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를 찾은 판결 그리고 민주주의와 투쟁의 역사
-‘긴급조치 제9호’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의 의미-
이상희 회원 (긴급조치 변호단)
긴급조치 제9호가 발령된 지 47년 만에 만에 국가(사법부)가 긴급조치의 발령 및 적용과 집행의 위법성을 인정하고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였다. 박정희가 발령한 긴급조치에 저항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옥되고 인생의 굴곡을 겪은 만큼이나 오랜 시간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가의 책임을 묻는 과정 역시 고난의 여정이었다는 점에서 재심과 국가배상청구 소송의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투쟁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이번 판결을 쟁취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저항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신 피해자들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영구 집권을 위해 헌법의 일부 효력까지 정지시킨 뒤,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 연임 제한 조항 삭제, 3권 분립 원칙을 무력화시킬 정도의 대통령 권한 집중을 핵심으로 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1974년 1월부터 긴급조치를 발령하였다. 말이 ‘긴급’이지, 긴급조치 제9호만 하더라도 1975년 5월 13일에 발령되어 해제(1979년 12월 8일)될 때까지 4년 7개월간 국민의 일상을 규율하였다.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고 헌법 개폐 등에 대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제1호만 하더라도 긴급조치 위반에 대해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으로 긴급조치 제1호의 첫 번째 구속자가 된 백기완, 장준하 선생님의 경우 1심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2심에서 12년으로 감형되어 확정됨). 제1기 진실·화해위위원회가 974명의 판결문을 통해 위반 사건 내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학생운동이 32%이고, 재야·야당 정치 활동이 14.5%인 반면, 음주대화나 수업 중 박정희나 유신체제를 비판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건수가 48%에 달한다. 그만큼 긴급조치가 시민들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0월 긴급조치 발동이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진실규명 결정을 하였다. 피해자들은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사법적으로 판단받고 원상회복을 위하여 형사재심을 청구하였다. 하급심 법원은 긴급조치가 페지되었다는 이유로 판단을 회피하였으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9년 12월 긴급조치 제1호에 대하여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으로 유신헌법에서 정한 요건도 갖추지 못한 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보고 당초부터 위헌무효’라고 판단하였다. 위 판결 이후에 대법원은 긴급조치 제4호, 제9호에 대해서도 순차적으로 위와 같은 취지로 위헌 무효 판결을 하였다. 헌법재판소도 잇따라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결정을 하였다. 법원은 위 대법원 판결과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피해자들이 제기한 형사재심청구 소송에서 무죄를 선고하였다.
피해자들은 형사적인 원상회복을 넘어 긴급조치에 대해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국가배상은 국가의 위법행위를 사후적으로나마 금전적으로 회복·구제함으로써 법치국가원리를 최종적으로 담보하는 기능을 수행하며(서울고등법원 2019나2038473 판결) 국가의 기본권 보장의무를 이행하는 방안이자(대법원 2018다212610 전원합의체 판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신체의 자유를 사후적으로 회복한다는 의미(헌법재판소 2006헌마788 결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대법원은 2014년 10월 27일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한 수사기관의 직무행위나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는 당시 시행 중이던 긴급조치를 따른 것이므로 불법행위 책임이 없다’는 취지로 판결(제2부, 주심 이상훈)한데 이어, 2015년 3월에는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불법행위를 구성할 수 없다’고 판단(제3부, 주심 권순일)하였다.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법령에 의한 국가기관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중대한 인권침해에 가담했는데, 대법원은 각 행위를 분절하고 전통적인 국가배상법리에 따라 공무원 개인의 고의·과실을 요구함으로써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었다.
위 2개의 판결 모두 사실상 긴급조치의 효력을 추인하였다는 점에서, 과거 유신체제에서 민주주의와 법치국가 원리를 뒤흔든 판결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더 황당하고 어이없던 일은, 위 판결 모두 대법원의 <사법권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판결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과 변호단은 긴급조치의 발령·적용·집행을 총체적으로 판단하여 실질적인 법치주의를 구현할 것을 주장하면서 국가배상책임의 법리 문제를 제기하였고, 패소판결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일부 위헌 의견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법 규정에 따라 청구인들의 청구를 각하하였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결국 2022년 8월 30일 민주주의와 법치국가 원리에 부합하는 판결을 선고하였다. 구체적으로, ‘긴급조치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하여 그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평가’된다고 보고, 긴급조치의 적용·집행으로 강제수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함으로써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하였다. 국가배상책임의 구성과 논거, 긴급조치 발동의 위법성 여부, 법관 판결의 위법성 여부에 대하여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13명의 대법관 모두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였다. 국가배상법리와 관련하여 완결된 법리를 제시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나, 다수 공무원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개입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가배상책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제 패소 판결이 확정된 피해자들의 구제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남았다.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과거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국가공동체의 책임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법원의 권한과 책임을 묻는 김선수 대법관과 오경미 대법관의 의견은 유신시절의 법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법관들에게도 유효하다는 생각에, 길지만 이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은 민주주의 체제와 사법권의 수호자이며 인권의 옹호자로서 헌법에 의하여 숭고한 권한과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이와 같은 법관의 존귀함과 긍지는 헌법이 선언한 법관의 독립을 통하여 드러나고, 개별 법관이 구체적인 사건에서 헌법상 부여된 권한과 책임을 다하여 인권옹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완성된다. 법관이 인권옹호의 굳건한 의지로 개별 사건에서 재판행위를 통해 행정부, 입법부에 대한 견제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헌법이 보장한 법관의 독립을 제대로 구현하는 길이다. 이는 법관의 도덕적, 윤리적 소임일 뿐만 아니라 헌법적 책무이기도 하다. 유신시대에 법령의 형태로 나타나 극단적인 인권침해의 결과를 가져온 긴급조치의 경우처럼,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어두운 시대 상황일수록 헌법은 법관에게 헌법수호의 책무를 다할 것을 더욱 절실히 요청한다. 법관이 그 요청에 부응하여 행한 인권옹호조치는 헌법적 가치가 현실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여 헌법이 보장한 다양한 권리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속에서 꽃 피울 수 있게 한다. 이와 반대로 법관이 헌법수호의 요청을 묵살하고 위헌적 법령의 테두리 안에 안주할 때 인권침해의 양상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법관의 독립은 얼마나 위태로워지는지, 우리는 긴급조치 사건의 재판을 통해 목도하였다. 법관은 통치권자나 지배권력이 위헌․위법한 국가권력 행사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도구로 전락되어서는 결코 아니 되고, 헌법에 의하여 부여받은 권한과 책임을 다하여 위헌․위법한 국가권력 행사를 견제하여야 한다.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회전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법관은 바퀴에 달린 톱니 하나에 불과하여 외부적 요인으로 톱니바퀴의 회전이 멈추지 않는 한 톱니바퀴와 함께 회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톱니바퀴의 외부에 존재하는 제동장치로서 필요한 경우에는 톱니바퀴의 회전을 멈출 수 있는 존재인가? 법관이 톱니바퀴의 외부에 존재하는 제동장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긴급조치 사건에 관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에 대하여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과 반성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법적 평가의 문제가 아니며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사법부상이나 법관상은 어떤 모습인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미래를 위하여 법관에게 요구되는 헌법적 책무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사법부와 법관의 위와 같이 중차대하고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재확인하고 다짐하는 차원에서 이 별개의견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