 

김지미 같이 가보실 생각은 안하셨어요?

 

김선수 1년 같이 가봤는데, 집사람이 자기는 등산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같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주체질이라나(웃음). 애들 때문에 시간이 안 나다가 요새는 시간이 나면 여행을 같이 하자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 요구를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 그게 중요한 숙제입니다.

 

김지미 몇 년 전에 변호사님이 회장님이실 때 오대산 둘레길을 간 적이 있었잖아요. 그 때 보니까 가는 버스에서도 그렇고 산이나 풀, 나무 이런 거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아시더라고요. 그런 거는 따로 공부를 하시나요?

 

김선수 도감 갖고 다니면서 공부했는데, 독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장주영 전 회장은 부인이 생물선생님이시고 야생화 모임을 같이 해서 일가견이 있지요. 그래서 장 전 회장은 꽃 사진 찍으러 백두산도 몇 차례 다녀왔습니다. 조용환 변호사님은 꽃 사진에 프로급이어서 전시회도 했습니다. 나중에 조용환 변호사님 인터뷰하고 좋은 꽃 사진 몇 개 실어보세요.

 

김지미 나는 산은 좋은데 가는 게 쉽지는 않다 이런 사람들도 꽤 있어요. 저도 그런 편이기는 한데 더군다나 매주 거르지 않고 같은 일을 지속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거든요. 이번에는 좀 쉴까, 이번 주는 건너뛸까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은 없으세요?

 

김선수 초반에는 그랬는데, 아까 얘기 했잖아요. 연애하러 나가는 거라고(웃음). 초반에는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가기 싫고 그런 게 있었는데, 어느 정도 되면 몸이 먼저 압니다. 등산 거리도 처음에는 2-3시간 하다가, 적응이 되면 4시간 정도는 해야 좀 했구나 하다가, 또 더 적응이 되면 4시간은 부족하고 6시간 정도 해야 몸에서 신호가 오고, 가끔은 야간산행도 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몸이 먼저 반응을 해요. 그리고 1주일을 제대로 보내려면 한 번 산에 가서 땀을 쫙 빼고 와야 그 다음 한 주를 지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처음 가는 코스를 가본다고 하면 미리 조사하고 설렘을 안고 기다립니다.

 

김지미 매주 가는 목적지를 선정하는 기준 같은 거는 있으세요? 매주 다른 산을 가시잖아요.

 

김선수 지금은 어느 산을 간다고 하지 않고 어느 줄기를 탄다고 합니다. 백두대간,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바다로 떨어지는 정맥, 정맥에서 갈라져 강으로 떨어지는 지맥이 있습니다. 2014년에는 경기권 지맥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대간이나 정맥은 등산로가 잘 나 있는데, 지맥은 동네산인 것 같은데 사람들이 많이 안 다니기 때문에 등산로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등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바’라고 하는데 엉뚱한 데로 가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김지미 2007년부터면 근 7년 매주 가셨으면 정말 우리나라에 웬만한 산들은 거의 다 가 보셨겠어요.

 

김선수 남쪽에 산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직 멀었습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이 있는데, 2012년쯤인가 100대 명산 종주를 마쳤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2년 6개월 코스가 있는데, 그런 팀에 합류하지 않고 혼자 다니다 보니 빈 구간이 많습니다.

 

김지미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면 정당해산심판 작년 1년간 하셨잖아요. 변호사님께서는 통합진보당 당원은 아니시잖아요. 정당해산심판 변론을 맡아야겠다 생각하시게 된 이유는 뭔가요?

 

김선수 일단은 이정희 대표가 부탁을 했기 때문에(웃음). 정당해산 헌법사건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사활이 걸린 전선 내지 바리케이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막아주지 못하면 파시즘이나 유신의 시대로 회귀할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라면 이런 ‘세기적인 사건’을 맡아서 혼신의 힘을 다해 수행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유행했던 뮤지컬 드라마 <레미제라블>을 보면 마지막 장면이 파리 시내 바리케이드였잖아요. 공화파 젊은이들이 왕당파의 공격을 거기서 막고 있었는데, 그 젊은이들의 심정이었어요. 정부쪽은 온갖 최신 무기로 무장해서 총공격을 하는데, 우리는 소총 하나 들고 지켜야 되는 역할이 우리한테 맡겨진 거다 그런 생각이었죠. 이정희 대표가 이야기할 때 고민하다가 김진 변호사에게 연락을 해서 상의했습니다. ‘도와줄 수 있냐’고 물으니 내가 하면 같이 해보겠다고 해서 힘을 얻고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정희 대표가 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긴다고 해서 민변에 공지를 했더니 신청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웃음) 후에 이석기 내란음모 형사사건 기록이 본격적으로 올 때 그쪽 변호인들이 몇 명 합류했습니다.

 

김지미 연말에 정당해산심판 선고가 난 이후에 정세에 대해서 아주 비관적인 전망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요. 선고 나던 날 저는 사실 관여한 바도 없고 관련도 없기는 하지만 선고가 나는 순간에 사실은 정말 힘이 쭈욱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허무함이랄까 어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느낌이 들었었는데, 1년간 집중해서 하셨던 사건이고 이게 민주주의를 지키는 어떤 이정표와 같은 그런 사건이다 라고 생각하고 맡으셨던 변호사님 입장에서 선고를 현장에서 들으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김선수 선고하는데 법정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 그 사건은 해산결정이 되는 경우에 대리인단 입장을 밝혀야 될 것 같아서 미리 대리인단의 입장을 정리해서 갔어요. 1주일 전부터 대리인단들에게 각자 해산될 경우에 대비해서 입장을 정리해서 1장 정도씩 해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종합하여 정리해서 대리인단 입장을 준비해 갔습니다. 이걸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선고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선고할 때 전영식 변호사는 밑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고, 김종보 변호사는 대리인석에서 구호를 외쳤습니다. 권영국 변호사가 방청석에서 구호를 외치는 바람에 경위들에 끌려 나가면서 주목을 받은 반면, 김종보 변호사는 대리인석에서 외쳤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고 결과 하나하나에 어찌 일희일비 하겠습니까.

 

김지미 이번이 신년 첫 인터뷰인데 연말에 정당해산결정이 나고 나서는 무조건 선배변호사님을 한 분 해야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 이유가, 생각을 해보니까 지금 다들 암울해 있고 힘이 빠져있고 그런 상황인데 더 했으면 더 했을 7-80년 90년도 초반까지를 거쳐 왔던 선배님들은 과연 이런 상황들을 수도 없이 마주했을 텐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겨내시고 다시 힘을 내셨을까가 너무 궁금한 거예요. 변호사님도 노동사건 많이 하시다 보면 사실은 성취감을 느낄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정말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판결을 받았을 때도 많이 있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 주세요. 이게 오늘 인터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선수 별로 할 이야기도 없는데(웃음). 내가 할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한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그리고 결과가 안 좋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시 다음 일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민변이 없어져야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했다던데,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민변이 할 일은 있을 것이고, 그런 일들은 내가 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사건에서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왔다고 다음 사건을 안 할 수도 없는 거고.

 

김지미 내가 할 일은 아직 많이 있다 이런 생각으로..

 

김선수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일반사건이라도 그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게 전부인 사건입니다. 변호사의 숙명이지 특별한 뭐가 있겠어요. 사건은 항상 기다리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 변호사로서 해야 할 역할은 계속 있는 거고. 한 번 잘못 했으면 다음 거 더 잘하면 되는 거고.

 

김지미 아주 간명한데도 정답인 것 같네요.

 

김선수 어떤 사람들은 변호사 업무에 환멸을 느끼고 보다 근본적인 것을 찾아서 해야 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시민운동가로서 활동을 확장했지요. 정치의 영역으로 활동의 장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활동가나 조직가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활동 양식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거기에 맞는 자질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게 내 자질에 맞으니까 이 영역에서 계속 활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아까 공부모임 이야기 잠깐 하셨는데 공부모임이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하는 줄은 몰랐네요.(웃음). 공부모임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 하시잖아요.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40대의 필독도서 한 권만 추천해주세요.

 

김선수 연령대가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시기에 펼쳐보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래서 그런 시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책 하나씩은 있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독교인이면 성경, 불교신자면 불경을 그런 책으로 꼽을 겁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중국고전에서 그런 걸 찾습니다. 『논어』와 『맹자』, 『노자』, 그리고 『육도삼략』과 『손자』 『오자』 같은 병서들도 힘들고 어려울 때 정독하면 그 상황에 맞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구절들을 찾을 수 있어요.

 

김지미 제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자면 남편이 40살이 되었을 때 제가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이라는 책을 선물해줬는데 요즘 제가 그 책을 보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잘 안 읽히더라고요.

 

김선수 고전은 다른 사람이 해석한 것을 읽는 것보다는 원전을 직역한 것을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직역한 것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이 있으면 한자 원문을 찾아보고 필요하면 외우거나 메모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 알 수 있어요. 공자는 인의정치, 맹자는 왕도정치, 자기들이 이상으로 삼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도 백성이 행복하고 안전하게 잘사는 그런 사회를 꿈꿨는데, 왕을 통해서 그런 사회를 실현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공자와 맹자가 왕을 설득하러 다닐 때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나요. 공자 같은 경우에는 상갓집 개취급도 당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기가 바라는 원하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찾아다니고 설득하고 노력하고 생각을 밝히고 했습니다. 논어 원전을 직역한 것을 읽어보면 공자의 치열한 삶이 전달되고 절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어요. 그 시절에도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간 것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은 읽을 때마다 내가 하면 됩니다. 반면에 노자나 장자 같은 경우에는 왕이나 권력가들이 자기들보다 못하잖아요. 공자나 맹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도 설득해서 어떻게 하려고 현실적으로 노력하는데, 노자나 장자는 그런 노력 자체를 무시합니다. 하찮은 권력에 빌붙어서 무엇을 도모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 리 없습니다. 그런 권력자들을 무시하고 큰 그림으로 자연의 섭리를 논하니 얼마나 통쾌하겠어요. 살아가다 보면 공자나 맹자처럼 현실 속에서 열심히 노력해야 될 때도 있지만, 노자나 장자처럼 한 발자국 물러서서 여유를 찾는 것도 필요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40대는 논어 맹자를 읽고, 50대에는 노자 장자 읽으면서 조화를 찾아보나, 저도 숙제입니다.

 

김지미 처음에 변호사님께서 나 같은 식상한 사람 말고 참신한 사람 인터뷰를 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변호사님이 참 새로웠어요. 인터뷰를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마지막으로 민변회원들에게 할 말씀 해주세요.

 

김선수 민변회원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우리 사회가 지금은 후퇴하고 있다고 그러지만 엄혹한 시절을 뚫고 민주화를 이루는 그런 과정에서 우리 회원들이 기여한 바도 크고, 우리 사회의 오늘을 있게 한 데 대한 민변의 역할과 관련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나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위상이나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같이 해 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든든한 모임이 있다는 게 큰 힘이 됩니다. 그런 큰 힘을 민변을 통해서 확인하고 현 시기를 헤쳐 나가는 동료 내지는 동지로서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럴수록 움츠리면 안 되고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면 체온이 올라가고, 체온이 올라가면 병 같은 게 안 들어온대요. 매일 땀날 정도로 몸을 움직이면 침체된 상태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함께 손잡고 힘을 내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어려운 시기를 같이 극복하면 좋겠습니다.

 

앵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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