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경남지부의 대찬 리더, 박미혜 회원 인터뷰

2021-08-02 2

“왕성한 활동과 열정으로 가득한 지역운동 판을 꿈꿔봅니다”

경남지부의 대찬 리더, 박미혜 회원 인터뷰

 

이번 회원 인터뷰에는 경남지부의 지부장인 박미혜 회원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경남지부는 소규모 인원으로 구성된 지부이지만 다양한 영역에서의 지역운동을 열정적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기 위하여 비대면(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박미혜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회원들에게 간단한 소개 및 인사말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경남지부장 박미혜 변호사입니다.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벌써 변호사 16년차인데(!) 여전히 좌충우돌 중인 그런 사람입니다.

 

-2006년 변호사가 되면서 바로 민변에 가입하셨지요? 어떤 계기였는지요?

저는 원래 변호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사법연수원 시절 인권법학회동기들이 함께 준비한 국가보안법 폐지 찬반 토론회 개최 과정에서 사법연수원 교수로부터 막말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신성한 연수원’에서 정치꾼들이나 하는 토론회를 개최하는 ‘머리에 똥 든’ 연수생… 합격생을 1,000명씩이나 뽑으니 들어오게 된 ‘이상한 애’… 물론 일부 연수원 교수의 생각일테지만 그 충격적인 일을 계기로 사법부의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에 대해 깊이 느끼게 되어 구체적으로 법조인으로서 나의 모습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회원들과 함께 당시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이었던 박원순 변호사님이나 공감의 변호사님들을 찾아뵙기도 하고 민주노총 법률원을 찾아가기도 하는 등 고민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고민 속에서도 변호사를 한다면 민변에 가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돈만 버는 변호사 생활은 너무 우울할 것 같았습니다(물론 돈 잘 버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는 잘 압니다요^^). 변호사로서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해야지만 제 스스로 변호사 생활에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거란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취업을 할 때도 민변 선배님들이 계신 사무실로만 알아보고 다녔습니다.

그 시절 제 인권법 학회 동기들은 모두가 제게 스승이었고, 제 첫 직장에서의 상사이자 민변 선배님이신 심재환, 고 김승교 변호사님이 제게 영향을 많이 미친, 새내기인 저를 키워주신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창원에 내려가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창원에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결혼 후 남편과 계속 떨어져 지내는 동안 건강이 나빠지고 그 여파로 2세도 생기지 않아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10년 넘게 아등바등 서울살이를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내게 남은 것이 별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움켜쥐고 지켜야 할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어느 날, 창원행을 결심했더랍니다.

 

-경남지부 사무실은 어디에 있나요? 운영은 어떻게 되는지요?

저희 경남지부는 따로 사무실이 없습니다. 상근 직원도 없구요. 경남 지부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김형일 변호사와 제가 함께 일하고 있는 저희 법무법인 사무실이 사실상 민변 사무실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경남에서 민변 활동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습니다. 경남이 넓은 지역에 변호사들이 흩어져 있어 모이기가 쉽지 않고 로스쿨도 없다보니 신입 변호사의 유입도 원활하지 않은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어 항상 소박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경남지부의 일상적, 정기적 활동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코로나 이전에는 월례회를 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금은 정기적인 모임은 못 하고 있고요, 지역의 현안이 생길 때마다 2~3명씩 팀을 만들어 모임을 갖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경남지역 모군수의 성추행 피해자를 대리하는 사건을 우리 회원들이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친목활동이 어려울 텐데 요즘은 경남지부 회원들 간 친목교류는 어떻게 하나요?

친목활동을 못 해서 너무 아쉽습니다. 임수진 신입회원 환영식을 코로나 중에 어렵게 치르고 그 이후로는 다 함께 모이는 행사를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월례회 외에 답답한 세상사 술안주 삼아 이야기 나누는 치맥모임을 하거나 선배님 댁에 방문해서 술을 얻어먹기도 했었지요^^(아~~ 꿈 같은 이야기네요)

 

-언론에 소개된 활동들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2010년 7월 4대강 사업반대 시위로 환경운동가들이 함안보 고공농성을 하고 있을 때 변호사님께서 40미터 높이의 농성장으로 올라가셨지요? 그날 상황과 이 투쟁의 내용에 대해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저는 2007년 창원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추진한 4대강 사업은 당시 환경운동연합의 가장 큰 투쟁과제였습니다. 4대강 공사가 본격화되자 부산 경남지역 환경운동연합 활동가 2분이 4대강 사업을 막기 위해 함안보 공사현장 크레인 위에서 목숨을 건 농성을 시작하였습니다. 크레인 주변은 24시간 내내 경찰에 의해 봉쇄-고립되었고, 한여름 더위에 활동가 2분의 건강도 염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크레인 점거 이후 업무방해 혐의로 피의자 신분이 되어버린 활동가분들은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즉시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청구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 확실했었기 때문에 결국 변호인이 의뢰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크레인에 변호인이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는 그것 말고는 피의자들을 접견할 방법이 없었던 셈입니다. 그 뒤 활동가 분들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기각되었고 크레인 업체 등에서 손해배상 청구 등 경제적인 압박을 해왔으나 그 사건들도 다행히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당시 이포보와 함께 함안보 크레인 점거는 4대강 공사의 문제점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경남과 부산지역에서는 이 일로 인해 각계 각층의 4대강 반대운동 참여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민들이 '4대강사업 반대' 등의 피켓을 들고 함안보 공사장 앞을 지나고 있는 사진

시민들이 ‘4대강사업 반대’ 등의 피켓을 들고 함안보 공사장 앞을 지나고 있는 사진(ⓒ윤성효, 오마이뉴스, 2010. 7. 31.촬영)

 

-그 외에도 수행하신 수많은 공익사건들이 있는데요 하나씩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요? 먼저 2007년 마산 수정산단 반대위 사건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마산 수정산업단지 반대대책위(수정산단 대책위)는 제가 환경운동연합과 함께 일하면서 주민들이 이긴 몇 안되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환경운동연합과 함께 했던 활동들이 법에 막혀서 대체로 승률이 좋지 않았습니다^^; 각종 개발현장에서 환경운동에 대한 일부 주민들의 반감과 개발론자들의 마타도어를 몇 번 마주치며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수정산단 대책위 활동에서는 마산만의 절경이 펼쳐지는 수정만 앞바다를 매립하여 STX조선의 기자재 공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에 대해 주민과 수녀님들이 환경단체와 한 뜻이 되어 성과를 이뤄내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투쟁의 가장 선봉에 선 분들은 노령의 할머니들과 수녀님들이었는데, 도시락을 싸와서 농성을 하시는 할머님들과 봉쇄수녀원의 봉쇄를 풀고나와 여러 전문가들과 주민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던 수녀님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 싸움에서 법정다툼을 맡았던 저는 패소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과 수녀님들의 지치지않는 의지에 창원시가 민관협의체를 만들었고 저도 그 협의체에서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뜻하지 않게 당시 조선업 경기의 불황이 시작되면서 수정산단은 결국 산업단지지정이 해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에게 수정산단 대책위 활동은 시민들과 함께 지역 현안을 풀어나가는데 있어 변호사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많은 고민과 작은 깨달음을 동시에 던져 준 사건이었습니다.

 

-2012년에는 부마항쟁 피해자 첫 손해배상 소송도 수행하셨지요?

부마민주항쟁 고문 피해자분들을 대리해서 국가배상소송을 한 것도 역시 기억에 많이 남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부마항쟁에 대한 최초의 사법부 판단으로 주목을 받기도 하였지만, 막상 판결내용과 소송 과정에서는 매우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평생 후유증이 남을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들임에도 1,000만원~3,000만원 수준의 위자료밖에 인정되지 않았던 점도 그렇고 피해자들 중에는 성고문을 당하신 여성분, 물고문 전기고문의 고통으로 인해 제발 그냥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해당 재판을 진행하던 판사 중 한 명은 ‘(10. 26. 사태로)어쨌든 며칠 지나지 않아 다 석방된 것 아니냐’라는 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소송을 진행하던 2011년 2012년 당시만 해도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평가가 너무도 부실했던 탓이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의 소송 이후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는 것을 보면서 피해자분들이 몹시 허탈해하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부마항쟁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인터뷰를 하는 오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한열 열사가 부마항쟁의 주역이라고 언급했다는 기사를 보고 또 다시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주민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 연대하셨는데요. 경남지역에서 창원출입국외국인사무소 외국인 유학생 폭행 사건이 있었지요?

그 사건은 경남이주민센터와의 연대활동을 통해 맡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체류자격이 있는 유학생을 출입국사무소 공무원들이 단속하면서 다짜고짜 폭행을 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혔고 그 영상이 지상파 뉴스를 통해 알려지면서 출입국사무소 공무원들의 불법행위가 알려지게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증거 영상이 있었기에 범죄 혐의 입증이나 고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속하게 합의하여 사건을 조기에 종결하려는 출입국사무소와 법무부의 압박을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나라, 우리나라로 노동력을 송출하는 나라들에 대한 ‘대한민국의 갑질’ 혹은 ‘상대국의 대한민국 심기 살피기’를 목도하는 것이 저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늘 억울하고 서러운 나라로만 대한민국을 생각했었는데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대한민국을 보았습니다.

제 의뢰인이었던 피해 유학생은 저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로 서울에 있는 자국 대사관에 불려가(출입국 사무소 직원들도 해당 대사관에 가 있었던 상태) 결국 합의서를 써주게 됩니다. 합의서를 쓰기까지 도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그 유학생은 끝내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국회에 나온 법무부 장관은 이 사건에 대한 국회의원의 질의에 팩트와 전혀 다른 답변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느꼈고 바로 잡고 싶었지만 정작 피해자인 유학생은 한국에서 공부를 잘 마치고 싶고 가해자들이 합의금을 주기로 했으므로 더 이상 문제 삼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변호사로서 자괴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합의서의 효력으로 해당 공무원들은 기소유예,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세계 이주민의 날 기념 제1회 경남 민변·경남이주민센터 주최 이주민 심포지움' 현수막이 정면에 걸려있고 제일 왼쪽 연단 사회자 옆으로 서있는 박미혜변호사가 보인다.

경남지부는 이주민 문제에 관하여도 적극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다. 세계 이주민의 날 기념 제1회 경남 민변·경남이주민센터 주최 이주민 심포지움 사진(2019. 12. 18.)

 

-젠더이슈 관련해서 스쿨미투 사건에도 조력한 적이 있으시지요?

한창 스쿨 미투가 터져나오던 시절에 미투에 참여한 경남지역의 여학생들 그리고 성평등 강의를 하러 나갔던 강사분들이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을 해당 강사분의 제보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의 자문을 해 드리게 되었는데 그 뒤 이 스쿨미투 과정에서 있었던 기가 찬 상황들을 책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제가 그 책의 감수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스쿨 미투 이야기가 정리된 원고를 감수하다보니 학교라는 공간이 너무도 보수적이고 여학생들에 대해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라는 곳이 이렇게 경직되고 배타적인 곳이었나 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투를 했던 여학생들은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으로 비난받았고 그를 지지했던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이나 교사 혹은 학부모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투를 외쳤던 학생들이 지금 대학교나 사회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믿고 싶고 그렇게 되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 쟁점의 공익인권 사건에 다채롭게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 노동문제 관련해서는 최근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비판 기자회견에 참석하셨습니다. 원래 노동문제에도 관심이 있으셨나요?

원래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는 주변 환경이 저를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냥 저는 제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그게 노동문제와 겹쳐지는 곳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97학번으로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가 반수를 해서 98학번으로 다시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IMF세대이지요. 대학 생활 시작부터가 경제적 불안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고 계셨는데 고용이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제 밑으로는 동생이 둘이나 있었고요.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저는 노동문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경제적인 부담감과 함께 그런 고민은 계속되었고요.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부모님이 노래방을 운영하시면서 제 뒷바라지를 해주시고 계셨기 때문에 빠듯한 살림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딱 2차 시험칠 때까지만 저를 좀 밀어주세요’라고 아버지와 애절한 담판을 지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제 대학 동기 중에는 아버지의 실업이나 사업 부도로 가정경제가 불안한 친구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심정의 발로에서(?) 한 학기밖에 다니지 않았던 고려대에서는 한국사회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을 했었습니다. 동아리 이름만 보고 그냥 가입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순진하게도(^^) 한국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줄 것 같은 기대를 품고 가입을 했었습니다.

연세대에 입학해서는 노동법학회에 가입을 했습니다. 제 의지도 약간은 있었지만 당시 법대 학생회장이던 김남주 선배(현 민변회원)의 꼬임에 넘어간 탓이 컸습니다. 이름은 노동법학회인데 노동법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신촌 거리에서 술에 취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날이 주로 많았고(^^;;;) 인문학 서적을 읽거나 집회가 있으면 참여하는 활동도 가끔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노동법학회 출신으로 우리 민변에서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인 김수정, 김태근, 김남주, 이한본 선배님들을 보면 학회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가실겁니다(^^).

그리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면서는 인권법학회 내에 이주노동자팀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저희 팀원들이 연수원 2년차 때 소장 초안을 놓고 토론했던 사건이 10년 뒤에 이주노동자의 노조설립을 인정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나왔던 일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경상남도 창원 출신입니다. 학교다니실 때 한번쯤 들어보셨을 산업도시, 국가산단이 있는 도시 출신입니다. 저는 창원을 노조의 도시라고도 표현합니다. 지금 제가 속해 있는 법무법인에는 민주노총 경남본부 부본부장님이 사무장님으로 계시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민주노총의 일들도 알게 되고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제가 노동 현안을 찾아서 일을 한다기보다는 그냥…있으니까 보이니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지역에서의 활동이 참 감사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운동에서 지역운동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민변 총회만 한번 가 봐도 그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이고 그 때 그 공간에 제가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변호사로서 창원에 정착했던 2007년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창원, 지금의 경남은 너무 많이, 너무 빨리 쇠락해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들이 겪고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소멸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고 당장 지역민들의 삶의 문제로 다가와버렸음을 느낍니다. 반면 수도권은 과밀로 인한 온갖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민변 활동만해도 해를 거듭할수록 모든 사건과 이슈가 점점 더 서울을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봅니다. 악순환입니다. 지역 사회가 그 지역의 문제마저도 서울에 의존하는 행태를 보이면 점점 지역에서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지고 인재를 키울 수도, 미래 세대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사람이 없어지고 사람이 없는 지역은 그 무엇도 새로운 것을 도모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운동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공통된 가치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 지역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관련하여 저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세대교체’입니다. 지역 시민단체나 각종 활동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분들이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활동이나 역량도 물론 소중하지만 젊은 세대를 키우고 넘겨주어야 할 때를 준비하고 길을 터주는 역할이 꼭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세대교체가 성공해서 왕성한 활동과 열정으로 가득한 지역운동 판을 꿈꿔봅니다.

'학폭위, 이대로 좋은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제도의 실효성 검토를 위한 심포지엄' 현수막이 상단에 걸려있다. 무대 위에 앉아있는 6명 중 왼쪽에서 네 번째 박미혜 변호사가 앉아서 발제중이다.

'경남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라는 문구가 적힌 그늘막 아래 박미혜 변호사를 비롯한 3인이 서있다. 그들 앞에는 '미얀마 군사 쿠테타 규탄 및 한국-미얀마 민주주의 연대를 위한 결의대회' 현수막이 세워져 있다.

경남지부는 미얀마 군사 쿠테타 대응 및 민주주의 투쟁에도 적극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다.

 

-지금 창원에서 민변 회원들로 구성된 ‘법무법인 믿음’을 만들고 운영하고 계십니다. 같이 일하는 회원 변호사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형일 변호사는 경남지부의 사무국장을 하고 있구요, 임수진 변호사는 민변의 새내기 변호사입니다. 김형일 변호사는 사무실 일이나 민변 일이나 모든 면에서 저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와서 정말 친동생같은 느낌이 드는 친구입니다. 정말 마음이 따뜻한 친구이고요… 임수진 변호사는 제가 얼마나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시대에 뒤쳐진 사람인가를 느끼게 해 주는 그야말로 열정 넘치는 젊은 청년 변호사입니다. 법무법인 믿음과 경남 민변에 들어온 복덩이라고 생각합니다.

민변 총회에 참석한 경남지부 회원들. 세 명 중 가장 오른쪽에 서있는 박미혜 지부장이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민변 총회에 참석한 경남지부 회원들. 가장 오른쪽에 서있는 박미혜 지부장이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지금 시기에서 민변의 역할과 가야 할 길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기엔 능력부족인데요…지부장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민변에서라도 지역 균형발전-지역과 서울의 상생에 대해 고민하는 움직임, 목소리가 나왔으면 합니다.

그리고 요즘 제가 하는 고민 중에 하나로… 변호사의 사회 참여는 어디까지가 적정한가라는 고민이 있습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것과 변호사로서 참여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분명 다를 것이고 참여하는 우리 스스로도 다를 것인데…그 적정한 범위와 한계가 어디인가를 요즘 고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사회 현안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전문가에게 과잉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민변 활동에까지 이런 고민들이 가닿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목표와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다면?

좀 뜬금없이 들리실 수도 있지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순리대로 사는 법 터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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