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신장식 변호사

2015-08-12 2

2년 전 대의원회에서 1년차 변호사답지 않게 내공 가득한 발언을 하던 한 변호사가 기억에 강렬히 남았었습니다. 정치관계법 개혁 TF에서 다시 만난 신장식 변호사, 그 해박한 정치 관련 지식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습니다. 20대. 30대. 40대를 지나오며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를 열심히 찾아 온 파란만장 신장식 변호사를 만나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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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식 저는 변시 2회로 2013년에 변호사가 되어 현재는 법무법인 지향에서 일하고 있고요, 그 전에 20대 때는 지역운동을, 30대 때는 진보정당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김지미 나중에 더 깊이 이야기를 하겠지만 신변호사님 이야기를 할 때 정치를 빼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학부와 대학원 모두 정치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신장식 그랬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정치를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막연하게 했던 거죠. 제 꿈은 과학자요, 선생님이요, 대통령이요 이랬던 소박한 수준에서 생각을 했던 거죠.

 

김지미 어렸을 때 막연한 꿈이긴 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가진 어떤 동기가 있을까요?

 

신장식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가 87년도였고, 제가 다니던 청주고등학교가 충북대학교랑 아주 가까이 있었어요. 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서 최루탄이 터지면 저희 고등학교까지 왔거든요. 그렇게 87년 6월 항쟁에 관심을 갖다가 87년 12월 대선 때, DJ, YS, 노태우 이런 후보들의 유세 현장을 갔었어요. 그 당시에는 대규모 유세, 100만명이 모인 여의도 유세, 부산 수영만 유세, 보라매공원 유세 같은 대규모 유세가 있었잖아요. 이런 유세 현장에 갔었는데 DJ 유세 때가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유세 자체보다 그때 광주민주화운동 관련된 사진과 이런 것들을 유세장 주변에서 전시를 했거든요. 그걸 보면서, 그리고 실제 유세장에서 표출되는 엄청난 에너지들을 보면서 사람들의 에너지가 세상을 바꾸는데 모일 수 있는, 집단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정치에 있겠다 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나도 능력이 된다면 좋은 정치를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87년도 6월은 고등학교 1학년에게도 굉장히 큰 충격을 줬던 사건이었어요.

 

김지미 고등학생이 느끼는 정치라는 건 막연할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가 정치라는 단어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치를 한다 그러면 사실 국회의원도 있을 것이고 국회의원이 아니면서도 정치를 하는 분들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국회의원’ 이렇게 생각을 하신건가요?

 

신장식 그런 건 아니었고요, 그냥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 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거에요. 지금은 유세가 금지가 돼서 자동차 유세 등 아주 제한된 방법만 가능하지만, 그때는 유세장에서 느끼는 열기 이런 것들이 정말 대단했고,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가 꼭 리더가 되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정치가 굉장히 필요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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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세상을 바꾼다라는 이야길 하셨는데, 고등학생이 느끼기에 세상의 어떤 점이 부조리하거나 모순된다라고 느끼셨나요? 이 세상을 바꿔야겠다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신장식 다 마음에 안 들었어요 세상이(웃음). 그때 제가 문학회에 있었는데, 문학회 지도 교사 선생님이 문학회 4기였고 제가 21기였어요. 대학 다니거나 사회에 나가있는 선배들도 찾아와서 같이 토론도 하고 책도 읽고 시도 읽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세상에 불만이 너무 많았어요. 너무 불만이 많아서 세상을 버리고 어디를 가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세속적인 사람이라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웃음). 내가 스님이 되거나 종교인이 될 자신이 없었어요. 그러면은 세상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굉장히 낭만적이고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 는데, 학교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와 부조리함이 있잖아요. 우리 때는 거의 마지막 세대이기는 하지만 교련을 했던 세대이기 때문에 그런 걸 보면서 낭만적이고 막연했던 생각이 정치를 통해서 여럿이 함께 하면 바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김지미 조숙하셨나봐요. 사춘기 때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통 개인적인 일탈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신장식 개인적인 일탈도 했죠, 술도 먹고.

 

김지미 그 정도야 뭐 일탈이라고는(웃음). 그러다가 대학을 90학번으로 입학을 했는데 91년부터 신림동 봉천동 신정동 철거반대 투쟁에 참여를 하고, 아까 20대 때는 지역운동을 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요즘에는 지역운동이 예전에 비해 활성화되었지만 90년대 초에 벌써 지역에서부터 정치운동이 시작되어야한다고 생각을 하신건가요?

 

신장식 그것도 91년도에 강경대가 백골단에게 타살당하고 나서 오늘 3만, 내일하면 5만, 그 다음에 10만, 20만, 30만해서 종각에서부터 동대문운동장까지 종로통이 사람으로 꽉 차는. 그래서 87년에 봤던 것보다 한발 더 나아간,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그게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잖아요. 최근에 선배변호사님들의 노력과 강기훈씨의 꾸준한 투쟁덕분에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안 변하는 건가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변하나보다…그래서 사실 그때 저는 운동을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앞으로 뭘 할까 생각하면서 다시 수학 정석 2-1을 보면서 의대나 약대를 갈까… 그런데 제가 수학을 잘 못하더라고요(웃음).

 어쨌든 좀 더 열심히 해서 의대나 약대를 가서, 세상을 못 바꾸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지금 민변에 있는 민병덕 변호사가 저랑 같은 과 동기거든요. 그 친구는 철거지역에서 공부방을 하고 있었어요. 철거 들어온다고 용역깡패들이 있으니까 도와 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때의 저는 아무런 의지가 없었거든요. 드래곤볼과 수학정석2-1을 왔다 갔다 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친구가 가자니까 친구따라 강남 가듯이 갔는데 가서 달동네 주민들을 만났고 거기에서 세상을 한꺼번에 바꾸지 못하더라도, 특별한 기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힘을 받는 분들이 있구나.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내가 어떤 사람이냐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철거 지역에 들어가기 시작을 한 거죠.

지역운동으로 인식이 넓어진 계기는 91년부터 철거투쟁하면서 우리가 계속 요구했던 것이 가수용단지, 철거가 돼서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에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임시거주시설, 그 다음에 영구임대아파트 이 2가지가 핵심적인 목표였는데, 94년에 실제 신정동에서 철거투쟁하면서 임시거주시설을 따냈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주민들이랑 살았어요. 그런데 철거투쟁은 우리 주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인생에서 몇 년이에요. 철거 투쟁 끝나고 나면 그 동네에서 살아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철거투쟁이 워낙 격렬한 투쟁이기 때문에 철거투쟁을 하고 나면 운동 쪽으로는 오줌도 싸기 싫은 정도의 아주 극단적인 피곤함과 어려움과 이런 것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지역 주민분들한테도 정말 이미지가 안 좋아요. 철거민들은 철거투쟁 과정에서 변화된 의식과 조직이 생겼는데 이후 어떻게 이웃들과 정착을 하고 지역의 주민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지방자치, 지역운동을 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95년도에 지역에서 활동을 했던 학생들이랑 같이 당시에는 서강대에 있는 도시빈민연구소, 지금은 한국도시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거기를 찾아가서 우린 지역활동가가 되고 싶은데 학생운동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 지역활동가로 교육해 달라고 요청해서 제가 활동가 교육 1기가 되었어요. 저와 관악사회복지회라든지 지금 여기저기서 20년 가까이 지역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랑 같이 1기로 교육을 받았어요. 지금은 그 교육프로그램이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이라는 곳에서 하고 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지평이 넓어진 거죠.

김지미 관악구 구립어린이집 정상화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님도 하시고 관악주민연대 정책실장, 실업극복 관악운동본부 정책실장 등등 관악구를 기반으로 해서 지역운동을 하셨어요. 그러다가 30대에 들어서면서 진보정당 활동을 하셨단 말이죠. 어떻게 지역운동에서 정당의 활동으로 옮겨오게 됐는지.

 

신장식 신대방동, 신림동 같은 철거지역을 쭉 다니다가 95년도에 관악주민연대라고 하는 지역운동단체가 생기고 그때부터 관악구에 완전히 정착을 한 거죠. 그 전에도 신림동, 봉천동에서 철거투쟁을 했지만 지역운동을 업으로 삼게 된 것은 95년도부터인데 주민운동을 쭉 해가면서 그때 우리가 많이 썼던 게 임파워먼트였어요. 주민을 주체로 세우고 주민에게 정치적인 힘을 갖도록 한다 라고 했는데 사실 지역운동과 정치를 2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지역단체나 지금 시민운동 단체들도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당활동을 하면 특정 어떤 간부를 못한다던지 하는 제한이 있잖아요. 임파워먼트를 하는데 실제로 주민들이 파워를 갖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꺼려하는,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냉소가 지역운동 내에도 있었다라고 저는 생각을 했고 2000년에 민주노동당이 창당을 하면서 실제로 주민들이, 민중들이 파워를 갖도록 하는 것은 정당, 정치와 정면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항상 민중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게 운동의 마치 가장 고결한 목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저는 한쪽면만 보는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파워를 실제로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정치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김지미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민주노동당 창당이 계기가 되었겠네요.

 

신장식 네. 상당히 큰 계기죠. 지역운동을 쭉 하면서 그 전에는 지방자치를 통해서 뭔가 분권화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여전히 그것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실제로 권력을 가질 수 있겠냐 파워를 가질 수 있겠냐. 명백히 한계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김지미 2000년 창당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진보정당 활동을 하셨는데, 민주노동당에서의 본인의 역할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신장식 민주노동당에서 지구당 위원장을 하고 총선후보를 2000년, 2004년 두 번 출마를 했고, 2008년에 진보신당에서 출마를 했으니까, 총선 후보 3번을 한 게 역할 중에 하나였고, 중앙당에서는 2002년 대선 때 기획위원장을, 2004년 총선까지 기획위원장을 했고요, 그 다음에 당내에서의 분야별 활동으로 보자면 민생과 관련된 일을 했어요.

 

김지미 과거에 활동 하셨던 거 보면 이자제한법 부활 추진위원장,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 관악운동본부장, 신용카드수수료인하 범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이게 다 민변 민생위 활동영역이잖아요. 아까 철거 투쟁 과정에서 이런 관심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우리 민생위 활동은 열심히 하시나요?

 

신장식 제가 민생위 소속이긴 한데 열심히 못하고 있어서(웃음). 관심사가 민생위 쪽이고 실제로 상가임대차보호법 한다고 관악구에 있는 상가 다 돌아다니면서 서명 받고, 이자제한법은 98년도 이자제한법이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이자제한법 부활 추진운동을 했죠. 그런데 이자제한법이 만들어지지 않고, 대부업법이 만들어지면서 대부업법 반대, 이자제한법 부활 이야기하면서 국회 앞에서 1주일간 단식농성도 하고 그랬었죠. 그리고 무상급식도 2002-2004년 사이에 당에서는 큰 당론 중심의 투쟁을 좋아했는데, 저는 그런 건 다른 분들이 알아서 다 하니까 상가임대차보호법, 이자제한법, 그 다음에 무상급식 조례로 만들자 라고 해서 그런 일을 했고요. 신용카드는 2006년, 2007년 신용카드수수료인하운동을 했죠. 그때 정말 재밌었는데, 상인 단체들을 다 만난 거에요. 미용사협회 회원이 민주노총 조합원보다 수가 많다는 사실도 확인을 했고요. 민주노총 조합원의 45만 그때쯤이었는데, 미용사협회 회원이 50만이 넘더라고요.

 

김지미 협회에 가입한 사람만 50만?

 

신장식 50만이 넘어요. 엄청나게 큰 조직이죠. 그 다음에 요식업협회 회장님은 거의 재벌기업 회장님 같은 의전을 받는 분들도 있었고, 제일 재미있었던 분들은 유흥주점협회. 거기가 신용카드 수수료가 4.5%인가 4.7%인가 그랬어요. 제일 높았어요. 그런데 그 분들을 만나면 빨리 데모하자고(웃음). 우리 삼촌들하고 언니들 다 데리고 나오겠다고. 그래서 자제하시라고 그랬던 일도 있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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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뭔가 이야기만 들어도 정말 재미있었을 것 같고 생동감이 느껴져요.

 

신장식 네. 재미있었어요. 주유소협회도 재밌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일을 할 때 주로 영세자영업자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해서 주유소협회랑 엘피지가스충전소협회랑 따로 있어요. 그 협회에서 찾아오셔서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를 해야된다 라고 하면서 우리도 가입하겠다고 하는데 처음엔 되게 꺼렸죠. 유흥주점협회랑 주유소협회를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런데 이야길 들어보니까 합리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름 값 중에 절반정도가 세금이잖아요. 그런데 그 세금에 대해서도 카드수수료가 나가는 거고 그 부담을 주유소에서 하는 거에요. 예를 들면 기름 값이 리터당 1600원이다. 그러면 800원이 세금이죠? 세금이라고 단순하게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런데 1600원 전체에 대해서 카드 수수료가 나가니까. 이거는 10% 부과세 나가는 것도 그렇지만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 사람이 지금 궁박한 처지에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정책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럼 같이 하자. 그때 신용카드 수수료에 대해서 그런 문제 제기들이 많이 나오고 하니까 카드사에서, 정부에서 권고를 해서 카드사에서 일정 정도를 떨어뜨렸어요. 지금은 그래서 당시보다 카드 수수료가 많이 낮아졌죠.

 

김지미 아까 고등학교 때 내가 굳이 리더가 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총선에 3번을 나갔었죠. 지역구가 관악(을). 내가 나가야겠다 결심을 하셨던 이유가 있나요?

 

신장식 하나는 2000년 총선 때 당내에서 굉장히 토론이 많았어요. 총선 전술을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 그때 저는 지역구 당선이 어려울 것이다, 잘하면 울산 북구일 텐데. 지역구 당선이 어려우니 매우 제한된, 그때는 비례대표제가 1인 1표로 해서 지역구에 출마한 자당후보가 득표한 득표율을 더해서 거기에 따라서 비례대표 의원을 배분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우리다 다수 출마해서 그 지역구 후보들이 득표한 걸 가지고 비례대표 의석을 노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저는 주로 그 입장에서 당내에서 토론을 했는데 그 입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런 이야길 했으면 내가 나가야지. 그때가 30살이었으니까 공명심도 있었겠죠.

 

김지미 15, 16 17대 이렇게 나가신 건가요? 득표율이 꽤 높았다고 하던데요.

 

신장식 2000년에는 8.5% 득표했고, 2004년에 13.8% 정도 득표했어요. 2004년에는 안타까웠지. 15%가 넘으면 전액반환인데. 1.2%가 모자라서 3,500만원밖에 반환을 못 받았어요. 정말 유시민, 매우 좋아하는 분이지만, 그 땐 미웠죠. 민주노동당 찍으면 열린우리당 떨어진다고 해서 비례는 민주노동당을 찍고 지역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을 찍어야 한다 그러셨거든요. 그때 사전 여론조사에서는 제가 20%가 넘게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 1주일 동안 하루에 몇 %씩 빠지는 게 거리에 나가면 느껴져요. 출마해본 분들은 많이 아실 텐데, 투표 3일에서 1주일 전에는 악수만 해도 내 표인지 아닌지 알거든요. 잡는 힘이 다르고요, 표가 빠져나갈 때 악수하면 되게 미안해하는 게 느껴집니다(웃음). 우리 15% 넘어서 사무실 큰 곳으로 이사가야 하는데 돈을 돌려받아서(웃음). 그래서 2000년에 당시에 당에서 기획도 잘 해주었지만, 제가 그런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1인 1표 위헌소송 낼 때 저하고 민변 회원인 김웅 변호사하고, 그 분도 저랑 비슷한 코스를 거쳐서 관악(갑)으로 나오셨어요. 그리고 권영길 이렇게 1인 1표 위헌소송 당사자로 하고 대리인을 김수정 변호사님, 박갑주 변호사님이 하셨던 거죠.

 

김지미 2008년까지는 나가셨잖아요. 그 이후에는 출마를 안 하셨죠. 이제는 아예 접으신 건가요, 아니면 잠시 숨고르기를 하시는 건가요?

신장식 일단 10년씩은 해보고 그 다음에 생각해보려고요. 마흔부터 법공부를 했으니까 10년 정도는 해보고 그 다음에는 정치를 할지, 그런데 저는 지금도 정치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광의의 의미에서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저한테 보통 정치를 할거냐? 하면 주로 출마할거냐 라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거는 제가 50살이 된 다음에 그때 판단해도 늦지 않다. 적어도 변호사로서 10년은 뭘 해봐야 그 다음에 밥 좀 먹었습니다 라고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지미 지금까지 이력을 쭉 듣다보면 법이란 말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어요. 어쩌다 2013년에 나이 마흔이 돼서 로스쿨을 가시게 됐는지.

 

신장식 2008년에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에서 분당이 됐고, 또 거기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 하니 2008년에도 출마를 했고 진보신당 대변인을 2008년에서 2009년 초까지 쭉 했는데, 2009년에 굉장히 많이 아팠어요. 앉았다가 못 일어날 정도로. 제가 그때 58키로까지 빠졌어요.

 

김지미 어떤 병명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신장식 있었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그때는 스트레스 때문에 빠진다고 생각했는데, 갑상선 항진증이 있었더라고요. 많이 아팠어요. 많이 아파서 2009년 2월에 당을 그만두고 더 있으면 내가 큰 일 나겠다 싶더라고요. 지금도 살이 있는 편이지만 살쪘을 때는 90키로까지 나갔거든요. 그랬던 사람이 58키로까지 빠지니까 그때는 정말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고 하동에 내려가서 요양을 했는데, 요양을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 앞으로 뭘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을 하게 됐죠. 그때 여러 가지 계산을 해봤어요. 일단 제도의 변화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해 가장 실감을 했던 것은 2004년 총선에서 1인 1표 비례대표제, 당사자로 참여했던 그 소송에서 헌재에서 위헌 판결 받고 1인 2표제가 되면서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의원이 8명이 들어가고, 그 이전에 2002년 지방선거 때 광역비례대표로 광역의원들이 그때도 8명인가 들어가고 하는 걸 보면서 어느 국면에서는 법과 제도의 변화가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자제한법, 상가임대차보호법, 그리고 무상급식 조례, 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싸움이었잖아요. 그러면서 거기에 일정하게 법률가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하나가 있었어요. 그 다음으로 그때 정치학과 석사를 마치고 논문을 안 쓴 상태였는데, 석사논문을 하고 박사를 해서 학자로 살 것이냐, 아니면 벤처기업 붐도 있었고 그런 사업을 하는 친구도 있었으니까 사업을 할 것이냐. 아니면 로스쿨이나 사법시험을 준비를 해서 법률가가 될 것이냐 라고 했을 때 법과 제도의 변화에 대해서 나름 매력을 느끼고 있는 상황도 있었는데, 보니까 로스쿨이 가장 안전한 투자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2008년에 먹고 살아야 됐으니까 로스쿨 1기들을 대상으로 해서 논술하고 언어강의를 했었거든요. 리트 언어논술 강사를 했어요. 논술 책을 냈죠. 그래서 로스쿨 입학하려면 영어공부만 하면 되겠더라고.

 

김지미 리트는 식은 죽 먹기였겠는데요?

 

신장식 식은 죽은 아니었고요(웃음). 토익공부를 평생 처음 해봤어요. 처음 토익시험을 보러 가는데 정말 민망해 죽는 줄 알았네. 중학생들이랑 같이 시험을 봤어요. 왜 이렇게 중학생들 고등학생들이 토익시험을 보는 거야. 시험 보러 갈 때마다 나이가 제일 많아(웃음).

 

김지미 로스쿨 다니시면서 강의는 계속 했었죠?

 

신장식 했어요. 먹고 살아야하니까. 주로 주말과 방학에요.

 

김지미 논술강사라는 게 따로 자격증이 있는 건 아니어서 사실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논술강사를 하기는 하더라고요. 말과 글이 되니까 그렇겠죠?

 

신장식 운동권들이 맨날 토론하잖아요.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체화가 돼요. 그 다음에 입시논술이나 논술이 약간 전투적 자유주의자 정도의 비판의식을 가지면 제일 쓰기 좋아요.

 

김지미 그럼 여기서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저는 정말 글 쓰는 게 너무 어렵거든요. 와중에 짧게 얘기하기는 힘드시겠지만, 서면 쓰는 거 말고 사심을 담아 논평이나 성명류의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신장식 기자들이 하는 말로 야마를 잘 뽑아야 된다(웃음). 제가 2008년부터 2009년까지는 진보신당에서 대변인도 했었어요. 야마를 잘 뽑아야 된다. 한 페이지 넘어가면 안 된다. 길게 쓰고 싶은 것은 다 백데이터로 붙여주는 방식으로. 한 페이지 안에서 다 보고 더 필요한 것은 백데이터로 풍부하게 붙여주는 방식으로 하는 게 그나마 기자들의 가독성이 좋더라고요

 

김지미 한 페이지로 줄여 쓰는 게 사실 힘든 거잖아요. 구구절절이 쓰려고 하면 쓰지. 그게 어려운 거죠. 글쓰기 강의는 다음에 한 번 더 듣도록 하고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오면 로스쿨 나와서 변호사가 된 것에 대해서는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만족하고 계시나요?

 

신장식 저는 직업으로서의 변호사에 대해서는 정말 만족해요. 세상 어느 직업이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을 자기 직업의 사명으로 법에 명시 되어 있겠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분에게는 기분 나쁜 말일 수도 있겠지만, 공익변호사와 그냥 변호사 이렇게 나누는 것 자체가 모순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직업적 사명에 충실한 변호사와 그렇지 않은 변호사가 있을 수는 있겠죠. 왜냐하면 변호사의 직업 자체가 공익성을 전제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공익변호사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후배들이 물어보면, 변호사법을 잘 읽어보시고 변호사의 사명에 맞춰서 자기 직업수행을 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해요.

 그런데 오해는 있었죠. 시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정말 오해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일을 민생위 일도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상인들 쪽에 관심이 많아요. 저의 어머니 아버지가 장사꾼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곁에서 고통 받는 것도 너무 많이 봤고. 아버님이 소매점을 하실 때도 있고 대리점을 하실 때도 있었는데, 최근에 나오는 남양유업 사태라든지 이런 거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었고, 곁에서 지켜봐서. 시장 쪼개기부터 시작해서 물량 밀어 넣기 그런 것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봐왔거든요. 그래서 그런 쪽으로 일을 좀 더 특화해서 하고 싶기도 했고, 정치적으로도 조금 더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직까지는 일에 치여서.

 

김지미 광의의 정치는 계속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어쨌든 하던 가닥이 있으셔서, 민변에 정치관계법 개혁 TF가 올해 3월에 만들어졌고 변호사님이 간사 변호사이잖아요. 특별히 이 시점에 민변에서 TF까지 만들어서 정치관계법 개혁에 관한 대응을 해야된다라고 할 만큼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한 시기다라는 판단이었던 것 같은데, 왜 그러하고 올해 어떤 점이 바뀌어야 한다 라는 목표를 가지고 계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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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식 정치관계법이 변화해 온 것을 보면 2004년 정치관계법 개정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헌재 위헌판결 1인 2표가 있었고, 그 다음에 2002년 대선에서 소위 차떼기 등등이 나오면서 정치관계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민적인 압력이 있었죠. 정치개혁국민협의회인가 이런 것들도 만들어지고 하면서 지금의 정치자금법이나 공직선거법, 정당법의 기본 틀이 2004년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저는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정당후원회도 다 없애고 그 다음에 지구당도 없애고. 소위 오세훈 선거법 하면서 이런 것들이 쭉 있었는데, 올해 그것도 박갑주, 김수정 변호사님을 비롯해서 많이 노력을 해서 몇 차례 위헌소송을 하기는 했었지만, 인구비례 1:2 맞춰야 된다는 헌재결정이 작년에 나왔잖아요. 그래서 정치 관계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도래를 했고 국민들도 10년 지나고 나니까 정치관계법을 바꿔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열기가 2004년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1:2가 되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했던 것은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 비례성을 늘려야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독일식정당명부비례대표제. 비례성과 지역대표성 2가지를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독일식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러려면 현실적으로 의원정수 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헌재에서 1:2가 됐으니까 방법은 지역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데 그러면 김무성 대표가 얘기한 것처럼 비례대표를 줄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거의 최악이 되기 때문에 지역구가 느는 만큼 비례대표도 늘려서 의원정수 자체를 확대하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다 라는 판단이었어요. 의원정수 얘기는 아무도 하기 어려운, 사실 지금도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헌재 위헌결정으로 인해서. 그렇다면 이때 정치권에서는 분명히 이 얘기를 제대로 못 할거다. 그러면 소위 정치권 아닌 시민사회단체나 법률가들이 비례성을 늘려서 사표가 나오지 않는, 사표를 최소화하는 그런 선거법 개정에 대해서 우리가 좀 적극적으로 발언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마침 선관위에서 정치관계법과 관련된 개선안을 냈는데 놀랍게도 굉장히 긍정적인, 의원정수에 대해서는 자기들도 뭐 눈치 보느라고 300석 얘기를 했지만 사실 선관위안을 잘 보면 무조건 300석을 초과하는 해석이 나오게 되어 있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300명을 넘길 수밖에 없도록 선관위도 개혁안을 낸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조건으로 봤을 때 법률가들이 국민들의 정치적 기본권 측면에서 보면 비례성을 높이고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기 위해서 사실 입법부의 권한이 더 커져야 된다. 그러려면 의원정수도 늘어나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조건이다 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김지미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언론에서 나오고 있는 기사들이 자세히 쓴 건 좀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단순한 구도의 기사들, 의원정수와 관련된 기사들만 계속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지역구를 안 늘릴 수는 없는데 의원 정수 확대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반감이 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되면 비례대표가 축소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잖아요. 국회의원 하는 일도 없는데, 왜 할 일없는 국회의원 수를 더 늘려서 우리 세금으로 그렇게 하려는 것이냐. 그래서 세비를 감축하자 이런 이야기도 나오는데, 또 일각에서는 세비를 줄이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이런 얘기들도 있고요. 의원정수가 왜 늘어나야 하고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선이 현실적으로 타당한지, 비례대표 수를 늘리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것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주세요.

 

신장식 지금 언론이나 양당이 다 이야길 안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선관위 개혁안 중에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권역별비례대표다. 지역구를 200석, 비례대표를 100석으로 하자 이런 게 아니고 연동형이라고 하는 점, 연동형권역별비례대표제 이야기를 하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김지미 선관위에서 그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굉장히 센세이션하다고 잠깐 이슈가 되다가 지금은 사그라들었죠.

 

신장식 네. 그런데 지금도 권역별비례대표제 이야길 하는데, 권역별비례대표제가 병립형이냐 연동형이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거죠. 그건 언론에서도 연동형과 병립형에 대해서 정확하게, 미안한 얘기지만 잘 모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해설을 안 하고 있는 건지. 사실은 이게 더 훨씬 중요한 쟁점이라고 생각을 해요. 김무성 대표 이야기는 애초부터 연동형은 배제하고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병립형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 비례대표처럼 지역구 따로 정당투표 따로 해서 그 인원 안에서만 비례성을 하는 거고. 연동형은 독일처럼 일단 정당 득표수만큼 지역구+비례대표 의석수를 확정을 하고 시작을 하는 거죠. 2:1로 한다, 그리고 300석이다. 지역구가 200석이고, 비례가 100석이라고 할 때 어느 정당이 50%를 득표를 했다 라고 하면 지역구+비례대표의 숫자를 150명으로 일단 고정을 해놓고, 그런데 지역구에서 150석보다 더 많이 당선됐다고 하면 초과의석으로 그냥 인정을 하는 거죠. 독일이 그런 방식으로 하는데, 이랬을 때 정당득표로 인해서 드러난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가장 잘 반영이 되고 지역대표성도 훼손하지 않는 거죠. 지역에서 뽑힌 의석수는 일단 그대로 인정을 해주는 방식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핵심 쟁점은, 연동형이냐 병립형이냐라고 하는 이야기가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 라고 생각이 돼요. 우리는 정치관계법 개혁 TF 안에서 많은 토론을 했지만 핵심적으로 비례성이 가장 중요하다. 국민들의 의사가 왜곡되지 않고 의석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하는 것을 핵심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는 연동형으로 가야 된다 라고 하는 부분들이 좀 핵심 쟁점이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안타깝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책임감 있게 민변이나 또 언론사에서도 책임감 있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고요. 두 번째로 의원정수 확대에 대해서 저는 2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 없다 라고 이야길 하는데 물론 하는 일없는 국회의원들도 있죠. 그런데 실제로 지금은 행정국가라고 할 만큼 행정부의 권한과 힘이 워낙 커졌잖아요. 그런데 우리 국회는 상시국회도 아니고 회기가 격월로 임시국회가 열리고. 국정감사기간도 굉장히 짧고, 여야 간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국정조사도 한 번 하기 너무 어렵고. 상시적으로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면서 사실상 행정독재, 시행령독재라고 할 만큼 행정부가 국민들로부터 감시받고 있지 못 한거죠. 물론 국민들이 직접 감시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바쁜 국민들에게 그것까지 감시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정치가 해야 할 일을 국민들에게 전가시키는 거잖아요. 그러면 시행령독재, 행정독재라고 불릴 만큼 비대화된 행정부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의회가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권한도 늘려줘야 하고, 일하는 기간도 늘려줘야 하고, 그 다음에 인원수도 늘려줘야 행정국가, 행정독재, 시행령독재라고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라는 것이 저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우리 국회가 사실은 삼권분립 안 되어 있잖아요. 미국 의회같은 경우는 외교통상에 관한 권한이 다 가있는데, 우리 외교통상에 관한 권한이 전혀 없고 여당은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 역할만 하고 있기 때문에.

 

김지미 적정한 의원정수에 관해서 TF에서는 십만동량설 이야기를 하긴 했었죠.

 

신장식 십만동량설로 가면 거의 500명이 되는 거죠. 그런데 500명이다 그러면 너무 깜짝 놀라실 것 같고. 제 생각에는 지역구 헌재 위헌결정 때문에 1:2 인구편차를 적용을 하면 지역구가 260석까지 늘어나는 것 같아요. 260에서 270사이. 거기에 지역구와 비례가 1:1이 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1:2 정도를 맞춘다라고 하면 400명선 정도는 되는 것이 비례성을 높이고 입법부가 행정부를 체크 앤 밸런스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다. 그런데 이렇게 됐을 때 제일 걱정하시는 것은 비례대표가 늘었을 때 이게 예전에는 돈국구다, 그 다음에 유력 정치인. 중진들 또는 당권을 가진 사람들의 친위부대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 하는데 그것은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는 클로즈드 리스트잖아요. 당에서 제시한 번호대로 가는 건데, 호주같은 경우에는 오픈 리스트, 그러니까 비례대표 순위를 국민들이 직접 정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죠. 무지 복잡해 보이지만 복잡한 건 계산하는 선관위가 복잡하지 국민들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기 선호에 따라서 1, 2, 3, 4번 써내면 되니까. 심지어는 호주에서는 그렇게 개방형 리스트에 자기가 선호하는 비례대표의 순위를 적을 수 있고 이게 힘들고 귀찮다 하면,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서 제시한 번호를 한 번에 딱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있으니까, 그런 개방형을 제도적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어요. 아예 정당법에 국민경선제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그건 정당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비례대표 선출 과정은 정당법상의 오픈 프라이머리가 됐던 수기로 결정을 하던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과정들을 거치면 되거든요. 독일 같은 경우는 비례대표 순위를 정할 때, 클로즈드 리스트이긴 하지만, 인터뷰를 하게 되어있고, 그 인터뷰의 속기록을 공개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공개하지 않으면, 아예 선관위에 명부를 등록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국회의원이 지역 대표성도 당연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국회의원은 전국구니까 국민들을 대상으로만 해야 돼. 저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역대표성도 반드시 보장 되어야 하지만 또 나라 전체를 보고 전문성과 자기 지역구의 민원에 얽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국회의원도 당연히 필요한데, 그런 좋은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서는 그런 정당 내부에서의 민주적인 선정과정, 그 다음에 국민들이 직접 비례대표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제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돈국구다 내지는 당권을 가진 사람들의 홍위병들이 비례대표의원이 되는가 하는 우려는 충분히 제도를 통해서 불식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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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내년 총선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올해 안에 결정이 나야 한다고 하면 시간이 많지 않은데, 이런 것들이 중요성에 비해서 크게 이슈화 되지 못하고 있고 정치관계법은 복잡하거나 어렵다는 인식이 있어요. 이런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서 여론을 형성하기에는 시간이 좀 촉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신장식 갑자기 메르스 사태를 핑계 삼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국가적 재난상황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국회 정개특위가 뚝하고 활동을 멈췄다가 갑자기 속도를 엄청나게 내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제대로 공론화 되고 진지한 검토를 거쳐야 하는 이야기들이 그냥 뚝딱뚝딱 처리되고 있어서 매우 안타깝죠. 우리 TF 안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하는 것을 한 축으로 해서 함께 입장도 발표하고 있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직접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자라고 해서 언론에 기고문을 송기호, 좌세준, 성창익 변호사님이나 이런 분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실 제가 이 부분에서 혼란이 있어요. 예전에 진보정당에서 했을 때는 당내에서 이거 단식이라도 해야 한다, 싸매고 누워야 한다 라는 정도의, 욕을 얻어먹더라도 어떤 충격요법을 줘서라도 논의를 촉발시켜야한다는 논의가 가능했는데 어쨌든 민변이니까.. 단순한 국회의원들의 밥그릇싸움처럼 보이는 이 상황에서 법률가로서 좀 진지하고 원칙 있는 논의와 여론을 형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요.

 저의 개인적인 고민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해서 정개특위 새정련의 간사인 김태년 의원도 만나서 의견도 전달을 하고 혁신위 쪽으로도 의견을 전달하고 또 그래서 혁신위에서도 민변안과 거의 유사한 안이 나오기도 했잖아요. 우리가 막 북치고 장구치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우리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루트를 찾아서 의견을 전달하고 그것이 일정하게 반영이 돼서 안도 나오기도 했다. 이종걸 의원도 사실은 거의 받아서 얘기 나왔다가 지금은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인데, 그렇다고 해서 민변에서 거리에 나가서 그럴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그것이 옳은지도, 그것이 우리의 의사가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방식인지도 의문이잖아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언론에 기고문을 보내서 그렇게라도 우리의 의견을 외화 시켜 보자고 하는 것인데 이게 약간 고민이 돼요. 어떤 방법론이 있을까.

 

김지미 그러게요. 예전에 모식품 광고가 생각나네요. 진짜 좋은데, 어떻게 알릴 방법이 없네.(웃음)

 

신장식 국민들한테 진짜 좋은 건데. 민주주의에 진짜 좋은 건데.

 

김지미 그럼 비례대표제나 의원정수 말고 그 외에 이참에 같이 좀 개선됐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이 있을까요?

신장식 지구당 같은 경우는 부활 돼야죠. 이게 돈 먹는 하마다 이랬는데, 지구당 활동 다 하고 있는데. 오히려 공개해서 감시 받지 못하는 영역에 가 있는 지하정치는 양성화 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생각이 되고요. 이번에 공개변론을 헌재에서 한다고 해서 잘됐다 싶은데, 정치후원금 관련해서 정당후원회가 지금 불법인데, 정치자금 같은 경우도 당연한 비용이다라고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것도 정치적 의사 표현의 하나의 방식이고, 오히려 소액다수가 할 수 있게 정치자금법도 변화해야 된다. 독일 같은 경우는 국고보조금 많이 주는 나라인데, 당비 내지는 후원금 모금 액수에 비례해서 국고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법이 바뀌었어요. 우리 같은 경우국고보조금을 배분할 때 제일 먼저 원내교섭단체한테 일단 절반 딱 떼어주고 그 다음에 의석수, 득표율 이렇게 나눠서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당원의 당비 납부율, 그 다음에 소액 다수의 정치후원금 모집 비율 이런 거에 매칭 펀드 방식으로 해서 국고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오히려 소액 다수로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사가 더 잘 반영될 수 있도록 정치자금법도 충분히 변경 가능하다 라고 생각이 돼요. 그래서 이번에 9월 10일 날 공개변론이 있는데 그것도 잘 해야 되겠다. 그것도 지향에서 합니다.

 

김지미 지향이 정치관계법의 메카네요.

 

신장식 정치관계법 트리플 크라운 달성을(웃음). 그래서 지구당 부활 부분하고 정치자금법, 그리고 투명하게 공개해서 햇빛 아래서 검증 받을 수 있게 해야 된다 라고 생각이 되고요. 일단 크게 보면 그렇고. 국민경선제는 사실 퀘스천마크가 있어요. 오픈 프라이머리를 강제하는 것은 일단 정당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오픈 프라이머리가 실제로 정치 신인들에게는 더 큰 장벽이 될 수 있다. 기득권에게 민주주의라고 하는 명분까지 얹혀주는 이렇게 악용될 수 있는 소지들도 굉장히 많다. 뭐 하고 싶은 당은 하면 되는데 그것을 정당법으로 강제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미 오늘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쉽게 풀어서 회원 상대로 설명하는 강연회 같은 것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아까 10년은 변호사로 살아보겠다고 하셨는데. 사실 인생의 스펙트럼이 10년 단위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건 드문데 변호사님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운이 좋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장식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이 되어주고. 로스쿨도 딱 생겨주고.

 

김지미 아까 그런 말씀 하셨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이냐 보다는 어디에 있냐가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변호사님은 내가 있을 곳을 계속 찾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지역운동하면 지역운동만 쭉 하시는 분들도 있고, 정치하면 정치만 쭉 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그게 아니라 시기적절하게 최선이 무엇인가를 찾아다니시는 것 같은데, 이 자리가 내 자리가 맞나 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우리 회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신장식 일단 2가지 정도일 것 같아요. 하나는 자기 문제의식을 유실시키지 않고 계속 집중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일상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일상 속에서 묻어두기 쉽고 지우기 쉽잖아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나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 뭔가를 놓치지 않고 꾸준히 생각하는 것이 첫 번째 중요할 것 같고요. 두 번째는 일정한 시점이 되면 결론 내리지 말고 그냥 쉬세요. 다 내려놓고. 더 이상 일상 속에서 질문을 해결할 수 없는 시점에는 그냥 과감히, 그리고 천천히. 그 정도가 되면 몸도 마음도 굉장히 힘들어졌을 때잖아요. 그런데 몸도 마음도 힘들어 코너에 몰려서 하는 결정은 좋은 결정이기가 어렵더라구요. 질문을 놓치지 말고 집중하되 더 이상 일상 속에서 이 질문을 해결하기가 어렵다라고 생각이 되면 일상에서 벗어나서 자기와 정직하게 대면하고 몸도 마음도 편안해진 다음에 결정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잘한 결정 중에 하나가 2009년에 1주일 만에 당 그만 뒀던 거예요. 나는 죽을 것 같다. 그러니 업무 인수인계를 1주일간 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을 못하겠다. 하고 딱 끝나자마자 내려가서 쉬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제일 잘했던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계속 질질 끌려 다니고. 그런 것 때문에 요즘 진보정당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들이나 동료들, 선배들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정말 반짝반짝 빛나던 사람들이 굉장히 개인적인 어려움 때문에 정치적 판단도 소극적이고 진취적이지 못한 판단들을 하는 경우들을 왕왕 보거든요. 지치고 힘들 때는 과감히 쉬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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