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 인터뷰] ‘길 위의 신부’ – 문정현 신부님 인터뷰

2011-02-28


민변의 인터뷰, 문정현 신부님


인터뷰 : 출판홍보팀 이재정 변호사
사진 : 출판홍보팀 염용주 5기 인턴
정리 : 출판홍보팀 박형우 5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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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명동 성당 서각대 옆에서 뵙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기도와 서각 작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명동성당에 대한 애착이 크지. 1974년 긴급조치 9호로 감금되었는데 활동 근거지가 바로 여기 명동 성당이었어. 1975년 3월 1일에는 ‘민주 구국 선언’이 있었어. 사제단 일은 아니었지만 미사를 계획했었고, 미사 직후에 구국 선언을 발표했어. 이로 18명이 기소, 11명이 구속되고 이 중에 나도 있었지. 또 조성만 사건(군사 독재 정권 퇴진, 88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유서를 남기고 옥상에서 투신), 박종철 사건(수사관이 탁자를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 일화로 유명) 등도 있었지. 결국 명동 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야.


또 명동 성당은 ‘피신처’이자 ‘해방구’였어. 경찰이 들어와서 잡아가지 못했으니까. 용산 참사 때도 3명이 탈출해서 영안실에서 3개월을 지냈거든. 그런데 최근에는.. 발 붙일 데가 없네. 4대강 사안 때 일이 있었어. 4대강 공사저 활동을 위해 성당으로 들어오게 됐었지,  4대강 사안은 주교회의가 결의한 사안이고 단식 농성, 미사를 한다는 내용이었지. 그 와중에 서울 교부 관리국 신부 말이  “여기는 영업소입니다. 영업 방해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거야. 사제들의 기도 행위인데 영업 방해라고 하니 아연실색할 수 밖에. 도저히 용납이 안 돼.


그 뿐이 아니야. 6월 31일 위원회 대표들이 신자들과 사제들 사이에 개입해서 사제들에게 “여기서 미사하시면 안됩니다, 우리 성당 지켜야합니다.”, “여기서 미사를 보시려거든 옷을 벗고 하십시오”라고 해. 사제복을 벗으라는 말인데,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어. 천주교의 교리로 사제 서품을 받으면 영원한 사제잖아. 어떻게 사제 옷을 함부로 벗겨.


사용자 삽입 이미지김정일도 아니고 무슨 명동 성당 위원회가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서 마지막 미사 드리고 우리 사제단에서 공식 문건을 전달하고  해명도 했지. 그 이후로 나는 단식 농성을 끝냈고 다른 일도 많았어. 오사카, 오키나와도 갔다오고.


그런데 그 이후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더라고. 기도를 통해서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2010년 8월 10일부터 1인 기도회를 시작하게 된거야. 다음 주일이 정확히 200일째가 되네. 오전에는 기도하고, 오후에는 서각하고 있지.


Q2. 역사를 알고 상식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라면 아직도 명동 성당이 ‘해방구’라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성직자들의 응대는 차갑다고 느끼셨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메아리가 없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메아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명동 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라고는 하지만 그 과정과 내용은 제외하고 이야기하잖아. 빼앗긴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오늘날 명동 성당이 역사적 사실 때문에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돼.


Q3. 정치와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논리가 만연해있는데.. 신부님이 보시는 종교는 무엇인가요?


내가 여기 있으면 내 이름과 이 생김새로 표현되잖아. 부서진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구분할 수 없지. 탄압받고 상처받는 자가 있으면 교회가 이들을 포용해야 하는 거야. 물론 교회가 말의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다를 수야 있지.


마치 영과 육을 갈라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어떻게 종교와 정치를 갈라놓을 수가 있나. 분리할 수는 없어. 종교는 더더욱 함께 가는거야.


기존 논리가 정·교를 가른다면 그건 독재자의 논리고, 관리자의 당치 않은 논리야. 유신 때 김종필이 로마서 인용하면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지.


우리가 종교 밖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배워야 하고, 함께 해야 하는거야. 돌아만 보면 가야할 데가 많잖아. 입으로는 아무 소용 없어. 지식도 소용 없어. 함께 가야하는 것이지. 글도 자기 행동에서 나와야 돼. CTRL+C, CTRL+V 해서 무슨 소용있어.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힘이 있잖아.


기독교, 원불교 따질 일이 뭐가 있어? 정치도 함께 가야 해. 진정한 정치가 너무 오래됐어.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전유물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Q4. 문 신부님 하면 ‘길 위의 신부님’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다가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되셨나요?


내 낙관도 ‘길 위의 신부’야.(웃음) 2002년 MBC에서 ‘길 위의 신부’라는 다큐로 MBC 스페셜을 1시간 정도 방영한 적이 있었어. PD 사무실에서 제의를 해서 나를 한 달을 찍어댔는데, 이 사람들이 테이프로 120개를 찍었다나. 그리고나서 더는 못하겠다는 거야. 아침에 눈 뜨면 매향리 가있고, 다른 날은 8군 정문에 있고, 비오는 날에도 나가있고, 길 위에서 자고.. 그래서 편집 작업을 하던 사람이 딱 보고 “길 위의 신부구먼.” 했다는 거야. 그래서 타이틀이 ‘길 위의 신부’야. 근데 그게 싫지 않고 좋더라고. 이 명칭이 나를 끌고 가기도 해. 집에 편하게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어도 돼? 나는 길 위에서 살아야지.’ 이게 나를 끌고 가고,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고 하니까.. 나는 꼼짝없이 그렇게 살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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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1. 최근에는 ‘길 위의 신부’에서 ‘가을의 신부’로 업그레이드 하셨던데.


송구러스러워서 몸둘바를 몰랐어. 인권 재단 ‘사람’에서 박래군이 와서 무슨 콘서트를 한다는거야. “신부님 인권 센터를 하나 내려고 하는데 신부님 이름을 팔아서 하려고요.” 하더라.(웃음) 그래서 “인권 센터 있으면 좋지.” 하면서 허락했어.


그러고 보면 인권 활동가들은 진짜 배고파. 대부분이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살아. 학교도 잘 나오고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인권 운동 하겠다고 식당 나가서 일하고 생활비 마련하더라. 변변찮은 일할 공간도 없고. 해서 적어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이 있으면 좀 낫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특히 박래군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싸우던 귀한 동지인데 그 요청을 뿌리칠 수야 있나. 가을의 신부라 길래 내가 갈 때가 되어서 그랬나 했어.(웃음)


Q5. 신부님의 개인사가 궁금합니다. 문규현 신부님도 동생되시고, 한 형제가 우리나라 현대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두 분이신데요. 부모님 이야기도 궁금하고요.


문규현 신부와 내가 나온 집안은 부모님, 외조부모님, 친조모까지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집안이야. 특이한 것은 1929년 한국 천주교 79분이 목자 위에 올라가 성인이 되셨어. 한국의 귀한 보혈이라고 해야 하나?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은 거지. 문규현과의 사이에 여동생이 있는데, 또 수녀야. 맨날 옷바라지만 했는데, 자기 동생과 오빠가 당당하게 사니까 ‘허리피고 살아라’라고도 말하더라.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 다섯을 신부, 수녀로 내놓는 것도 개의치 않으신 분들이야.


어머니가 특이하신 분이셨어. 배우진 못했지만, 신앙을 스스로 깨우치고 암기력이 좋아서 모든 기도문을 외워버리셨거든. 그 긴 기도문이 머리 속에 다 있어라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삶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셨어. 우리는 어려서 그런 어머니가 싫었어. 왜냐하면 방이라고는 아랫방, 윗방 두 갠데 일요일이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우리집을 차지하고 앉았거든. 미사 끝나고 저녁먹을 때까지 우리 집에 와 있어서 서 있을 데도 없었어.


예전에 상조가 없을 때 애경회라는 것이 있었어. 성당의 꽃이었지. 부모님이 가셔서 시신 다 수습해주고 막막할 때 무보수로 장례까지 다 해주는 거야. 그 오뉴월에 시신 한 번 만지면 시신 썩는 냄새가 집에 배고 그게 오래 가. 또 아버지 심부름을 매일 다녔지. 우리집도 쌀밥 못 먹는 없는 집이었는데 굶는 사람 집 솥뚜껑에 “밥을 가만히 두고와” 하셨어. 그 심부름 정말 오랫동안 했어. 하다 보니 그런 정신으로 이웃을 바라보게 되더라고.


밭에 붙어 살고 하면서도 초상났다고 하면 가서 일하시고, 돌아오시고.. 이것이 일상화 되어 있으셨어. 지금 생각하니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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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 이 기도가 어떻게 마무리 될 것 같으세요?


이 기도가 200일 정도 되어가. 3월 9일이 재의 수요일로 40일 동안의 사순절이 시작되지. 예수님의 순환과 죽음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기에 따로 떼어 설명할 수가 없어. 세상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음으로써 묻힌 게 아니라 죽음으로써 되살아난 동시적인 예수님의 삶.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야.


사용자 삽입 이미지여기 서각은 묵상하고, 성서 읽고 다시 묵상해서 나온 글귀를 따서 붓글씨를 쓰고 판거야.


예수부활대축일에 토, 일, 월 지금까지 만든 서각을 전시하려고 해. 전시와 판매? 내가 써서 파는 것을 돈으로 환산하기는 싫고.. 해서 판매라는 말은 좀 곤란하고. 내는 대로 받고 후원해야지.그리고나서 이제는 내 자리로 가야지. 내 자리는 4대강, 생태 문제야. 각자 마음에 파고 있는 4대강도 잘 점검하자.



Q7. 마지막으로 뉴스레터가 민변 내부에도 나가지만, 대 국민용으로도 나갑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미 이야기했지만, 과거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무엇이 되었든. 이 사회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헌신한 사람들의 가치, 그 분들의 희생으로 오늘이 있다는 점. 그 희생을 바탕으로 살아야만 밝은 내일이 약속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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