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짱간이 ‘진짜’ 간다[1] – 민변을 떠나는 장길완 회원 인터뷰
– 작성: 허진선
5년의 민변 상근을 뒤로하고, 3년 간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교정시설에서의 대체복무를 앞두고 있는 장길완 민변 상근 간사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매체의 한계로 길완님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이야기, 또 민변에서 상근하며 느낀 감정들을 최대한 담아보려 하였습니다. 3년 뒤 건강히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장길완(이하 “장”): 장길완이고요. 2017년부터 민변에서 상근하고 있습니다. 여성인권위원회,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소수자인권위원회와 교육기획팀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허: 올해로 6년차이시네요!
장: 네. 2017년 3월에 입사했으니까요, 딱 5년하고도 한 달 지나는 중입니다.
허: 지금 맡고 있는 위원회는 평소에 관심 있던 분야인가요?
장: 네, 질문을 들으니까 민변에 지원했을 때 자기소개서나 그동안 활동했던 걸 보내주고 면접 과정에서 이야기했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대학 시절에 여성주의나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동아리를 하기도 했어서 기존에 해왔던 성평등이나 반차별 관련된 이슈들을 민변을 통해서 풀어낼 수 있었고, 여성인권위원회, 소수자인권위원회, 아동청소년위원회도 맡게 되면서 연속성 있는 고민을 풀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허: 성평등과 반차별 이슈라고 하니까 생각이 났는데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계시지 않나요? 처음에 어떻게 결합하게 되신 거예요?
장: 차별금지법은 2007년 법무부가 성적 지향을 포함한 7개 사유를 삭제하고 발의했던 법률이라, 성소수자 관련 활동을 막 시작하던 2013년부터 알고 있던 이슈였어요. 당시에는 막연하게 언젠가는 제정되겠지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제가 민변에 들어왔던 2017년부터 전신이었던 ‘반차별공동행동’에서 운동의 외연을 넓히고 단단하게 만들어보자고 하면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로 재출범했던 걸로 기억해요. 차제연 재출범 초반에는 민변에 적응하느라 결합력을 높이지는 못했고, 서명운동 같은 활동에 간간이 참여했어요.
당시에는 차별금지 이슈는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운동 사회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제가 느끼기에는, 차별금지법이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이 크게는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서 차별은 부정의한 일이고, 각자 삶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차별은 구조적일 수밖에 없는데, 차별금지법은 불평등 자체를 개인에게 알아서 해결하도록 방치하는 게 아니라 국가나 공동체 역량을 투입해서 해소되게 하는 법이잖아요. 차제연 출범 이후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사회를 보면서, 그런 측면에서 차별금지법이 정말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18~19년도부터 사무처 상근자로서 차제연 활동에 열심히 결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차제연에서도 당시 민변 회장님에게 공동대표를 해달라는 요청이 오기도 했구요. 활동에 결합할 수 있는 시기와 조건이 맞아서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차제연에서 일이 주어지면 ‘일 많아요’라면서 도망치기 바빴던 것 같고, 막상 그 안에서 많은 역할을 못했던 것 같아서 부채감도 있었는데요, 민변에 있으면서 했던 일을 요즘 정리하고 있는데 내가 또 차제연 활동을 아예 안 하지는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길완님이 국회 앞 농성, 대선 앞두고 차별금지법 제정 유세단 활동 등 수많은 활동에 함께하기 위해 애쓰셨던 기억이 있어요. 특히 작년이 연내제정을 목표로 걸고 가장 집중적으로 차제연이 활동했던 시기인데,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결국 제정이 무산됐죠.
장: 작년이 사회적 분위기나 사람들 목소리가 커졌을 때죠. 이제는 정말 정치권, 국회가 응답해야 할 때라고 해서 사업계획 스케일이 커졌던 것 같고요. 그 결과로 국회 입법 국민동의청원 10만 명을 조직할 수 있었죠. 다른 반차별 동료 활동가들이 전국 지역 간담회도 진행하고, ‘평등길 1110’이라는 이름으로 미류, 종걸 활동가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50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도보로 행진했어요. 그 둘을 서포트 하는 역할을 했었고, 말씀하신 연말 국회 앞 농성이랑 올해 초 차별금지법 유세단까지 함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을 하나도 모르는 시민분들에게 차별금지법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하면 ‘그 법이 왜 아직도 제정되지 않았냐’들 하시더라구요. 정치권에서는‘사회적 합의’ 때문에 제정 못 한다고 하잖아요? 차별금지법제정 활동을 통해 수많은 단체들과 시민분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그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왔다라고 봐요. 국민동의 ‘10만’명은 다 어디있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국회 앞 농성, 유세단 활동을 하면서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던 구체적인 시민들의 목소리, 시민들의 얼굴들은 전국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각기 다른 이유, 다르지만 각자 소중한 이유들, 각자의 생존의 이유들로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고 있더라구요.
허: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투쟁이 떠올라요. 이동권 투쟁도 ‘생존’의 영역이잖아요?
장: 네. 차별금지법 제정 활동도 그렇고, 이동권 투쟁도 그렇고 정작 이 목소리들을 안아 들어야 할 사람들이 그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 답답함이 크죠. 전장연 동지들이 이동권 투쟁을 21년을 하셨더라고요. 물론 21년 전과는 지금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 부족한 현실이잖아요. 기재부에서는 이동권을 보장할 예산을 안 잡아주고, 저상버스도 턱없이 부족하고, 엘리베이터도 부족하고요. 민변 회원 중 국회의원들도 많은데요, 소속정당들도 그렇고, 이러한 문제가 자기 과제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운동 사회가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와라’고 하지 말고, 시민들 선택 받아 제도권 정치에 들어간 만큼 소임을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허: 올해 안에 차별금지법이 꼭 제정되면 좋겠는데, 대체복무 소집을 앞두고 있어서 활동은 함께하지 못하시는 상황이죠?
장: 법 제정이 완료되면 하나의 국면이 바뀌는 것은 확실하지만. 하루아침에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거나, 장애인들의 출근길이 편해진다거나 학벌 없는 사회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차별금지법을 도구 삼아서 만들어가야 하는 게 있는데, 그런 걸 같이 하지 못해서 아쉽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장애인차별금지법추진연대’에서 ‘법’ 글자를 떼고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라고 이름을 바꿔서 연대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어디선가 들었었는데요. 저도 회의를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차별 사례를 수집하고,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지, 인권위에 진정을 어떻게 넣을까? 소송으로 대응할까? 등을 논의하면서 차별 겪은 당사자와 비슷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과 계속해서 싸우시더라구요. 그런 면에서 차제연도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에 할 일이 많겠죠? ‘동료시민으로서 평등한 관계 맺기’를 사회적으로 학습시켜나가면 진일보한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5-6월 경에 대체복무를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때까지 활동을 열심히 하고, 3년 동안 잘 쉬다가? 아 쉰다는 건 좀 물음표네요. 어쨌든 잘 다녀와서 그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허: 차별금지법제정 활동 외에 민변에서 기억이 남는 활동은 어떤 게 있으세요?
장: 살면서 인권위 진정할 일이 없잖아요. 재판부 제출할 의견서 써볼 일도 없고요. 그 전에는 못 해봤던 일들인데 부족하게나마 동료들과 함께 그런 작업을 해봤던 게 기억이 남아요. ‘성별’에 맞는 한복 착용을 요구하는 문화재청 한복 가이드라인이 있었죠. 100여명 시민들과 함께 인권위에 진정도 했구요. 정기국회가 개원되는 9월에 맞춰서 제가 맡고 있는 위원회 분야들의 법안을 검토하는데 모두 다 검토하지는 못하지만, 문제점 있는 법안들에 대해서 왜 문제인지 살펴봤던 기억이 있어요. 초등학교 교사 관련 법에서 정신장애인 채용을 제한하겠다는 것처럼, ‘먼지 차별’을 당연하게 담아서 제출되는 법들이 많고요. 그런 것에 대한 의견서를 함께 쓴다든지요.
기억나는 게 너무 많아요. 교정시설 수용자들의 인권 처우에 관해 조사하는 활동도 했었어요. 사회의 오랜 차별과 구조적 모순 중 하나가 성차별이잖아요. 그런 차별에 대해서 여성위 변호사님들과 같이 대응했던 기억도 있어요. ‘낙태죄’가 위헌이라는 선고가 나던 날 그 현장에 함께 있기도 했고요. 대체복무제에 대한 기자회견, 국방부 공청회나 토론회 개최했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부족하게 제도가 도입되기는 했지만, 그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미약하게나마 함께했던 과정들이 기억이 남아요. 그렇게 제도를 만드는 데 관여했는데 제가 그 제도의 심사 당사자가 되니까 신기하고 그러더라고요.
5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기간이지 길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시간을 돌이켜보니 많은 활동을 했고, 한 가지만 뽑기가 어렵네요.
허: 와, 진짜 많은 활동에 함께하셨네요. 지금 당장 떠오르지 않은 활동들이 더 있을 것 같아요. 반면에 아쉬운 점은 없나요? 이런 활동을 했으면 좋았겠다든지 이 활동은 이렇게 해봤으면 더 좋았겠다든지.
장: 음, 조금 일찍부터 차제연에 결합할 걸 이라는 생각은 있습니다. 그리고 민변에서 특히 실무가 중심이 되는 일들을 더 잘 해낼 수 있었는데 할 수 있던 만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한국인권보고대회도 제가 3년 연속 총괄 담당을 했는데, 어느 순간 저도 매너리즘이 있던 것 같아요. 매년 하듯이 하자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면서 진행했던 것 같아요. 보고대회가 실질적 대안을 모색하고 법제도의 한계에 더해 법으로만 담아낼 수 없는 인권의제를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되도록 기획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걸 하는 아쉬움이요. 남아 계신 분들이 저보다 더 잘 해내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허: 완전히 민변을 떠나시는 건 아니잖아요?
장: 네. 3년 휴직계 내고 4월 중순까지 일하게 될 것 같아요.
허: 3년 뒤에 돌아오시는 거죠?
장: (웃음.) 위원회가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하고 정기회의만 한 달에 7-8개 되는 것 같은데요, 코로나 때문에 세 개 위원회 마지막 회의를 줌으로 참가하니까 기분이 싱숭생숭하더라고요. 매월 오프라인에서 모여서 고민하고, 공부하고,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대안이 무엇인지 논의하던 시간이 일상이 되었는데, 앞으로 3년 동안 그런 자리에 없을테니, 그런 지점들이 아쉽기는 하더라고요.
허: 민변에 있으면서 고마웠던 사람이 있을까요?
장: 너무 많죠. 제가 많이 부족한데도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던 각 위원회 위원분들, 특히 집행부 같이 하셨던 위원들과, 무엇보다도 주5일, 아 저희는 주6일일 때도 자주 있었죠(웃음), 생활을 같이 하고 서로 일을 배우고 협력해나갔던 사무처 동료들에게 감사하죠.
허: 대체복무 심사 받으러 가실 때도 상근변호사님이 함께 휴가 내고 가셨잖아요?
장: 아 맞아요. 민변이 인권단체이기도 하지만, 변호사 조직이다보니까 상근간사들의 경우에는 매우 실무적인 것들만 하게 되는 때도 많은 것 같아요. 외부 단체분들과 연대할 때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민변 활동가가 실무역할을 해야 하긴 하지만, 실무만 하게 될 때도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걸 토대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사람을 조직하고 기획해서 바꿔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에 내용적 참여를 간사들이 함께해야죠. 그러기 위해선 동등하게 참여시키기 위한 노력 등 평등한 조직 문화가 꼭 필요하고요. 특히 상근변호사인 채완은 그런 점에 있어서 동료로서 함께 고민했던 사람이에요. 게다가 병역거부 심사가 3번인데 세 번 모두 변호인으로서 동행하면서. 저도 몰랐던 저에 관한 사실들. 저도 까먹고 있던 사실들을 같이 이야기했죠. 함께하는 동료이다보니까 제가 왜 병역거부를 하게 되었는지,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미래에 대해서. 걱정과 고민들과 기대가 있다는 것을 많이 들어주고 고민을 나눴던 사람이어서 심사과정에 옆에 있던 것만으로 힘이 되었고 고마웠죠. 물론 지금 인터뷰 중인 진선님을 포함해서 함께 상근하는 9명의 동료들과 지금은 그만두셨지만, 그전에 계셨던 다른 상근자분들, 전 사무처 구성원들 모두 지금의 제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허: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장: 평화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이 정부로부터 제약받기도 쉽잖아요. 평화와 전쟁이라는 이분법 사고 안에서 병역거부자는 이래야 할 것 같고, 게이나 트랜스젠더, 레즈비언들은 이럴 것 같고. 그런 식의 상들, 타자화가 분명 있잖아요.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오래된 신화처럼요. 양심적 병역거부 심사과정도 병역거부자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벗어나기 힘든 제도인 것 같아요. 소견서(진술서)를 쓸 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양심적 병역거부 해야지’하고 갑자기 툭하고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쌓이게 된 것을,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정리해서 쓰는 게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병역거부 문제가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평화적 신념에 의해서 하는 거다 보니까 민변도 평화적 상상력을 고민을 해나갔으면 좋겠고, 국가가 정상적인 몸을 선별하고, 모두가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해보고, 군사주의나 안보의 내용과 영역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을 해나갔으면 좋겠어요.
허: 길완의 인생을 짧은 소견서(진술서) 안에 담아내고 또 그 글을 읽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는 데 며칠 밤을 새고 몇 달을 고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진지한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요. 민변에서 있는 기간 동안 재미있었던 일화 하나만 풀어주세요.
장: 좋아하는 걸 일로 하다더라도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스트레스가 있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이태원 게이클럽에 가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못 가지만요. 코로나 전에 사무처 분들을 게이클럽에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모 변호사님이 게이클럽에서 현란하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춰서 클럽 사장님이 저분도 게이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있네요. 그분이 그날 그 클럽의 거의 주인공이었어요.
허: 마지막 공식 질문입니다. 나에게 민변이란 어떤 곳인가요?
장: 5년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마웠던 공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좋은 동료들을 만났던 것이 감사했습니다. 내가 보려고 생각조차 못 했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서 함께 배워나가고 활동할 수 있어서 저도 함께 진일보할 수 있던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홉수라 그럴까요? 아니면 일신상의 변화가 생겨서 그런지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나는 기분이에요. 민변이 나에게 어떤 공간이었고 나는 어땠는지를 반추하는 시기여서 더더욱 여기서 배웠던, 여기서 같이 나눴던 생각들을 교정시설 안에서도 잃지 않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나가고, 3년의 시간 동안 우리 사회 성평등이라던가 소수자인권이라던가 주목받지 못했던, 없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위치 지어진 시민들과 함께 민주사회 지평을 열어갈 다양한 회원과 상근활동가들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민변은 그런 충분한 역량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구요. 응원하고 지지하겠습니다!
아 참, 인터뷰 마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제가 대체복무를 5월 초, 6월 초쯤 가는데. 코로나 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요, 밥 약속. 술 약속, 선물 모두 환영입니다. 제 핸드폰 번호는요, 010-….
[1] <짱간이 간다> 유튜브 시리즈 영상은 민변 유튜브 채널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짱간이 간다> 유튜브 시리즈 바로 가기)
*장길완 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도에 관해 작성한 글을 다음의 링크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