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민변 ‘찐 덕후’, 김은진 회원을 만나다

2021-10-28 3

민변 ‘찐 덕후’, 김은진 회원을 만나다

 

2021년 제34차 총회에서 평생 한 번밖에 못 받는다는!(?) 신인모범회원상을 수상한 바로 그 변호사, 김은진 회원을 만나보았습니다. 어디에나 있다는 그 사람, 김은진 2인설, 3인설 등을 발생케 한 그의 활동 비결은 무엇일까요?

총회 때 수많은 꽃다발을 받은 김은진 회원

 

허자인(이하 “허”):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김은진(이하 “김”): 2020년 6월 8일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풋내기, 2년차 변호사 김은진입니다.

 

허: 몇 개의 활동을 하고 계신지 정말 궁금해요. 제가 들어가 본 모든 곳에 계셔요. 인터뷰 전에 민변 홈페이지를 찾아봤을 때, 변호사님께서 쓰신 기고문도 많이 봤어요.

김: 위원회는 5개 하고 있어요. 노동위, 여성위, 미군위, 디정위, 통일위. 그리고 사법센터 정보소위, 주택세입자 법률지원센터에도 참여하고 있고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국가보안법 폐지 TF 소속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무처 회원소통팀에도 있습니다.

 

허: 정말 두루두루 계시는군요!

김: 네, 방금까지도 회의를 하고 왔습니다.(웃음)

(김은진은 어디에나 있다.)

 

허: 노동위 수요모임 말씀이시지요?

김: 네. 그거 끝나고 회원소통팀 회의하고.

 

허: 약간 그런 느낌에요. 에스파는 4인조이냐 8인조이냐를 논할 때, 변호사님은 한 분이냐 두 분이냐를 논해야 할 것 같아요. 일종의 ‘김은진 팀’ 같은 게 있는 건가요?

김: 그렇지는 않고요, ‘민변의 김은진’과 ‘중용의 김은진’, 이렇게는 좀 구분되어 있는 것 같아요.

 

허: 어떻게 구분이 되어 있나요?

김: 민변의 김은진은 이제 사람들 만나고, 놀러 다니는 거 좋아하고, 행사 같은 걸 즐겨하는 따뜻한 사람이고요.

 

허: 그럼 변호사 김은진은…?

김: 골방에 처박혀서, 1일 1서면을 목표로….

허: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실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신가요?

김: 저는, 민변이 재미있어요. 약간 취미생활 같은 거예요. 전에 조세현 변호사님께서는 ‘쉬는 날엔 민변이다’, 이렇게 얘기하셨잖아요? 저한테는 취미예요. ‘덕질’의 느낌으로, 스트레스 해소도 하고요.

 

허: 코로나 시대에 변호사님을 민변으로 이끌어 주시고 활동하게 해 주신 분도 궁금하네요.

김: 추천인은 다산의 이주희 변호사님이에요. 제가 변호사시험 치고 나서 코로나가 터져서 외국 여행도 못 가서, 그냥 3월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근데 일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렇게 그냥 변호사로 살아가는 게 맞는 건가?’ 길고 긴 시간을 거쳐서, 고난의 길을 걸어서 변호사가 되었는데, 그냥 이렇게 살면 일반 변호사들이 생각하는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을 좇게 될 텐데, 그게 내가 변호사가 되려는 이유였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민변 활동을 하면서, 변호사로서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자 민변에 가입했어요.

 

허: 민변 1기 인턴이시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인턴을 하시게 된 거예요?

김: 그게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대학생이었는데, 그때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를 할 때 이명박 정부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을 하게 됐어요. 그때 연대 활동을 하면서 민변을 알게 됐고, 2008년 9월부터 2009년 2월까지 민변 인턴을 했어요. 그때 용산 사태가 있었고, 민변을 통해서도 그쪽 활동을 많이 하게 됐고요.

그 이후에는 2009년 여름 이후로 쌍차(쌍용자동차) 파업에도 참여했어요. 그때 권영국 변호사님을 뵌 게 기억나요. 제가 민변 인턴할 때 (노동위) 위원장이셨거든요? 쌍차 파업하는 현장에서 권영국 변호사님을 만나니까 너무 반가웠죠. 거기서 잡혀가셨던가…?(웃음) 그러면서 ‘여기 현장에서 실천하는 변호사가 있구나, 그리고 그게 민변 변호사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땐 서선영 변호사님, 송상교 변호사님이 계셔서 소통 많이 하면서 인권침해감시단 활동도 하고 그랬어요.

 

허: 원래 법대 진로를 잡거나, 변호사가 되기로 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김: 이게 너무… 진부해요… 여러분의 자소서에도 있을 것 같아요. 빠르게 얘기해드릴게요(웃음). 법학과는 그냥 점수 맞춰서 진학했고요. 제가 생각했던 대학생활의 캠퍼스는 서로 토론도 하고, 교수님과 어떤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법대 수업은… 그냥 책을 펴놓고 줄을 쭉쭉 긋는 거였어요.

너무 적응이 안 돼서 방황하면서 법학에 대한 꿈을 접었어요. 2학년 때 노조법 수업을 들었는데, 그나마 법에서 재미있었던 게 노동법이었어요. 그때 노조 전임자가 있다는 걸 알았고, 노조 전임자를 해야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노조 전임자가 되려면 먼저 노조원이 되어야 하더라구요?(웃음) 아무튼 노동법에 계속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노동법학회를 만들게 됐죠. 그러고 보니, 학회 같이 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멋진 법률가가 됐어요. 노무사나 변호사.

당시 노동법학회의 성공한 법률가 중 1인.

2007년 즈음에 노동법학회를 만들고, 2008년 초에 광우병 촛불집회 등을 하면서 민변 변호사님들을 알게 됐어요. 그렇게 ‘노동법 하는 변호사가 있구나’, ‘노동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는 현장에서 뭔가 실천적인 활동을 하는구나’라고 환상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때 잘 선택해서 바로 로스쿨에 갔어야 하는데!(웃음) 로스쿨을 가지 않고 사법 시험을 준비해서 헤매다가… 시험을 그만두고 다시 한번 저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했거든요. 그래서 2015년도에 대학원에 가서 노동법을 전공하게 되었죠. 그런데 지도 교수님께서 노동법은 실무 경험이 있는 게 더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운이 좋게 2016년도에 노무사 시험도 합격하고 로스쿨도 합격했어요. 네, 이렇게 해서 로스쿨에 드디어 가게 됐습니다!

남들 보기엔 엄청 일관성 있는 삶 같은데, 사실 전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거예요.

 

허: 그렇죠. 그림은 이제 밖에서 그리기 마련이니까.

김: 노동에 관한 관심도 조금씩 달라져 왔어요. 처음에는 이제 노조법, 집단법에 되게 관심이 많았는데, 점점 개별법에 관한 관심도 생기고.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이나, 소수자들이 하는, 더 소외된 계층의 노동들에 관한 관심도 생기고요. 돌봄 노동 얘기도 요새 많이 나오잖아요? 이주 여성이라든가, 빈곤 여성 등 이슈도 그렇고요. 노동이 여러 이슈랑 관련이 많거든요.

 

허: 연구나 독서모임 하고 계신 거 있으세요?

김: 모임은 있어요. 여성 노무사들이 주축이 되는 모임이고, 변호사도 있고 학자들도 있어요.

로스쿨 다니면서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 등 성차별 관련한 이슈에 대해서 온라인 상담을 했었어요. 로스쿨 생활 중에 많은 도움이 되었었죠. 힘들고 지치는 로스쿨 생활 중에 뭔가 의미도 있고,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일이었어요.

 

허: 그, 로스쿨에서는 책으로 세상을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죠.

김: 이게 맞나, 정말 이게 졸업하고 나서 쓸 수가 있는 건가… 근데 로스쿨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잖아요. 로스쿨에 들어가면 ‘이게 맞아 이거야’ 하고 달달 외우면서 공부해야 하고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혼란이 오잖아요. 그리고 막 가슴이 막 터질 것 같고요.

그럴 때 이런 상담 같은 걸 하면서 ‘역시 이건 아니야’ 이러면서 계속 가기도 하고.

 

허: 많은 부분에서 아름다운 ‘덕질’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저도 디정위나 그런 데에 가입은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이슈가 좀 어렵다 보니까 잘 못 끼기도 하거든요.

김: 그럼 일단 올리세요!
허: ?!

김: 진입 장벽이 꽤 있는 곳도 있는데, 저는 주로 텔레그램 방을 이용해요. 한 3개월 정도 ‘눈팅’을 하고. 그런데 이제 눈팅만 하고 있으면 내가 눈팅하는지 잘 모르니까, 텔레그램 스티커 하나씩 남기거나, 코멘트 하나씩 남기거나. 위원회별로 분위기가 다르니까 눈팅 좀 하면서 이 위원회에서 관심 있는 이슈가 무엇인가 쭉 보고, 또 내가 그럼 관심 있는 이슈는 무엇인가 고민하고요.

 

허: 그런 것도 궁금하더라고요. 사실 민변에 가입하고서도 스스로 내가 이걸 하고 싶다 했을 때, 갈 수 있는 사람들도 물론 있긴 있지만 먼저 끌어주지 않으면 ‘여긴 어떤 곳이지?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이렇게 되는 경우도 되게 많잖아요. 변호사님이 그렇게 힘을 내서 다가가실 수 있었던 계기가 있을까요?

김: 제가… 눈치가 없어요(웃음). 모르면 물어보고, 그냥 다가가서 말도 걸고. 이런 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또 온라인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줌으로 하다 보니까 이제 화면을 꺼놓기도 하고(?!). 초기에는 분위기를 익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던 것 같아요.

허: 어떻게 보면 줌이 좋은 것 같기도 해요. 저도 노동위 수요모임 들으면서 왔거든요.

김: 판례 모니터링 시간에 밥도 좀 먹고(웃음). 그래도 줌으로 하니까 의견을 내려고 좀 노력하게 돼요.

다가가서 말을 열심히 건 결과, 신입회원 설명회에도 자리한 김은진 회원 (왼쪽 두 번째)

 

허: 오늘 신입회원 설명회에서 홍보하고 싶은 위원회가 있다면 혹시 어떤 걸 먼저 홍보하고 싶으신가요.

김: 회원팀… 맨날 나오는 멤버가 한 5명밖에 안 되는데. 이현아, 노푸른, 조아라, 문예현,  조미연, 저 이렇게 하면 딱… 더 오지도 않아요. 가장 오래 이야기를 하고, 가장 많이 민변에 대해 고민을 하는 곳 같아요. 오늘 했던 회의 같은 경우에는, 이번에 가입한 회원은 없었고요… 탈퇴한 회원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민변 인원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죠.

 

허: 중요하네요.

김: 아무래도 소속감을 더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사무처 활동을 하다 보면.

 

허: 그러고보니 미군위 이슈 관련해서 최근에 토론회 가셨다고 소식 들었거든요.

김: 유엔사 토론회였어요. 유엔사라는 게 6‧25 전쟁 때, 국제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의해서 창립이 되었다고 해요. 그 이후에 우리가 정전 선언을 했거든요? 근데 그 이후에도 계속 유지가 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처음에 유엔 안보리에서 결의하는 취지는 그거였거든요, 북

한의 남한에 대한 무력의 공격을 격퇴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그 정도의 목적. 유엔사라는 것도 사실은 이제 다국적 연합군인데 거기를 통솔할 수 있는 지위를 미군 장교한테 준 거였어요. 그리고 그냥 유엔기를 사용하게 해서, ‘유엔 통합군 사령부’를 줄여서 ‘유엔사’. 이게 현재도 계속 존재를 하면서 남북한 교류를 막고 있어요. 예를 들면 물자가 오고 가는 데 있어서 유엔사가 허가하거나 검열하는 통관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문제가 되었고.

최근에는 미-중 관계가 악화가 되면서 이 유엔사를 통해서 미국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는 이런 큰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에 유엔사의 ‘재활성화’에 대해서 법적인 근거가 있는지, 실질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토론회였어요.

허: 정말 열심히 준비하셨군요

김: 6개월을 준비했어요… 같이 준비한 분들과 친목도 좀 쌓았고요. 제가 관심이 ‘1도 없던’ 영역이에요. 알고자 하지 않았던, 잘 몰라서 ‘덕질’을 하지 않았던 이슈였는데 공부를 하면서 ‘자주·평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건 진짜 해결되어야 한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정말 어렵고 깊은 공부였어요.

 

 

 

허: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더 하고 싶으세요?

김: 지금 사회의 변화, 산업에서의 변화 같은 것들에 관심이 있어요. AI라든가 정보 인권이라든가, 아니면 요새 전기차나 수소차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무엇이 정말 친환경일까요?

아까 말씀드린 여성 노동 관련해서는 제가 활동을 많이 못하고 있어서, 앞으로는 그쪽 관련해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허: 우리 벌써 한 시간 됐는데, 고용변님은 괜찮으신가요?

김: 괜찮아요. 이걸 핑계로 잠시 띵가띵가하는 거죠.

 

특별한 비법 없이, 한 마디라도 남기면서 약간의 존재감을 내비치며 ‘덕질’을 하는 것만이 비법이라는 그의 말. 생각보다 별것 없어요. 여러분도 관심 있는 곳에 한 마디라도 남겨보세요, 즐거운 민변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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