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변론][시선] 가습기 살균제 책임자 무죄판결(서울중앙지방법원 2019고합142 등 판결)에 대한 단상

2021-02-16 51

 

법은 자연과학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 책임자 무죄판결(서울중앙지방법원 2019고합142 등 판결)에 대한 단상-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이 모두 다 증거다.”

“내 아내의 죽음이 증거다.”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하다가 폐 질환이 발병한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외침이다.

 

2021년 1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3형사부는 ‘가습기메이트’로 인한 소비자 피해와 관련하여 제조사인 SK케미칼 홍지호 전 대표, 판매사인 애경산업 안용찬 전 대표 등 13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가 폐질환 혹은 천식을 유발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그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하였다.

 

2018년 대법원이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의 인산염)를 성분으로 한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할 경우 그에 따른 원인미상 폐질환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하였음에도, 1심 재판부는 CMIT/MIT는 PHMG와 다르며, 폐질환 발생과의 인과관계 역시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업에 의한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법원의 태도는 매우 유감이나, 피해자 및 유가족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판결문 전반에 깔려있는 자연과학적 엄격성이다.

 

1심 재판부는 ‘환경부 산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위원회의 피해 판정은 피해자 구제 목적을 위해 폭넓게 피해자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2012년 환경부가 제작한 종합보고서(CMIT/MIT의 독성 및 치명성이 주된 내용임) 역시 ‘추정 내지 의견’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관련 전문가들 중 어느 누구도 인과관계를 단정하지 못했다고 보아 “증거가 부족하다”고 결론내렸다. 이처럼 법원은 기존 CMIT/MIT의 위해성을 인정한 자료들의 신뢰도를 애써 부정하며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위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판결이 나자마자 재판부에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진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전문가들은 “과학자들은 항상 가설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법원의 방식처럼 ‘입증된다’는 말은 학술적으로 하지 못한다”, “모든 과학연구는 한계점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판결은 연구의 한계점만을 선택해 근거로 삼았다”고 지적했다(<한겨레> 2021. 1. 19. 환경·보건 전문가들 “가습기 살균제 재판부 과학적 이해 부족했다”).

 

재판부의 말마따나 형사사건에서 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사회는 모든 변수가 완벽히 통제된 실험공간이 아니다. 100%의 확신, 100%의 가능성을 요구하는 순간 법과 재판절차는 어떠한 것도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환경부가 장기간 조사하여 인정한 CMIT/MIT의 위해성을 손쉽게 부정해 버리는 근거는 무엇인가, 전문가들에게 100%의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엄격성의 목적은 무엇인가, 1심 재판부는 가해자는 없고 “내 몸이 증거”라고 외치는 피해자들만 존재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CMIT/MIT와 폐 손상 사이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직접 폐 손상을 겪은 피해자들이 가장 명확한 증거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연과학적 엄격성’이라는 그늘에 숨어버린 무책임하고 비겁한 판결이 항소심에서는 뒤집히기를 바란다.

 

 

2021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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