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안기부와의 변론전쟁 – 체포하여 48시간은 수사기관 맘대로 가둬놓을 수 있다는 ‘미신’을 깨다(1) -안상운 변호사

2014-01-07

칼럼5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의 법정 연기력에 감탄한 사람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는 그 사건이 어떻게 판결 선고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검사는 구속 기소된 22명의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계엄법·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징역 3~10년을 구형하였고, 재판장은 5~7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는 것이다. 1) 구형량보다도 선고 형량이 더 높았다는 것인가? 변호인의 ‘괘씸죄’가 작용한 것일까?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런 1981년 판사에게 이른바 ‘시국사건’에 대해 무죄선고를 바랄 수 있었을까? 피고인에게 적법행위를 기대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는 행위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 하에 행위자 대신에 사회적 평균인을 두고 이 평균인의 관점에서 그 기대가능성 유무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대법원판례에 의하면 2) 현직 대법관도 보안사에 연행돼 고문을 당하는 판에 일개 하급법원 판사에게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지 않았을까 싶다(그렇다고 양심에 부끄러운 판결을 한 법관이 무죄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게 어찌 부림사건 뿐이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인권변호 활동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민변의 원로․선배 변호사님들은 법정에서 평생 ‘무죄판결’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분들이 실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라 군사정권․독재정권 하의 사법부가 엉터리 재판을 한 결과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오죽 했으면 고 이돈명 변호사님께서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3) “1979년 10월 박정희 씨가 죽기 전까지 나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유죄 변호사라 불렀는데, 저 이돈명이가 변론을 맡았다 하면 이기는 사건이 없고 유죄가 안 된 것이 없다는 말이었지요.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농담 삼아 부른 것이었지만 사실 그랬습니다. 누가 맡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느 사건 하나 이겨서 무죄로 판결이 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길래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일 겁니다.”라고 한탄을 하였을까.

 

한승헌 변호사님도 “어떤 정치인은 징역을 살고 와서는 ‘당신이 변호한 사건치고 무죄 받은 사건이 있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내가 변호한 사람 중에서 징역 가면서 인사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리고 내가 변호한 사람 치고 석방 안 된 사람이 없다. 최소한 만기 석방은 다 되더라’는 말까지 했죠. 뜻은 있었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던 변론이었습니다.”라고 토로하셨을까. 4)5) 고 황인철 변호사님(민변 2대 대표간사, 1990~92년)의 추모문집의 제목은 왜 『’무죄다’라는 말 한마디』(문학과 지성사, 1995)였을까.

‘사법 암흑기’인 유신과 5공화국 시절에 수많은 시국사건을 맡아 변론했지만 한 차례도 무죄판결을 이끌어 내지 못했기 때문에 ‘승률 0% 변호사’라고 불렸다는 홍성우 변호사님(민변 3대 대표간사, 1992~94년)도 “인권변론 사건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절망하거나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라고 왜 좌절감이 없었겠어요. 한두 번 절망한 게 아니에요.”라고 토로하시면서, “뻔히 유죄판결 날 걸 알면서 뭐하러 며칠 밤을 새며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는 짓궂은 질문에는 “하지만 ‘이왕 유죄판결 나는 거 열심히 하면 뭐해’ 하면서 대강 할 수는 없었어요. 무리한 기소라는 걸 알면서도 당연히 유죄판결이 나겠지 하고 ‘관대한 처분 바란다’는 말이나 한다면 가만히 앉아 있는 법원, 검찰하고 다를 게 뭐 있겠어요. 그 사람들이 꿰어 맞추려는 재판에 ‘변호사도 있었다’는 요식절차를 갖춰주기 위한 들러리 밖에 안 되는거죠.”라고 강조하시면서 양심범으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너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니 유죄를 받더라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소신과 용기를 지켜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고 강조하신다.6)

 

중앙정보부와 그 후 안기부는 시국사건에서 유죄를 끌어내기 위해 법원·검찰뿐 아니라 변호인들에게도 압력을 행사했다. 변호인들에 대한 압력은 변호인의 접견 거부나 증인에 대한 압력 등 변론권에 대한 침해와 변호인에 대한 징계, 연행과 구속 등 변호인에 대한 탄압과 헌법에 보장된 변호인 접견을 금지했던 사례는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7) 그런 상황에서 무죄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후학들은 ‘이기는 재판’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하였다. 민변 창립 초기 사무실이었던 서소문동 배재빌딩 5층 사무실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젊은 변호사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였다. 정은경 간사 혼자 사무실을 지키던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박성민, 박용일, 박원순, 안영도, 김응조, 박인제, 유남영, 이석태, 조용환, 김형태, 윤종현, 이경우, 이양원, 박연철, 이원영, 백승헌, 김한주, 이오영, 김갑배, 김선수, 이상중, 정미화 변호사님(무순) 등이 주된 멤버였다. 매주 주제를 정하여 헌법, 형사소송법, 국가보안법, 집시법, 노동법 등 실무분야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살아있는 역사’를 망라하였다. 세미나 뒤에는 자연스럽게 저녁식사와 맥주 한 잔을 곁들인 토론이 이어졌고, 그 이후에는 NL 주사파(술을 좋아하시는 그룹)와 PD파(바둑을 즐기는 그룹)으로 나뉘어 ‘불금’을 즐겼던 시절이었다. 그 때 배운 지식과 선배․동료 변호사님들과의 유대감은 그 이후 민변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강화해 주었고,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인권변론 활동을 가능하게 된 토양이 되었다.

 

시국사건의 실체적 재판이야 판사들의 전권이라고 하니 그렇다고 쳐도 절차적 기본권조차 무시하는 수사기관의 행태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변호인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안기부의 계속되는 변호인 접견방해와 진술의 임의성 진술의 근거로 삼기 위한 생색내기식의 제한적인 접견허용이나 접견 시 수사관들이 입회하고 사진을 찍어 법원에 임의성 입증증거로 제출하는 행태를 바로잡기 위하여 민변에서는 안기부장 등을 형법상 직권남용죄로 고소․고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접수한 검찰이 감히 안기부장을 수사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변호인 접견이라도 제대로 할 방법을 고심하던 차에 뜻밖에 검사 출신인 주명수 변호사라는 분(연수원 13기, 1987년 수원지방변호사회에서 개업)이 직접 당사자가 되어 안기부장을 상대로 안기부가 구속된 피의자에 대한 변호인접견을 불허가한 처분을 취소하라는 결정을 받았다. ‘듣보잡’ 형사소송법 제417조에 근거하여 8) 준항고를 법원에 신청하여 승소결정을 받은 것이다.9) 부끄럽지만 그 당시 필자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변호사들은 ‘준항고’라는 제도를 알지 못하였다. 사법시험도 판결까지만 출제되었지 그 이후 조항들은 출제된 적도 없었다. 당시 필자가 들은 후문에 의하면 주 변호사님이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준항고장’을 접수하려고 하자 접수 담당 직원이 처음 보는 신청서라면서 접수를 거부하자 직접 수석부장판사를 찾아가 근거 조문을 들이대니 법원에서 ‘일단’ 접수를 받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 결정의 사건번호가 ‘89보1’(밑줄은 필자)인 것이다.

89보1(주명수)

어쨌든 이 결정에 의하면 1989. 6. 27.과 같은 해 7. 6.에 각각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에 구속된 피의자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주 변호사님이 그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89. 7. 11. 국가안전기획부장에게 그들에 대한 접견신청을 하였으나 같은 날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부터 ‘변호인접견을 불허한다’는 처분을 받은데 대해, 법원은 「헌법 제12조 제4항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제34조는 ‘변호인 또는 변호인이 되려는 자는 신체구속을 당한 피고인 또는 피의자와 접견하고 서류 또는 물건을 수수할 수 있으며 의사로 하여금 진료하게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행형상의 이유로 인한 행형법 제18조, 동법시행령 제54조 내지 제72조에 의한 제한 이외에는 변호인의 접견을 금지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이유로,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준항고인에 대하여 한 변호인접견불허처분은 위법 부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417조, 제419조, 제414조 제2항에 의하여 국가안전기획부장이 한 변호인접견불허처분을 취소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결정문이 법률신문 등을 통해 알려지자 드디어 안기부의 변호인 접견거부행태가 ‘서서히’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 후인 1990. 2. 13. 대법원은 89모37 변호인 접견불허에 대한 재항고 사건(신청인은 변호사 강철선 외 2인, 상대방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에서 “형사소송법 제34조가 규정한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은 신체구속을 당한 피고인이나 피의자의 인권보장과 방어준비를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권리이므로, 법령에 의한 제한이 없는 한 수사기관의 처분은 물론, 법원의 결정으로도 이를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구치소에 구속되어 검사로부터 수사를 받고 있던 피의자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되었거나 선임되려는 변호사들이 피의자들을 접견하려고 1989. 7. 31. 구치소장에게 접견신청을 하였으나 같은 해 8. 9.까지도 접견이 허용되지 아니하고 있었다면, 접견불허처분이 있는 것과 동일시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변호인의 접견이 예전에 비하면 많이 편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나 검찰에서의 변호인 접견권은 가령 오전에 접견신청을 하면 오후 늦게 접견을 허용한다거나, 혹은 검찰 조사를 내보낸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여전히 제약을 받았다. 안기부나 그 수사관들의 위법행위에 대해 실질적인 ‘타격’이 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우리 민변의 김한주 변호사님(15기)이 준항고뿐만 아니라 민사소송까지 제기하였다. 치안본부 대공2부 남영동분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피의자의 처로부터 변호인으로 선임된 김 변호사님은 1991. 4. 11. 피의자의 구속집행장소인 용산경찰서와 실제 구금 장소인 남영동분실을 찾아갔으나 변호인 접견을 거부당하자 이를 취소한다는 준항고 결정을 받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접견거부처분이 준항고를 통해 위법임이 확인되었으니 이는 민사상 불법행위에 해당되므로, 국가는 변호인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법리구성인데도 당시에는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나중에야 일본의 판례시보 등을 보니 일본에서도 이와 같은 민사판결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92가단24555(김한주)

서울민사지방법원은 1991. 9. 19. 국가는 원고에게 금 2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선고하였다.10) 수사기관의 변호인접견거부에 대해 국가의 변호인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11) 헌법재판소 1992. 1. 28. 선고 91헌마111 결정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 대한 빛나는 판례를 남겼다.

덕수합동법률사무소의 이석태 변호사님 등 3명의 민변 회원이 대리인이 되어 국가안전기획부장을 피청구인으로 하여 제기한 이 사건에서 헌재는 “헌법 제12조 제4항이 보장하고 있는 신체구속을 당한 사람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무죄추정을 받고 있는 피의자·피고인에 대하여 신체구속의 상황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폐해를 제거하고 구속이 그 목적의 한도를 초과하여 이용되거나 작용하지 않게끔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의 “변호인의 조력”은 “변호인의 충분한 조력”을 의미한다면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필수적 내용은 신체구속을 당한 사람과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이며 이러한 접견교통권의 충분한 보장은 구속된 자와 변호인의 대화내용에 대하여 비밀이 완전히 보장되고 어떠한 제한·영향·압력 또는 부당한 간섭 없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접견을 통하여서만 가능하고 이러한 자유로운 접견은 구속된 자와 변호인의 접견에 교도관이나 수사관 등 관계공무원의 참여가 없어야 가능하며, 변호인과의 자유로운 접견은 신체구속을 당한 사람에게 보장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어서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 등 어떠한 명분으로도 제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그 동안 변호인이 안기부에서 피의자와 접견할 때 안기부 수사관들이 ‘참여’하여 대화내용을 듣거나 기록해 온 것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서 위헌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변호인 접견시 수사관이 ‘가청거리 내’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변호인과 피의자 간의 접견 시 비로소 비밀이 보장되게 되었다.

 

한편 당시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은 설령 상고를 제기하여 그 심리 중이라고 하더라도 구치소나 교도소에서는 상고심은 법률심이기 때문에 출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상고 이후 2~3주 안에 미결수를 지방의 먼 구치소나 교도소로 이감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로 인해 변호인들은 당장 상고이유서를 쓰기 위해 멀리 지방 출장을 다녀와야 하고, 그것은 결국 변호인의 접견권을 사실상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교도소장 등이 미결수용자를 다른 수용시설로 이송하는 행위를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행정처분이라고, 그래서 영장주의에 반하는 이송행위는 위법이라고 생각하는 변호사는 아무도 없었다.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모양을 중시하는 프로기사가 오히려 단수를 보지 못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런 인권침해적인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마치 온 힘을 다해 사냥하는 맹수처럼 소송을 제기하여 기념비적인 판결을 받아낸 민변 회원이 있다. 바로 박승옥 변호사님(14기, 현재는 목포에서 개업 중)이다.

박 변호사님은 당시 담당하던 이수호 선생님(전교조 해직교사, 강경대 군 사망 이후 결성된 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1991. 6. 25. 구속, 이후 민주노총 위원장 역임)이 1992. 4. 25. 상고를 제기하였는데도 5. 20. 안양교도소에서 저 멀리 진주교도소로 이송되자 즉시 서울고법에 이송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함과 아울러 그 효력정지를 구하는 신청을 제기하였고 법원은 1992. 6. 15. 이송처분의 효력정지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을 하였다(92부417 결정). 이수호 선생님은 이틀 뒤인 같은 달 17.에 다시 안양교도소로 원상회복되었다. 12) 대법원은 교도소의 수용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유만으로는 이송처분이 적법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13)

이러한 민변 변호사들을 비롯한 많은 변호사들의 노력에 의하여 수사기관의 잘못된 관행들이 위법으로 판정되어 시정되고, 그에 따라 인권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92부417(이수호)

1991년 전대협 5기 의장단 사건을 변론하면서 필자는 기존의 형사소송 전반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형사소송법 조문과 실무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안기부의 변호인 접견거부 또는 방해 행태, 변호인 접견시 수사관들의 입회 또는 사진 촬영 행태, 가족들의 면회 금지 또는 제한 행태, 경찰 유치장이 아닌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20일 이상 감금(수감)하는 행태, 노련한 언론플레이 행태 등도 그러하였지만,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신체의 자유에 대한 침해 내지 방치 행태가 더욱 그러하였다.

 

아래의 헌법 제12조를 읽어보자.

 

[헌법 제12조] ①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②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③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다만, 현행범인인 경우와 장기 3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고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후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

④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다만,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가 변호인을 붙인다.

⑤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받지 아니하고는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하지 아니한다.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자의 가족등 법률이 정하는 자에게는 그 이유와 일시·장소가 지체없이 통지되어야 한다.

⑥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적부의 심사를 법원에 청구할 권리를 가진다.

⑦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폭행·협박·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 또는 정식재판에 있어서 피고인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 수사 및 형사재판의 실무는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도 ‘임의동행’이라는 미명 하에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으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도 처벌을 받았다.

모든 국민은 고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기 일쑤였다.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지 않고 일단 체포 또는 구금을 한 뒤에 사후에 요식행위로서 영장을 발부받았다.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없고 안기부가 정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잠깐 변호인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할 때 그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전혀 고지받지 못하였고,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자의 가족 등에게는 수사기관이 편리한 때에 그 이유와 일시·장소가 통지되었다.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폭행·협박·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닌 경우에도 처벌되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구속취소 신청

 

검찰은 전대협 김종식 의장에 대한 기소를 ‘구속만기일’ 하루 전인 1991년 8월 24일(토)에 했다. 아니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김종식이 기소되었다는 보도를 들은 나는 즉시 사무장을 시켜 공소장을 등사하도록 하였고 이와 별도로 법원으로부터 공소장 부본을 수령하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공소장에 찍힌 법원의 접수인은 구속만기일이 지난 8월 26일(월)로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토요일도 정상 근무일이기는 하였지만 통상 토요일에는 결재를 하지 않고 따라서 공소장을 접수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법원 결정문도 토요일 일과 시간 이후에 접수했다고 되어 있다). 나는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법원에 직접 가서 재판기록에 철해져 있는 공소장 원본을 살펴보았는데 역시 8월 26일로 찍혀 있었다. 그렇다면 김종식은 구속만기일인 8월 25일 석방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9월 초 형사소송법 제93조 14)에 따라 구속취소 신청을 냈다. 구속취소 신청 사유는 첫째, 구속기간이 만료된 뒤 기소가 이루어졌으므로 구속영장의 효력이 상실되었고, 둘째 김종식은 그에 대한 안기부의 연행시점, 즉 1991년 7월 8일부터 헌법상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므로 그에 대한 수사기간의 구속기간도 그때부터 기산하여야 하며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집행한 시점인 7월 10일부터 기산할 수는 없으므로 그럴 경우 8월 24일도 이미 법정 구속수사기간을 초과하여 역시 구속영장의 효력이 상실되었으며, 셋째 김종식은 체포당할 때 헌법 제12조 제5항에 의하여 반드시 고지 받게 되어 있는 체포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고지 받지 못한 채 폭력적으로 연행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체포는 헌법 위반으로 구속은 무효이니 석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신청을 한 나는 그 결정이 법정 결정기한인 7일 이내에 나올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나오지 않자 내심 불안하였다. 김종식의 재판은 그가 구속된 지 3개월이 지난 10월 10일에야 1차 공판기일이 열렸다. 그때까지 구속취소 여부에 대한 결정통지를 받지 못한 나는 당일 미리 법정에 가서 개정되기 직전 법대에 있는 재판기록을 슬쩍 들춰 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공소장에는 8월 26일자 접수인 이외에 8월 24일자 접수인이 같이 찍혀 있는 것이었다. 또한 바로 이틀 전 재판부는 “이 사건 공소장에 날인된 이 법원의 접수일부인에 의하면 1991년 8월 24일 당직접수인을 날인하였다”는 이유로 구속취소 신청을 기각한다는 결정을 해놓고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법원이 공문서까지 변조할 수가 있나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개정이 되자 발언권을 얻어 내가 구속취소 신청서에 첨부한 공소장 부본(법원으로부터 받은 것)과 복사한 공소장 원본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구속취소 신청 후에 8월 24일자 접수인을 찍을 수 있느냐고 항의하였지만 재판부는 재판기록에 있는 접수인이 정당하다며 발뺌했다. 재판부의 결정문대로 공소장 기재에 의하여 접수일자가 구속기간 내가 명백하다면 무엇 때문에 기각결정을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첫 재판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피고인과 상의하여 일단 재판을 연기하기로 하여 첫날은 인정신문으로 끝났다. 나는 구속취소 기각 결정에 대해 항고를 제기하면서 나중에 누군가가 접수인을 소급하여 찍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약 어떤 이유로 인하여 공소장이 8월 26일 접수된 것이 사실이라면 전대협의장을 석방시켜주어야 하는데 어느 판사가, 그리고 어느 검사가 감히 수괴급(?) 피고인을 풀어줄 수 있겠느냐고 애써 자위해보았지만 그와는 별도로 구속취소의 두 번째 신청사유, 즉 구속영장의 효력발생 시점에 대한 재판부의 입장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구속된 피고인에 대한 구속기간은 구속된 때(7월 8일)를 시점으로 하여 계산하되 이는 구속영장의 기재에 의하여(7월 10일)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법원의 기각결정이유는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지 전대협의장을 풀어줄 수 없다는 당위론적 법률해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피고인이 실제로 신체의 자유가 박탈된 때 즉 체포 또는 구금된 때가 아니라 그 이후에 수사기관이 구속영장에 기재한 때에 구속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재판을 보고 사법부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대법원의 판단을 받아 보고 싶어 재항고를 하였다. 대법원은 역시나(!) 1991. 12. 30. “체포, 구금 당시에 헌법 및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사항(체포, 구금의 이유 및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고지 받지 못하였고, 그 후의 구금기간 중 면회거부 등의 처분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사유는 형사소송법 제93조 소정의 구속취소사유에는 해당하지 아니한다.”며 기각결정을 하였다(91모76 결정). 15)

 

대법원은 첫째, 이 사건 공소장은 토요일인 1991. 8. 24.의 일과시간이 경과된 후에 서울형사지방법원의 당직 근무자에게 접수되어 월요일인 같은 해 8. 26.에 주무부서인 형사합의과에 인계된 사실을 인정한 후, 이 사건 공소제기는 구속기간 내인 위 1991. 8. 24.에 적법히 제기되었다고 판단한 원심의 조치는 정당하고,

둘째, 재항고인(김종식)이 형사소송법 제201조에 의해 1991. 7. 9.자로 발부된 구속영장에 의하여 그 다음날 구속이 집행된 사실을 인정한 다음, 위 구속영장에 의한 집행일자인 1991. 7. 10.부터 2개월이 경과한 같은 해 9. 10.을 기산점으로 하여 행한 위 법원의 구속기간갱신결정은 적법하다고 판단한 원심의 결정은 타당하며,

셋째, 형사소송법 제70조 제1항 소정의 구속사유가 계속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사건에서, 재항고인에 대한 구속의 경위가 변호인의 주장과 같다 하여 이로써 재항고인에 대한 구속의 사유가 소멸된 것으로까지 인정되지는 아니하고

넷째, 재항고인이 체포, 구금 당시에 헌법 및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사항(체포, 구금의 이유 및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고지받지 못하였고, 그 후의 구금기간 중 면회거부 등의 처분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사유는 형사소송법 제93조 소정의 구속취소사유에는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법원 결정이 과연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신체의 자유에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헌법을 위반한 것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구속취소 기각결정을 보면서 필자는 아~, 그 때 한겨레신문 법조출입 기자에게 제보를 하여 기자가 직접 공소장을 열람하고 접수일자인을 사진 찍어 보도를 하였다면 과연 법원이 접수인을 소급 날인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자문해 보기도 하였다. 그 때만 해도 아직 ‘언론플레이’가 뭔지도 몰랐던 때 초보변호인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8월 24일자 접수인은 누가 찍었을까?

 

그런데 구속취소 신청 사건에서 검사가 제출한 의견서가 또 나의 헌법 본능을 자극했다. 필자는 대학 1학년 때부터 헌법에 관심이 많아 허영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고, 사법시험에서도 헌법과목의 점수가 높았다.

담당 검사는 구속취소 신청에 대하여 안기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피고인에 대한 구금은 ‘임의동행’에 의한 것이므로 임의동행 후 ‘48시간’이 지나기 전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했으니 적법하다고 의견서를 제출했다. 천하의 전대협의장이 제 발로 남산 안기부까지 갔다는 주장이다. 더 우스운 것은 설사 임의동행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경찰관직무집행법 경찰관직무집행법16) 상 6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조항을 망각한 채 이른바 ‘48시간 무영장 구금론’을 내세운 것이다. 법률전문가이자 공안베테랑인 ‘고등’검찰관이 연행 내지 임의동행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인데 일선 경찰관들의 법적 무지 내지 탈법의식이야 더 이상 일러 무삼하랴 싶었다.

실제로 이 사건 후 필자의 친구가 서울 은평경찰서에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되어 하루를 꼬박 지낸 뒤 필자에게 전화를 해와 이럴 수 있느냐고 하여 필자는 담당자를 바꿔달라고 하여 그에게 경찰관 직무집행법을 알려주면서 친구가 경찰서 보호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내보내달라고 말하자 그는 자기들은 상부로부터 48시간 이내에 영장을 청구하면 된다는 지침을 받았기 때문에 절대 내보내줄 수 없다며 계속 위법을 강조하는 필자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일이 있다. 이른바 ‘48시간 미신’을 얼마나 깊이 신봉하고 있는지 실감하였다. 이러한 미신 뒤에는 대법원도 한 몫 크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대법원의 기각결정을 받아본 뒤 이를 형사재판이 아닌 민사재판을 통하여 그 위헌․위법성을 끝까지 파헤쳐 보기로 했다.

전대협 의장을 풀어달라는 재판이 아니고 단지 그에 대한 임의동행 형식의 구속이 민법상 불법행위이냐 아니냐를 판단해달라는 것이므로 법원의 부담도 그만큼 가볍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있었다.

 

형사 2심 재판이 끝난 1992년 5월 21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하였다. 민사재판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가소송수행자로 법정에 나온 안기부 직원은 김종식의 구금은 긴급구속이 아니라 임의동행이며, 또 48시간 이내의 구금은 긴급구속이어서 형사소송법 제207조에 의거한 적법한 구금이므로 긴급구속에 따른 사후영장을 발부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불법구금이 아니고 2일간의 구금에 대하여는 형사보상이나 피의자보상으로 피해구제를 받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원고와 같이 연행된 손00는 체포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자신들은 연행된 것이 아니라 ‘납치’를 당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마침내 1992년 10월 15일 원고승소 판결이 선고되었다.

법원은 “일응 긴급구속을 한 뒤에 구속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됨에도 사후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못한 경우에는 비록 그 후에 통상의 사전영장이 발부되더라도 긴급구속기간은 법관의 승인을 받지 못한 불법구금이며… 한편 안기부 수사관들은 원고를 연행하여 안기부에 구금하면서 원고에게 범죄사실의 요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원고에게 고지하지 아니하였고 이는 불법행위이다”고 판결하였다. 17)

92가단58883(김종식)

이른바 ‘48시간 미신’을 깨는 우리나라 첫 판결이 탄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문화된 수사관의, 변호인의 조력권 고지의무 불이행에 대하여 그것이 불법행위임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로 기록되게 되었다. 다행히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 어떤 신문은 1면 머리기사 3면 해설기사로, 다른 신문들은 사회면 머리기사 또는 중요 기사로 보도하였다. 18)

이 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도 1993년 11월 23일 “이른바 임의동행에 있어서의 임의성의 판단은 동행의 시간과 장소, 동행의 방법과 동행거부의사의 유무, 동행 이후의 조사 방법과 퇴거의사의 유무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객관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는데, 이 사건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은 원고를 긴급구속한 것이 아니라 임의동행한 것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들이 피의자를 연행한 1991. 7. 8. 04:40경부터 48시간 내에 사후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아니하고 같은 해 7. 10. 01:35경 통상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하였다면 피의자를 불법체포 구금한 것에 해당하고 이와 같은 경우 통상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하였다고 하여 불법체포나 그 동안의 구금이 적법하게 된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이 사건에서는 안기부 수사관이 원고를 계속 구속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관의 사후 영장을 발부받지 아니한 것은 잘못이고, 이와 같은 경우 통상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하였다고 하여 이 사건의 불법체포나 그 동안의 구금이 적법하게 된다고 할 수 없다…안기부 수사관들이 피의자인 원고를 체포, 연행하여 긴급구속을 함에 있어 원고에 대하여 그 범죄사실의 요지와 구속의 이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 대한 고지를 하지도 아니하고 긴급구속 후 원고를 계속 구속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관의 사후영장을 발부받지도 아니하였다면 그와 같은 불법체포, 구금에 대하여 위 수사관들에게 고의, 과실이 없다 할 수 없다.“라고 판결하였다(93다35155 판결). 19)

 

대법원 판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이 판결 선고 후 얼마 되지 않아 경찰서에 접견을 간 필자는 수사관의 책상 앞에 피의자에게 범죄사실의 요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반드시 고지하고 그에 대한 확인서를 받으라는 지침을 발견하였다. 3군 사령부에 연행된 군인 피의자를 접견하러 갈 때에는 설마 군 수사기관에서 이를 지킬까 의문시했는데, 막상 피의자를 만나 보니 부대에서 보안대로 연행될 때 범죄사실의 요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검찰의 조사실에서는 이러한 지침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법조 출입 기자들조차도 사전영장을 청구하면 마치 인권이 침해되는 것이고, 검사가 피의자를 소환하여 ‘밤샘 수사’를 한 뒤 48시간 이내에 영장을 청구하여 발부받으면 유능한 검사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그런데 이 판결 이후 임의동행 형식의 사후영장이 아니라 사전영장 청구제도가 확립되게 되었다. 이는 그 이후 1995년에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후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의 발전과 변화로 인한 법규범과 현실간의 괴리를 해소하고, 민주화의 결과에 따른 기본권보장의 강화요청에 실질적으로 부응하여 인신구속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20)

이 때 임의동행과 보호유치 등 탈법적 수사관행을 근절하고 적법한 수사절차를 확보하기 위하여 헌법에 규정된 체포제도를 도입하여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정당한 이유없이 출석요구에 응하지 아니하거나 아니할 우려가 있는 경우 사전에 판사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체포하고, 48시간이내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아니하는 경우 즉시 석방하도록 하였고, 긴급구속제도를 폐지하고 긴급체포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체포 및 구인기간을 구속기간에 산입하고, 체포된 자에 대하여도 적부심사청구를 인정하였다. 또한 구속의 신중을 도모하기 위하여 판사가 피의자를 대면하여 심문할 수 있는 피의자심문제도(영장실질심사제도)를 신설하였다.

 

또한 문민정부임을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 정기국회에서 국가안전기획부법21) 제11조(직권남용의 금지)가 신설되어 부장·차장 및 기타 직원은 그 직권을 남용하여 법률에 의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하거나 다른 기관·단체 또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여서는 아니 되며, 안전기획부 직원으로서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하는 자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형사소송법 제34조(피고인·피의자와의 접견, 교통, 수진) 및 제209조에 의하여 수사에 준용되는 제87조(구속의 통지), 제89조(구속된 피고인과의 접견, 수진), 제90조(변호인의 의뢰)와 군사법원법의 관계규정(제63조·제127조·제129조 및 제130조)등 범죄수사에 관한 적법절차를 준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제19조(직권남용죄)에서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하거나 다른 기관·단체 또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고 안전기획부직원으로서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변호인의 피의자와의 접견·교통·수진, 구속의 통지, 변호인 아닌 자의 피의자와의 접견·수진, 변호인의 의뢰에 관한 형사소송법 규정을 준수하지 아니하여 피의자, 변호인 또는 관계인의 권리를 침해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그 미수범도 처벌한다는 규정을 신설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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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네이버 지식백과(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15208&cid=40942&categoryId=35104)
2)대법원 2008. 10. 23. 선고 2005도10101 판결
3)경향잡지 2004. 7(http://blog.naver.com/cbckmedia?Redirect=Log&logNo=130100718381)
4)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3&contents_id=23039
5)한승헌 변호사님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안기부 남산 지하실에서 58일 간이나 구금된 바 있는데, 그 내용에 관하여는 한승헌, “내가 겪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한승헌 변호사 법조 55년 기념선집 『피고인이 된 변호사』, 종합출판 범우, 2013, 111~135쪽 및 같은 책 “‘남산’ 지하실과 교도소에서”, 163~169쪽 참조.
6)법률신문 2013. 11. 4. 『[법조라운지] “승률 0% 후회는 없다”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http://www.lawtimes.co.kr/LawSeries/SeriesNews/SeriesLoungeContents.aspx?key=%EB%B2%95%EC%A1%B0%EB%9D%BC%EC%9A%B4%EC%A7%80&m=cov&page=1&serial=79542)
7)이에 관하여는 한겨레 2010. 5. 21.자에 실린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51. 변호사에 대한 탄압 (상), 비일비재했던 공안기관 ‘시국변호사’ 감시·연행·구속” 기사 참조.
8)제417조 (동전)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구금, 압수 또는 압수물의 환부에 관한 처분에 대하여 불복이 있으면 그 직무집행지의 관할법원 또는 검사의 소속검찰청에 대응한 법원에 그 처분의 취소 또는 변경을 청구할 수 있다.
9)서울형사지법 1989. 7. 15. 자 89보1 결정 [수사기관처분에대한준항고](확정), 이 결정은 하급심판결집 1989(2), 474면에도 실렸다.
10)91가단24555 판결, 이 판결은 하급심판결집 1991(3), 203면에 실렸다.
11)이후 부산지법 1992. 6. 24. 선고 91가단58693 판결도 민변 부산지부 정재성 변호사님이 대한민국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국가안전기획부에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 수감된 피의자의 처로부터 변호인 선임을 의뢰받은 변호사의 접견을 담당공무원이 변호인 선임서가 없으면 접견할 수 없다면서 거부한 경우 변호사가 접견권 행사를 방해받음으로써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국가와 공무원 본인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였다(위자료는 금 100만 원). 이 판결은 하급심판결집 1992(2), 168면에 실렸다.
12)이 결정은 법률신문(1992. 7. 23. 제2141호, 9면)에 실렸고, 상고심인 대법원 1992. 8. 7. 자 92두30 결정으로 확정되었다.
13)

그 후 대법원 1996. 5. 15. 자 95모94 결정은 “청구인에 대하여 1995. 11. 29. 서울지방법원 판사로부터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그 구속영장에는 청구인을 구금할 수 있는 장소로 서울 서초경찰서 유치장으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청구인에 대하여 위 구속영장에 의하여 같은 달 30. 07:50경 서초경찰서 유치장에 구속이 집행되었다가 같은 날 08:00에 그 신병이 조사차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에게 인도된 후 위 서초경찰서 유치장에 인도된 바 없이 계속하여 국가안전기획부 청사에 사실상 구금되어 있다면, 피청구인의 청구인에 대한 이러한 사실상의 구금장소의 임의적 변경은 청구인의 방어권이나 접견교통권의 행사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위법하다.“고 판시하였다.
14)형사소송법 제93조(구속의 취소) 구속의 사유가 없거나 소멸된 때에는 법원은 직권 또는 검사, 피고인, 변호인과 제30조제2항에 규정한 자의 청구에 의하여 결정으로 구속을 취소하여야 한다.
15)이 결정은 대법원 발간 법원공보 1992. 3. 1.자(915호), 819쪽에 실려 있다.
16)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불심검문) ① 경찰관은 수상한 거동 기타 주위의 사정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또는 이미 행하여진 범죄나 행하여지려고 하는 범죄행위에 관하여 그 사실을 안다고 인정되는 자를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다.

②그 장소에서 제1항의 질문을 하는 것이 당해인에게 불리하거나 교통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질문하기 위하여 부근의 경찰서·지구대·파출소 또는 출장소(이하 “경찰관서”라 하되, 지방해양경찰관서를 포함한다)에 동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당해인은 경찰관의 동행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개정 1988.12.31, 1996.8.8, 2004.12.23>

③경찰관은 제1항에 규정된 자에 대하여 질문을 할 때에 흉기의 소지여부를 조사할 수 있다.

④제1항 또는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질문하거나 동행을 요구할 경우 경찰관은 당해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를 제시하면서 소속과 성명을 밝히고 그 목적과 이유를 설명하여야 하며, 동행의 경우에는 동행장소를 밝혀야 한다. <개정 1991.3.8>

2항의 규정에 의하여 동행을 한 경우 경찰관은 당해인의 가족 또는 친지등에게 동행한 경찰관의 신분, 동행장소, 동행목적과 이유를 고지하거나 본인으로 하여금 즉시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여야 하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하여야 한다. <신설 1988.12.31>

2항의 규정에 의하여 동행을 한 경우 경찰관은 당해인을 6시간을 초과하여 경찰관서에 머물게 할 수 없다. <신설 1988.12.31, 1991.3.8>

⑦제1항 내지 제3항의 경우에 당해인은 형사소송에 관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신체를 구속당하지 아니하며, 그 의사에 반하여 답변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신설 1988.12.31>
17)서울민사지방법원 1992. 10. 15. 선고 92가단58883 판결, 이 판결은 하급심판결집 1992(3), 230면에 실려 있다.
18)심지어 사주의 인권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던 조선일보도 1992. 10. 16.자 31면에서 “不法구금 賠償판결 영장없는 연행 등 수사관행 쐐기” 라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19)이 판결은 법원공보 1994. 1. 15.자(960호), 185면에 실려 있다.
20)[시행 1997. 1. 1.] [법률 제5054호]
21)[시행 1994. 1. 5.] [법률 제4708호, 1994. 1. 5., 일부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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