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 인터뷰] 다만 사람을 사랑한다 – 송경동 시인 인터뷰

2012-02-29

 

[민변의 인터뷰]








다만 사람을 사랑한다


– 송경동 시인 인터뷰 –








인터뷰_유신혜 변호사


정리_출판홍보팀 7기 인턴 윤다정


사진_정영미 간사






  지난 2월 23일(목), 민변 사무실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송경동 시인과 콜트·콜텍, 기륭전자 노동자들이었다. 송 시인이 희망버스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된 지 14일만이다. 당초 송 시인의 수술 일정 때문에 녹색병원에서 이루어지기로 예정되었던 인터뷰는, 콜트·콜텍 대법원 판결 선고 일정에 따라 서초동을 방문한 송 시인의 일정에 맞추어 민변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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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콜트·콜텍 대법원 판결이 있었어요. (두 회사를) 법인분리를 시켜놨거든요. 하나는 전자기타 공장, 하나는 통기타 공장으로 분리해놨는데 오늘 오전에 콜트는 이겼어요. 콜텍은 조금 위험하네. 오후 2시에 (대법원 판결이) 또 있는데. 오늘 무슨 날인가보네. 현대차 비정규직 근로자 지위확인소송 대법원 판결이 또 있고. 오늘 아주 중요한 날인 것 같은데.(웃음)”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어 인터뷰에 응한 송 시인은 오후에 있을 콜트·콜텍 대법원 판결을 못내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대법원 판결이 오전과 오후에 각각 진행되는 이유를 인터뷰 도중에 잠시 설명하기도 했다. 걱정스러운 낯빛에 웃음을 띠는 송 시인의 얼굴은, 그러나 결코 어둡지만은 않았다.










시인 송경동




(민변) 문인을 꿈꾸는 다른 사람들처럼 등단이라는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고 ‘거리의 시인’이 된 이유가 궁금하다.
(송경동-이하 “송”) 어려서 말더듬이였던 게 계기가 되었지요. 혀가 어렸을 때 잘못되어 굳는 바람에 말을 다른 친구들에 비해 훨씬 늦게 배웠어요. 고등학교까지도 글 읽는 시간이 되면 손발에 땀이 났지요. 제가 일어서서 글만 읽으면 친구들이고 선생님이고 다 웃어버리니까요. 그게 늘 스트레스라 집에 오면 글 읽는 연습을 하곤 했어요. 말을 못하니까 안에 말이 쌓이잖아요. 나도 아름답게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꿈이 생겼죠.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 무슨 말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꿈이 자연스럽게 문학, 글쓰기에 대한 꿈으로 발전하지 않았는가 싶어요.
또 알려졌듯이 집안 환경이 어둡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꾸 위악적인 소년, 불량소년으로 빠지더라고요. 소년원에서도 살아봤고, 나와서는 자연스럽게 노동자가 되었지요. 지금 와서는 그게 참 소중했던 삶의 길이었다고 생각해요. 소외되고 배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을 수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곧 나이기도 했고요. 소위 ‘노동현장’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곤 했어요. 정말 순박한 사람들인데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 자연스레 구조적인 삶의 모순을 느꼈습니다.


노동과 현장 생활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문학은 삶의 탈출구이기도 했어요. 기계처럼 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삶인데 조금은 인간적인 일을 해 보고 싶었지요. 그 소망이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글쓰기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글쓰기의 내용은 저처럼 소외되고 배제당하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고요.
그러다가 노동자문학회를 만났어요. 구로노동자문학회라는 곳에서 20대 초반에 활동했는데 저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기존과) 다른 문학을 꿈꾸었죠. 그 곳의 모토가 무엇이었냐 하면 시인·소설가가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은 등단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어요. 도제 수업 받듯 하면서 특별한 사람만이 시인·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시인·소설가의 마음을 갖고 살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저도 자연스레 등단과 같은 절차를 벗어나서 ‘거리의 시’를 좇게 된 것 같습니다.




(민변) ‘거리의 시인’이라는 별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송) ‘시의 마음’이라는 게 어떤 것일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시인이라는 것은 일종의 무당 같은 일이라 생각해요. 다들 노동하면서 열심히 사는 세상에서 시인이란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노동과 일 속에서 생겨나는 꿈과 희망, 좌절, 그리고 공동체가 가진 열망이 무엇일까를 포착해서 대변하는 역할일 거예요. 때문에 아직도 자기 말이나 자기 권리를 찾지 못한 몸들이 어렵고 힘들게 절규하는 거리나 광장과 같은 곳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지요. 사회가 완전히 해방된 사회가 되었다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아직도 자기 권리를 충분히 얻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을 때에는 그런 곳에 같이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거리의 시인’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을 쫓아다니고 거기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 같아요. 현장에서의 제 역할은, 가끔가다 열리는 문화제에 프로그램이 많이 없어서 시낭송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거리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또 대부분의 시를 거리에서 많이 읽고 쓰기도 했고요.


사실 거리라는 게 만들어지지 않은 어떤 미래에 대한 구체상이 논의되고, 어렵고 힘들게 한 발 한 발 만들어보고, 실현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가는 그런 공간이잖아요. 사회가 늘 평화롭고 평등하고 모든 게 행복하다면 좋겠지만 아직 그렇지 않은데, 새로운 민주주의와 미래에 관한 억눌린 꿈을 펼치는 거리·광장은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그 공간에 제가 참여해서 느끼고, 배우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저 스스로에게 영예로운 일이지요.




(민변) 본인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송)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나이를 그 사람이 살아온 햇수만큼으로만 생각하는데, 오히려 한 사람에게는 인류의 역사와 시간이 축적되고 연결되어 전해져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존귀한 존재이고, 모든 사람의 생명 하나하나가 굉장히 소중한데, 그 사람들의 생의 환희나 생의 기쁨이나 행복을 충분히 누릴 수 있어야 좋은 세상이겠지요. 알다시피 저희 사회는 전혀 그렇지 못하죠. 어쩌다보니 한국사람 평생의 꿈은 정규직 일자리 하나 갖는 것, 어떻게 해서든 남을 짓밟고 기회를 빼앗아서라도 그 자리를 얻는 것, 내 아파트 하나를 내 이름이나 가족 명의로 가져보는 것이 되었어요. 이게 정상적인 모든 인간들에게 행복한 사회일까요? 그렇지 않거든요.


그 원인이 되는 게 자본주의 문화와 논리지요. 수많은 사람의 노동의 결실이 그들에게 돌아가 재생산되거나 그들이 자기 주변을 가꾸는 데 돌아가지 않고, 초과이윤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소수에게 몰아지잖아요. 그런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각종 비민주적인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야 하고, 늘 착취당하고, 부족하고, 결핍이 생기는 게 삶이 소외되는 과정이죠. 그런 구조 하에서 모든 인간이 생을 만끽하고 자유로이 발전할 수 없는 사회를, 즉 역사적 자본주의라고 하는 운영원리를 넘어서서, 모두가 노동한 만큼 그걸 받아서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고 있어요. 막연하지요.(웃음)


최소한 자본주의의 사회적 구조를 넘어서는 사회로 가야겠지요. 한국 재벌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자금, 사내유보금만 해도 80조라고들 얘기하는데, 제가 듣기로는 한 800조 된다고 알고 있어요. 그게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아옹다옹하지 않아도 되고, 그 많은 시간을 힘들게 장시간 노동하지 않아도 되고, 적은 금전 때문에 친구나 가족과 의를 상하지 않아도 되고, 남의 것을 뺏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고, 오히려 자기를 충분히 표현해볼 수 있는 창조적 활동들에 자기 시간을 쓸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민변) 산문집 제목이 《꿈꾸는 자 잡혀간다》인데, 제목이 이렇게 지어진 이유는.
(송) 제가 지은 게 아니에요. [편집부에서 지었는지.] 네, 그렇죠.(웃음) 5년 전에 내기로 출판사와 계약된 책인데, 계속 원고 정리를 하려고 들다 보면 기륭 현장에 가 있고 그랬지요.


제가 생각한 제목은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였어요. 경기도 고양시의 한 붕어빵 노점상인이 가로수에 목을 매달고 돌아가신 적이 있어요. 노점상 철거 과정에서 좌판은 철거반원에게 짓밟혀서 리어카도 다 부서졌지, 새벽에 나가도 일용직도 못 구하지, 그래서 너무 분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 분을 위해 쓴 시 제목이었어요. 흔히 얘기하는 시 문화의 삶의 끄트머리라도 느끼며 살 수 없는 인생들 편에 편파적으로 서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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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본인의 시 중 사람들이 꼭 읽기를 바라는 시, 특히 애착이 가는 시가 있는지.
(송) 다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죠.(웃음) 다 애착이 가지요. 왜냐하면 제 시는 제 것이 아니거든요. 제가 쓰긴 했지만, 그건 하나하나의 현장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과 사건 하나하나가 사실 굉장히 힘든 과정이었어요.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쓴 <너희는 고립되었다>라는 시가 있어요. 64만 8천원 받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 앞에서 1800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천막생활을 했던 이야기지요. 故하준근 열사와 같이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도 많이 썼어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라>라는 시는 포항에서 건설 일용노동자로 살다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포스코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경찰 폭력으로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였지요. 뉴코아,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있고요. <이 냉동고를 열어라>라는 시는 용산참사 이야기예요. 희생자 다섯 분이 평지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쫓겨 올라갔다가 강제진압 과정에서 불타 돌아가셨는데, 일 년 간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냉동고에 시신이 넣어져 싸우던 내용을 담았어요. 누가 망루에서 불을 점화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요.


이 모든 게 제 얘기가 아니잖아요. 제가 지어서 써낸 시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잘 썼다 잘 못 썼다, 애착이 간다 안 간다를 상품처럼 판단하기 이전에 한 편마다 민중들의 삶의 이야기가, 눈물이, 절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삶과 사람은 소중하므로 그걸 담은 시도 다 똑같이 소중하다는 말씀이신지.] 네, 그렇죠.


진짜 이유는 제가 빼어난 시를 못 써요. 그래서 좋은 시 한 편을 꼽을 수가 없네요.(웃음)




(민변) 본인이 시인이 되는 과정에서 멘토가 된 문인이나, 특별히 좋아하는 문인이 있는지.
(송) 김남주 선생을 좋아합니다. 한국문학예술대학이라는 비인가 학교가 있었어요. 진보적인 문학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김남주 선생, 이시영 선생, 이런 분들을 우연히 잘 만나서 문학 공부를 하게 됐죠. 당시에는 주점에서 12시까지만 술을 팔 수 있도록 영업이 제한되었는데, 맨날 단골 맥주집에서 셔터 내려달라고 하고 안에서 촛불 켜고 술 마시고 노래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과정에서 배운 게 많아요. 제가 쓰고자 하는 시가 그런 세계나 사람들과 연결되다 보니, 김남주 선생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그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김남주 선생의 육성을 녹음한 시 테이프가 있어요. 문득 힘들 때면 그 테이프를 듣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김남주 선생의 단순하면서도 단아한 육성이 제 머릿속에 가끔 들려요.






거리에 선 송경동




(민변) 추도시 낭송 도중 분을 참지 못해 무선마이크를 두 번이나 내동댕이쳤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처럼 타인의 불행에 절절하게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공감능력이 크고 깊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본인의 성격에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일지.
(송) 제가 누구보다도 성격이 좋고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태도인 것 같아요. 사실 그런 자리(투쟁 현장)나 노동자들 곁에 있을 때 저도 모르게 기억나는 것은 저의 삶이거든요. 제가 노동을 할 때 이런 겨울에는 솜바지를 입고도 안에 내복을 두 개씩 껴입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허리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면 그게 힘들고 추웠던 이런 저의 삶이 생각나요.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문학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보따리 하나 싸들고 당시 돈으로 3만원을 들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주로 지하철 공사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했지요. 거기 함바(숙소)가 있거든요. 지금은 지하철 공사가 많이 끝났지만 당시에는 서울시내 전역이 지하철 공사장이었거든요. 작업복도 시커멓고 나도 시커멓고, 거기다 흙 파면서 땅 속에서만 사니 내가 꼭 바퀴벌레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몇 년 이 현장 저 현장을 떠돌며 일하고 먹고 자면서 살았죠. 이런 지하철공사장이나 석유화학단지에서 일할 때에는 건물 지을 때 골조 올리는 H빔을 타고 걸어 다니면서 종일 일해요. 위아래로는 다 허공이에요. 옆에 빔들이 있지만 뛸 수는 없는 거리고요. 한번만 헛디디면 죽는 거거든요. 원숭이처럼 거기서 무거운 쇳덩어리들을 지고 오가며 일했죠. 그런 때 느낀 서러움과 서글픔 같은 것들이 제게 다가와요. 비슷한 일을 당하는 사람, 그런 일 때문에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면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거죠.


제가 남들보다 인성이 좋고, 누구보다도 연대의 마음이 강하다기보다는 살아온 길에 느낀 소회, 아픔, 외로움과 같은 것들이 제 안에도 있는 거죠. 그것들이 현장과 사람과 사건들과 공명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살았고, 그런 아픔이 아직도 내 안에 해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지요.


마이크를 던졌던 것은 故정해진 열사 영결식에서였어요. 인천 전기원노동자였는데 분신해서 돌아가셨죠. 전봇대 타시는 분들이 과거에는 정규직이었는데 지금은 다 비정규직이에요. 그 분 장례식에서 시를 읽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모행사가 다 쇼 같고, 분위기를 잡고 폼을 잡고 (시를) 읽는 나도 쇼를 하는 것 아닌가 싶고. 근 십년간 60여명 넘는 열사들의 추도시를 쓴 것 같아요. 절 거리의 시인이라고들 하지만 추도시 전문 시인이라고 해야겠죠. 늘 돌아가신 이후에 폼을 잡고 추도시나 읽고 있는 데 스스로 모멸감을 느껴서 저도 모르게 시 낭송을 마치면서 마이크를 집어던졌어요. 그러려고 올라간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겠어요. 퍼포먼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경우가 두 번 있었죠.




(민변) 시인으로서 살려면 주변 상황과는 상관없이 순수성을 유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뿐만 아니라 함께 활동하는 사람을 모두 포함한 주변의 위선과 기만 안에서 본인을 지키려는 노력은 어떻게 하는지.
(송) 힘들죠. 가끔 저도 현실과 타협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늘 생계가 힘들다보니 조금은 편해지고 싶고, 돈이라도 좀 버는 자리와 계기를 얻고도 싶어요. 저도 평범한 인간이에요. 자연스러운 욕망에 많이 흔들리지요. 제가 겉으로는 성인군자처럼 옳은 일만 하는 것 같지만 제 안에도 자본주의의 잘못된 문화나 습관 등이 많이 들어와 있어요. 그 속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부분을 주로 선택하려 하고 먼저 말하려 할 뿐이지, 제가 해방된 사회의 개인처럼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 사회를 겪었는데 왜 안 그렇겠어요. 웬만하면 좀 더 인간적인 선택을 하려 노력할 뿐이죠.




(민변) 외람된 질문이지만, 혹시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해 본 일이 있는지.


(송) 어떤 인간으로 태어나도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잖아요. 최소한의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것들이 (재벌들) 안에도 있을 거예요. 그것들이 발현될 수 없도록 구조와 환경이 막는 거죠. 평생 살면서 내가 누구인가, 우리가 누구인가, 역사가 무엇인가를 접하거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도 소외되고 불행한 삶이라 생각해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다움을 충분히 표현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거니까요. (만약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행복하게 보여도 그렇게 소외된 삶을 살았겠죠.




(민변) 대추리, 기륭전자, 삼성반도체, 용산, 콜트, 최근에는 한진중공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현장에 연대하면서 가장 큰 희망을 얻었던 순간이 있다면?
(송)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느낄 때겠지요. 상황만 놓고 보면 다 어려운 곳이거든요. 대추리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주한미군의 지위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주한미군 나름대로는 세계적 계획 속에서 추진한 것이고, 거기에 한국 정부도 무조건 따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걸 막을 수 있을까요? 연세가 70~80대인 대추리 주민 백여 명이 이길 수 있을까요? 해답이 잘 안 보이는 싸움이잖아요. 삼성반도체도 노동자 50여명이 의문사했지만 꿈쩍도 안 하고요. 용산참사도 사실은 서울 시내에만 백여 군데, 전국적으로는 육백여 군데 되는 재개발, 재건축, 뉴타운 사업과 같이 가는데, 그 사업이 모두 부동산 투기 붐을 통해 배를 불리려는 건설자본 나름대로의 큰 계획이죠. 용산에서 뭔가를 내어준다면 그런 계획 자체에 대한 전면적 수정이 있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니 결과적으로 용산 싸움이 잘 안 풀린 거죠. 콜트·콜텍은 6년째 투쟁중이고요.


다들 실질적인 해답을 찾고자 하면 현실적 전망으로는 못 가는 곳, 쉽지 않은 곳이에요. 거기에 가서 보게 된 건 작은 꼬뮌(commune) 같은 사람들의 공동체죠.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 하나 없는 콜트·콜텍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그대로 6년째 정리해고 법안에 대해 싸우고 있는데, 저만한 민주주의 투사들이 어디 있겠어요. 정리해고 문제는 본인들의 기본적인 생존권 문제지만 수백만 명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도 해요. 노동자들은 위로받을 대상, 불쌍하니까 도와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누구보다 앞장서서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진전을 위해 싸우는, 우리 모두가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희망을 느끼죠. 현장에 안 가 보면 그런 걸 느끼기 힘들어요. 거리를 두고 볼 땐 숫자 몇 명으로 보이지만, 직접 나가서 보면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견디고 싸워 나가는지 알 수 있어요.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 감동스럽고, 인간다움이 살아있는 이 모습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변) 투쟁이 장기화되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고, 이익 문제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분쟁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순간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송) 역사의 발전 과정을 5년, 10년 단위로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수십 년 걸릴 수도 있고 수백 년 걸릴 수 있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하나의 건에 대한 승리나 패배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투쟁 과정에서 무엇을 남기고 얻을 것인가가 소중하다고 생각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 제도, 기구, 교육, 이데올로기 등 온갖 것들이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위해 쓰이는 사회에서 소수의 노동자 민중들이 하나의 사업장에서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죠. 사실 내용적으로는 다 패배죠. 전면적인 사회구조의 변화가 있지 않은 이상 모든 노동자 투쟁은 패배의 연속일 수밖에 없어요. 온전한 승리란 없고.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도 309일 동안 목숨을 걸었지만, 그 아래층에 올라왔던 사람들(사수대)도 근 200일을 목숨 걸고 싸웠어요. 2차 희망버스 가기 전에 현장탄압이 날마다 심각하게 벌어질 때, 침탈이 들어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한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해서 기껏 얻어낸 게 정리해고 요건 없고, 일 년 후에 복직시키겠다는 판결인데, 사람들이 굉장히 허탈해했어요. 물론 현재로서는 이 정도 성과가 작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이거 하나 얻자고 이 사람들이 이 순간에 목숨을 걸었나 싶을 수 있거든요.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도 2008년 당시에 96일 동안 단식했거든요. 그렇게 싸우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2010년도에 다시 싸우면서 저와 함께 포크레인에 올라서 점거농성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받아낸 게 뭐냐 하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예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따낸 근래 거의 유일한 사례니까 그것도 엄청난 거죠. 그런데 그 정규직화의 내용이 뭐냐 하면 고용기간만 보장하는 거지 임금은 120만원 정도예요. 공장에 들어가면 진짜 사원이 되어서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뼈빠지게 일해야 하고요. 이런 삶이 승리일까요? 사회에서는 충분치 않은 거예요.


그렇게 싸워가면서 왜 이럴까, 이제 우리에겐 어떤 꿈이 더 필요할까, 이런 식으로 꿈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과정이 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씩은 좋아지겠죠.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민변) 긴 안목을 가지고 순간순간을 버텨야 한다고 하셨는데, 고통을 느끼는 것은 매 순간 연속된 과정일 것이다.
(송) 말도 못 할 때가 많죠. 답이 없으니까요. 상황은 구체적이잖아요. 동지끼리 장기투쟁 하다가 마음이 상해서 서로 얼굴도 안 보려고 하고, 서로 마음의 상처가 심하고, 이걸 무슨 말로 어떻게 풀어 볼 수 있나 싶어요.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죠. 현장에서는 이런 일, 떠나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예요.


기륭전자 투쟁은 처음에 200여 명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함께했지만, 장기투쟁이 되면 한 달에 64만원 받던 노동자들이 돈 한 푼 안 나오는 데서 어떻게 버텨요. 붙잡지도 못하죠. 그럴 때의 안타까움과 가슴 아픔, 이런 걸 말로 다 할 수가 없죠. 자꾸 그런 현실에 지다 보면 답이 없는 게 아닌가, 방법이 없지 않냐, 이렇게 싸워 뭐가 남는가, 하다 보면 역사에 대한 회의에 빠져서 자칫 전체를 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늘 이겨도 외롭고 지면 더 외롭고 그렇겠죠.


어느 시인은 세상이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시가 쉽게 쓰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자기에게 되묻는 글을 썼는데, 시대나 사회가 주는 괴로움을 버리고 나의 행복만을 찾으려는 순간 현장에서는 멀어지겠죠. 물론 괴로움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현장을 버리고 떠난다고 행복해질까요? 10억을 가진 중산층이라고 해서 행복할까요?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행복할까요? 안 그렇잖아요. 인간적 고뇌를 말로 하지는 않지만, 다들 괴로워도 현실에 살게 되잖아요. 이 세계 어디에서든 인간으로 살며 최소한의 양심과 의식을 버리지 않으려면 누구든 인간적 고뇌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바보나 악한이 되지 않는 한.


저 같은 경우에는 역사가 무엇인지, 투쟁과 저항이 무엇인지를 보았는데, 거기에 눈을 감고 돌아섰을 때 내가 그걸 참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괴로울 것 같아요. 그럴 바에는 오히려 이걸 느끼면서 살죠.




(민변) 최근 가장 관심 깊게 보고 있는 사안은 무엇인지.
(송) 희망버스라는 운동이 어떻게 다른 사안과 연결되고 진화해야 할지, 이 운동이 한국사회의 어떤 전면적 변화와 맞물릴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아요. 중요한 시기에 한국사회가 도달한 것 같거든요. 87년 절차적 민주주의 체제가 쭉 몇 십 년 이어져 왔지만, 내용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구조조정, 정리해고가 만연하여 민주주의가 전면적으로 후퇴했다고 생각해요.


전 세계적으로도 월가 점령시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에서는 새로운 혁명의 바람이 불고, 다보스포럼에 모였다는 전 세계 자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스스로 고민할 정도로 세계적 모순이 심화됐다고 생각해요. 어떤 식이든 인류나 세계는 퇴행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수십억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모순을 느끼고 있으니 더 나은 사회로 갈 거예요.


한국 사회도 지금 그 지점에 놓여 있는 거죠. 전과 다르게 보수 여야가 나서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만들 것처럼 공약을 내세우는 변화가 생겼잖아요. 여기서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이 전면적으로 사회의 주인이 되는 체제나 구조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반(反) 이명박에서 정권만 민주당으로 바꾸는 것이 시대적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노선을 폐기하고 거기에 다른 사회 운용 원리가 들어서야 하는 때에 와 있는 거죠. 이걸 자꾸 기만하고 눈감게 만드는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역사와 노동자 민중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해요.




(민변) 시인으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본인이 생각하는 역사적 과업이 있다면.


(송) 지금까지처럼 살 수 있다면 저에게 고맙겠지요. 20대에 가졌던 순박한 꿈, 조금은 깨끗한 열망을 잃지 않으면 좋겠어요. 일을 하고 나이를 먹어 삐걱이는 몸으로도 언제까지나 힘과 연대가 필요한 사람들 곁에 겸손하게 함께일 수 있으면 고마울 거예요.




(민변) 시를 쓰는 목적에는 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는 팩트를 전달하거나, 외부적으로 선동하거나, 내부의 결속력을 조직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시를 쓰는지.


(송) 시를 쓰면서 여러 가지로 고민을 많이 해요. 지면을 통해 발표되는 시와 현장에서 즉석으로 낭송하는 시는 다른 것 같아요. 지면에 실린 것은 두고두고 읽을 수 있지만, 현장에서 낭송하는 시는 순간의 교감이 소리로만 전달되는데, 이 때 공감을 형성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피곤하고 지루하게 해요. 그래서 시가 잘 전달되는 방식이나 의의를 고민하게 되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꿈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잡아내서 시에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현장에서 분노든 아픔에 대한 공감이든,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려면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많이 고민하죠.




끝으로




(민변) 인터뷰를 보게 될 민변 회원들 및 그 밖의 독자들에게 한 마디.
(송) 열심히 살겠습니다.(웃음)


작년에 희망버스를 기획하며 만난 사람들이 다 좋았던 것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꿈꾸기를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에요. 우선 한진중공업이라는 사유재산을, 자본의 벽을 넘어 보았지요. 담 넘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크고 넘기도 힘든 그 담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넘어 들어갔어요. 자본의 벽뿐만 아니라 늘 그 곳을 지키는 공권력의 벽도 있었는데 그 투철한 벽을 넘으려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요.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던 것 같아요. 가면 누구나 함께 주인이 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을 만들고, 그 곳에 가서 함께하고 싶다는 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 같아요.


그 힘이 굉장했잖아요. 1~2만 명 규모의 집회는 일 년에도 여러 차례 있어요. 그런데 희망버스는 같은 1~2만 명 규모의 시위 군중이었지만 전혀 다른 사회적 주체들이 다른 표현 양식으로 일어났죠. 그러면서 한국 사회의 담론 지형에 질문을 던지고 다른 방향을 주었어요. 그게 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꿈, 한발 내딛음이 모인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기성의 것들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것들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고, 꿈을 좀 더 키워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송경동, 노동자 송경동, 노동운동가 송경동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굳이 그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의 말대로 ‘무당’이 적절할 것이다. 무당은 영혼을 몸속에 받아들여서 영혼의 한을 대신 풀어준다. 송 시인은 천대받고 소외된 이웃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웃들의 한과 절규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정제된 언어로 이야기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 모든 작업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철저한 인간애(人間愛)다. 괜찮으니 다 잘 될 거라는 무책임한 낙관주의와는 또 다른, 패배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긴 안목으로 역사를 보려는 긍정의 에너지가 송 시인의 주변을 밝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 빛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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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개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몸속의 불순물을 진주로 바꾸듯, 송 시인은 슬픔과 눈물을 품어 아름다운 시를 쓴다. 그가 만들어낸 진주가 투쟁 현장을 넘어서 자본주의의 모순에 빠진 한국 사회 전체에 아름다운 희망의 빛을 뿌릴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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