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언제나 첫 마음으로, 새내기 박인동 변호사를 만나다.

2014-10-27 1,055

 박인동 변호사 인터뷰

 

 ‘새내기’라고 하면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따라서 떠오릅니다.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지요. 그만큼 새내기가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올 한 해 새내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보여준 신입변호사가 있습니다. 바로 박인동변호사가 그 주인공인데요.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박변호사를 만나 순수하고도 따뜻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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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오늘은 민변 자원활동가 5명이 함께 했어요. 박인동변호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네요. 제가 회원 인터뷰를 쭉 하면서 연차가 낮은 변호사님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봐야겠다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박인동 변호사가 신입 변호사 중에 발군의 활약상을 보여 주었고 또 곧 지방으로 내려가 개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이 아니면 박변호사의 이야기를 듣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박변호사님은 변시 3회로 이제 막 실무수습을 마친 따끈따끈한 새내기 변호사잖아요. 먼저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을까요?

 

박인동 : 일단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법조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사실 처음엔 그런 개념도 잘 없었는데 초등학교 때 판관 포청천이라는 프로그램을 상당히 재미있게 보면서 호기심이 생겼고 구체적으로는 박원순 시장님 책을 보면서 딱딱한 판사나 검사가 아니라, 변호사라는 직업군에 속해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포청천 때문에 웃으시는 거에요? 포청천 안보셨어요?

 

김지미 : 포청천 엄청 재미있었죠..작두를 대령하라 막 그러고(웃음) 좀 더 자세히 들어가서 박원순 시장님의 어떤 책을 보고,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가요?

 

박인동 : 고등학교 때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 책을 보면서 여러 가지 법과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신문과 같은 매스컴을 통해서 박원순 시장님이 아름다운 가게 등 꾸준히 변화를 하면서 한 곳에 갇혀있지 않는 삶을 사시는 모습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김지미 : 그래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을 가게 된 거군요. 박변호사는 전남대 로스쿨을 나왔잖아요. 로스쿨을 보면 공익법학회나 인권법학회 등 학회가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던데 박변호사는 인권법연구회에서 활동을 했었죠? 그 곳에서의 활동은 어땠나요?

 

박인동 : 저는 처음에는 일단 사람이 좋아서 들어갔는데 실제 로스쿨 제도 속에 들어가면 학업 스트레스나 변시, 중간, 기말 스트레스가 되게 많아요. 그래서 서로 경쟁도 있고 빡빡해지기 십상이고 사실 인권감수성을 접할 데가 없거든요. 그러던 중에 인권법학회라는 곳에서 직접 느껴본 건 뭐였냐면 한 달에 한두 번 강사를 초빙하거나 강연회를 가지면서 우리가 접하지 못한 부분,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님도 그때 오셨었고, 감정노동 관련해서 아시아나 항공 노조 승무원 분도 오셨고 그런 분들을 통해서 로스쿨에서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운 것 같아요.

 

김지미 : 경쟁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곳이 학회였다는 거네요. 로스쿨에서도 실무수습을 하는데 박변호사는 광주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실무수습을 하셨네요. 특별히 민주노총을 실무수습지로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박인동 : 가장 컸던 거는 거기에 인연회 출신 1회 변호사 선배가 있었어요. 김성진 변호사님이라고 전대 1기인데.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를 하고 있었고, 마침 그때 광주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실무수습이 처음 열리는 거였어요. 그때 같은 인권법학회 동기들이랑 지원했었죠. 그래서 운 좋게 됐고 광주에는 금호타이어라고 있는데 그 노조도 가보고 여러 가지 케이스도 보고 상담도 하고 그랬어요.

 

김지미 : 사실 노동법은 그렇게 자세히 배우는 과목도 아니고 특히나 노동사건을 실제로 접하기는 어려운데 민주노총에서 실무수습을 하면서 가까이서 노동사건도 보고 직접 방문도 하고 느끼는 점이 좀 있었을 것 같아요. 민주노총 가기 전에 노동현안에 대해서 관심이 특별히 있었나요, 아니면 민노총을 가게 되면서 더 눈을 뜨게 된 건가요?

 

박인동 : 사실 저는 노동보다는 이주여성이나 다른 쪽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민주노총 법률원에 갔을 때 간접고용, 여러 가지 임금문제, 근로자지위확인 같은 각 분야별로 하루 한 개씩 진행했던 사건들을 주셔서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도 학교 다닐 때 몰랐는데 청소노동자 어머님들 문제가 컸었잖아요. 그런 분들도 와서 노조를 결성 하고 자신감을 얻으시고. 당연한 권리지만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일반 형사나 민사랑은 다르게 그 분들의 삶의 권리를 찾아주는 느낌이 많았었고.. 물론 제가 직접 소송을 하거나 이러진 않았지만 직업이라는 거 자체가 모든 생활의 유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 연관되는 거잖아요. 그런 직장을 지켜내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게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데, 법률원 변호사님들이 힘들지만 항상 보람을 느끼고 해나가시는 걸 보면서 아, 이런 삶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지미 : 박변호사는 변호사시험 합격하고 변호사 실무수습을 권영국 변호사님이 계신 해우에서 했는데 해우에서 실무수습을 하게 된 것도 이 민노총에서의 경험 때문인가요?

 

박인동 : 사실 해우에 권영국 변호사님이 계신 줄 몰랐어요..

 

김지미 : 아, 권영국 변호사님의 존재를 몰랐어요?

 

박인동 : 듣긴 했는데 해우에 계신 줄은 몰랐고.. 김종보변호사님이 전남대 로스쿨 1기 선배님이신데 당시 민변 상근변호사셨잖아요. 그런데 김종보변호사님한테 갑자기 전화가 와서 세월호 관련해서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고 있는 일 당장 그만두고 올라오라고 하셔서 온 거에요. 그래서 사실 권영국 변호사님 잘 몰랐었는데 제가 해우에 간다고 하니까 인권법학회 친구들이 되게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되게 훌륭하신 분인가 보다 그랬죠.

 

김지미 : 결과적으로는 세월호 TO로 들어온 거네요?(웃음) 박인동 변호사가 세월호 관련해서 굉장히 활동을 열심히 했단 말이죠. 이게 다 세월호 TO로 들어왔기 때문이었군요.

 

박인동 : 네~(웃음) 저는 그래서 사실 약간 죄송했던 게 해우 같은 경우는 권영국 변호사님이 이것만 해라 하고 집중할 수 있게 배려를 해주셨는데 조영관 변호사나 김수영변호사 같은 경우는 다른 업무를 하면서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 분들이 진짜 더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야 마음 놓고 이것만 하면 되니까 그 분들에 비하면 괜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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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실무수습은 어찌 보면 내가 앞으로 변호사로서 일을 하게 될 때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욕구도 분명 있었을 텐데 세월호 문제에만 너무 집중해서 다른 걸 놓치게 되는 거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어요?

 

박인동 : 그런 부분도 있죠, 당연히.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안 나게 권변호사님이 해주셨어요. 사안의 시급함과 중대함을 항상 먼저 얘기를 해주세요, 그러면 다른 생각은 사실 못하게 되고. 권변호사님이나 류하경변호사님이 항상 다른 거 배우고 싶으면 얘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럴 시간이 없어요.(웃음) 그런데 한편으로는 변호사를 1, 2년만 할 건 아닌데 굳이 이 시기에 다른 걸 꼭 해야 하나..세월호 문제는 이 시기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인데..아마 다른 분이 오셨어도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

 

김지미 : 세월호 국면이 올해 상반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유족들하고 거의 같이 생활하는 박주민 변호사도 있고, 우리 회원은 아니지만 진도에 내려가서 계속 있었던 배의철 변호사도 있고, 안산에 가서 주기적으로 상담하시는 오세범 변호사님도 계시고. 하나의 사건이지만 각각 다양하게 활동들을 하고 계신데 박인동 변호사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박인동 : 저는 일단은 민변 세월호 특위의 위원이었는데 세월호 특위의 주목적이 법률지원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민변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진상규명 파트라고 권변호사님을 비롯해서 다들 그렇게 생각해서 자연스럽게 진상규명 파트로 가게 됐어요. 그 진상규명을 검찰이나 현재 감사원 감사도 나왔지만, 결국 본질적인 것을 밝히지 못한 상황이잖아요. 민변 이름으로 중간검토보고서나 여러 가지 자료를 낸 것도 그 이유였던 것 같아요.

 

김지미 : 진상규명과 관련해서 민변에서 얼마 전에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 내용이 굉장히 압축적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어요. 교보문고에서 판매 2위까지 올라갔다는 뉴스도 있었고, 어느 페이스북을 보니까 단원고 생존학생들끼리 노는 사진에 이 책이 놓여있기도 했었지요. 그만큼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책인데 목차를 보면 총 4장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 중에서 박인동 변호사가 주로 집필한 부분은 어느 부분인가요?

 

박인동 : 중간에 해경의 대처나 구조 부분이요.

 

김지미 : 3장. 참사를 사고로 만든 인재. 이 부분을 주로 쓴 거네요. 글이라는 게 줄줄줄 늘여 쓰는 건 쉬운 데 압축적으로 쓰는 게 어렵잖아요. 이 책이 그다지 두꺼운 책이 아닌데도 굉장히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거든요. 변호사가 말하고 글 쓰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변호사들이야말로 말하고 글 쓰는 걸 더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특히나 박변호사는 1년차 변호사로서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 책을 쓰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이 있을까요?

 

박인동 : 글의 전체적인 틀이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데 권영국변호사님이 틀을 다 짜셨어요. 10대 원인을 뽑는 거나 목차를 잡는 것도. 권변호사님이 이 책의 필요성을 느끼신 건 어느 강연을 갔었는데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핸드북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대요. 사실 민변 이름으로 검토보고서가 나왔는데 그건 실제 일반인들이 보기 어렵잖아요. 너무 자세하기도 하고 팔지도 않고. 그래서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컴팩트한 책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서 먼저 구상을 하셨던 거에요. 저는 오히려 더 쉬웠던 게 기존에 검토보고서 썼던 게 다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걸 축약을 하거나 따온 경우가 많았고 그걸 중심으로 이후에 더 추가되거나 밝혀진 내용, 드러난 의혹들을 추가했어요. 거기에다가 권변호사님 생각은 마지막에 특별법 내용까지 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지막에 책 보시면 유가족 특별법안이 나와 있어요. 근데 약간 어려웠던 거는 시기가 최대한 빨리 나와야하는 상황이었어요. 추석도 껴있고 해서 9월 초순이나 중순에 나왔으면 하는 고민이 있었고, 그래서 시기를 서두르다 보니까 편집도 최대한 빨리빨리 해야 되고. 그래서 그런 시간에 쫓기는 것 빼고는 저는 별로 한 일이 없어요.

 

김지미 : 권변호사님이 다 작성을 하고 나는 뭐 별로 한 게 없다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셨는데 이 책의 머리말에 권변호사님이 ‘특히 박인동 변호사의 역할은 집필에서 편집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이었다.’ 라고 최고의 칭찬을 해주셨어요. 이렇게 어렵지만 거대한 작업에 참여하고 나서 개인적으로 내가 이 부분에서 성장한 것 같다 라고 느끼는 점이 있어요?

 

박인동 : 음, 저는 집중력이라고 해야 할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시기가 있고 거기에 맞는 집중력이 필요한 건데 그걸 많이 깨달았던 것 같아요. 세월호 국면은 항상 변하고 어느 시기가 되면 이걸 내야 되고 어느 시기가 되면 민변에서 또 발표를 해야 되고 이런 게 있잖아요. 저는 그런 집중력을 많이 배웠어요. 처음에는 제가 먼저 초안을 쓰면 권변호사님이 빨간펜으로수정을 해주시거든요. 그러면 처음에는 피바다가 되어서 돌아왔어요(웃음). 중간검토 보고서가 그랬거든요. 근데 갈수록 빨간펜도 줄어가고, 다음에 또 책을 내는 이런 작업을 한다면 좀 더 유연하게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지미 : 일반적으로 변시를 합격하고 실무수습을 하면 어느 사무실에 고용되어서 소송 관련 일을 하게 되고 보통은 서면을 쓰거나 재판을 다니거나 하는 게 전부인데 박인동 변호사는 좀 달랐잖아요.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 기자회견 때 사회도 보고 거리에 나가서 참여를 한다든지 인권감시단 활동을 한다든지 거리에 나가서 많이 활동을 했어요. 변호사가 사무실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 같은데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변호사 상과 해우에서 실무수습을 거치면서 바라보는 변호사상이 바뀐 게 있을까요?

 

박인동 : 네,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실무수습을 막 시작할 때에는 일단 최대한 일을 많이 배우자, 송무를 많이 배우자, 그래야지 의뢰인도 오고 돈을 벌지 않겠냐 라는 생각이 많았었는데, 권영국, 류하경 변호사님 두 분 다 뭔가 있으면 항상 현장에 나가 계시는 거예요. 세월호 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사건들도. 초기에는 삼성 서비스 노동자 문제 때문에 서초동으로 왔다갔다 많이 하실 때였거든요. 그래서 ‘아,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원래 이렇게 사시는 건가 다들?’ 이런 생각을 했는데 다른 동기 변호사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안에 있대요. 어디 안 나간대요. 그러면서 ‘너는 왜 이렇게 쏘다니냐?’ 이러는 거예요, 저는 국회도 가고 안산도 가고 여러 군데 돌아다녔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의 절실함은 현장에서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장에 나가면 왜 변호사가 필요한가를 몸소 느낄 수 있거든요. 서면 잘 쓰고 법리적으로 잘 대응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참 중요지만 현장에 나가면 오히려 제가 더 힘을 받고 치유를 받는 느낌도 있어요. 변호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돈을 벌어서 제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람이 있어야 건강하게 오래 할 수 있는데 현장에 나가면 그런 걸 느끼는 것 같아요. 저는 동기변호사 그 누구보다 변호사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안산에 가서 진상규명을 하든, 국회를 가든, 집회를 가든 거기서 오히려 더 변호사님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건 현장에서 변호사라는 존재에 대한 역할을 더욱 더 느낀다는 거죠. 그래서 개업을 하면서도 변호사로서의 일과 밖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 사이에 어떤 균형을 이뤄야 될 것인가 계속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김지미 : 사실 권영국 변호사님이 변호사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시죠. 어제 재판도 있었지만 거리의 변호사라고 불리는 투사시죠. 류하경 변호사님도 제2의 권영국이라고도 불리고 있고요. 오리가 알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본 대상을 엄마라고 따라 다닌다는 말이 있잖아요, 박인동 변호사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변호사로서 처음으로 근거리에서 바라봤던 변호사가 권영국, 류하경..(웃음) 박인동변호사의 앞으로의 모습도 이 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추측을 해도 될까요?

 

박인동 : 사실 개업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동기 변호사랑 같이 하는 건데 그 동기가 ‘형, 같이 동업을 하자, 대신 형 활동하는 거 다 이해해 준다. 민변을 하든 뭘 하든. 사무실 유지할 수 있게만 같이 하자.’ 그러더라구요. 그게 가장 끌렸거든요. 저는 변호사 경험이 적을 때부터 권영국 변호사님 나이 이상까지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젊을 때 지쳐서 나중에 ‘아, 못하겠다.’ 이런 것 보다는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가면서 권변호사님같이 이렇게 머리가 희끗희끗-아, 그건 염색을 안하셔서 그런 건데 염색 절대 안하세요. 있어보이시려고. (웃음) 아무튼 나이가 들더라도 머물러있는 변호사가 아니라 깨어있고 발로 움직이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아시겠지만 권변호사님이랑 같이 다니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안타세요. 9호선이 굉장히 깊은데 계단으로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도 따라서 계단으로 갔어요. 호리호리한 권변호사님의 섹시한 몸매의 비결은 계단 이용입니다.(웃음)

 

김지미 : 앞에서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이제 다음 주면 지방에서 그것도 무변촌이라고 할 수 있는 전라남도 화순에서 개업을 하잖아요. 박변호사는 서울에서 짧지만 찐하게 활동을 하면서 이름도 조금은 알려졌고 내 역할을 찾은 면도 있어서 당연히 더 큰 서울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 같은데 지방에서 변호사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박인동 : 거창한 이유는 없구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로스쿨까지 전부 다 광주에서 나와서 솔직히 말하면 아는 사람이 다 지방, 제 고향에 있어요. 그래서 제가 좀 더 잘 할 수 있고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하는 그런 고민이 컸어요. 서울 민변은 일이 되게 많잖아요. 일도 많고 역할도 많을 거고 그런 생각도 들었는데, 바꿔서 생각하면 광주전남 민변도 있기 때문에 제가 거기 가서 굳이 안 할 이유나 못 할 이유가 없다면 거기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광주전남 민변에 서지훈 간사님이 제 후배여서 그런 편한 사람도 있고 거기서 제 역할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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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광주라는 대도시도 아니고 화순이라는 무변촌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나름대로 어떤 일들을 주로 하고 싶다 계획한 게 있을까요?

 

박인동 : 일단 어쨌든 개업을 하니까 사무실 유지가 급선무라 초기에는 국선이랑 소송구조를 최대한 빨리 신청을 해야 할 것 같구요. 같이 개업하는 동기가 로스쿨 때 이주여성 관련해서 봉사단체를 만들었어요. 그 이주여성센터가 광주 광산구에 있는데 저희가 3학년이 되고 공부 때문에 더 이상 도와드릴 수가 없어서 그때 나중에 변호사가 돼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제 동기가 전화를 해서 개업한다고 하니까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웃음) 그래서 일단은 그 일부터 시작을 할 것 같아요. 그리고 24일 날 광주지역 로스쿨 3기분들이 광주민변 집행부랑 모여서 간담회를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날 가서 얘기도 좀 듣고 거기서 또 제가 녹아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하면 충분히 될 것 같아요.

 

김지미 : 민변 집행부가 지난달에 지부방문을 갔었어요. 첫 날 저녁에 광주를 가서 우리가 박인동 변호사 광고를 굉장히 많이 하고 왔어요. 엄청난 인재가 내려올 것이다. 환영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그래서 지금 광주지부의 기대가 굉장하거든요.

 

박인동 : 아..망했네.(웃음)

 

김지미 : 광주 민변은 지부 중에서도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지부 중에 하나여서 광주 지역에 가서도 아마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박인동 변호사의 활약을 기대를 해볼게요. 처음에 부모님 얘기를 잠깐 했었는데 박변호사가 술도가집 아들이잖아요. ‘우리술’이라는 막걸리를 만드시는 일을 부모님께서 하시는데 부모님이 사업을 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역을 내려가서 활동하는 게 수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도 있었어요?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박인동 : 그런 것 보다는..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저의 집안에 예민한 부분인데.. 사실 빚이 워낙 많아서 청산을 해야 될 것 같은 상황이예요. 이것도 사실 문제인 게 막걸리 붐이 불면서 국순당 같은 대기업이 진출하게 돼요. 그러면 중소기업들은 유통망을 잡을 수 없거든요. 한국사회가 그렇더라고요. 무슨 붐이 불면 대기업이 진출하고 중소기업들은 대개 망하고 흡수되고 이런 상황이.. 그래서 사실 좀 어려우신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집에 내려가면 실제적인 도움은 못 드리겠지만 집에서 출퇴근을 할 거니까 심리적 안정을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김지미 : 박인동 변호사가 얼마 전에 막걸리 한 박스를 민변에 보내줘서 우리가 나눠서 먹고 긴조 변호단 청산도 기행 갈 때도 가져갔었어요. 저도 집에 두 병 가져가서 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농담으로 민변 행사를 하면 여기서 막걸리를 받아먹어야겠다고 얘기를 했었어요. 앞으로 광주 민변에서의 모든 행사에는 ‘우리술’이 들어간다고 보면 되나요? (웃음)

 

박인동 : 그래서 민변 활동 열심히 하려구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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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 한 가지 물어볼게요. 올해 31살인데 여자친구는 있어요?

 

박인동 : 네. 2년 반 사귄 여자친구가 있어요.

 

김지미 : 이제 슬슬 결혼도 생각을 해볼 수 있는 나이인데 결혼 계획이 있어요?

 

박인동 : 저는 마음은 있는데..개업을 이제 막 시작하고 그래서 내년 쯤 더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김지미 : 오늘 자원활동가들이 참관을 하고 있는데 자원활동가 중에는 법조인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고. 이 친구들에 대해서 인생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박인동 : 아.. 뭐가 있을까.. 그냥 제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입장은 아니어서. 저는 대학을 4,5년 쭉 다니고 졸업 후에 공익근무를 다녀오고 그 후에 로스쿨을 준비한 거거든요. 사실 저는 로스쿨이라는 제도가 없었으면 사법시험에 분명 못 붙었을 거예요. 근데 그래도 내가 막연한 꿈이더라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살면서 이게 될까 말까 불확실하고 안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근데 일단 자기 앞에 있는 맡은 일부터 최선을 다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로스쿨 들어가면 아시겠지만 마음이 각박해질 수가 있거든요. 저는 그 따뜻한 마음만 안 변하면, 그 ‘따수운 마음’이라고 하잖아요. 따수운 마음.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해우 와서 그런 걸 많이 배웠거든요.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도 중요한데 따뜻한 열정과 가슴이 있어야지 분노하더라고요.

 

김지미 : 사법시험은 왜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박인동 :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웃음) 진득하니 해야 되잖아요.

 

김지미 : 박변호사도 방금 따수운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했고 몇 번 안 봤지만 제가 본 박변호사의 기본 성정 자체가 정말 따뜻한 사람 같아요. 그런데 제가 좀 놀랐던 게 저번에 저희가 청운동 갔을 때 옆에서 장난치고 희희낙락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들하고 약간 대치가 됐었어요. 경찰이 사람들 못 들어오게 막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갑자기 눈빛이 확 변하더니 달려드는 거야, 경찰한테. (웃음) 그 순식간에 확 바뀌는 모습이 되게 놀라웠어요. 성격이 욱하는 면이 있어요?

 

 

박인동 : 욱하는 면도 있긴 한데 아.. 이게 권영국 변호사님이랑 다니면.. 사실 저 배운 것 같아요(웃음). 권변호사님이랑 집회가면, 마이크에서 소리가 나요. 권변호사님이 중대장이랑 싸우고 계시는 거예요. ‘집회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이러고 싸우고 계세요. 그럼 또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도 해우 실무수습생인데.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하다보니까..(웃음) 그런데 특히 박근혜 정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느끼는 거는 뭐냐면 공권력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당연한 줄 알아요. 그래서 반드시 그걸 지적을 하고, 큰 소리를 치더라도 싸우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 사람들이 경계심을 갖고 일반 시민들에 대해서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봤을 때는 무작정하면 안 되겠지만 변호사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일반 시민 분들이 당연한 권리인데 침해 당하고 있구나 그때 생각하시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에서는 분노를 적절히 할 필요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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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이제 서울 생활을 접고 아예 내려가잖아요. 민변 본부 입장에서도 인재를 하나 잃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지금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서울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공존하는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인터뷰를 마치면서 선배, 동료 변호사에게 어떤 포부라든지 다짐 이런 걸 공개적으로 밝혀서 시간이 지나면 좀 잊을 수도 있고 마음이 좀 흐려질 수도 있을 때 되돌아보면서 내가 이런 얘기를 했었구나, 이런 것도 필요할 것 같거든요. 자신만의 포부를 좀 밝혀준다면?

 

박인동 : 일단은 먼저 제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민변이라는 조직이 있었고 거기에 또 세월호 특위라는 조직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실제 실무를 하는 이현아 간사님이나 여러 변호사님들이 계셨고 그리고 권영국 위원장님이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 책도 내고 인터뷰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감사해요. 민변은 항상 꿈꿔왔던 조직이거든요. 저 대학교 때도 누가 잡혀 간다고 하면 찾아갈 수 있는 게 민변 사무실이었는데, 그런 곳에 제가 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많이 느꼈던 거는 민변에 상근으로 계시는 분들인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할 때 그냥 변호사가 이거 하자 해서 딱 완성이 되는 게 아니라 그 뒤에는 수많은 보도자료도 내고, 성명자료도 내야하고, 연락도 해야 하고, 장소도 잡아야하고, 실무가 되게 많은 거예요. 실무는 상근자들이 다 하시는데 앞에 나가서 인터뷰는 또 변호사들이 하잖아요. 그 속에서 그 분들의 고충이나 이런 부분에 항상 감사드려요. 그리고 선배 변호사님들은 앞으로 또 기회가 되면 정말 많이 뵐 수 있으면 좋겠고 제 포부는 그거 같아요. 내가 왜 민변에 왔는가 하는 그 처음의 마음만 잃지 않도록. 저는 처음의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로스쿨 다닐 때 좀 힘들었을 때가 있었어요. 빡빡하고 변시를 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때 제가 뭘 봤냐면 로스쿨 자기소개서를 읽어봤어요. 내가 이렇게 훌륭하게 썼구나. 다들 그렇게 훌륭하게 쓰잖아요. 인권을 위해 일하고 등등. 그걸 읽어보면서 첫 마음을 되새기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변호사님 말씀처럼 제가 지금 포부랄까 이런 걸 이 자리에서 말하면 혹시 나중에 힘이 들거나 그럴 때 되새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자신에게나 민변 회원들에게 약속하고 싶은 거는 처음의 마음 잃지 않고 해우 사무실에서 배웠던 그 마음으로 약자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겠다는 거예요. 삼성이 저에게 일을 맡기지는 않겠지만, 만약 맡긴다면 한 10번은 고민할 수 있도록. 무턱대고 받는 게 아니라..

 

김지미 : 단칼에 거절하는 게 아니고? (웃음)

 

박인동 : 아! 단칼에 거절할 수 있는 그런 결단력을!(웃음) 암튼 민변 새내기 변호사로서 올해 처음 활동했던 그 마음을 항상 잊지 않으면 자기가 목표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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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후배지만 정말 배울 점이 많아서 인터뷰 하기를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박변호사의 활약을 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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