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김미경 변호사님과의 만남.

2014-11-26 1,544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왠지 모르게 힘이 쭉 빠졌습니다. 나는 정말 헛살았구나 하는 통렬한 자기반성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이 숙제처럼 남았기 때문인데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남들과는 다르게 꽉 채워 사는 열정적인 김미경 변호사를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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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2011년인가요? 조동환변호사님 결혼식 때 봉하마을에서 보고 처음이죠? 오랜만이라 더 반갑네요. 오늘은 신연지, 최인경 두 자원활동가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김미경 : 네~반갑습니다

 

김지미 : 얼마 전에 안식년으로 1년을 쉬셨죠? 복귀하신지 얼마 안돼서 힘이 바짝 들어가 있겠는데요?

 

김미경 : 네~제가 11년차인데 아기 낳으면서 3개월 쉬고 2011년 7월부터 12년 7월까지 안식년으로 또 1년을 보냈었기 때문에 지치거나 쉬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10년 뒤에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해요.

 

김지미 : 김변호사님 만나러 오기 전에 우리 출홍팀에서 살짝 김변호사님에 대해 검색을 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그 역술인 이야기요.

 

김미경 : 아, 네. 고1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엄마가 점을 보러 갔는데 그 역술인이 제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했대요. 제가 지금도 날라리신자이기는 하지만 저는 전혀 믿지 않았어요. 아..나는 당연히 스무 살 넘어서까지 살 텐데 하나님이 살아 있는 역사를 보여주려고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죠.(웃음)

 

김지미 : 여고생 김미경은 그렇게 살아남아서 뭘 하고 싶었을까요?(웃음)

 

김미경 : 아… 제가 고등학교 때는 꿈이 컸어요… 이거 나가면 또 사람들이 뭐라 할 텐데,(웃음) 아니 뭐 솔직하게 할게요. 어렸을 때 꿈은 링컨 같은 사람이 되는 거였어요.

 

김지미 : 링컨 같은 대통령이요?

 

김미경 : 대통령은 아니고..사회지도자 같은 사람이요. 누가 물어보면 나는 직업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링컨 같은 훌륭한 정치가로 살 것이다. 이런 얘기를 대학교 2, 3학년까지도 하고 다녔어요.

 

김지미 : 오~~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링컨이라는 인물에 반해서였어요? ‘링컨 같은’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김미경 : 어렸을 때 위인전 읽는 걸 좋아했었거든요. 근데 그 때 링컨, 김구, 막사이사이 같은 정치가들이 와닿았어요. 링컨으로 대표되는 이런 정치인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실 법대를 왔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예요. 하하하~

 

김지미 : 그 꿈을 언제, 왜 접으셨나요?

 

김미경 : 제가 그런 자질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고, 현실 정치가 내 성향에는 맞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꿈은 스물두 살 정도에 접었어요.

 

김지미 : 정치가에서 법률가로 목표를 수정하게 된 계기는요?

 

김미경 : 아… 이게 단순하면서도 좀 복잡한데. 제가 암기를 상당히 못해요. 오로지 점수가 국영수에서만 나왔었거든요. 그래서 애초에 사시를 볼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1학년 때 ‘저는 정치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시는 공부해봤자 떨어질 거니까 안 보겠습니다,’ 이러고 다녔어요. 선배들이 보기에는 너무 좋은 밥이었던 거죠. (웃음) 법대에 왔는데 사시는 안 보겠다 그러구, 정치에 관심 있다 그러구. 그러다가 대학교 3,4학년 쯤 사회참여적인 활동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사시제도가 바뀌었어요. 사시과목에서 제가 싫어하는 암기과목들, 국민윤리, 국사, 세계사가 싹 빠졌어요. 그게 빠지는 걸 보면서, 아 또 하나님이 내가 싫어하는 암기과목들을 빼 주시는구나.(웃음) 그래서 요행으로 1차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험공부를 하게 됐어요. 4학년 때 그 결심을 하고 3년 휴학이 가능해서 3년 내에 사시가 붙으면 그 길로 가고, 아니면 졸업해서 떡볶이 장사하려고 그랬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떡볶이여서. 그런데 운 좋게 붙어서 변호사가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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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대학 때 통일동아리 활동을 했다고 들었어요. 연수원 때도 통일법학회셨죠? 지금 민변 통일위원회 소속이시고..통일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시네요.

 

김미경 : 제가 김구를 존경한다고..(웃음)

 

김지미 : 아~그 맥락이군요. 일관되시네요.(웃음)

 

김미경 :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겠지만 한국 사람으로서 통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통일이라고 하면 주사파 논쟁도 있고, 뭔가 마음에 부담감이 저 스스로도 있었거든요. 제가 자랐던 80년대 후반은 정말 과격시위가 많았는데 제가 또 서울대역 근처에 살아서 막 버스가 불타 있고, 온 도로에 깨진 병들이 있고 그런 장면들이 이해가 잘 안 갔어요. 과연 이 폭력이 맞는 걸까? 간디와 김구를 존경하고 평화적인 것이 좋다고 지향을 했었는데, 폭력이 목적으로 인해 정당화되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늘 있었어요. 그러다보니까 1학년 때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집회를 나가고 가두점거를 하고, 이게 잘 안 됐던 거죠. 그러다 제가 법대 여학생회 활동을 했었는데 그러면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오히려 더 거부감 없이 생각을 키워갔던 것 같아요. 페미니즘을 통해서 공부를 하고 사회학을 배우다보니 우리 사회의 많은 모순들이 사실은 분단으로 비롯된, 이 분단문제가 해결 됐다면 정치사상의 자유가 훨씬 더 자유롭고, 다른 선진국처럼 사상의 자유나 문화의 자유를 훨씬 더 누리면서 살았겠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통일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 더 열렸어요. 그래서 뒤늦게 2학년 2학기 때 ‘통일사랑’이라는 통일 동아리에 가입했고 활동을 했었죠.

 

김지미 : 그런 관심이 이어져서 연수원 때 통일법학회 부회장도 하시고 민변 통일위원회 소속이신데 솔직히 최근엔 통일위에서 변호사님의 얼굴을 뵙기가 힘들어요.

 

김미경 : 통일은 늘 관심 있는 주제고 지금도 북한아동을 후원하고 있고, 늘 마음은 열려있는데, 제가 안식년 기간 동안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김지미 : 그게 코칭인가요? 그건 잠시 후에 본격적으로 물어볼게요.

 

김미경 : 네, 코칭 공부를 하게 되면서 이 시간에 대한 확보가 필요하고, 사람이 24시간을 사는지라… 지금은 제가 갖고 있는 여유 시간을 코칭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대학원 다니는데 쓰고 이러다보니 다른 위원회 활동들을 같이 못하고 있어요. 날라리로 살고 있죠. (웃음)

 

김지미 : 그래도 통일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입장에서 법률가로서 통일운동은 어떤 모습이 옳다고 생각을 하세요?

 

김미경 : 저는 법조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인지는 조금 의문이 들지만 처음은 국가보안법 폐지라고 생각해요. 남북이 서로 온전하게 알고 소통하고 비판하고 이런 상황에서 교류도 있고, 협력도 있고, 퇴보도 있고, 선택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가장 필요한 일은 거기 있는 것 같고. 사회정치적으로 통일에 관한 제도들이 이루어지면 법제화는 따라가는 문제여서 선도의 차원에서는 국가보안법이 가장 처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위원회 활동하면서도 가장 관심 있었던 게 국가보안법 폐지와 관련한 일들이었는데, 지금은 사실 전혀 못하고 있지요.

 

김지미 : 아까 페미니즘도 잠깐 언급을 하셨는데 여성위원회 활동도 하시는 이중 적이시죠. 최근에 기지촌 여성들의 국가배상소송대리인단에도 참여를 하고 계신데 그 소송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김미경 : 대리인단이 구성된 건 작년 6월부터예요. 작년 6월부터 해서 1년의 과정을 거쳐서 올해 6월 25일에 소제기를 했고요. 첫 기일이 12월 19일에 잡혀있어요. 그래서 6-7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불법행위에 대해서 그 역사를 파헤쳐내고 인정받는 지난한 싸움이 이제 시작됐죠.

 

김지미 : 대리인단은 어떻게 구성된 건가요?

 

김미경 : 단체에서도 계속 요청이 있었고 내부에서도 검토를 했었던 건데, 최종적으로는 작년 6월부터 대리인단을 여성위, 미군위 연합으로 구성을 했어요. 이게 여성문제와 미군문제, 제가 제일 관심 있었던 두 문제가 맞닿아있는 부분들이어서 제안을 하셨을 때 흔쾌히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김지미 : 지금 언론보도도 되어서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실 텐데, 모르는 분도 계실 테니까 소송이 어떤 내용인지 잠시 설명 좀 해주세요.

 

김미경 : 우선 미군 기지촌이 60년대부터 형성이 되었는데 그때 우리나라는 성매매와 관련한 것은 모두 불법이었거든요. 그런데도 미군기지촌에 대해서는 국가가 특별관리를 공공연하게 해왔던 것이죠. 그러한 사실들이 뒤늦게 책이나 언론을 통해서 확인되어지는 과정 중에 있고 저희도 소송을 통해서 더 밝혀내려고 하는 거예요. 전쟁 중에 일본군이 위안부를 두었던 것처럼 미군의 성문제와 성범죄에 관한 해소차원으로 나라에서는 일종의 공창 같은성매매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합법화하지는 못하니까 60년대부터 기지촌을 암묵 관리 했었고 더 나아가 70년대에 들어서는 특정지역 설치에 관한 조례 같은 걸 제정해서 국가가 실질적으로 관리를 했어요. 구체적으로 보면 한미합동 회의 등을 통해서 기지촌에 대해서 한국과 미군이 같이 회의하고 미군기지촌 위안부들에게 ‘당신 들이 있음으로서 미군이 존재하고, 미군이 있음으로서 우리나라 안보가 지켜진다’는 식의 애국 교육을 하고, 또 성병 관리를 하면서 성병이 미군에 전염되지 않게 위안부들을 단속하는 차원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감금해서 강제로 놓게 돼요. 이 과정에서 쇼크사들이 발생해도 계속 투여를 해라. 이런 식의 지시 공문들이 확인이 되고 있어요. 미군기지촌 여성들에게 ‘양갈보’라고 하고 사회적으로 폄하하고 냉대, 멸시하면서도 그 분들을 존치시키고 관리하면서 악용했던 거죠. 그래서 기지촌은 우리 사회의 많은 비극과 부조리, 위법한 부분들이 집약되어 있는 곳의 하나인데 그러한 역사를 밝혀내고, 이 분들을 그러한 위법행위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 있고, 사회적으로 화합해서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과정이길 바래요.

 

김지미 : 이게 소송이니까 입증을 해야 하잖아요. 공무원의 고의과실과 관련해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 입증 자료를 찾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김미경 : 그렇죠. 그래서 단체에서도 수 년 동안 같이 진행하면서 쉽지 않았고. 그래서 이 소송이 다른 소송과는 다르게 스무 명이 넘는 대리인이 구성되어 있고 스무 분이 모두가 공동작업을 하고 있어요. 너무 분량이 많아서. 제가 정확히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지금까지 1년 동안 작업해서 제출한 호증만 수백 개. 그게 다 옛날 자료라서 글씨도 잘 안 보여요. 그걸 다 나눠서 독해하고 한자도 봐야 되고 영어도 봐야 되고. 그거를 분담해서 증거설명서를 작업하고 원고가 122분이거든요. 122분의 진술서를 스무 명이 다 나눠서 5, 6명씩 작업을 하고 있고요. 저희가 1년여를 넘게 준비했지만 앞으로 몇 년이 갈지 모르는 싸움이기 때문에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또 국가기관에 정보공개청구나 문서송부촉탁신청, 사실조회들을 해야 할 것이고. 이 사건의 역사적인 진실은 사실 한 두 분이 관여된 게 아니었거든요.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도 관리가 계속되고 있었고 현재도 미군기지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끝나지 않은 불법이고. 그 연계선상에서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었던 분들이 많으실 텐데 그 분들이 양심선언에 동참해 주시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 경험들을 직간접적으로 하셨던 공무원이나 의사들, 군의관들 내지는 진료소 보건소에서 근무하셨던 간호사, 조무사 이런 분들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사회의 역사를 같이 밝혀내고 바로잡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고 그 과정에 동참해주시면 좋겠어요.

 

김지미 : 제보가 결정적일 수 있겠네요. 아직까지는 제보가 들어온 게 없는 건가요?

 

김미경 : 네, 지금 저희가 그 제보를 받기 위해 언론화 작업을 준비 중이고 팀을 구성해서 단초를 풀고 있는 중이에요.

 

김지미 : 예전에 ‘양공주’라는 말도 있었고 사회적인 멸시, 냉대가 심했잖아요. 또 성과 관련된 문제여서 우리나라의 유교적 관념상 내가 기지촌 여성이었어요, 하고 나서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원고단의 모집 과정은 어떠했나요

 

김미경 : 우선 세움터나 기지촌여성연대 등 단체들이 있어서 그곳의 활동가분들이 기지촌 여성분들께서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봉사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런 용기들을 낼 수 있었고요. 사실은 이 사건 소송이 법률적으로 소를 제기하고 소장을 쓰고 증거신청을 하는 과정들은 변호사가 하고 있지만, 더 많은 영역에서 수십 년간 그 분들 안에서 함께 하시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셨던 단체들이 일구어내신 것을 저희가 함께 손잡고 연대작업으로 하고 있는 거죠. 어떻게 보면 저희의 역할은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김지미 : 아까 원고가 122명이라고 하셨는데 현재까지 모아진 원고가 모두 122명인건가요?

 

김미경 :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더 용기내기가 어려워서 포기하신 분들도 있고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신 분들이 122분이신 거예요.

 

김지미 : 기사를 보니까 그 당시에 10대 어린 소녀들이 공장에 가는 줄 알았는데 속아서 인신매매의 일종으로 기지촌으로 가게 된 분들도 꽤 있다고 하고 또 60년대 한국 GNP의 25%가 이분들의 수입이었다는 기사도 있더라고요. 국가가 어린 소녀들의 성을 팔아서 국부를 축적한 거잖아요. 그런 거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고 이 소송을 계기로 기지촌이 완전히 철폐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드네요.

 

김미경 : 미군 기지촌의 존재가 또 다른 양상으로 가고 있는 건 우리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노동의 악조건이 있는 현장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인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는데 90년대 후반에 여기도 그런 식으로 외국인이 많이 대체가 돼요. 현재 전체 미군 기지촌 여성들 중에 한국인 여성의 숫자는 감소했지만 그 자리를 사실은 외국인 여성들이 하고 있어요.

 

김지미 : 이주여성 문제와도 접해있네요.

 

김미경 : 그래서 분단, 분단 속에서 미군의 한국 주둔, 그리고 그 안에서의 성적 착취 문제 이런 것들이 집결되어있는,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희는 소멸시효와 관련해서도 계속 싸울 거고요.

 

김지미 : 이것도 어떻게 보면 과거사에서 시작이 된 거잖아요. 변호사님 보면 과거사위원회가 아닌데도 과거사 관련된 소송을 많이 하시는 건 장완익 변호사님의 영향인가요?

 

김미경 : 네, 과거사위 위원장 하셨던 장완익 변호사님이 저희 사무실 선배님이신데 제가 변호사 1년차일 때 장완익 변호사님이, ‘너는 일제 피해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하셔서 ‘제가 유관순 언니도 좋아하고 김구 선생님도 좋아하고 일제 피해자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래서 관심 있으면 같이 회의를 가자고 제안을 해주셔서, 그게 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김지미 : 제가 사실 과거사 관련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지난 번 민변에서 기자회견 한 건 후지코시를 상대로 했던 거고, 지금 미쓰비시도 있고 신일본제철도 있고, 소송이 여러 개가 병행되어서 진행되고 있는 건가요?

 

김미경 : 네, 2000년에 미쓰비시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국내소송이 처음 제기가 되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 소송과 관련한 회의에 제가 1년차에 처음 참석을 했었던 거죠. 그 소송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한 문서정보공개청구소송이 같이 제기되었어요. 그 소송을 통해서 자료가 공개된 게 2005년이고 그 후에 후속소송을 제기하면서 제가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두 번째 소송을 처음부터 같이 하게 되었던 거죠. 이 사건이 1심 2심 모두 패소했다가 12년 만에,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이 되었어요.

 

김지미 :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돼서 다시 2심에서 승소판결이 났고 이를 재상고해서 대법원에 계류 중인 상태인거죠?.

 

김미경 : 네, 그리고 지난 10월에 선고가 있었던 후지코시 사건은 이 대법원 판결이 있은 후 2013년 초에 저희가 추가소송으로 제기했던 거고요. 앞의 두 사건은 다 강제징용 되었던 남자 피해자분들이셨어요. 근데 이 후지코시 사건은 강제징용 피해자랑,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같이 결합된 사건이예요. 요 사건 전에 미쓰비시 사건이라고 광주에서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 또 있어요. 후지코시 사건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의미가 있었던 게, 피고 쪽에서 기존 대법원 판결에 따라 6개월 내에 소를 제기해야 한다고 소멸시효를 가장 다투고 있었는데 재판부가 대법원 판결과 상관없이 이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 라고 판단을 했고 설사 피고의 주장대로 대법원 판결을 기준으로 권리행사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은 3년이지 6개월이 아니다 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희 사건은 6개월 이후에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멸시효 항변이 다 배척됐어요. 그렇게 판단된 첫 번째 사건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죠. 여러 생각들이 드는데 처음 2000년에 제기되었던 미쓰비시 사건은 대법원 선고 때까지 살아계셨던 분이 한 분도 안 계셨어요. 그리고 저희 사건은 대법원까지 네 분의 원고가 다 살아계시다가 선고 후에 두 분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지금 생존자가 두 분밖에 안 계신 상태예요. 태평양 전쟁 때 피해자들이기 때문에 1940년대 그 분들이 10대셨으니까 말 그대로 젊으신 분이 80대신 거예요. 나이 드신 분들은 90대신 거죠. 그래서 이게 결국 피고기업과 법원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정말로 외롭게 싸우고 계신 건 당사자 본인들, 그리고 그 분들의 유족들이신거죠. 그래서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법원도 이러한 점을 좀 헤아려주고 단 한분의 생존자가 있을 때 이 판결이 해결될 수 있기를 무엇보다 바라고 있습니다.

 

김변

 

김지미 : 일본에서도 소송을 했는데 일본 법원에서는 다 패소를 하신 거잖아요. 그래서 한국 법원에서 승소를 한다하더라도 실질적인 집행 가능성은 없는 게 아니냐는 우려들이 있는데요.

 

김미경 : 네, 우선은 일본 정부, 일본 기업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른 부분이 있겠지만, 미쓰비시와 후지코시는 처음에 판결로 인정이 된다면 지급하겠다고 했어요. 패소판결이 나기 전에 사망자들이나 다른 유족들과 합의한 적도 있구요. 판결로까지 가지 않았음에도 합의했던 선례가 있었음에도 지금 이렇게 퇴보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 역사 정치적인 인식이 퇴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죠.

 

김지미 : 일본의 우익화 문제와도 연결이 되겠네요.

 

김미경 : 네, 그렇죠. 저희가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았을 때 신일본제철에서 임의이행가능성이 있다는 언론보도가 잠깐 나왔었는데, 아베 정권에서 ‘그런 건 없다’고 바로 제재에 들어갔던 일이 있어요. 아직은 확정되기 않았기 때문에 지급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한일 양국이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확정된 판결을 국제적 기업이 도외시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또 다른 싸움인 거죠. 명분과 실리 싸움을 할 것이고요.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특별히 가집행 절차를 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원고들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까지 전체적으로 피해자 인권문제와 관련한 재단설립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를 위해 대한변협에서도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집행절차로 가고 있진 않지만, 정말로 판결이 확정된다면 저희는 제3국하고 연대해서라도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이 기업들이 일본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중국, 미국과도 교류하고 있거든요. 특히 중국의 경우는 같은 피해자 입장이고, 중국에서는 청구권협정이나 이런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급심에서 승소판결이 났던 사례가 있거든요. 그래서 일본 법원에서는 자기네 판결에 반하기 때문에 집행이 안 되겠지만 제3국에서는 법리에 따라서는 다르게 판단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기대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난한 싸움일 뿐이겠죠.

 

김지미 : 긴 호흡으로 가야하는 사건들을 많이 하시는데, 생업은 어떻게 하시나요? (웃음)

 

김미경 : 우선은 제가 작년까지는 저희 사무실에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근로자로서 일을 했기 때문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요. 작년부터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제 수입은 제가 벌어야 되는데, 다행히 남편도 변호사인지라 제가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은 아니에요. 그래서 적게 번다고 해서 생계가 부담되는 상황은 아니고 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사실 이런 사건에 변호사보다 직원 분들이 더 고생하시거든요. 기지촌도 그렇고 후지코시 사건만 해도 호증이 100여 개예요. 이 100여 개에 번역문이 딸리고, 호증 하나가 한 장짜리가 아니잖아요. (한쪽 팔을 높이 들어올리며) 제 방에 막 이렇게 쌓여있거든요. 그런 것들 준비해주시는 게 다 저희 사무실 직원 분들이신데, 저희가 그 건을 해주신다고 돈을 더 드리거나 하지는 못하거든요. 야근 매일 하고 그러시는데… 저희 직원들이 장난으로 막 사장님이라고 부르시는데.. 사실 좋은 사장은 안 되는 거죠…(웃음) 앞으로 제 몫인 것 같아요, 좋은 사장이 되는 것은.

 

김지미 : 아까 안식년 다녀오면서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겼다! 하셨어요. 제가 언뜻 ‘코칭’이라는 말을 들어서 미리 찾아봤는데, 이게 딱 감이 안 오거든요. 연세대 코칭아카데미에서 YCA 전문코치 자격증을 2012년에 따시고, 작년에는 한국코치협회에서 또 전문 코치 자격증을 따셨어요. 이 코칭이라는 게 어떤 거고, 코칭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뭘까요?

 

김미경 : 우선 코칭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계기를 먼저 말씀을 드리면, 변호사라는 직업이 다양한 사건사고를 경험하는 상담자를 만나게 되는데, 내가 그런 상담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런 상담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었어요. 법률 공부는 했지만, 법률적 문제를 겪고 있는 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나, 이런 데에 늘 관심이 있었어요. 우리가 사건을 접할 때 민사든 형사든 처음은 상담이잖아요. 무엇이든 그 의뢰인을 만나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내가 이 분을 잘 만나고 있고 이 분의 얘기를 잘 듣고 있는 것인지… 이런 거에 대해서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안식년에 새로운 어떤 것을 공부해볼까 고민하다가 그 부분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상담과정을 찾아보는데, 법률 상담에 관한 부분은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코칭이란 걸 처음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코칭과 관련한 걸 찾아보니, 내적 심리적 문제가 있는 분들을 치유하는 심리 상담과는 다르게, 코칭은 일반 평범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조직적인 잠재능력을 최대화해서 그 분들의 성과와 꿈과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파트너십의 과정이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이 과정이 제가 법률 상담을 하고 있는 의뢰인들의 얘기와 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분들은 심리 상담이 필요하신 게 아니라, 자신들이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고 그것을 원하는 대로 해결하는 방향에 법적인 조력이 필요한 거여서, 이 코칭 공부를 해보면 혹시 내가 해보려는 법률상담의 소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그 과정을 안식년 1년 동안 배우면서, ‘아 이게 진짜 도움이 되겠다’. 코칭을 제대로 공부하고 법조계에 알리고, 또 로스쿨이 실무 중심의 교육을 하는데 법률상담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발달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코칭과 법률상담을 접목한 것을 제 힘이 닿는 한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요. 그런 꿈을 새롭게 안식년을 통해서 꾸게 됐어요. 예전에는 파트너 변호사가 되면 ‘진짜 민변활동 열심히 해야지!’ 생각했었는데, 안식년을 통해서 다른 꿈을 꾸게 된 거죠. 10년을 앞서 생각해 봤을 때, 앞으로 최소 5년 이상은 투자해서 배워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공부하고 있고요. 그래서 올해는 한국가톨릭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에 조직상담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그래서 상담분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코칭분야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내 직역과 연결시키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 상당히 낯선 개념 같거든요. 코치협회 홈페이지도 찾아봤는데요. 포춘 500대 기업 CEO의 50%가 코치를 받고 있다.

 

김미경 : 네, 미국에서는 80년대부터 발달을 했고요. 우리나라는 2000년경에 도입이 됐어요. 미국 기업의 임원을 보면 개인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있고, 리더로서 자신의 역량을 어떻게 개발하고, 밑에 직원들과 상호작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심리 상담의 영역만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자신의 성과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것이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 전문코치가 존재해요. 우리나라 대기업도 SK, LG 이런 데에서는 임원들에 대해서 코치를 하고 있는데, 그런 도입 자체가 우리나라에서 한 10여 년 된 거죠. 아직 우리나라는 초창기이고 아마 요새는 TV에서 코칭을 조금 볼 수 있으실 거예요. 학습코칭, 그러니까 학생들의 학습능력이나 진로코칭으로 접목되고 있는데, 학습코칭도 하고 있어요. 실제 저도 중고생들 코칭도 하고 있는데,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어쨌든 법률상담에 대한 접목을 바라고 있어요.

 

 김지미 :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비즈니스코칭이라고 하면 업무역량강화를 위한 임원, 사원, 조직원들 간의 파트너십을 제대로 구축하기 위한 거잖아요.

 

김미경 : 네, 그런 것도 있고 1:1코칭도 있어요, 저도 1:1 개인코칭을 2년 동안 받았어요. 라이프 코칭이라고도 하는데, 직장을 다니지 않는 주부라고 하더라도 삶의 관계나 행복, 질의 문제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더 행복하고 유의미하게, 자신의 잠재력을 보면서 어떻게 즐겁고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같이 하는 것이죠.

 

김지미 : 그럼 지금 자격증이 있으시니까 다른 사람을 코칭을 해줄 수 있다는 거잖아요. 어떤 사람을 주로 코칭하세요?

 

김미경 : 1:1코칭도 하고 기업에 코칭 강의도 하고요. 코칭을 기업에 소개하고 도입할 수 있도록 강의하고 있고. 또 제가 트루셀프코칭이라고 해서 같이 코치하는 코치와 동료들하고 프로그램을 같이 공동 개발하는 데에 참여해서 FT로도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거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고. 그룹강의를 하기도하고 1:1코칭으로 학생들이나 주부, 대학생들, 대학원생들 하고 있죠.

 

김지미 : 집단코칭도 가능하죠?

 

김미경 : 집단코칭도 가능하죠. 집단코칭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건 학생들이에요. 저희가 스터디 코칭이라고 얘기하는데, 지금은 제도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전문상담가 선생님들이 배치되고 있는 중인데, 이런 분들도 상담이나 코칭을 배우시기 때문에 심리문제가 있는 학생들은 상담을 하시고, 심리문제가 아니라 학업성적 향상이나 진로에 대한 분석들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에게도 코칭을 연결해주고 있어요. 공부라고 하는 건 물론 1:1도 있지만, 그룹으로 하는 것이 효과를 내기도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룹코칭이 많이 이루어지는 건 학생들.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업에서는 팀이나 그룹으로 활동을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기업에서도 많이 하고 있죠.

김지미 : 안식년 1년을 너무 알차게 보내신 것 같은데, 안식년 동안 해외자원봉사도 가시고 방송도 타셨다면서요?

 

김미경 : 아, 네네.. 그것도 증거가 남아있죠.(웃음)

 

김지미 : 어떤 단체를 통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오신 거예요?

 

김미경 : 안식년을 2011년에 7월부터 다녀왔어요. 그 1월에 둘째를 낳았구요. 사실 제가 안식년에 외국에 나가서 한 6개월 정도를 공부를 할 계획이었거든요. 친정어머니께도 말씀을 드려서 어머니가 애 둘을 봐주실 테니 공부해라, 허락을 받은 상황이었는데요. 안식년을 준비하고 있는데, TV광고에서 코이카와 MBC가 협력해서 처음으로 외국자원봉사를 가려는 자원자를 받는다는 광고가 딱 나오는 거예요. 사실은 그 전에도 너무너무 가고 싶었는데, 변호사가 여름 휴가 일주일 말고는 길게 쉴 수 있는 기회가 없잖아요. 그마저도 애 본다고 쉬지도 못하지만. 그래서 그 광고를 보고 마음을 먹고, 신청을 하게 됐죠. 신청을 하면서는 엄마한테 얘기를 안 했어요. 엄마가 허락을 안 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니까 처음엔 되게 반대하시더라고요. 어쨌든 최종적으로는 엄마랑 빅딜을 했죠. 외국연수 안 가겠다, 대신 저 봉사활동이 된다면 저걸 가겠다. 처음엔 엄마가 막 욕하셨죠. 미친X라면서, 니 애나 보라고.(웃음)

 

김지미 : 아..생후 6개월 된 아이를 두고?

 

김미경 : 그렇죠. 니 애도 안 보면서 무슨 남의 애를 보냐고 하시면서 반대를 하셨지만, 아까 말씀드린 빅딜. (연수 가면) 2개월에서 6개월 정도 아이를 혼자 보셔야 하는데, 이거는 3주밖에 안 되니까. 고민하시다가 OK 해주셨고, 다행히 남편이랑 시어머니도 찬성해주셔서. 단 한 번뿐인 안식년인 거를 아시니까, 원하는 거 하라고 해주셔서 다녀왔죠. 16박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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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가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어요?

 

김미경 : 저희가 세네갈 사막지역을 갔었는데 거기 평균 수명이 45세예요. 대부분 유소년기에 사망하는 거죠. 아이들의 5분의 1밖에 학교를 못 다니고 이런 상황이어서. 그 마을에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마을에 학교나 유치원 역할을 할 수 있는 교육공간을 세워주고, 아이들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같이 하는 데를 갔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유아교육, 건축 이런 분야에 재능이 있는, 재능기부가 가능한 분들이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쪽으로는 재능기부를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상태여서, 자기소개서에도 저는 ‘청소랑 설거지 이런 거 되게 잘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쨌든 애를 둘 키운 엄마다. 저희가 했던 팀에 연세세브란스팀이 함께 가서 대부분은 의료봉사 도와주는 역할이었어요. 저는 워낙 재능 없는 상태에서 갔기 때문에, 재능 있는 친구들이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설거지 하고 밥 하고, 거기서도 저는 조력, 후원하는 일을 주로 했어요. 제가 단순작업을 되게 잘 하거든요. 제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하는 것만큼 사람을 충만하게 해주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김지미 : 얘기를 듣다 보니 이걸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이 드는데, 애들이 어려서 엄마 손이 필요한 일도 많을 것이고 소송도 굉장히 작업이 힘든 것들 주로 하시고, 개인적 사건도 분명히 있을 테고, 대학원도 다니고, 강의도 다니고.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사시는 거 아닌가요?

 

김미경 : 그렇진 않고요. (웃음) 제 모토가 ‘Here and now’여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저는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아요. 예를 들자면 저는 지금 이 순간에 있잖아요. 그러면 집에 두고 온 아이는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애가 열이 나서 아플 때도 있죠. 그런 상황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아주머니께 맡겼기 때문에 그 분을 온전히 믿고 맡기고. 주말에는 집에서 애를 보면 직장 생각은 하지 않아요. 내일 써야하는 서면이 밀려 있죠. 내가 다 쓸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지 않죠. 그런 힘이 제가 코칭 공부하면서 가장 성장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전과 후의 차이는 ‘Here and now’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제가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더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많이 내려놓아지고 편안해져서인 것 같아요.

 

김지미 : 김변호사님이랑 제가 동갑이잖아요. 40대가 되면서 일은 더 많아지지만 마음은 여유로운 상태를 누구나 바라는데 사실 저는 못 그러고 있거든요. 민변에서도 이 일 하다가 또 저 일 하다가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러고 있는데 정말 부럽네요. 저도 코칭을 좀 배워볼까요?

 

김미경 : 강추합니다! 써주세요. <코칭을 전파하는 변호사>예요. (웃음)

 

김지미 : 제가 김변호사님을 오랜만에 보면서 눈에 확 들어온 게 또 있는데요. 굉장히 날씬해지셨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뭔가 다이어트를 안 해도 살이 빠질 것 같은 생활 같기는 한데요.(웃음)

 

김미경 : 저절로 빠진 건 아니고 다이어트를 했어요. 안식년 동안에 빼고 돌아간다고 해서 2012년 6월에 완성한 건데, 2년 반 동안 유지는 하고 있어요.

 

김지미 : 어떻게 빼신 거예요?!

 

김미경 : 우선 첫 번째로는 쉬는 동안 요가지도자자격증을 땄어요.

 

김지미 : 우와~진짜 놀랍네요, 추진력과 활동력.

 

김미경 : 쉬는 동안에는 시간이 많으니까. 물론 엄마한테는 욕 얻어 먹었죠. 애는 안 보고 지 하고 싶은 것만 한다고.(웃음) 제가 1년 동안 쉬면서 요가지도자자격증을 땄는데요. 요가는 사실 저희에게는 필요한 운동이죠. 심신안정도 그렇고, 늘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살기 때문에 이완이 좀 필요한데. 제가 첫째 낳고 2개월 정도 지났을 때 20kg이 찐 상태에서 친척 할머니가 오셨어요. 쉬는 중에 ‘어떻게 살을 이렇게 못 뺐냐고.’ 당신이 저희 집 근처에 요가를 다니시는데 살 빼라고 요가를 나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 요가를 나갔어요. 3개월 째 되는 달에요. 그런데 요가 선생님이 환갑이 되신 화가 여자분이셨어요. 투잡이신 거죠. 화가가 직업이신데, 요가를 배우셔서 가르치시는 거예요. 그걸 보고 되게 멋지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뭔가 운동을 제대로 배우고, 이걸 또 가르치면서 자기도 운동을 하는 걸 멋지게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둘째를 임신했는데 그때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 한 5개월 지났을 때 걸을 수가 없어서 침을 맞으러 다녔는데 임신하면 유산 위험이 있어서 침을 못 맞게 해요. 그래서 운동을 하라는 강권을 받은 거죠. 그래서 진짜 휴직을 해야 되나, 안면근육이 떨리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걷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지막 보루로 여름휴가를 이용해서 임산부 요가를 시작했어요. 한 시간 코스인데 시간이 없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30분 했거든요. 3주를 했는데 기적 같이 허리가 안 아픈 거예요! 그래서 ‘아, 내가 도구 없이 내 몸을 이용해서 운동하는 것이 이렇게 효과적이구나.’ 깨달았죠. 그 효과에 놀라서 요가를 제대로 배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둘째 낳고 나서도 요가 다이어트를 하고 1년 쉬는 동안에 요가지도자자격 과정이 있어서 3급, 2급을 4개월, 4개월 씩 다녀서 이론과 필기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대학교 때도 사시 안 본다고 공부 안 하고, 연수원에서도 변호사될 거라고 공부 안 했는데. 부모님이 제가 대학 들어간 이후로 공부한 걸 보신 적이 없거든요. 안식년 동안 공부 되게 열심히 했어요. 맨날 사람 자세 그리고 있고. 엄마가 ‘뭐하냐고, 미친 거 아니냐고’, (웃음) 엄마가 그때도 미쳤다고 얘기를 하셔서. 제가 엄마에게 ‘내가 꿈이 있다고, 변호사를 평생 할 수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 몸만 허락이 되면 환갑이 넘으면 내가 배운 선생님처럼 양로원이나 고아원에서 요가로 사람들 만나면 좋겠다. 이게 코칭하고도 잘 연결이 되는 것 같고 요가를 하면서 고아원 친구들, 청소년 친구들 계속 만나고 싶은 꿈이 있다, 늙어도 값지게 살 수 있는 기능인데. 내가 환갑 가서 이 공부를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공부는 지금 해두고 쓰기는 나중에 쓸 거다’ 라고 했죠.

 

김지미 : 식이요법 없이 요가만 하신 거예요?

 

김미경 : 먹는 거는 조금 줄였죠. 제가 먹는 걸 되게 좋아해요. 고등학교 때 별명이 하이에나였어요. 지금도 피자 라지 반 판은 거뜬히 먹어치우거든요. 그런 걸 줄였죠. 저는 인생에서 몸무게 하향곡선을 그린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음식조절에서는 뭐가 작용했냐면, 50대 아주머니께서 요가반장님이셨어요. 근데 저는 이 분이 되게 충격적이었거든요. 이 아주머니께서 폐경기 여성이셨는데 되게 날씬하세요. 어떻게 이렇게 날씬하냐고 그랬더니, 먹고 싶을 때 먹고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면 그 후에 총량을 생각해서 줄이라고, 그러니까 일주일 총량을 생각하래요. 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봤거든요. 술도 마시고 안주도 먹고 다 먹어요. 그런데 예를 들어 일요일에 뷔페를 가면 그 다음날은 조금 가볍게, 열량이 덜 나가는 샐러드를 먹거나 하는 거죠. 현미밥 섞어 먹고! 그게 삶의 큰 지혜였어요. 그때부터 그걸 계속 생각하면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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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오늘 정말 유용한 정보가 많은데요(웃음) 코칭에 다이어트에..코칭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면 아까 그룹코칭도 하신다고 했는데 민변 상근자 그룹코칭을 한 번 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김미경 : 제가 아직 배우는 중이어서, 그것도 제 목표와 바람 중에 하나입니다. 제 능력을 더 갈고 닦아서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지미 : 현재 민변 상근자가 9명이니까 작은 팀 정도는 되는데 민변이 워낙 규모가 작은 조직이다 보니까 별 다른 복리후생제도가 없는 게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업무량은 많고 저녁 회의 때문에 야근 잦고..우리끼리는 뭔가 좀 해보자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거든요. 김변호사님 말씀 듣다 보니까 코칭이 우리한테 딱 일 것 같아요. 우리를 마루타로 삼아도 돼요. (웃음) 기꺼이 응할 생각이 있으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김미경 : 네~, 제가 공부를 시작할 때도 얘기가 있었는데 소중한 초대라고 생각을 하고요. 늘 마음은 있어요. 제가 코칭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고 ‘코칭’이란 책을 읽었어요. 거기서 와닿았던 게 뭐냐면,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의 많은 요소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스트레스 받고 짜증나고 이런 것들을 살펴보았을 때 많은 부분이 직장에서 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직장이 단 몇 퍼센트만 변화해도 삶이 달라진다, 라는 책에서의 그 말이 마음에 들어서 했고. 비즈니스코칭 과정이 1%의 직장에서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라는 말이 탁! 와닿아서 했어요. 1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제가 단 1%라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참 의미 있겠다, 싶었어요.

 

김지미 : 제가 인터뷰 마지막에 앞으로의 꿈이나 계획 같은 걸 물어보는데 김변호사님은 ‘코칭’이라고 하실 것 같아요. 언뜻 듣기로 변호사를 그만두고 전문 코칭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셨다는데 지금도 그런 생각이 있으세요?

 

김미경 : 예, 조금 있어요. 우선은 그게 2012년 안식년 마무리 할 때, 상황적 특수성이 있었어요. 2012년 5월 24일에 강제동원관련 대법원판결이 있었잖아요. 사실 이 사건이 저한테는 너무나도 어렵고 무서웠던 사건이었어요. 상고이유서 쓰면서도 막 울면서 썼거든요. 너무너무 이기고 싶고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건인데 ‘아, 1심 지고, 2심 지고 하는 게 나 때문에 지는 구나.’ 내가 역사적 죄인이 되는 구나… 하는 두려움, 무서움.(울먹울먹) 어쨌든 대법원 판결 선고가 승소 판결이 났잖아요. 딱 그 판결 선고를 듣고 변호사직을 지금 내려놔도 여한이 없다. 이제 안 해도 된다. 후회가 없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그 생각이 들 때 제가 코칭을 접하게 된 거여서, 이제 변호사직 안하고 코칭만 해도 여한이 없다, 했죠. 사실은 당장 그만 둬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김지미 : 지금도 생각하시면 울컥하시나봐요..사람이 이렇게 찐하게 살아야 하는데..

 

김미경 : 그거랑 맞물렸던 것 같아요. 제가 사람을 돕고 싶어서 변호사가 되긴 했지만, 사실 사람을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변호사도 하나의 방법이고 코치로서도 요가선생님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요. 누군가와 소통하고 돕고 나누면서 살고 싶은. 세 가지가 다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건 지금으로서는 코칭인 것 같아요. 단순히 내가 나의 역량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의 역량이 10에서 20이 되고 30이 되고, 더 기뻐질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고, 능력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 기쁘게 살 수 있다면. 법률분쟁 하나하나를 해결해주는 것보다 더 값지고 귀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여기에 더 매진하고 싶어요. 더 많은 분들의 시간과 도움과 돈으로 변호사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실 여한이 없어요.

 

김지미 : 그 말이 진짜 부럽네요. 여한이 없다. 지금 현재로서의 꿈은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 도우면서 그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다. 그게 변호사가 될 수도 있고 코칭이 될 수도 있고 환갑이 넘어서 요가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그 세 개를 같이 할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보면 어쩌면 어릴 때 꿈을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여한이 없다고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부럽기도 하고 반성도 되고 자극이 많이 되었어요. 소중한 시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미경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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