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팔방미인, 이재화 변호사 인터뷰

2016-05-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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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재화 저는 사법연수원 제28기로 수료한 후 1999년부터 변호사개업을 하였고, 2000년에 민변 회원으로 가입하였습니다. 현재 민변 사법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김지미 제가 처음 민변에서 변호사님 성함을 들었을 때, ‘이 이재화가 그 이재화인가?’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 이재화’가 뭘 말하는지 아실 거예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 중반까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행정법 수험서의 저자 이재화를 말하는 건데요. 저는 다른 사람일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책으로 굉장히 유명세를 타셨을 것 같은데, 행정법 전공자가 아닌데도 행정법 수험서를 쓰시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이재화 제가 90년에 고시 공부를 시작해서 96년에 합격을 했는데요. 고시공부 할 때 다른 과목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행정법을 보니까 행정법이라는 게 원래 법률해석학인데, 대한민국 법에 대한 해석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고, 외국의 이론만 소개하는 책이더라고요. 이거는 제대로 된 법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왜 이런 걸 공부를 하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다가 도저히 감을 못 잡아서 판례를 가지고 고시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판례를 보니까 법률이 있고, 법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결론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리딩케이스가 될 만한 판례들을 모아놓고 그 당시 나온 대법원 판례해설이나 웬만한 국내논문들은 다 읽었죠. 판례 같은 경우는 여러 가지 쟁점이 있는데, 수험생들이 알 수 있는 쟁점을 대법원 판례를 가지고 단순화시켜서 그걸 사례를 통해서 살아있는 행정법을 좀 써보겠다 해서 썼는데, 처음 나왔을 때 폭발적으로 인기가 있어서 보름만에 베스트셀러가 된 거죠. 행정법연습은 한 8년간 베스트셀러였어요.

 

김지미 초판이 나온 게 몇 년도였죠?

 

이재화 제가 연수원 들어가기 직전이니까 97년 2월에 나왔어요.

 

김지미 그럼 2차 시험 끝나고 집필을 시작하신 거예요?

 

이재화 바로 했죠. 제가 2차 시험 때 마지막 전세보증금을 빼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시험 끝나고 정말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때 이미 결혼해서 큰아이는 두 살, 둘째는 엄마 뱃속에 있었거든요. 집사람하고 아이는 춘천의 처가에 보내고 마지막 6개월은 하숙을 하면서 공부를 했죠. 그래서 아이 우유 값이라도 벌자라는 생각이 1차였고. 그 다음에는 제대로 된 행정법 책을 써보자 하는 게 2차였죠. 손으로 하루에 16시간을 써서 한 달 만에 쓴 게 행정법 연습이에요.

 

김지미 손으로 직접 쓰셨다고요?

 

이재화 컴퓨터 살 돈이 없어서 손으로 다 쓴 거예요. A3 있잖아요. 거기에 손으로 한 달 동안 써서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퉁퉁 부어있었죠. 그리고 연혁이니 입법례니 이런 거 다 빼고 엑기스만 모아서 교과서 분량으로 참고서를 쓰겠다고 해서 쓴 것이 행정법의 쟁점이었어요. 그거는 제가 2년 동안 작업을 해서 연수원 2년차 시보생활 할 때, 45일 동안 밤새워서 마무리 지었어요.

 

김지미 45일 동안 밤을 샌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이재화 45일 동안 밤을 새서 쓰고 아침에 조금 자고 이렇게 하면서 책을 내고 결국 병원에 입원을 했죠.

 

김지미 그 당시만 해도 교과서로 수험 준비를 하던 때잖아요. 민법은 곽윤직 시리즈 보는 식으로요. 실전서라고 부를 수 있는 책에 대한 욕구가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데 사실 누구도 쓸 엄두를 못 냈을 것 같아요. 더구나 수험생의 입장에서 수험서를 낸다는 게 파격적인 발상 같아요. 실천에 옮기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구요.

 

이재화 제가 기자생활을 했던 것이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기자들은 본질이 뭔가를 항상 먼저 보는데, 행정법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더라도 실전적인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거든요. 행정법의 쟁점에는 교수들이 오류를 범한 것을 다 지적해놨어요. 교수들이 소송법적 지식이 없어서 판례를 잘못 해석해 놓은 것들을 학사 학위 밖에 없는 사람이 과감하게 다 비판했던 거죠. 그래서 그때 당시에 고대나 연대 같은 경우에 대표적인 교수들이 학위도 없이 함부로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정작 교수방에 가면 책상 위에 내 책이 새까맣게 줄이 쳐 진 채로 있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학생들이 그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질문을 하니까 안 볼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제 자랑 같지만 행정법이 현실의 학문으로 되돌아오는데 디딤돌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 생각합니다.(웃음)

 

김지미 제가 이 책을 안 봐서 행정법 과락을 맞았던 거군요.

 

이재화 이 책을 안보고 어떻게 합격을 했지?(웃음)

 

김지미 저는 이렇게 유명한 책인지 몰랐답니다. 제가 좀 사이비로 공부를 해서(웃음).

 

이재화 그게 연 판매 부수로 행정법 연습이 5만부, 행정법의 쟁점은 3만부 정도 팔렸을 거예요. 매년 개정판을 냈으니까. 행정법연습은 8판까지 냈고 행정법의 쟁점은 5판까지 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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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마지막 전세금까지 탈탈 털어서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만회하고도 남았겠는데요?

 

이재화 그렇죠. 인세 수입이 좀 됐어요. 그걸로 바로 서울에 입성해서 전세자금 마련하고 그랬었죠.

 

김지미 한 방에 해결하셨네요. 그럼 이때부터 강남 좌파의 길을 걷게 되신 건가요?(웃음)

 

이재화 그게 행정법 전문가라고 알려지면서 처음에 유명한 사건을 맡게 됐어요. 사법시험불합격처분취소소송을 제가 제일 처음으로 했었죠. 실질적으로 성공한 첫 번째 케이스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제가 됐어요. 처음에 고등학교·대학교 동기 4명이 상담하러 왔었는데, 저는 새로운 일에 대해서 호기심도 많고 도전하고 싶은 욕구도 많거든요. 이것을 사건화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죠. 그때 당시에 제가 신림동에서 학원 강의를 했기 때문에 공간은 거기서 빌리고 오는 사람들을 대책위원들로 만들고 아는 KBS 기자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굉장히 관심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집중보도를 했던 거죠. 요즘이야 인터넷이 있고 해서 집단소송을 조직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는데 그때 당시에는 아날로그식으로 해야 했거든요. 그렇게 해서 그때 원고가 400여명 정도 됐을 거예요. 1심부터 다 승소를 해서, 원래는 소송한 사람들만 구제되는데 너무 많다보니까 나중에 일률적으로 구제를 해서 2차 시험을 볼 수 있게끔 해줬죠.

 

김지미 말씀하신 중에 나온 얘기인데 기자 출신, 월간 <말>지의 기자를 하셨잖아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학생회실이나 학회실에 꼭 있던 간행물이었거든요. 지금은 <말>지를 대체할 만한 매체가 없는 것 같아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때는 제가 어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좀 어려웠어요.

 

이재화 〈말〉지 출신들이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많이 갔어요. 원래는 대중 주간지를 표방했었고 해직 기자들이 데스크를 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기자를 했었거든요. 근데 제가 처음부터 기자를 했던 건 아니고 원래는 영업사원으로 들어간 거예요. 86년에 징역을 살고 나와서 인천에 있는 합판 공장에 노동운동 하려고 취업을 했죠. 그런데 12시간 주야를 맡게 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 노동운동은커녕 시간 나면 잠자기 바쁜 거야. 그때 몸무게가 54키로까지 빠질 만큼 건강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 그러다가 〈말〉지 영업사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옮기게 됐는데 책을 들고 다녀야 하잖아요. 이게 더 힘든 거야(웃음). 그런데 당시 민주언론운동연합김태홍 사무총장이 몸이 약해서 영업사원으로는 안되겠으니글을 한 번 써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기자가 된 거죠. 말이 기자이지 월급도 없고 교통비조로 10만 원 정도씩 줬어요. 나중에는 20만원 주고. 6월 항쟁 거치면서 형편이 나아져서 월급을 어느 정도 받았지요.

 

김지미 제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 중에 하나가 우리 선배님 중에 전과자가 많다는 거예요.(웃음) 징역 산 얘기 좀 해 주세요.

 

이재화 자민투·민민투 나오기 전에 85년도에 민족·민중·민주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가 있었어요. 흔히 삼민투라고 부르는. 그 사건으로 구속이 돼서 실형 1년 받았어요. 85년 8월 16일에 들어가서 86년 8월 19일에 원주교도소 만기 출소했죠.

 

김지미 당시 학생이었고 초범인데 실형을 받으셨네요.

 

이재화 그때도 반성문 안 쓰면 실형 나오고 반성문 쓰면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주범은 집행유예 나오고 나는 반성문 안 써서 실형 나왔죠(웃음).

 

김지미 반성문 쓰시지 그러셨어요.

 

이재화 그때 당시에 나를 기소했던 검사가 고영주 검사에요. 고영주 검사가 마침 내가 검사시보할 때 중앙지법 형사2부장으로 와서 내가 찾아갔었어요. 깜짝 놀라서 벌벌 떨고 있더라고(웃음).

 

김지미 설마 벌벌 떨고 있었을까요?(웃음)

 

이재화 내가 이야기 하니까 ‘아 그러신가요. 제가 점심 한 번 모시겠습니다.’ 그러더니 시보 끝날 때 쯤 전화가 왔어요. 시보님 몇 분 같이 하자고 해서 그때 빵잽이출신 시보들만 다 모아서 갔죠(웃음). 제가 좀 짓궂은 면이 있거든요. 예술의 전당 앞에 두부집에 갔는데 거기서 고영주 검사가 자유민주주의 어쩌고 하길래 아, 검사님 여기 다 국가보안법 위반한 사범들이라고 그런 이야기하시면 안 된다고 제가 그랬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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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그럼 〈말〉지 기자를 그만 두고 사법시험을 준비하신 거예요?

 

이재화 〈말〉지 기자하면서 중간에 노동자들이 볼 수 있는 잡지를 만들려다가 실패해서 돈을 엄청 까먹었죠. 노동자 잡지를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다 실제 해 보니까 안 팔리는 거예요.

 

김지미 이게 다 결혼한 이후의 일이잖아요. 변호사님은 나름 신념이 있어서 하시는 거겠지만 집에서 보면 참 사모님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사모님께서 옥바라지를 하셨다는 얘기도 제가 들었거든요.

 

이재화 집사람도 학생운동을 했어요. 고대 84학번인데 써클 후배였어요. 그때 당시에는 언제 정도에 구속될 거라고 알잖아요. 제가 4학년이고 집사람이 2학년이었는데 잡히기 며칠 전에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들어 간 거죠.

 

김지미 그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웃음)

 

이재화 나는 그렇게 하고 갔는데 아이 엄마는 이게 좋아하는 거야 아닌거야, 나 어떻게 하지? 이렇게 갈등하면서 면회도 오다가 안 오다가 그랬어요. 근데 그때 당시에는 공안 사범들 같은 경우에는 가족들만 면회가 됐어요. 그러니까 약혼자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우리 집사람이 장인어른 주무실 때 인감도장을 몰래 훔쳐서 약혼자 등록을 해서 그렇게 해서 접견을 다녔죠. 1년 동안.

 

김지미 사모님도 변호사님을 많이 좋아하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그게 도리가 아니잖아요. 참으셨어야죠. 자유롭게 날아가도록(웃음).

 

이재화 그래서 출소하고 나서 결혼 했어요. 저는 노동자 잡지 만들던 때이고 집사람이 민교협 간사도 하고 사회과학 서적 책방도 운영하고 이랬었는데, 둘 다 자취하니까 생활비도 많이 들고 그래서 비용도 줄일 겸 합치게 된 거죠.

 

김지미 그 당시는 변호사님이 실질적 수입이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합친다고 생활비가 뾰족한 수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재화 그래서 내가 알바를 많이 했지요. <신동아>니 <일요신문>이니 여성지 이런 곳에 기고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엔 그 기고가 고시공부를 하게 만든 셈이에요. 사노맹 사건의 박노해씨가 수배 됐었는데, 부인이 김모씨라고 약사 출신이에요. 그래서 박노해 인터뷰와 부인의 수기를 창간하는 여성지에 싣게 됐는데 수배 작업이 좀 필요했고 특종작업은 선불을 달라고 해서 꽤 목돈을 줬어요. 그래서 특종으로 실었는데, 그때 당시에 안기부에서 잡지사에 이거 누가 했느냐 대라고 해서 나를 불렀고 나를 만나면 박노해씨 소재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해서 그때 당시에 남산 안기부 지하에 48시간 동안 끌려가서 있었어요. 안기부 가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내가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보면 불법연행이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평생 동안 직업으로서 운동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다고 하던 차에 예전에 현직 검사장으로 있던 선배가 고시 공부를 하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났어요. 그때는 법전도 한 번 사본 적이 없는데 무슨 고시공부를 하냐 이랬었는데 남산에서 48시간 동안 잡혀 있으면서 나로 인해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워낙 긴장을 해서 풀려 나오고 나서 보름을 못 일어났어요. 허탈하기도 하고 법전을 사서 고시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김지미 애초에 법대에 가신 건 뜻이 있어서 가신 거였죠?

 

이재화 그렇죠. 그런데 학생운동 한다고 법전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어요. 법대에 간 것은 아버지 때문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큰형이 30살 정도 됐어요. 실제 보상도 하나도 못 받고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셔서 법률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법대에 들어갔지요. 사실은 형편상 사립대 올 수가 없었어요. 숟가락과 모포 하나만 들고 서울로 올라 온 거예요. 대학 3년 동안 식당에서 알바를 했는데 알바를 안 할 때는 내가 워낙 비위가 좋아서 거기 노동자들하고 친하니까 맨날 거기 가서 밥을 먹었죠. 3년 동안거기서 밥을 다 해결하고 나중에 옷하고 주거는 후배들 집에 돌아다니면서 살았기 때문에 돈이 한 푼도 안 들었어요. 빈대 생활하면서 학교를 졸업을 했죠.

 

김지미 이야기를 듣다보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캐릭터 같아요. 정말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네요. 96년도에 시험 합격하시고 민변 가입하신 게 2000년이니까 변호사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서 민변 가입을 하셨는데,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까 장난스럽게 얘기했지만 다른 매체 인터뷰 보니 강남좌파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사신 적도 있단 말이죠.

 

이재화 제가 나이가 좀 들어서 변호사가 됐는데 민변 활동도 누가 같이 하자고 한 계기가 별로 없었어요. 중간 중간에 몇 번 갔었는데 말도 걸어주는 사람도 없고. 생물학적 나이는 선배 그룹인데, 실제는 신입 회원이고 분위기도 적응이 잘 안돼서 아주 큰 행사가 아니면 위원회 활동을 안했죠. 그래도 어디에 있던 민변의 취지에 맞는 활동은 계속 해왔었어요. 정치검찰들하고 현장에서 싸우는 것은 본능적으로 전투적인 사람이니까 그렇게 해왔었죠. 이번에 민변 회장선거를 하면서 보니까 나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젊었을 때 합격하면 자연스러운데 좀 늦게 30세가 넘어서 된 사람들은 어색하기도 하고 활동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선배들뿐만 아니라 후배들도 그런 측면이 꽤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미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민변활동을 하신 게 대선 직후부터였지요?

 

이재화 네. 지난 대선 끝나고 2013년 1월부터 했지요.

 

김지미 이후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적극적이세요. 사법위원장도 맡으시고 민변에서 생기는 특위 위원이나 정치관계법TF, 정당해산TF, 개성공단TF 등 각종 TF에도 많이 참여를 하시고, 민주변론 편집위원, 심지어 작년에는 통일위원회 신입회원으로 가입을 하셔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민변의 각종 현안,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고 계시고 이런 것을 바탕으로 회장선거까지 나오셨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다가 적극적 참여를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이재화 가장 큰 계기는 대선 패배 같아요. 지난 번 대선은 승리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봤는데, 하여튼 졌거든요. 후보 단일화 실패나 후보 개인의 자질 문제라기보다는 시민사회 토양이 제대로 성숙이 안됐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돌아보니까 80년대 혁명, 사회변화를 꿈꾸던 동료들이나 동지들은 다 없었어요. 광장은 텅 비어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죠. 학생운동 경험도 있고 돈도 웬만큼 벌고 나도 모르게 국회의원 돼 보자 하는, 말하자면 초심 자체를 잃고 있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세상을 변화하기는 어렵다 나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서 앞장서자. 그래서 다시 왜 내가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가 초심으로 돌아와서 하다보니까 일단 굉장히 일이 재밌어요. 우리가 법률만 많이 안다고 해서 활동을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경륜이 좀 필요한 건데. 저 같이 50대 초중반 정도 되고 변호사 17-18년 정도 하고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활동을 하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돌아왔던 거고 모범을 보이자 생각했던 거예요. 저는 활동의 기간이 얼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진정성 있는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 기본적으로 신입회원의 자세로서 임하고 타성에 젖은 관행들을 하나하나씩 실천적으로 극복해나가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김지미 계속 드는 생각이 보통 사람들하고 다른 면이 분명히 있으신 것 같아요. 내가 뭔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굉장히 집중해서 하시는 성격인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통합진보당해산심판사건에서 변호사님께서 마지막에 최후변론하시는 영상에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하거든요. 이 때 민주당 비례대표 30번을 달고 통합진보당해산사건을 하셨잖아요. 통합진보당 당원이다 이런 오해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이 사건은 어떻게 해서 참여를 하시게 된 건가요?

 

이재화 원래 이석기의원 내란음모사건의 변론요청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때 정당해산까지도 심판청구 할 것으로 생각이 들더라고요. 형사사건 변론보다는 정당해산이 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 청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자원을 했던 거죠. 87년 헌법을 우리가 만든 건데, 헌법의 이름으로 정당을 해산해. 우리 시대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거라고 생각을 해서 여기서 더 이상 우리가 물러설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스스로도 그렇게 열심히 할 줄은 몰랐어요.(웃음)

 

김지미 변호인단이 꾸려지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주심 역할을 하셨잖아요.

 

이재화 저는 누가 건드리면 열정이 폭발하는 스타일인데(웃음), 저 쪽에서 말도 안 돼는 이야기를 하고 물량공세를 하는데 누군가는 집중해야 하잖아요. 저는 그럴 때 과감한 면이 있어요. 다른 사건 하지 말고 이거에 집중해야 되겠다 싶었죠. 하다보니까 일일이 다 읽고 반박하려니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더 잘 이해를 할 수 있었어요. 사실 이전에는 민노당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공부하고 비판하다보니 공안검사 출신들에게 져서는 안 되겠다는 오기도 생기고 해서, 그러고 보니까 1년 내내 그것만 했던 거죠. 그래서 박한철 소장하고 30분간 법정에서설전을 하기도 했어요. 헌법재판소에서는 그때 당시 2014년 지방선거 전에 빨리 끝낼 생각하고 서증조사도 요식행위로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것을 저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형식적으로 재판을 하려면 공개변론을 왜 하느냐. 재판관들이 연구실에서 그냥 결정문 쓰면 되는 것 아니냐. 우리가 이렇게 공개변론 하는 것은 충분하게 양쪽에서 주장하고 반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거기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하겠다는 거 아니냐. 안 그러면 이거는 완전히 쇼에 불과한 거 아니냐. 이렇게 설전을 30분간 했죠. 그게 아마 헌법재판소 생기고 처음일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12월까지 재판이 갈 수 있게 된 거죠.

 

김지미 헌재는 훨씬 전에 끝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네요.

 

이재화 그 장면의 자세한 설명은 제가 쓴 <기획된 해산, 의도된 오판>에 잘 나와 있어요(웃음).

 

김지미 아까 말한 최후변론에서 눈물까지 흘리셨어요.

 

이재화 법정이나 SNS에서 제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같이 우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지난번에 홍콩을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교포들도 봤다고 하시고. 최후변론 하기 전에 고민을 좀 했는데 저는 가장 설득력 있는 변론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라 생각을 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우리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통합진보당에서 주력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우리 세대 사람들이에요. 저도 옛날에 처벌받은 전력이 있고 감옥 갔다왔고 지금 변호사 하고 있는데, 나한테는 당신 변했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안하는데, 그런데 하필 왜 저 사람들에게만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말이 안 되는 거다.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당시에 막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사회구성체논쟁 다 했었단 말이에요. 그것은 그 시대에서 군사독재정권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암울한 시대에 우리나라의역사였고.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현재가 있는 건데 왜 유독 그 사람들에게만 옛날에 너희들 그렇게 했는데 왜 변했음을 증명하라고 이야기하느냐. 여기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이야길 하자. 실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처벌받은 사람이 우리 대한민국 요소요소에 다 있거든요. 헌법재판관들의편견을 바로잡지 않으면 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하나는 학생운동 하다가 전향한 그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해산을 시킬 위험성이 있어서 그게 말이 되느냐는 지적을 좀 해주고 싶었어요. 그 2가지를 해주고 싶었죠. 그래서 최후변론하는데 나도 막 울먹이게 되더라고요. 저의 최후변론에도 불구하고 해산판결은 결국 막아내지는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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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정당해산이 되고 나서 오히려 더 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재화 네. 더 이상 보여주기식 자기만족적인 활동 가지고는 안되겠다. 어떤 형태든 어떤 단체든 간에 조직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이후에 팟캐스트도 하고 전국 순회강연도 하고 책도 펴내기도 했지요. 사실은 누군가가 앞장서서 하지 않으면 점점 패배주의의 늪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라도 힘내자는 생각을 했죠. 저는 위기 속에서 강한 남자에요. 남들이 힘 빠질 때 힘을 내는 스타일이어서 내가 조금 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뛰어다녔는데 제 능력이 그 정도지요.

 

김지미 팟캐스트, 책 이야기 하셨는데, 정당해산심판사건 이후에 <기획된 해산 의도된 오판>이란 책도 내셨고, <분노하라 정치검찰>이런 책도 내셨었죠. 팟캐스트 <정봉주의 전국구>에도 출연하시잖아요. 강연도 많이 하시고, 팔로워가 11만이 넘는 파워 트위터리안이기도 하구요. 자신의 활동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신데 이게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재화 저는 늘 세상은 혼자서 주장해서는 바뀌지 않고 시민들하고 함께 있을 때 힘이 생긴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민변 논평을 내면 몇 백명 안 본다. 그것을 시민들이 볼 수 있는 상태로까지 만들어 주는 것이 활동가의 몫이다. 우리는 변호사이지만 민변은 활동가의 자세가 필요하다. 활동가가 SNS를 안한다는 것은 반쪽짜리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팟캐스트도 하는 거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을 하면 다 알아듣거든요. 예컨대 상고법원 설치와 같은 주제는 민변 회원들도 좀 어려워하잖아요. 재미없어 하는데, 막상 팟캐스트에서 상고법원을 주제로 방송했는데 80만명이 들었어요. 우리가 노력하면 못할 일이 없고 설명을 못할 주제는 없다는 것이 증명된 거죠. 항상 시민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승헌 변호사님이 훌륭한 점 중에 하나는 저술활동을 열심히 하신다는 거거든요. 기록을 남기는 건 아주 중요하죠.

 제 책은 유명 베스트셀러가 아니어서 항상 2,000부 수준이에요.<기획된 해산 의도된 오판>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렇지만 나중에 이 부분에 관한 지식과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필했지요. 누구나 진 사건에 대해 책을 쓰고 싶지 않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정사로 남게 될텐데 그 걸 못 보겠더라고요. 1년 동안에 진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두 달 동안 기억해서 쓰는데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쓰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특히 서문은 못 쓰겠더라고요. 서문을 3일 동안 내내 썼는데 쓰는데 복받쳐서 못쓰겠더라고요. 그래서 10분 정도 쓰다 옥상에 담배 피러 가고 그랬지. 머리말의 제목이 ‘민주주의도 헌법도 울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겁니다.

 

김지미 이야기를 이어서 민변 선거로 넘어가 볼게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고 민변이 거기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셨을 같은데 민변이 예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활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마를 하신 건가요?

 

이재화 대한민국에 -후배들은 5만원 내지만- 회비 10만원 내는 회원이 천명이 있는 조직이 없어요. 그리고 지적능력이나 활동능력으로 봤을 때 정당으로 치면 당비를 내는진성당원이 천명이 있는 거예요. 이 부분을 잘 조직하면 저는 제1당, 제2당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또 하나는 우리가 28년 동안 활동하면서 너무 관성에 젖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는 굉장히 보수화되어 가고 있는데, 우리는 관성에 따라서 자기만족적 활동의 측면이 강해서, 이제는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시민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를 하면 시민운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회원 천명의 시대가 됐는데 그동안은 누가 회장이 되는지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었잖아요. 이러한 관행은 민주적 정당성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많은 회원들이 생각해왔지만 그 관행을 깨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나선 것입니다. 저라도 나서서 경선 문화의 토대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지미 변호사님 덕분에 28년 만에 첫 회장 경선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예상 외로 언론에서도 굉장히 관심을 많이 보였어요. 저는 이번 선거를 통해서 민변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랄까 이런 것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변호사님이 여태까지 쭉 걸어오신 길을 보면 승부사적인 기질이 굉장히 강하고, 아까 위기에서 열정이 나온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변호사님은 질거다 안될거다라는 생각을 안 하셨을 것 같아요.

 

이재화 네. 저는 안했죠. 당연히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출마한 것이지요.

 

김지미 그런데 결론은 낙선이란 말이죠. 그래도 약 40%라는 적지 않은 지지를 얻으셨는데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재화 결과에 만족은 못하지만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를 지지해준 40%는 민변이 변해야 한다는 회원들의 의지라고 봐요. 다만 안정적으로 민변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회원들이 조금 더 많았던 거죠. 그렇지만 저를 지지해 준 40% 회원들의 뜻도 굉장히 소중하기 때문에 정연순 당선자도 그런 뜻을 헤아려서 회무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낙선했다고 제가 어디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민변에서 제 역할이 있지 않겠어요? 변함없이 활동을 할 겁니다.

 

김지미 이번 경선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도 있지만 민변의 발전을 위해서 양측 선본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또 다양한 회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리가 마련됐다는 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재화 특히 지부의 회원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지부 회원들과 함께 민변의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같이 고민을 해볼 수 있었고, 또 위원회 활동을 안 하는 후배들도 비로소 민변 회원이라는 자각을 했던 계기가 되기도 했고 참 좋았어요. 민변에 활력을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누구든 직위에 관계없이 열심히 활동하고 인정을 받으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회장이 될 수 있는 단체를 만들고 또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경선은 계속 되어져야 하고,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요.

 

김지미 지금 사법위원장 맡고 계시지만 사법위원장 임기도 1달 정도밖에 남지 않아서 일반 평회원으로 돌아가서 백의종군하셔야 되는 입장인데 앞으로 나는 민변 활동을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포부나 계획이 있으신가요?

 

이재화 아직 확정된 계획은 없는데 기존에 위원회 차원에서 할 수 없었던, 선배 그룹들의 역량이 필요한 모임을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민변의 선배들이 위원장, 회장·부회장 임기를 마치면 사실상 무대가 없어서 활동을 못하는 선배들이 많아요. 제가 이번에 선거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는데 그런 사람들을 민변 활동에 나오게 해서 어떻게 민변의 역량으로 만들 것인가 고민하고 있어요. 총회 끝나고 가을부터는 본격적으로 외화시켜볼까 합니다.

 

김지미 마지막으로 새로운 집행부에 대한 덕담 부탁드려요.

 

이재화 정연순 당선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살아있는 민변의 역사이고 역대 사무총장 중에 가장 추진력이 있는 사무총장으로 인정받으시는 분이니까 민변을 좀 더 활기있게 잘 이끌어 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경선을 통해서 선출된 회장이기 때문에 회원들의 바닥 민심을 반영해서 회무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강문대 총장 예정자도 특히 책임성이 강한 분이기 때문에 두 분을 중심으로 해서 12대 차기집행부는 더욱 더 잘 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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