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 키세스 시위대 그리고 극우 집회 / 강한결 회원
키세스 시위대 그리고 극우 집회
– 강한결 회원
1월 4일에서 5일까지 이어진 집회의 키워드는 ‘키세스 시위대’였다. 그러나 나는 철야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키세스 시위대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5일 개인적인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서야 눈보라에 덮인 사람들의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4일 광화문에서 시작해 한남동으로 이어지는 집회에서 사실 내가 느낀 감정은 극우 집회에 대한 충격과 슬픔이었다. 극우 집회를 내 눈으로 본 것이 그날이 처음이었다. 4시 광화문 집회 장소가 광화문 동십자각이어서 나는 별생각 없이 광화문역에서 내렸다. 광화문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태극기, 성조기와 마주했다. 나는 그때까지 극우 집회 참가자 대다수가 노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랬지만, 우리 부모님뻘의 부부가 거기 얌전히 앉아있는 것을 보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극우 집회는 막바지였고 사회자는 “자, 이제 한남동으로 빨리 갑시다!!”라고 소리쳤다. 급하게 동십자각으로 가서 다른 변호사님들과 만났다. 광화문은 평화로웠지만, 한남동이 너무 걱정되었다. 그래서 김도희 변호사님과 함께 이정민 변호사님 차를 타고 한남동으로 향했다.
집결지는 한강진역이었는데, 이태원역에 가기 전부터 차가 막히고 인도에는 ‘stop the steal’ 피켓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차로 이동하면서 이정민 변호사님이 ‘한남동 집회에는 젊은 남자들이 많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랬다. 그리고 아이 손을 잡고 나온 가족 단위 참가자들도 있었다. 한강진역 3번 출구는 우리 비상행동 집회 참가자들과 극우 집회 참가자들이 뒤섞여있었다. 응원봉과 경광봉, 다양한 깃발과 태극기, 성조기가 뒤섞여있어 사람들도 혼란스러워했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비상행동 행진은 차도로, 극우 집회 행진(?)은 인도로 보도블록과 화단만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극우 집회 참가자들의 수가 현저히 적었으나 “중국에 잡아먹히고 싶냐!”라며 계속 시비를 걸었다. 나에게도 “민변 정신 차려!”라고 소리쳤다. 계속 작은 몸싸움들이 있어 사이에 껴서 떨어뜨리는 것이 일이었다.
겨우 극우 집회와 분리되어 최종 집회 장소에 도착했다. 안쪽은 안전했지만, 가장 가장자리에서는 경찰들을 사이에 두고 빨간 경광봉이 어지러웠다. 나는 극우 집회의 젊은 남자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다. 노인들은 이해할 수 있어도, 내 또래의 남자들과 한평생 같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날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애도 기간이어서 K-pop 대신 민중가요를 많이 불렀다. 그 노래들이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1월 19일 윤석열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서울서부지방법원이 습격당했다. 괴로워서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국민의 힘, 전광훈, 극우 유튜버들, 폭도들 모두 제대로 처벌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동시에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래도 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착잡하고 고민이 된다. 나는 윤석열을 뽑지 않았으나 그를 뽑은 동료 시민들을 둔 죄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맞은 것처럼, 우리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