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및 고구려유적지 탐방기
<민변 인천지부 2024년도 역사문화기행>
이재원
- 준비
민변 인천지부에서는 2019. 12.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 상해시, 항주시 등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역사여행을 다녀왔었다. 그때 우리 일행들은 다음에는 백두산 및 중국 만주지역으로 답사여행을 해볼 것을 기약하였었다. 그러던 것이 코로나21 사태로 인해 계속 미뤄졌었다. 인천지부는 2024년 1월경에 열린 총회에서 백두산 및 고구려유적지 탐방여행을 하기로 정하였고, 2024. 8. 1.부터 8. 5.까지 10명의 변호사와 7명의 가족들 총 17명이 4박 5일간의 답사여행을 떠났다.
- 대련시에서 단동시까지
우리 일행은 2024. 8. 1. 오후 2시 무렵에야 중국 대련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한국말을 구수하게 하는 중국동포 가이드분인 최봉호씨를 만났다.
대련시에서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공원이라는 성해광장을 방문하였다. 성해광장에서의 자유시간은 한국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습도가 높은 무더위와 타는 듯한 목마름, 특색없는 공원의 풍경, 너무 많은 인파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러시아거리였다. 중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대련시에 러시아인들의 거리가 생겼다고 하는데, 다른 대련시의 건물들이나 거리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 느껴졌다. 우리는 러시아거리를 구경한 후 4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단동시로 갔다.
-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이 있는 집안시에서의 하루
우리는 8. 2. 약 5시간 정도를 달려 집안시에 도착했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네 시골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 모양들, 논밭이나 가로수들, 나무 수종들. 압록강을 따라 개설된 도로이기 때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식생과 풍경들이 북한지역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것이어서 그런지 우리네 자연 및 풍경과도 아무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집안시에 도착한 후 점심식사를 하고 광개토대왕릉을 방문하였다. 광개토대왕릉 입구에서 수풀들 사이로 난 인도를 조금 걸으면, 먼저 사면이 모두 유리로 된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고구려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광개토대왕비가 들어서 있는 건물이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6.39미터이고, 무게는 대략 37톤으로 추정된단다. 거대한 4각 기둥 형태의 응회암 자연석 4면 전체에 빽빽이 1,775자의 글씨를 음각한 것이다. 자연석인 관계로 중간에 긴 홈들도 있고, 군데군데 거친 모양으로 튀어나온 부분도, 작은 구멍들도 보였다. 거대한 광개토대왕비의 실물을 직접 보면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가정을 쓸데없이 다시 한 번 해보았다. 웅대한 고구려가 속절없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 융성함을 한껏 드높였던 광개토대왕의 비를 1,000년 이상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빈 들판에 홀로 외로이 서 있게 하였다는 생각에 잡념이 인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를 표지판을 따라 20분여를 걸으면 광개토대왕릉이 나온다. 들판에 넓고 완만한, 원형 모양의 둔덕이 있고, 그 둔덕의 중간 부분에 돌무더기가 조금 보이며, 돌무더기 위쪽으로는 일반적인 무덤의 봉분 모양이 도드라져 보이는데, 그곳 전체가 광개토대왕릉이란다. 전체 지름이 68미터 전후이고 높이는 14미터 정도란다. 광개토대왕릉이 이렇게 큰 규모였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도굴과 무관심으로 1,000년 이상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위대한 대왕의 무덤이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는 것이 새삼 애석하게 느껴졌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광개토대왕릉에서 1.3km 정도 떨어진 장수왕릉이다. 장수왕릉은 그 보존상태가 훨씬 양호하여 제법 규모가 있는 관광단지로 개발되어 있었다. 장수왕의 묘인 장군총은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명칭에 걸맞게 커다란 4각형 돌들을 피라미드 형태의 돌무덤이다. 전체적으로 장수왕릉은 주변을 잘 정비하고 정원도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는데, 광개토대왕릉이 백제의 쓰러진 왕궁터나 절터를 연상케 한다면, 장군총은 신라의 잘 보존되고 정성스럽게 꾸며진 대원릉이나 천마총 등을 떠올리게 하였다.
- 백두산
우리는 8월 3일 오존 5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 백두산 서파 관광단지에 도착했다. 거기서 긴 기다람과 검색 끝에, 다시 관광단지 내에서만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2번 갈아타고 1시간 20분여를 달리고 나서야 서파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발 2,100여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한 서파 초입은 뒷편의 천지 쪽 외에는 서파보다 훨씬 낮은 산봉우리들만 있어서 서파 밑으로는 온 세상이 뻥 뚫려 있는 듯하다. 그 광활한 빈 공간에서 백두산 자락의 맑고 시원한 바람이 그대로 불어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서파의 1,442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긴 하였지만 아무런 막힘이 없이 제 속살을 모두 보여주는 듯한, 다양한 모양과 형질의 봉우리들, 등산로 가까이 피어 있는 노란빛, 흰빛, 자주빗, 주황빛깔들의 야생화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만한 느낌을 일게 했다. 등산로의 계단에는 50개의 계단에 하나씩 계단의 숫자가 쓰여 있는데, 나와 아내가 1,200~1,300여개의 계단을 지날 때 즈음부터 등산로 초입부분의 광활한 빈공간에 머물러 있던 거대한 검은 먹구름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 즈음에는 이미 검은 구름이 우리를 앞지르고 있었다. 나는 검은 구름 때문에 천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곧이어 우리 머리 위쪽으로 거대한 나무데크가 보이고 그 위에 수많은 인파들 사이로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등산로를 오르면서 보았던 초록빛깔이나 작은 바위들로 구성된 유순한 봉우리들이 아닌, 회갈색, 갈색 빛깔의 커다른 돌산들이다. 계단길을 오를 때 점점 흐릿해졌던 하늘이 놀랍게도 천지에서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천지 쪽으로 나아갔다.
수많은 인파들이 데크의 앞부분에서 천지를 구경하고 있었다. 데크에 발을 내딛자, 사람들 머리 사이로 천지의 물빛까지 눈에 들어왔다. 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초현실적인 광경을 보는 듯한 착각에 잠시 멍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에 검은 구름떼가 우리를 앞질러 가서 걱정이 앞섰었는데, 막상 서파 정상에 오르자, 천지가 구름들 사이로 태양빛을 받아 영롱한 빛깔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해치면서 천지 가까이 다가갔다. 늘상 영상으로 보던 천지가 내 발 아래 펼쳐져 있다. 웅장한 바위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에메랄드빛, 짙푸른빛 등이 다양한 빛깔로 초현실적인 물빛을 띄고 있는 천지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일었다. 우리가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보았던 수많은 강물과 시냇물, 계곡물들은 2개월여 동안 지속된 장마로 온통 흙탕물이었다. 천지에도 계속 비가 내렸을 것이고, 특히 지난 일주일 정도는 집중호우로 등산로 자체를 폐쇄하였을 정도였다는데, 천지의 물빛은 이 세상의 물이 아닌 듯 물빛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절로 신령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물빛이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봉우리들의 다양한 모습과 형태들, 에메랄드 색이 곧바로 짙푸른 색으로 변하기도 하면서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물빛, 밝은 태양빛 광선, 하얗고 어두운 구름들 속에 새초롬하게 드러난 푸른 하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내 평생 이런 광경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 풍경을 눈으로 담고 휴대폰으로 담아두었다.
천지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올라 백두산관광지구 내에 있는 금강대협곡에 방문했다.
협곡을 나온 우리 일행은 인근에 있는 천지레프팅 장소로 갔다. 레프팅 장소에 가서 보니, 원시림 사이에 폭 7~10미터 정도의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계곡물을 2~3명이 탈 수 있는 고무보트를 타고 아무런 노도 없이 그냥 물의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딸 시민이와 함께 보트를 탔다. 운행을 도와주는 현지인들이 우리보트를 힘껏 밀자 우리 보트는 속도를 내면서 천지계곡으로 빠져들었다. 경쾌했다. 흙갈색 물에 손을 넣어보니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진다. 백두산의 원시림 속을 빠른 계곡물을 따라 시원하게 내려간다. 숲이 우거진 곳에서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다가 멀리 하늘이 열린 곳에서 태양광선이 물속으로 스며들고 그 속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비롭고 환상적인 모습이다.
레프팅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후 다시 3시간여를 달려 통화시에 있는 우리들의 숙소로 갔다.
- 오녀산성과 압록강
우리는 8. 5. 7시 30분에 통화시 호텔을 출발하였다. 1시간 30분여 달려 환인시로 갔다. 환인시는 고구려의 최초 수도였던 졸본성과 오녀산성이 있는 곳이다.
먼저 들린 오녀산박물관에서는 고구려의 초기 산성의 모습들, 발굴된 토기들, 생활도구들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오녀산성을 멀리서 조망하면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환인시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오녀산성을 출발한 우리는 대략 3시간여를 달려 단동시로 왔다.
가이드 최선생은 단동시 역시 침수가 되어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재차 말하면서 양해를 구하였다. 다만 우리가 처음 왔을 때보다는 수위가 많이 낮아져 단동시의 압록강변에 있는 강변도로로 지나가면서 강 건너편 신의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우리는 5시 무렵에 단동시에 도착하여 압록강변의 도로를 달렸다. 가이드 최선생은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곳이 위화도라고 설명해주신다. 위화도구나. 빗줄기가 많이 잦아져서 거의 내리지 않았지만 버스 안에서는 거대한 흙탕물로 변한 압록강 위로 흐릿한 초목만 보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압록강변에 하얀 유람선 한 대가 보였다. 우리는 가이드 최선생에게 유람선이 운항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최선생도 유람선을 확인하곤 곧바로 전화를 하기 시작하더니 비가 그쳐서 유람선이 운항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운좋게 유람선을 승선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대부분 별다른 구조물이 없어 강변이 잘 보이는 2층으로 올랐다.
우리를 태운 배는 압록강 상류쪽으로 향했다. 선착장 부근에서 보였던 신의주의 건물들은 이내 자취를 감추고 푸른 초목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둑해지는 시간이어서 단동시 쪽에서는 화려한 불빛이 비치기 시작했음에도, 신의주 쪽에서는 불빛이 거의 켜지지 않았다.
우리 배는 위화도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위화도는 압록강 하구의 강 중간지점에 강줄기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는 섬이다. 위화도의 북한군 초소가 군데군데 보였다. 수풀과 초소지역이 지나고 강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한 2층건물들이 나타났다. 집들의 간격은 넓고 일정했다. 똑같은 모습의 집들이 정형화된 형태도 줄잡아 20~30채 정도 나란히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가이드 최선생은 최근의 홍수로 인해 위화도에 사는 주민들이 모두 소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이 전혀 켜져 있지 않은 것이란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길게 늘어선 2층건물들 중 2채에서 런닝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2층 베란다에 나와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그곳을 바라보니 흐릿하지만 또렷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다. 북한 주민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했으나, 점점 더 씁쓸한 생각이 든다. 단동시의 화려한 불빛과 30~40층 높이의 고층건물들을 매일 바라보며 살고 있을, 그러면서 매일 한국인관광객들에게 노출되어 생활하고 있을 위화도의 2층건물들의 주민들은 위화도와 신의주, 북한의 처지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까? 저 강변에 늘어선 2층건물들이 선전용 건물들일지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복잡한 감정들이 짐작해본다. 기분이 묘할 따름이다.
유람선을 승선할 때부터 내리던 비는 위화도의 중간을 통과할 때 즈음부터 폭우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잔잔하던 빗줄기가 갑자기 폭우로 돌변한 것이다. 위화도 건너편의 단동시는 화려한 불빛을 내뿜고 있다. 마천루와 고급멘션, 고층아파트, 화려한 조명의 상가들이 세찬 빗줄기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이 뽐내듯 서 있다. 반면 우리의 위화도는 이렇게 세찬 비에 떠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굵은 빗줄기를 속수무책으로 하염없이 맞고 있다. 역시 씁쓸하다.
우리 배는 압록강에서 가장 상류쪽에 위치한 위화도의 끝자락에서 회항하여 출발지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 배는 우리가 탔던 선착장을 지나 조중우의교 밑을 지난다. 조중우의교에는 차량이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조중우의교 바로 아래쪽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 쪽 다리 부분이 파손된 채 중국 쪽 절반의 다리만 남아 있는 압록강단교가 있다. 압록강단교 건너편의 신의주는 북한의 제2의의 도시인 신의주에서도 가장 번화하다는데, 선전용으로 개발한 그곳조차 그 규모나 높이 등에 있어선 단동시 강변의 마천루나 저 아래 중국 소유라는 월량도의 마천루들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또한 제법 높은 건물들도 있었으나 그 건물들에서 나오는 불빛도 듬성듬성 희미할 뿐이었다.
유람선 관광을 마친 후 우리는 단동시내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였다.
- 한국으로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도착하여 간단한 여흥을 조금 더 즐기고 그 다음날인 8. 5. 오전 7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4시간여를 달려 다시 대련으로 왔다. 대련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역시 40분 정도 연발이 되었다. 우리들 일행은 저녁 6시 30분 무렵에 모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의 여행은 마지막 회식자리에서 김원규변호사님이 부인분의 맨 처음 고백을 받고 했었다는 말,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행운과 축복을 받은 여행이었던 것 같다. 함께 해준 우리 일행들과 가이드 최선생 및 최선생 가족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덕분에 평생에 잊지 못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