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박홍-매카시즘의 희생자, 정현백 교수(1)_안상운 변호사의 인권변론기 16회

2014-07-28 1,280

안상운 기획 연재 타이틀

박홍-매카시즘의 희생자, 정현백 교수

 

한국의 ‘매카시’ 박홍 서강대 총장의 등장

 

1991년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하자 ‘주사파 전사’ 박홍 서강대 총장이 화려하게 언론에 등장하였다.

바로 그날 기자회견을 열어 성경 위에 손을 올리고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 이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그는 ‘어둠의 세력’을 폭로할 생각이었는지 ‘주사파’ 전도사(?)가 되어 미국에서는 이미 1950년대에 사망한 매카시즘(McCarthyism)을 한국에서 완벽하게 부활시켰다.

 

1950년 2월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 R. 매카시는 “국무부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하여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을 펼쳤으나 1954년 상원의 분과위원장에서 해임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당시 매카시는 국무부의 진보적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한 데 그치지 아니하고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는 것은 물론,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과 트루먼 대통령의 페어딜 등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주의 정책까지 공산주의와 연계시켜 심판대에 올렸다. 매카시 여파는 또 예술계와 언론계에까지 미치면서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매카시는 그가 말한 공산주의자가 누구인지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그런 매카시가 바로 분단국가 한국에서 40여 년 만에 환생한 것이다.

 

이른바 ‘빠콩’ 시리즈와 보수언론의 부추김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히자 북한은 19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통하여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남북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판문점에서 열고, 1994년 7월 25일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회담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자 정부는 김 주석의 조문을 거부하였고, 이러한 화해무드를 탐탁지 않게 여겨온 조선일보 등 보수진영은 ‘마녀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김 주석 사망 이후 조선일보의 첫 번째 마녀사냥은 이른바 ‘조문논쟁’으로 시작되었다. 7월 11일 국회 외무통일위에서 한 이부영 의원의 “조문단 파견용의 없나”라는 대정부 질문이 발단이 되었다.

조선일보는 이를 ‘조문사절 운운’, ‘조문 주장’ 등으로 표현하며 이 의원의 발언을 왜곡했다. 조선일보는 심지어 7월 20일자 시론 <호지명이 죽었을 때>에서 ‘친북세력 추방’을 문민정부에 요구하며 매카시즘 광풍을 일으키는 일에 정부도 동참하라고 촉구하였다.

 

두 번째 ‘마녀사냥’은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 보도로 확대되었다.

7월 18일(월) 청와대 오찬에서 당시 서강대 박홍 총장은 “대학 내에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으며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말했다. 사노맹과 사로청의 차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함을 드러낸 발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 신문들은 다음날 이를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6월 7일 한총련 출범식 직후 한총련 간부 90여 명 검거령, 6월 18일 UR 비준저지 집회와 관련한 326명의 검거 등으로 ‘주사파 사냥’에 나선 때여서, 박홍 총장의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6-1(동아일보9407191면)

 [동아일보 1994년 7월 19일 1면]

 16-2(조선일보9407192면)

  [조선일보 1994년 7월 19일 2면]

 

박홍은 그 다음날인 7월 19일에는 서강대에서 “지난 주 제가 9박 10일 동안 중국에 가 북경에서 김일성대학 총학생회장, 주체사상 책을 쓴 사람도 만났습니다. 연변에서 만났습니다. 김일성은 죽었지만 그 사상은 죽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45년 동안 해왔고 5,6년 남조선을 향해 써온 대남정책은 세 가지입니다.

이것을 1백57개 총학생회장들이 받아 들였고 혁명적 사회노동자 노조위원들의 뿌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다 받아 들여서 현재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현정부를 타도하라. 둘째로는 우루과이라운드와 연결해서 반미투쟁해라. 셋째로 미군기지 반환 서명운동에 들어가라. 그게 선을 가장한 악이 막 섞여 들어갑니다. 넷째는 북조선 NPT의 탈퇴, 핵무장을 지지하라…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 연형묵 총리와 6개월 동안 지내며 교육받은 학생이 있다. 내가 만났다. 노동당 입당은 주사파끼리도 모른다. 그게 알려지면 개는 맞아 죽는다…

내가 해외를 돌아다니며 보니까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 한 2,3백 명 된다. 베를린에도 한 20명 있고 미국에도 있다…유사시 요인 암살 등을 위한 테러조직이 있다…

학생들은 해외 6개 지역의 범민련 본부에서 팩시밀리를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16-3(조선일보94072031면)

 [조선일보 1994년 7월 20일 31면]

 

조선일보의 ‘박 총장 키워 주기’는 민망할 정도다.

 

조선일보는 7월 21일 <용기있는 지식인의 할 일> 이라는 사설을 통해 박 총장과 생각을 같이 하는 지식인들의 동참과 일제 발언을 촉구하였다.

반면 같은 날 시론 <끌려 다니는 지식인, 뒷북만 치는 정부, 주사파의 천국─한국대학>에서는 박 홍 총장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사상이 의심스럽거나 용기 없는 지식인이라도 되는 듯이 매도했다.

16-4(조선일보9407213면)

  [조선일보 1994년 7월 21일 3면 사설]

 

이어 박홍은 7월 22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총련은 ‘북한으로부터 팩스 지령을 받고 있다’는 박 총장의 폭로를 극력 부인하고 있다”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직접 사람을 보내고 만나기도 했지 않느냐. 사무실에 있는 팩시밀리를 이용하겠는가”라고 말했다.

“‘한총련이 북한 측과 연계됐다’는 증거를 대라고도 주장하고 있다”는 질문에 대하여는 “혁사노-사노맹-한총련의 강령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총련 신년사와 기자회견 내용, 방학 중 한총련의 투쟁지침, ‘93 범민족대회 기획안’ 등을 보면 남한적화에 연대를 맺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궁극적 목표가 같다”고 답했다.

 

그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박 총장 발언의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주사파”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특히 박 전 총장의 발언에 신빙성이 없다는 검찰의 조사결과 발표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발언을 간접적으로 지지했다.

 

정부는 맞장구라도 치듯이 국무회의에서 친북노선의 좌경학생운동을 뿌리뽑고 학생운동을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사회각계가 참여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는 등 종합대책 마련을 검토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장학금 받고 교수된 학생 있다”는 박홍

 

‘주사파 시리즈’ 발언을 통해 일약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박홍은 1994년 8월 1일 일본 마이니찌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한국의 운동권 대학생을 초청, 장학금을 주고 장학금을 받은 학생 중에는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 사례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새로 폭로(?)했다.

그는 이어 “주사파가 한국의 대학에서 존재하는 이유 중에는 그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지적할 수 있는 교수도 없고, 왜 한국이 번영했는가 또는 통일을 어떻게 실현해야하는가 등을 설명할 이론이나 교재 등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라도 감수하겠다는 것일까.

 

16-5(동아일보9408031면)[동아일보 1994년 8월 3일 1면]

 16-6(조선일보9408031면)

  [조선일보 1994년 8월 3일 1면]

 

 

또한 그는 며칠 뒤인 8월 11일 민주평통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역회의 강연에서 주사파는 전체 학생의 1~2%에 지나지 않지만 영향력이 매우 크며 교수들 가운데도 주사파가 있다고 지적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을 위한 교묘한 전략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였고,

8월 13일 미국 LA 한국일보 미주본사와의 인터뷰에서는 “학원뿐만 아니라 종교·언론·정당에도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 일부 야당에는 주사파가 750명이나 암약하고 있으며 95년 지자제선거에서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운동권뿐만 아니라 학계를 넘어 정계에도 주사파가 다수 암약하고 있다는 담대한(?) 주장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16-7(조선일보9408131면)

[조선일보 1994년 8월 13일 1면]

 

 

그러나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한국에서 교수가 된 사람을 사법처리하기 위해 미국에서 귀국한 박홍 총장을 조사한 검찰은 수사의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박홍은 8월 19일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계에 자생적 공산주의자나 주사파가 있다는 말이다. 750명이라는 수는 각계에 퍼져 있는 주사파를 모두 일컫은 것이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도 포함해 정치계에 주사파 세력이 퍼져 있다는 것이다. 주사파란 남한의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들과 북한으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지령을 받는 세력들을 말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자 주사파 모두를 말한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박홍은 8월 25일(금) 여의도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이른바 ‘주사파 시리즈’를 종합 결산하였다.

박홍은 이 토론회에서 “주사파출신은 세 가지 종류다.

첫째는 사회모순을 극복하려고 열린 마음으로 학생운동하다 곧 잘못된 길로 들어섬을 깨닫고 주체사상을 버린 사람이다. 주사파는 아니지만 재야운동을 하다 제도정치권에 뛰어든 J, S의원은 이런 범주와 유사하다. L의원도 비슷하다…주사파와 사노맹이 다르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독사나 살모사나 마찬가지다. 750명이 누구인지 나는 안다. 학생회장이 주사파이면 통상적으로 간부들도 같은 계열로 봐야한다. 87년부터 94년까지 총학생회장 수 만해도 5백51명이다. 부회장도 그 정도이고 그래서 한 학교마다 20-30명씩, 7년간 잡으면 이 기간 동안 대학이 배출한 주사파가 1만 5천-3만 명에 달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학생들이 졸업 후 언론-교육-사회봉사계 등 각계에 진출했으며 특히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많다…민주당에 주사파가 많다는 말은 언론이 잘못 파악한 것이다. 여-야에 다 있다. 주사파의 전향파들이 정계-언론계에서 활약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고 말하였다.

 

16-8(조선일보9408261면)

[조선일보 1994년 8월 26일 1면]

 

16-9(동아일보9408261면)

[동아일보 1994년 8월 26일 1면]

 

 

결국 박홍 총장은 주사파가 누구인지 특히 북한에서 장학금을 받고 남한에서 교수가 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16-10(한겨레박재동 만평박홍)[한겨레신문, 박재동 확백 만평]

 

 

안기부에 연행됐다 32시간 만에 풀려난 정현백 교수

 

그런데 기어코 사단이 벌어졌다.

국가안전기획부는 1994년 10월 6일(목) 성균관대 사학과 정현백 교수와 숭실대 독어독문학과 김홍진 교수, 서강대 사회학과 윤여덕 교수 등 현직교수 3명과 독일유학생 이태훈 씨 등 3명을 포함, 모두 6명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긴급구속(연행),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언론들은 안기부가 지난 8월 박홍 총장이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김일성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대학교수가 된 사례가 있다고 폭로한 이후, 그동안 꾸준히 내사활동을 펴온 것으로 안다면서도 “김일성 장학금과의 관련 여부를 수사하기 위해 연행한 것은 아니고 독일을 중심으로 한 해외간첩단과의 연계여부를 확인-수사하기 위해 이들 교수 및 유학생들을 연행, 수사 중”이라고 보도하였다.

검찰도 구체적인 혐의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공사건으로 박홍 총장 발언과 관계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0월 5일 밤 11시경 학교에서 과천 자택으로 돌아오던 정현백 교수는 집 앞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다.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은 문민정부 이후 안기부는 임의동행을 하지 않아 긴급구속장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는데 이를 보여줄 것을 요청하자 단지 신분증만을 내밀고는 집 안을 30분간 수색한 다음 정 교수를 연행한 것이다.

정 교수는 안기부 분실에 도착하였다가 다음 날 새벽 1시경 중부경찰서에 가서 ‘인치’ 절차를 밟은 다음 다시 안기부로 끌려가 20여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핵심사항은 북한의 고급공작원으로 20년간 암약하였다는 김용무와 언제, 어디에서 만났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정 교수는 1977년 당시 서울대 인문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은사 두 분으로부터 김용무를 소개받은 뒤 몇 번 어울린 적이 있는데 17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거쳤다.

안기부는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자 연행한지 32시간 만인 10월 7일 새벽 6시 반경 정 교수를 석방하였다.

 

안기부 조사보다 언론보도에 더 공포감을 느낀 정현백 교수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과 ‘북한 장학금’을 받은 교수가 있다는 폭탄발언으로 뒤숭숭한 시기에 연일 박 총장의 무책임한 발언을 확대재생산하는데 열을 올렸던 우리 언론이 안기부의 교수들 연행 사건을 놓칠 리 없었다.

안기부가 이례적으로 공식발표 때까지 보도를 유보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미 ‘박홍 상품’에 맛을 들인 언론이 귀담아 들을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언론은 마치 박홍 총장이 말한 ‘북한 장학금 교수’가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양 추측, 확대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16-11(조선일보9410071면)

 [조선일보 1994년 10월 7일 1면]

 16-12(동아일보9410071면)

 [동아일보 1994년 10월 7일 1면]

 

KBS, MBC, SBS 등 방송3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중동 등 거의 모든 매체들이 <北 장학금 교수 조사>이니 <북 장학금 교수 구속> 등의 자극적인 제목으로 안기부가 이들 교수들을 대상으로 독일 유학 시절 친북한 활동이나 밀입북, 북한 장학금 수령 여부 등을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에는 이러한 보도 내용을 알 수 없었던 정 교수는 10월 7일 새벽에 풀려나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라디오에서 자신이 곧 구속될 것이라는 보도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정 교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토록 갈구하였던 휴식과 잠이 아니라 ‘북한 장학금 교수 2명 연행’이라는 등의 언론보도였다.

정 교수가 석방되었는데도 우리 언론은 ‘세 교수는 일단 귀가 조치하였다’고만 할 뿐, 보도를 정정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6-13(한겨레941010정현백)

[한겨레신문 1994년 10월 10일 1면]

 16-14(한겨레21941020정현백)-1

 [한겨레21 1994년 10월 20자 14면]

118호 뉴스레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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