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를 지켜보며… 조금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_이태원 참사 명단공개, 누구를 위한 공개인가 (월간변론 108호)

2023-10-04 136

지난 14일 일부 언론사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공개의 이유는 정부가 공적인 추모 공간을 마련하지 않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애도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명단 공개에 유가족의 동의는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하여 정부를 포함하여 정치권, 언론, 시민사회에서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일부 유가족을 대리하고 있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TF에서도 ‘명단 공개를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가족의 동의 없는 명단공개에 대하여 이는 프라이버시권 침해,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위반 등의 법적 책임이 문제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잇달았다.

일각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한 이름이므로 이는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반되지도 않고, 과거에도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희생자 명단을 공개한 전례가 있으며, 개인의 사생활 못지않게 사회적 의미도 상당히 크기 때문에 유가족 동의 없는 희생자 명단 공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비판과 지지 목소리를 저울 양쪽에 올려놓고 무게를 잴 순 없지만, 현재까지는 유가족의 동의 없는 명단공개가 적절하지 않다는 편에 무게가 실렸다. 여야가 적어도 유가족의 동의 없는 명단공개에 대하여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과거에 했으니 또 공개하자? ‘낡은 생각’이다

희생자 명단 공개에 대한 법적 근거는 찾기 어려운 반면, 명단 공개를 금지하는 법적 근거는 그것이 적확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용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또한 과거 사례에서 명단을 공개했다고 하더라도,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 우리는 과거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잘못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과거 대형 참사에서 피해자와 유가족이 크나큰 상처와 트라우마로 고통 받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고, 이러한 반성적 고려에 의해 세월호 사건 이후 재난보도에 관한 기준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거에 공개했으니 지금도 공개해야한다는 것은, 과거에도 계급이 존재했으니 지금도 계급이 존재해야한다는 것과 다름없이 ‘낡은 생각’이다.

희생자 명단 공개의 주요한 근거 중 하나였던 사회적 추모와 애도에 관해서는 어떨까. 즉, 희생자 명단 공개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반드시 이 시점에 공개했어야만 하는 사유가 있었던 것인지를 살펴보자.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수녀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수녀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희생자 명단 공개로 인하여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관한 추모와 애도의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번진다면, 이를 희생자 명단 공개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 명단 공개 후 현재까지 이를 뒷받침하는 유의미한 사회적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가족들 중 일부는 공개된 명단에서 희생자 이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령 명단을 공개하고 싶어 하는 유가족이 있더라도 명단 공개 여부가 사회적인 논란이 된 이상, 그 의사를 자유롭게 피력하는 것 역시 부담으로 작용할 터이다. 결과적으로 희생자 명단 공개는, 관련해 유가족들이 자연스럽게 희생자의 삶을 말하고 기억함으로써 진정한 애도와 추모를 할 수 있는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쳤다.

세월호 사건에서는 유가족들이 스스로 모이고, 유가족을 통해 자연스럽게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전달되면서 추모와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는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희생자 명단을 공개할 필요가 있더라도 그 시점은 유가족이 스스로 이를 공개하기를 원할 때이다. 꼭 지금 이 시점에 명단을 공개해야만 추모와 애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가족의 동의 없이 명단을 공개하는 것은 그 선의와는 무관하게 마치 추모와 애도를 강요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추모와 애도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보면,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작가는 상실로 인한 혼돈을 간직한 채 살아가며, 긴 시간을 들여 어머니를 기억하고 생각한다.

슬픔이 사라지는 애도의 끝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마찬가지로 그 시작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애도하자’며,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전에 우선 유가족이 그 슬픔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는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질 수는 없는 것인가. 적어도 여전히 유가족과 지인들이 슬픔의 바다 속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섣부름을 뒤로하고, 조금씩 자제하며, 그들을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적인 추모와 애도의 물결이 흘러넘치면 좋겠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 적어도 유가족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까지 만이라도 그 마음을 잠시 접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이형준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월간변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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