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고시랑] ‘코이카의 꿈’에서 찾은 행복

2012-01-17 260

 [고시랑고시랑]






‘코이카의 꿈’에서 찾은 행복






글_김미경 변호사






‘코이카의 꿈’과 함께 했던 시간의 행복을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을지, 다른 이들에게 그 행복을 전할지 걱정이다. 이런 걱정에 글 쓰기를 시작하지 못한 기억이 없는데…, 그처럼 ‘코이카의 꿈’과 함께 했던 시간은 내게 너무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코이카의 꿈’에 도전하다




8년차 변호사인 나는 회사의 배려로 2011년 7월부터 1년의 휴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안식년 시작한 더운 여름날, TV에서 MBC와 KOICA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해외 단기 봉사단을 선발한다는 ‘코이카의 꿈’ 광고를 보게 되었다. 전부터 해외 아동 결연 후원을 하던 단체가 단기 봉사단을 모집할 때 가보고 싶었던 터라, 광고를 보자마자 MBC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지원자격 등을 살펴보았다. 만 14세부터 만 60세까지의 건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해외봉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 자면 되고, 배우자가 있는 경우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고, 서류심사, 면접심사, 체력테스트를 한다고 했다. 그날 저녁 귀가한 남편에게 아프리카로 지원해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남편은 언제나 그러했듯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선뜻 동의해 주었다.




나는 남편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서류 심사에 통과를 못할 수도 있으니, 서류 심사에 통과하면 당시 7개월, 43개월의 두 아들을 돌봐주고 계신 친정엄마와 시어머님께 허락을 받을 요량이었다. 같이 살고 계시는 친정엄마는 내가 지원서 작업을 하는 것을 보시고 쉬는데 무슨 회사 일을 하냐고 물으셔서 별 수 없이 사실대로 토로했는데, 자신의 아들들도 돌보지 않고 외국에 나가겠다는 철부지 딸에게 처음으로 험한 말로 화를 내셨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겨우 설득하여 지원을 할 수 있었는데, 접수가 마감되자 예상과 달리 내가 지원한 세네갈이 지원자가 가장 많아 2천명이 넘어 서류 통과도 어려울 것 같아 염려가 많이 되었다.




간절히 내게 기회가 주어지길 기도하며 서류 발표를 기다렸는데, 운이 좋게 내게도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다. 면접 당일 체력테스트로 500m 달리기가 있다고 하여, 발표 후 1주일간 매일 1시간씩 아파트 단지 또는 양재천 산책로를 뛰면서 내게 주어진 기회가 날아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달리기 연습을 하면서 시어머님께도 조심스럽게 해외봉사에 지원하고 서류 통과 한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멋지신 시어머니는 나의 모든 염려를 시원하게 날려 버리며 “해외여행도 봉사도 아이들 어릴 때 해야지 크면 걸리는 게 많고 또 기회 주어질 때 망설이지 말고 해도 나이 들면 후회 많은 게 인생이더라. 열심히 생활하는 네가 자랑스럽고 대견해. 체력시험 잘 하고 아프리카 꼭 가서 시야 넓히고 많은 경험 갖길 바래!”라는 문자를 보내주시며 진심어린 축하를 해주셨다.




해외 봉사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작성하고, 달리기와 면접 준비를 하면서 무더운 7, 8월을 보냈는데, 무언가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꿈을 꾸고 그 꿈에 흔쾌히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가족들의 마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여름 나는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MBC 해외봉사단이 되다




나는 대학입시도 사법시험 발표도 모두 갑작스럽게 당초 예정보다 앞당겨져 나면서 발표 직전의 떨림을 느껴보지 못했었는데, 2011. 8. 30. 최종 발표 당일 발표 예정시간인 오후 6시가 되도록 아무런 연락도 없어서 정말 하루 종일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긴장을 했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을 때, 6시 무렵 최종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다. 하늘을 뛸 듯이 기뻤다. 더운 여름날 최고의 시원한 선물이었다. 그날 사무실 회식이 있었는데, 다들 바쁜 일정에 일하시느라 힘드신 것을 잘 알면서도 계속 만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도저히 감출 수 없었던 그날 밤이 생각난다.




9월 5일부터 8일까지 3박 4일의 일정으로, 5개국의 해외봉사단이 함께 모여 합숙 훈련을 받았다. 세네갈을 함께 가는 16명(나 포함)의 단원들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데, 모두 해외 봉사에 대한 기대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기쁜 마음이 같게 느껴졌다. 22세부터 52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하는 일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모두가 같은 ‘코이카의 꿈’을 꾸고 있어서인지 너무 친근하고 편하게 다가왔다. 합숙 기간 동안 신체 검사도 받고 예방 접종도 하고, 세네갈에서 유학 온 현지인도 만나고, 코이카 단원으로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2년을 거주한 한국인도 만나며, 멀게만 느껴졌던 지구 반대편 세네갈과 조금씩 친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해외 봉사 시 전염병 등의 발병 위험성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는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60년 전 해외의 원조를 받던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루어 아직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구촌 이웃들에게 사회경제적 원조를 해주어 ‘making a better world together’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단원 한 명 한 명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겨자씨가 되어야 한다는 강의를 들으면서 해외봉사 단원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기도 했다.




단원들은 합숙 후에 바로 인터넷 까페를 만들어 우리가 봉사를 가서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 고민들을 나누었다. 두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130여개의 글을 나누고 삼삼오오 잦은 만남과 엠티도 가면서, 모두들 봉사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건축물 및 실내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 및 공연, 벽화 등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내가 서른일곱 살, 16명의 단원들 중 12명이 나보다 어렸는데, 그 친구들이 어느 한 명 빠지지 않고 모두들 열심히 고민하고 마음을 나누며 여러 멋진 성과물들을 내놓는 모습을 보면서, 그 따뜻한 나눔의 젊은 모습이 모두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가 그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 친구들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내 두 아들도 이 친구들처럼 선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새 내가 이렇게 나이가 기성세대가 되어가 싶어 놀라기도 했다. 그래도 지난 가을은 단원들과 함께 세네갈 봉사를 준비하면서 코이카의 꿈을 키우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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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세네갈에 가다




그렇게 가을이 접어들 무렵인 2011. 11. 1. 우리는 세네갈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6명의 일반인 단원들과 시사만화가 박재동 선생님, 배우 이아현·조연우, 가수 케이윌·데이비드오, 아나운서 김초롱·김대호 단원들까지 처음으로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스텝들까지 47 명이 세네갈로 떠났다.




여름부터 서너 달을 함께 꿈꿔왔던 세네갈행, 우리들은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모두 조금 들떠 있는 듯도 했다. 두바이 경유, 비행시간만 20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김혜자)」, 「아름다운 아프리카 친구(세네갈편, 이자벨 르브라)」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인사말 메모를 익히며, 나는 마음도 조금 가라앉히고 낯선 땅 아프리카, 세네갈을 조금 더 가깝게 느껴보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단원들이 건축, 교육, 놀이, 그림 등의 재능 기부를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두 아들의 엄마이고 청소를 잘 한다는 것 외에는 마땅한 재능이 없어 역할에 대해 조금 염려도 되었다. 그러나 단원들과 함께 10월말 양평으로 엠티를 가는 전철에서 보았던 ‘별(이종만) 생각하기보다 기도하기로 한다. 기도하기보다 미소짓기로 한다. 미소짓기보다 손을 잡아주기로 한다.’는 시처럼,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손을 잡아주고 미소짓고 기도하며 진심을 나누는 시간을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세네갈로 향했다.




이틀을 소요하여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도착, 우리나라의 고속버스터미널보다 작아 보이는 공항 청사, 화장실도 남녀 각 2칸밖에 없는데 그 마저 문이 떨어진 것도 있고 청소도 되어 있지 않아서, 국제공항이 이런데 우리가 생활할 곳은 어떨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다카르의 풍경은 도시 속에 따바스키 축제를 앞두고 수십, 수백 마리의 양들이 떼 지어 있고, 신호등이나 가로등이 거의 없는 도로주변 수많은 가판대 상점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움직임은 자유스러워보였다.




어둠 속에 찾은 숙소는 바다가 가까이 있는지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불빛도 거의 없어 손전등이 없으면 방갈로 형태의 숙소를 찾기도 어렵고 긴 비행 시간에 9시간의 시차도 맞지 않아 숙소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다들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새벽 5시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우리가 봉사활동을 할 본나바를 향해 출발했다. 프랑스 식민지배의 아픔을 겪었던 세네갈은 프랑스 문화가 많이 들어와서, 길가에서도 바게뜨를 파는 곳이 많이 눈에 띄었고, 우리도 버스에서 바게뜨를 먹으며 본나바로 향했다.




본나바와의 첫 만남


우리가 본나바에 도착한 것은 현지 일자로 11. 3. 수도 다카르에서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와서, 사막차로 갈아타고 30여분을 더 들어가서 우리는 우리가 11. 7.까지 머무를 베이스 켐프에 도착했다. 우기가 막 끝나간다는 사막에는 키 작은 풀들과 나무들도 듬성듬성 보였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는 큰 바오밥 나무들이 있어 삭막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본나바에 도착한 첫날, 다 같이 우리가 어린이 교육문화센터를 건축할 마을의 촌장님께 먼저 인사를 하고 건축 현장을 다녀왔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겨준 것은 마을 어린이들, 인근 마을 3곳에 700명의 초등학교를 다닐 나이의 아이들이 있다는데 학교는 채 200명을 수용하지 못해서 나머지 아이들은 한 번도 학교를 가보지 못하는 것이 이곳의 현실이란다. 이곳에서 우리는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친구들에게 마을의 공터에서 같이 노래, 종이접기, 마술 등으로 같이 놀고, 촌장님이 기증해 주신 터에 교육문화센터를 건축하고 그 안에 기업 후원을 받은 책, 놀이기구 등을 꾸며 주어 마을 어린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봉사 활동의 목표였다.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단원들은 연습했던 ‘살레 말라꿈’ 인사를 건네며 아이들의 손을 맞잡았다. 평균수명이 45세밖에 안 된다는 세네갈에서 70세의 장수를 하고 계신다는 마을의 촌장님도 편안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우리 활동을 돕겠다고 약속하셨다. 건축 현장에서도 현지 인부들이 기초 바닥 공사를 마친 상태에서 건축물의 골조 쌓기를 시작하고 있었고, 잠시지만 우리는 단원, 연예인, 메니저까지 다 같이 한 마음으로 현지 인부들과 함께 벽돌을 나르며 이 건물을 멋지게 완공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이후 대부분의 일정은 단원들이 다 같이 모여 진행할 수 없었고, 첫날은 마을, 학교, 보건소를 둘러보는 3개 팀으로 나누어서 본나바의 모습을 살펴보았고, 다음날부터는 건축조, 교육조, 서포터조(식사준비조)로 나누어 활동을 하였다. 나는 첫날 마을에 가는 팀에 합류하였고, 빈민촌에서 21살의 3살, 5개월 된 아들을 키우는 어린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두 아들, 동생들 7명과 시각장애를 가진 친정 아빠와 같이, 시멘트 벽돌로 지은 3평 남짓의 방 한 칸에 살고 있었다. 8명의 남매들 중에 단 한 명만 학교를 다니고, 친정 아빠와 다른 동생들이 도시로 구걸을 하러 다녀오면 그것으로 겨우 끼니를 때운다는 그녀는, 젖이라도 잘 나와 5개월된 아들을 먹일 수 있는 것을 감사해했다. 내가 잠시 그녀의 둘째 아들을 안고 있었는데, 아가는 너무 작고 가벼웠고 맑은 눈망울로 웃으면서 내 가슴에 입을 대고 빨면서 젖을 먹고 싶어 했다. 그녀의 젖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나보다. 조금 지나자 아가가 쉬를 해서 아가 옷은 물론 내 잠바와 바지까지 젖었는데, 그녀에게 얘기하니 쉬를 하는 경우에는 옷을 갈아입히지 않고 그대로 말리고 똥을 쌌을 때는 갈아입힌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수시로 대소변을 보는 5개월의 작은 아가는 천 기저귀도 없이 그냥 바지만 입고 있었다. 두 아들들은 학교에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며, 세네갈에서 먼 길을 걸어 우물물을 길어가는 모든 일은 여자만 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면서 수줍게 웃던 어린 엄마의 모습이, 그녀의 예쁜 두 아들의 눈망울이 마음에 남는다.




첫날 서로 다른 경험들을 하고 단원들은 숙소로 모였고,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사막 숙소를 정비하고 나서, 어둠 속에서 군용 카레밥으로 저녁을 먹으며 전기와 수도가 없는 사막 생활을 시작했다. 베이스 켐프는 프랑스인이 호텔을 만들까 하다가 그만 둔 곳으로, bar로 쓸 수 있는 좀 널따란 나무 그늘 막과 화장실2칸이 있는 샤워장, 우물이 있었다. 그늘 막에 좌우를 나누어 남자 단원들과 여자 단원들이 모래 바닥 위에 매트를 깔고, 모기장을 쳐서 각자 사용할 수 있는 잠자리를 마련했다. 처음에 모기장이 부족하다고 해서 2인이 1개를 사용하라고 해서, 나와 동갑내기 친구는 안쪽 자리에 우리 매트 2개를 좁은 모기장에 넣고 준비를 했는데, 모기장이 부족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모두 1명이 1개의 모기장을 썼다. 2인 1실이 되어 버린 우리 모기장은 둘이 전혀 돌아누울 수 없을 정도로 좁기는 했지만, 매트가 모기장 바닥을 꽉 잡아주어 쓰러지지도 않고 그 때문에 개미, 거미, 모기 등의 벌레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계속 같이 사용했다. 내가 누운 자리에는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통로가 있어서 마치 기다란 큰 창문이 나 있는 것 같았고, 어두운 밤 침낭 속에서 잠을 자다가 눈을 뜨면 시간에 따라 위치가 바뀐 별들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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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생활 속의 봉사




사막에서 식수는 현지에서 구입한 생수를 이용하고, 나머지 설거지, 화장실 및 샤워 물은 모두 우물물을 직접 길러서 사용해야 했다. 나는 11. 7. 따바스키 축제날이자 다음날 연세세브란스 의료단을 맞이하기 위해 락호즈(Loc Rose) 근처 호텔로 숙소를 옮길 때까지, 거의 베이스 켐프에서 식사 준비를 돕고 설거지를 주로 하였다. 영양사인 스물 여섯의 인영이는 항상 예쁜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현지에서 구입한 식재료를 가지고 메뉴도 잘 결정하고, 불 조절도 잘 되지 않는 가스 버너를 이용해서 50인분의 식사를 뚝딱뚝딱 잘도 준비했다. 나는 쌀 씻기, 설거지를 도맡아 했고, 주로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FD 종훈이와 은석 작가의 도움을 받아 우물물을 길러 쿨토시를 이용해 부유물을 걸러내고 다시 정수 알약을 타서 정수물을 만들었다. 이 준비만으로도 여러 시간이 걸리고 단순하지만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는 고된 작업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준비할 물이라 아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현지에서 최고라고 해서 구입했다는 쌀은 물을 넣자마자 까만 깨 같은 것이 수북이 떠올랐는데 모두가 쌀벌레여서 여러 번 헹구지 않을 수 없었다. 쌀벌레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 광경을 함께 본 스텝들은 다른 단원들이 식사가 거북해질 것을 염려하여 내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일을 함구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 덕에 쌀 씻기는 내 전담이 되었고 기부할 다른 재능이 없던 내겐 안성맞춤 일이었다. 설거지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제작진에서는 식판을 준비했는데, 처음에는 우물물을 이용하여 헹구고 마지막에만 정수물을 사용하면서 정수물을 아끼려고 패트병 뚜껑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서 샤워기처럼 사용하였다. 쿨토시, 패트병을 이용해 가면서 정수와 설거지를 하고, 우물물을 길러다가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가며 샤워를 하면서, 우리가 도시에서 얼마나 귀한 수돗물을 함부로 낭비하면서 지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11. 5. 우리의 영양사 인영이가 대장과 함께 따바스키 축제때 마을 사람들에게 불고기, 전 등 한국 음식을 소개하기 위한 장을 보러가면서, 내게 점심 준비를 맡겼다. 집에서도 거의 식사를 준비를 하지 않는 어설픈 주부인 나는, 결국 주먹밥 준비를 하다가 양파 대신 내 왼손 중지를 조금 베었다. 왼손을 조금 다친 덕에 11. 7. 호텔로 갈 때까지 물이 들어가면 상처가 덧날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며, 얼굴만 물티슈로 닦고 양치만 하면서 샤워를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지저분하다 했지만 오히려 물도 아끼고 샤워 준비를 위한 고생을 하지 않아 좋았다. 다친 게 왼손이라 일회용 장갑을 끼고 설거지나 쌀 씻기는 계속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사막에서 며칠 씻지 않아 보니, 땀이 난 곳에 바람에 불어온 모래가 붙어서 내 몸을 만지면 모래과자 같았다. 특히 귓속까지 모래가 가득 붙어 있어서 이곳 아이들이 왜 온몸에 그리 모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지, 왜 그것을 개의치 않고 그냥 지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11. 6. 오전에 잠시 교육조와 함께 아이들과 부메랑 종이접기 놀이에 참여한 것 외에는 주로 숙소에서 있었고, 먼 곳까지 와서 주로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게 스텝들이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봉사 활동도 먹어야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누군가는 봉사자를 위한 돌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이미 많은 부분은 제작진들이 그 사전 준비를 다 해 놓은 상태에서 일을 하는 것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원들은 세네갈 아이들을 위해 땀을 흘리고, 서포트조는 단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스텝들은 단원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내가 세네갈에 있을 수 있도록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는 내 두 아들을 돌봐주시고…, 그렇게 세상은 관계들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고리로 돌고 돌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또한 사방이 탁 트인 사막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은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과 다른 해방감이 느껴졌고, 어둠 속에서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단원들과 사막에 누워 휘영청 밝은 달빛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너무 자유롭고 좋았다. 사막에 오면 별이 쏟아질 것을 기대했었는데, 놀라운 것은 다른 불빛이 없어서인지 달빛이 너무 환해서 달 주변은 별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곳에서 몇 년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브라질 신부님은 집을 지으면서 전기가 없는 이곳에서 달빛을 이용하기 위해 천장에 구멍을 뚫어 볼록렌즈를 넣고 사용한다는데, 달빛 속에서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본나바 사막의 아름다운 달빛과 석양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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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바스키 축제와 의료 봉사




11. 7. 따바스키 축제를 위해서 불고기, 전 등을 준비해서 마을로 나갔다. 마을 어른들이나 아이들은 모두 평소와 달리 화려한 색감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고 모두 즐거워 보여,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나도 한복을 입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어른들이 옷이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같이 모여서 마술사 대윤이의 마술, 단원들의 부채춤, 노래 공연 등을 보았다. 아이들과 섞여 앉아 함께 박수를 치고 보는데, 교육조 단원들은 아이들과 많이 친해져서 편지를 주고받거나 집에 놀러가 본 친구도 있고 어느덧 서로 편안하고 친근해 보였다. 늘 건축조에 있던 단원들도 나처럼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희창이는 건축 일로 까맣게 탄 얼굴로 아이들 속에서 한 남자 아이를 꼭 껴안고 공연을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희창이가 눈물을 흘리자 그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희창이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그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모습에 내 마음도 뭉클해졌다.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세대를 달리하는 우리들이 한 마음을 나누며 친구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날 축제를 마치고 바로 본나바의 사막 숙소의 짐을 정리하고, 락호즈(Loc Rose) 옆의 FICHE D’HOTEL로 이동하였다. 호텔은 수도, 전기 시설이 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2층인 천장에서는 박쥐 똥,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 쥐며느리 비슷하게 생긴 벌레가 자주 떨어져서, 오히려 별이 보이던 사막 숙소가 그리웠다. 침대 이불도 이, 벼룩 같은 작은 벌레들이 너무 많아서 사막에서처럼 그대로 침낭에서 자야 했는데, 우물물을 긷지 않고도 샤워를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장점이 없어 아쉬웠다.




11. 8. 오전 연세세브란스의 15명의 의료단원들이 합류하였다. 세네갈의 의대생들도 함께 와서 월로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과의 통역을 도왔다. 이렇게 30여 명의 식구가 늘어나고 의약품 등의 관리를 위해서 부득이 숙소를 호텔로 옮기게 되었고 앞으로는 식사 준비도 현지인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11. 8.부터 10.까지 3일 동안은 숙소를 나와 의료단원들과 함께 보건소에서 의료봉사를 도왔다.




보건소는 몇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경비 외에 근무하는 의료진이 없고 2개의 방외에 별다른 시설도 없어, 마을 사람들이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거나 핸드폰 충전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의료진은 첫날 그곳에 한국에서 가져온 의약품, 의료기기를 준비하고 간이 천막을 설치하여 소아과, 내과, 피부과, 안과, 가정의학과, 감염내과 등의 진료를 보기 시작했고, 의료봉사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보건소로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열 분 정도가 오셨는데, 약사 선생님은 한 분이 오셔서, 열 분이 처방하는 약들을 조제하는 업무가 밀렸다. 나는 약국에서 약사 선생님을 도와 약을 쪼개거나 갈고, 약 봉투에 약을 넣고, 약 봉투를 붙이고, 아침 점심 저녁을 그린 종이에 알약의 수를 표시하는 등의 일을 주로 도왔다. 하루에 2, 3백 명이 넘는 환자들이 진료를 받았는데, 순서대로 기다리게 하고, 보건소의 자리가 부족하여 뙤약볕에서 천막 아래 탁자를 두고 진료를 하고, 모든 이들에게 구충제를 나눠주며 먹게 하고, 개인마다 처방전을 그림과 불어로 설명하고…, 의료진만으로는 하기에 벅찬 이 일을 일반 단원들과 의료진, 세네갈 의대생들이 모두 역할을 분담하여 열심히 하니 큰 차질 없이 진료가 진행되었다.




의료 봉사 현장에서는 전신마취 없이 국부마취로 어린 아이들의 음낭, 탈장, 다지증 등의 수술이 이루어졌다. 약국 자리 옆방에서 수술이 진행되었는데, 수술 동안 끊이지 않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듣는 이까지도 그 고통을 절감하게 했다. 그런데 수술 후에 바로 걸어 다니는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보니 생명을 살리는 의료 봉사의 고귀함이 새삼 크게 느껴졌다. 생후 5개월 쯤의 한 아가는 피부 속에 기생충이 기어 다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사상충증으로 눈까지 기생충이 있어서 안과 선생님이 기생충을 빼주었다. 그 아가를 위한  알약을 갈아주면서 적기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시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데, 이렇게 귀한 인연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어 너무 다행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또 우리가 떠나고 나면, 의료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살아갈 이곳 사람들이 염려되었다. 의료진은 본나바 의 보건소뿐만 아니라 인근 오지 마을, 락호즈의 염전 등까지 직접 찾아가서 의료봉사를 펼쳤다. 전문직이라지만 이곳에서 와서는 단순 노동밖에 도울 게 없는 내 처지와 달리, 생명을 살리는 의료진들의 재능 기부가 너무 귀하고 멋지게 느껴졌다. 소명의식으로 직업을 갖고 그 직업에도 만족하며 직업상 재능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봉사를 하고 있는 의료진들의 따뜻한 모습은 내게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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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나바를 떠나 조알에 가다




11. 10. 본나바에도 말 그대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떴다. 사해보다 염도가 10배 정도 더 높다는 락호즈(Loc Rose)는 붉은 빛을 띠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락호즈의 석양과 보름달의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운 날이었다. 어느새 우리의 일정도 중반을 넘어서고, 하루 전부터는 건축조에서 완공을 위해서 야간작업까지 시작하고 무더위와 부족한 수면 속에서 조금씩 아픈 단원들이 속출했다. 말라리아 의심 증세의 MBC 직원은 고열이 나서 정신이 혼미한 듯 오들오들 떠는데, 따바스키 음식 준비로 전을 부치느라 무더위에 땀을 비 오듯이 쏟으면서 너무 고생을 한 것이 아닌지 미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스텝, 연예인, 매니저, 단원의 구분이 없이 힘이 닿는 대로 서로의 일을 도와가며 봉사를 하고 있었고, 멀게만 느껴졌던 연예인도 그저 언니 동생으로 친근하게 느껴졌고, 의미 있는 일에 함께 땀을 흘리며 서로 격려하면서 육체의 고된 피로를 이겨나갔다.




나는 11. 10. 새벽 4시경까지 벽화를 책임지는 혜연이와 함께 14일 개관식의 초대 포스터 작업을 했다. 아무런 책임을 지는 것이 없는 나와는 달리 특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단원들은 서울에서부터 계속 그 업무에 대해서 고민을 해왔는데, 이제는 며칠 남지 않은 일정들 속에서 그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어도 단원들과 함께 개관식까지 건물 완공, 벽화 완성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앞으로 묵묵히 나아가는 단원들의 모습이 든든했다.




나는 준비해 왔던 영양제 등을 건축조에 건네주는 것 외에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하고, 11. 11. 새벽에는 데이비드 오와 함께 해안지방인 조알로 떠났다. 단원들은 2명씩 세네갈 각지에서 해외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KOICA 단원을 만나서 그 지역 및 업무를 소개하는 일도 했는데, 나와 데이비드 오는 조알 지역에서 문어 축양 기술을 전수하는 일을 하고 있는 KOICA 여단원 2명을 만나러 가게 된 것이다.




KOICA 단원 한 명은 갓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한 명은 휴학을 하고 세네갈에서 2년의 해외봉사를 하러 왔는데, 스무 살의 데이비드 오가 ‘문어누나’라고 부른 단원들은 내게는 너무 앳되고 귀여워보였다. 이 둘은 수도 다카르에서 주로 지내다가, 6월부터 조알 지역의 바닷가 휴 호텔의 빈 방을 하나 구해 주중에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개발한 문어 축양 장비를 설치 운영하는 것에 도전하고 있단다. 문어는 세네갈 사람들은 먹지 않고 전량 외국으로 수출되는데 정어리의 50배가 넘는 가격이 나가고 그 크기가 더 클수록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 새끼 문어를 잡아서 더 크게 키워서 팔 수 있으면 세네갈 어민들의 어려운 생활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여 이 일에 도전하고 있다는 당찬 포부를 얘기하는데, 그 젊은 도전이 건강하게 느껴졌다.




어촌마을 조알에서 만난 사람들




11. 11. 오후에는 문어 단원들과 함께 조알 지역의 염장에 갔다. 조알은 세네갈 수산업의 핵심이 되는 지역으로 가장 큰 규모의 어시장과 염장이 있고, 염장에서는 바로 잡은 싱싱한 생선을 장기 보존을 할 수 있도록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를 한 후 아프리카 인근 내륙 국가 또는 아시아, 유럽에 수출을 한다. 차에서 염장 근처에 내리자마자 비릿한 생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염장을 하고 있는 곳에서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코를 넘어 위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정말 싱싱해 보이는 정어리 등의 생선을 끊임없이 말 또는 당나귀가 끄는 수레에 실어 날랐고, 그 수레는 대부분 열 살 남짓의 어린 남자 아이들이 몰고 다녔다. 그런데 염장은 가마솥보다 훨씬 더 큰 그릇에 담긴 물에 한 번 씻고 다시 소금 통에 절이는 방법으로 하는데, 2주에 한 번 정도를 갈아 준다는 씻는 물이 너무 지저분해 보였다. 나는 그곳을 둘러보면서 저 염장 통 속의 물고기를 만지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그 염장 통은 말할 수 없이 더러워보였다.




다행인지 우리는 염장에서 훈제하는 일손을 도왔다. 훈제는 정어리 등의 생선을 훈제 대 위에 가지런히 세워 정리한 후 밑에서 약한 열로 연기를 씌우는 방법으로 하는데, 우리는 막 도착한 싱싱한 정어리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 갓 잡아온 싱싱한 정어리 역시 깨끗한 통에 담아서 정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수레를 옮기는 말과 당나귀 등이 대소변을 본 진흙투성이 땅 위에 정어리를 수레에서 쏟아 붓고, 다시 그 정어리를 그대로 훈제 대에 올려서 정리를 했다. 정어리들 위에는 마치 세상의 모든 파리들이 다 거기에 집합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파리 떼가 들끓기 시작했다. 싱싱한 생선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고 더럽히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10여 미터의 긴 훈제 대에서 세네갈 여인들과 함께 정어리를 정리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염장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보통 하루 13시간 이상을 일하고, 겨우 우리 돈 2,500원 정도의 일당을 받는다고 했다.




그 여인 중에 40대 나이에 혼자 살면서 다섯 아들을 키우고 있는 벤쌈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병원에서 감염되어 오른쪽 다리를 다쳐 걷는 것도 불편한 몸인데, 둘째 부인으로 남편과 같이 살지 못하고 염장에서 일하면서 다섯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 염장에서는 정어리 등의 물고기를 고인 물에 씻어 소금에 재우거나, 훈제를 위해 정어리를 훈제 대 위에 가지런히 세워 정리해야 하는데, 나도 잠시 같이 해 보니 힘든데 오랜 시간을 계속 서있거나 앉아서 같은 작업을 해야 하는 그녀의 불편한 다리와 허리가 얼마나 아플까 싶다. 염장 근처 공터에 있는 방 한 칸짜리 그녀의 집에는 침대 메트리스와 컴퓨터 받침대 만큼 작은 책상, 부엌 살림살이, 옷들이 한 곳에 같이 있다. 그 허름한 집조차 자신 소유가 아니어서 비싼 집세를 내고 있다는 그녀는 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은 학교의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아들들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며, 아픈 몸을 이끌고도 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하면서 다섯 아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아들들이 학교를 나와서 모두 좋은 직장을 구하게 되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의 모습에, 친정 엄마의 모습이 겹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저녁 우리는 문어 단원들이 묵고 있는 휴 호텔의 옆에 방들에서 묵었다. 휴 호텔이어서 관리인 가족만 살고 있고, 밤에는 불빛도 제대로 없이 바닷가 바로 옆이라 계속 거친 파도소리가 들리고, 정리되지 않은 풀숲에서도 무언가 동물들 소리가 들리고, 방안에도 바퀴벌레와 모기가 많은데, 조그마한 호텔방의 더블 침대 하나에서 사이좋게 몇 달을 지내고 있는 두 단원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문어 잡이를 해보기 위해 5-6인승의 작은 카누 2대에 나눠 타고 망망대해 대서양을 향했다. 내가 탄 배에는 왼쪽 팔이 없는 서른이 좀 넘은 선주, 노를 젓는 청년, 잡일을 돕는 열다섯 살의 어린 어부가 함께 했다. 그 소년은 배를 바다로 몰면서, 망망대해에서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 몸으로 잠수를 하여서 배나 그물을 손보기도 하고 자맥질을 하여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평소에는 5시간 정도를 항해해 가서 문어 잡이를 한다는데, 배에 구명조끼 등 아무런 안전장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배가 낡아 물이 차오르기도 해서 물을 퍼내야하기도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다. 그래도 그 소년은 학교를 가보지 못했지만, 자신을 먹고 살게 해 주는 바다가 좋다고 한다.




2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나가니 우리가 떠나온 육지가 보이지 않고 360도를 둘러보아도 모두 바다뿐인 대서양 가운데 이었지만, 열심히 주낙을 던져도 문어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문어가 잡히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 멀미약의 효과가 약해져서 속이 울렁거려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어 다시 본나바로 돌아가는 일정을 고려해 빈 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문어 한 마리 구경하지 못했지만, 세네갈 어부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엿보면서 문어 단원들의 꿈이 실현되면 세네갈 어부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대서양에서 돌아와서 소년 어부의 집을 방문하였다. 소년의 엄마는 그 아들을 포함하여 5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아이들과 함께 그 날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20살이 넘은 큰 아들부터 예닐곱 살의 막내딸까지 아무도 학교에 보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아픈 눈의 시력이 계속 떨어져 가까이 있는 사물을 구별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고 하는데, 나를 바라보는 새빨간 흰자위와 희뿌연 검은 눈동자가 모두 심각해 보인다. 그녀는 아들들이 돈을 벌어오면 아껴 써서 모았다가도,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면 모았던 돈을 다 쓰게 되어 아직까지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다는데, 모두 바다 일을 하는 아들들이 돈을 잘 벌게 되어 배를 사고 막내딸이라도 한 명 학교를 보낼 수 있기를 꿈꾼다고 한다.




자녀들과 함께 힘겨운 오늘을 살고 있는 세네갈의 엄마들, 그 엄마들 모습 속에서 서울에서 내 두 아들을 돌보며 고생하고 계실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는 1940년생, 아버지를 7살, 어머니를 12살에 여의고, 전쟁 통에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안양으로 올라와서 10년 넘게 공장에서 일을 하셨단다. 친정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고, 5남매를 키우며 자식들이 교육을 받지 못해 자신처럼 살지는 않기를 바라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5남매를 모두 대학 교육을 시키셨다. 그 70년 세월 동안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현재 OECD 가입국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말하는 괄목상대의 발전을 해왔고, 엄마 인생의 반만큼을 산 나는 현재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려 엄마의 도움을 받아 두 아들을 키우며 세네갈에 봉사 활동을 올 수 있었다. 친정 엄마의 꿈과 희생이 엄마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것처럼, 세네갈 엄마들의 꿈처럼 그녀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엄마들보다 더 안전하고 건강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질적으로는 가진 것이 부족하여 힘겨워도 많은 아이들을 모두 품 안에서 키우면서 오순도순 웃음과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녀들을 보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서도 더 많은 욕심을 내면서 스스로 힘겹게 만들며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되었다. 오히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복잡한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두 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겠다는 욕심에 두 아들이 불행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세네갈 엄마들의 서로 다른 삶의 무게를 느끼며, 소통과 나눔으로 세상의 균형추가 맞춰지면 모두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꿈꿔본다.




완공된 문화센터를 두고 본나바를 떠나며




조알에 갔던 우리 일행은 11. 13. 자정이 지나서야 락호즈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은 개관식을 하루 앞 둔 날이라 아침 일찍부터 전 단원들이 건축 현장에서 건물 및 운동장의 마지막 정리, 벽화 작업에 참여하였다. 조알에 있으면서도 그 사이 단원들이 건축 현장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계속 마음이 쓰였는데,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는데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황량하기만 하던 회색 건물 골조가 이제는 거의 완공되어 노랑, 빨강 고운 색깔로 벽화까지 그려져 있어서 너무 예쁘고 밝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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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본나바 마을 언덕에 아이들의 꿈을 키우는 작은 문화센터가 세워져 있었다. 혜연이가 서울에서부터 고심고심해서 준비해 왔던 벽화 도안이 벽에 그대로 크게 그려진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혜연이와 그림을 전공한 몇몇 친구들이 도안대로 밑그림을 그리고, 다른 단원들이 혜연이가 만들어준 페인트 색으로 색칠 작업을 했다는데, 이것이 일반인들의 솜씨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벽화는 예뻤다. 나도 늦었지만 마지막 작업에 동참하여 벽화에 색칠도 하고 ‘코이카의 꿈’ 글씨도 직접 쓰고, 내부 청소와 장난감, 책 정리를 도우며, 문화센터가 완성되는 모습을 함께 했다. 문화센터 내부에 바닥 타일 공사로 모래가 산더미여서 밤    늦은 시간에 그 모래를 다 치우고 물로 닦는 청소를 하는데, 몇 명의 아이들이 소리 없이 찾아와서 옆에서 그 청소를 도왔다. 그 마음이 이곳이 자신들을 위한 공간임을 헤아려주는 것 같아 너무 고맙고 예뻤다. 모두들 자정이 넘도록 다 같이 작업을 하며 김영희 PD님이 귀국하면서 남기고 간 현지 햄버거를 야참으로 나눠먹었는데, 정말 문화센터가 완공되었다는 사실이, 건물에 예쁜 벽화와 내부 장식까지 모두 마치고 운동장에는 직접 페인트칠까지 한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이 밤이 본나바의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이 꿈같이 느껴졌다.




11. 14. 아침부터 단원들이 마지막 정리 작업에 힘을 쏟고, 문화센터 안에도 모든 정리를 마치고 운동장에 시소, 그네 등의 놀이기구도 모두 예쁘게 자리 잡았다. 문화센터 건물은 박재동 선생님의 ‘코이카의 꿈’ 그림에 세네갈 어린이들이 손 도장을 찍은 큰 장막으로 가리고, 그 앞 운동장에 단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가득 모여 11시에 드디어 개관식이 진행되었다. 문화센터를 가리고 있던 장막을 내렸을 때 동물들이 아이들과 뛰노는 벽화 그림을 보고 모두 환호성을 지르던 모습, 소년시대라며 아이들과 광훈이가 같이 춤을 추는 모습, 아현 언니의 지휘로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는 모습, 가수가 꿈이라는 아미나따가 멋진 한국어 발음으로 고향의 봄을 부르는 모습, 그 공연을 보면서 내 품에 꼭 안겨 손을 잡고 있던 맑은 눈망울의 아이들… 어느 한 장면 잊을 수가 없다. 개관식에 마을 사람들 많이 오고 문화센터 내부는 넓지 않아, 우선은 단원들이 2명의 어린이들만 손을 잡고 문화센터 안에 들어가서 같이 노는 시간을 가졌는데, 아이들이 장난감과 책을 보면서 모두 함박웃음을 짓고 너무 즐겁게 놀았다. 본나바 시장이 이 문화센터를 앞으로 잘 관리하고 지키겠다고 축하 연설을 했는데, 그 약속이 꼭 잘 지켜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개관식을 마치며 단원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은 관심과 사랑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넉넉하여 늘 웃던 세네갈의 아이들, 불편한 잠자리와 무더위 속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일한 단원들과 스텝들, 땀 흘릴 정도로 일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문화센터 완공을 위해 야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건축 현장 인부들, 한 생명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치료를 아끼지 않았던 의료진들, 우리들의 봉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던 세네갈의 어른들… 헤어짐의 눈물은 아쉽지만 모두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며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의료단장님의 말씀처럼 이것이 한 여름 밤의 꿈이 되지 않도록, 모두가 따로 또 같이 앞으로도 계속 ‘making a better world together’의 꿈을 키워가길 기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나눔과 몰입의 행복




우리는 11. 14. 개관식을 마치고 오후에 바로 본나바를 떠나 다카르로 이동하여 그날 저녁은 대사관저에서 만찬을 나누었다. 해외봉사를 통하여 단원들 개인에게는 현지인들이 친구가 되고 그 나라가 그 이전과 달리 남다른 의미가 되고, 이러한 교류들이 모여 결국 우리나라가 그 나라의 친구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세네갈을 떠나기 전, 과거 아프리카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가던 시절 그 관문이었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고래섬을 잠시 둘러보고, 환승하는 두바이에서는 비행기 대기 시간이 20시간 정도 되어 삼삼오오 두바이 관광을 하며 그간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귀국하여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어느새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의 찬 공기가 느껴졌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지인들은 내게 세네갈에서의 시간이 어떠했는지를 많이 물어봤다. 나는 그 질문들에 주저 없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답을 하였다. 무엇이라고 다 풀어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나는 세네갈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더 없이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맑고 예쁜 그곳 아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에 땀을 흘리는 것이 그저 좋았다.




그런데 나는 지난 연말에 우연히 「FLOW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나다(칙센트미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행복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 책에서는 ‘FLOW’는 행위에 깊게 몰입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될 때를 일컫는 심리적 상태이고, 삶의 많은 순간에서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게 되면 그 시간에 플로우를 경험하게 되고, 이런 플로우가 지나고 나면 사람은 내면의 통합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더욱 합치되는 느낌을 갖고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세네갈에서 나눔과 몰입의 행복을 느꼈던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코이카의 ‘making a better world together’의 꿈을 나누며 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 두 아들이 성장하면 꼭 함께 해외봉사를 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내게 그 지원부터 준비과정, 봉사기간, 돌아와서까지 반년의 시간 동안 큰 행복을 주었던 ‘코이카의 꿈’이 그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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