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기꺼운 소임’을 가진 윤복남 변호사가 사는 법

2023-04-03

윤복남 변호사님 회원인터뷰

인터뷰어 : 나대현, 허진선

문: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윤복남 변호사(이하 ‘윤’) : 안녕하세요. 저는 24년차 변호사입니다. 변호사가 되면서 바로 가입했으니 민변 회원이 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몇 년 전 20년차 회원이라고 해서 민변에서 감사패를 주셨는데 다른 상패는 보통 사무실에 두지만 민변 감사패는 집에 모셔 두었어요.(웃음) 현재 민변 집행부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고, 민변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및 법률지원 T/F(이하 ‘10.29 참사대응 T/F’)의 팀장입니다.

 

문 : 법무법인 한결의 구성원 변호사이신데 법무법인에서는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하시나요?

윤 : 특허 상표 저작권 같은 지식재산권 업무와 영업비밀 등 전반적인 기업법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문 : 변호사님의 약력을 보니까 물리학을 전공하셨더라고요. 물리학을 전공하시다가 사법시험에 응시하고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윤 : 저는 별을 좋아해서 사실 천문학과를 지망했었어요.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점수가 아깝다고 의대를 가라더라구요. 조금 부끄럽지만, 당시 저는 피가 무서워 의대는 정말 못가겠다고 버텼어요, 그러다 타협한 게 물리학과였죠. (웃음) 그렇게 물리학과를 갔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 80년대에 많이들 그렇듯이 저도 노동야학을 했습니다. 신당동에 있는 형제교회에서 야학을 하면서 청계피복노조 사람들을 많이 만났죠. 이후 노동운동을 하다가 활동을 정리하고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하니 어떻게 먹고 살까 고민이 됐어요. 저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당시 막막한 마음에 경제적인 타개책으로 변호사를 선택한 거죠. 그때 조영래 변호사님 평전을 읽은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변호사 하면서도 이렇게 멋진 일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원래 시작은 밥벌이였는데, 어떤 희망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과 선배 중에 조정식 선배님이 계신데, 그분께서 노동 현장에서 활동을 막 시작하셨다가 한 달도 안 돼 산재로 사망한 일이 있었어요. 그 일이 마음에 충격적으로 크게 남아서 제가 이후 어떻게 살더라도 그 선배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문 : 혹시 물리학 전공이 변호사 업무를 하시는 데에도 도움이 되시던가요.

윤 : 네, 도움이 되죠. 아무래도 제 업무 분야가 기술을 많이 다루다 보니까 기술에 대한 이해가 빠르면 좋거든요. 의뢰인으로부터 “변호사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해하세요?”라고 ‘칭찬’을 많이 듣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후배들에겐 특허나 지식재산권 업무를 하기 위해서 꼭 이과를 전공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해요. 제 사수가 정연순 변호사님인데, 정연순 변호사님도 문과거든요. 근데 특허 사건 꽤 많이 하셨고 너무 잘하셨어요. 제가 막 입사했을 때 정연순 변호사님 방에 사건 관련 정보통신 책이나 이공계 서적이 빼곡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만큼 사건에 대해 집중해서 보면 문과, 이과의 차이는 크게 중요치 않은 것 같아요.

 

문 : 자기소개에서 말씀해주셨듯 변호사가 된 직후부터 민변에 가입하셨다고 하셨는데, 민변과의 첫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신 건가요.

윤 : 저는 당연히 민변 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호사가 되자마자 스스로 가입신청을 했어요. 마음 한켠에 조영래 변호사님이 계셨고, 당시 저희 사무실 분위기도 그랬거든요. 쟁쟁한 선배님들 전원이 민변 회원인 사무실에서 새로 들어온 변호사가 민변 회원이 아니면 아마 이상했을 거예요.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문 : 민변 활동을 해오시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활동이나 사건이 있으신가요.

윤 : 비교적 최근이어선지 박근혜 탄핵 T/F 활동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촛불집회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기도 했고요. 제가 공판대응팀장이었는데 박근혜 전대통령 형사재판에 일일이 참석해서 모니터링하고, 대외적으로 언론 인터뷰도 하고, 탄핵 의견서도 썼어요. 당시 형사재판과 헌법재판이 따로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형사사건 증거들이 탄핵심판에 당연히 채택되는 구조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그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 싶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또 결과도 좋아서 보람찬 활동이었습니다.

 

 

문 : 이전에 민변 감사를 하셨고, 지금 집행부에서는 민변 부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특별한 계기나 과정이 있으실까요.

윤 : 달리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변에서 제안을 주셔서 하게 됐습니다. 그 때 히말라야 트레킹 후 하산하는 길이었는데, 통화불가 지대였음에도 용케 핸드폰이 울렸어요. 긴히 의논할 것이 있다면서 감사 선거에 나가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해주셨죠. 이후 부회장으로 연결이 된듯합니다.

 

문 : 변호사님께서는 “변호사는 ‘사회의 의사’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10.29 참사대응 T/F 팀장을 맡으신 것도 이러한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윤 : 사실 T/F 제안이 왔을 때 좀 망설여졌는데 그럼에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걷다 죽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참사 뉴스를 보고도 믿기지 않았고 너무 황당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날 그 이태원 골목에 나와 내 가족, 내 친구가 있었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후의 정부 대처나 대응 과정을 보면 어이없게도 진실은 왜곡되었고, 면피하기에 급급했으며, 일주일간 국가애도기간으로 다들 입 다물게 만들고 그냥 국화꽃만 든채 추모했으니.. 누구라도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 : 참사 초기에는 민변이 주축이 돼서 피해자와 유가족들 조력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시민대책회의를 통해서 결합하고 활동하는 범위가 더 넓어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현재 10.29 참사대응 T/F의 활동이 초기에 비해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윤 : 100일 추모제를 기점으로 민변 T/F는 1, 2기를 구별해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저희 활동에서 집중했던 것은 유가족들이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함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나아가 진실을 규명해 나아갈 주체로서 가족분들 모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유가족분들이 뿔뿔이 흩어져있는 상황에서 몇몇분이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했는데 적극 도움을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가족분들이 저희 민변 대회의실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하면서 첫 기자회견을 했을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저희 T/F는 100일 추모제 이전까지 유가족들이 협의회를 만드는 과정에 주력했습니다. 특수본 수사를 촉구하고 국정조사 기간 유가족 공청회를 도왔습니다. 이런 활동들이 기반이 돼서 100일 이후에는 좀 더 확대된 활동들로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시민대책회의의 활동력이 왕성하니까, 이제 100일 이후 2기에서 저희는 법률가로서의 활동에 조금 더 주력해도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재판 모니터링이나 특별법 제정 과정을 돕고, 추가 법률지원 활동을 하는 것으로 중심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 : 사회적 참사는 당사자는 물론 함께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 같아요. 10.29 참사대응 T/F 위원들께서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많으시겠어요.

윤 : 네, 처음엔 가족분들 만나면서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초기엔 우울증 증상이 생겨서 한의원 다니며 치료를 받았고 주변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어떤 트라우마나 부담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또 초기에 석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활동했을 때 다들 생업도 있다 보니까 지치고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민대책회의의 역량이 있기 때문에 저희는 2기를 선언했고, 중장거리 마라톤으로 생각하며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문 : 활동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이겨내시는 변호사님의 방법이 있으세요? 여가시간은 주로 어떻게 보내시나요?

윤 : 특별히 묘수가 있는 건 아니고, 가능한 유가족분들 마음에 공감하려고 해요. 그리고 저는 오래전부터 위빳사나 명상을 하는데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명상을 시작합니다.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다뤄서 요즘은 젊은 분들 사이에 많이 알려진 명상법이에요. 처음 시작한지 15년쯤 됐는데 한동안 놓고 있다가 다시 하게 되었고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트레킹을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때론 시간을 내서 많이 걷습니다. 코로나 직전에 히말라야를 정점으로 찍고 왔는데 요즘은 바빠 멀리는 못 가니 너무 아쉬워요. 또 드라마나 영화도 좋아하는데 온에어로는 못 보고, 여유있을 때 몰아서 정주행하는 편입니다. 최근엔 나의 아저씨와 미스터션샤인이 떠오르네요. 미국 로펌드라마도 몇 편 보았고, 요즘 넷플릭스 덕을 많이 봅니다^^

 

문 : 만약 변호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을 하고 계셨을 것 같나요.

윤 :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요. 하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다른 하나는 천문학자에요. 그런데 컴퓨터 프로그램 사건을 몇 건 다뤄 보니 프로그래머가 되지 않길 잘한 것 같아요. 결과물 자체는 세상을 이롭게 하니까 좋을 수 있는데, 혼자만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과정이 저에겐 외롭고 재미없었을 것 같거든요. 천문학은 여전한 저의 꿈인데, 몽골 트레킹에서 본 별 총총 하늘을 정말 잊을 수 없어요. 변호사가 아니라면, 아마 어디선가 천체망원경으로 밤새 별을 보고 있지 않을까요?….

 

 

문 : 변호사 은퇴 이후의 다른 꿈도 있으세요?

윤 : 저와 제 주변은 다들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은퇴하면 세계 시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있어요. 작고 아름다운 세상의 곳곳에서 한 3개월씩 살아볼 계획이에요. 불과 십 년전만 해도 내 나라를 떠나 사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코로나 시기였고 회사에 매어 사니 더 그렇지만, 나중에 여건이 되면 이곳을 훌쩍 떠나 자유롭게 살고파요. 또 아까 말씀드린 위빳사나 명상센터가 세계 각지에 있어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문 : 앞으로 변호사로서의 공익적 활동에 대해서 특별히 계획하고 계신 것이 있으신가요.

윤 : 탄핵 T/F도 그렇고 이번 참사대응 T/F도 그렇고 특별히 어떤 방향으로 마음을 먹고 해왔던 일은 아니었어요. 저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전문직으로 특화되어 있는 만큼 사회적 약자들을 도울 소명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변이 이미 자기 역할을 성실히 해나가고 있기에 민변 회원으로서의 공익적 활동은 기꺼운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끝으로 변호사님에게 민변이란.

윤 : 멀어진 꿈을 되새기는 곳이랄까. 젊은 시절 세상을 좋게 바꿔보겠다는 꿈이 있었고 저는 조영래 변호사님을 보면서 변호사가 됐는데요. 사실 변호사가 된 이후의 생활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죠. 그냥 주어진 일에 안주하고 있지 않나 반성도 됩니다. 민변 활동에서 만나는 변호사님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제게도 자극이 돼요.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되새기고 다시 찾게 해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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