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수록 빛나는 연대의 행진 – 3.8 여성대회 집회 참가기
강솔지
어두울수록 빛나는 연대의 행진
3.8.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에서 1만 5천여 여성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노동 간 단축, 임금 인상, 투표권 보장을 외쳤던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 3월 8일 서울 YWCA에서 여성의 25세 조기정년제 철폐를 외친 것을 계기로 매년 3월 8일에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하여 올해로 제39회를 맞이했습니다.
올해는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라”, “어두울수록 빛나는 연대의 행진”이라는 슬로건 아래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여성가족부 폐지 움직임, 성평등 관련 예산 삭감 등 여성인권 후퇴 상황을 마주하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용기를 북돋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날, 여성인권위원회와 집회시위인권침해감시변호단 등 민변의 많은 회원들이 함께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봄을 앞두고 있음을 잊을 만큼 강한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였지만, 많은 분들이 민변 깃발 아래 모여 구호 외치며, 노래 부르며 걸었습니다. 특히 집회시위 인권침해 감시 변호단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를 경찰과의 충돌을 대비하기 위해 현장대응조를 편성하여 함께 했습니다.
퇴근길에는 행진이 안된다고요?
당초 행사 계획대로라면 행진은 저녁 5시 부터 6시 반까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장은 행진이 퇴근시간대(17:00-20:00)에 주요도로(세종대로 등) 진행을 포함하고 있어 서울도심 교통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된다는 이유로 행진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이에 집회시위인권침해감시변호단과 여성인권위원회 소속 회원들(강솔지, 김두나, 김상은, 김은호, 김차곤, 민수영)이 모여 경찰의 집회 금지통고에 대한 취소 청구 및 집행정지신청을 제기했습니다.
헌법은 집회 및 시위에 대한 허가를 금지하며, 집회의 자유의 내용으로 집회의 장소와 시간,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합니다.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정치권력 또는 대중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장소’에서 집회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여러차례 강조했습니다. 집회의 주최자가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여 집회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선택한 방법은 최대한 존중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불금’의 퇴근길 정체가 우려된다는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위험을 근거로 퇴근시간대 집회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교통 혼잡을 이유로 한 집회 금지를 극히 예외적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현행 집시법 규정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집회·시위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이나 배경을 삭제하고, 이로 인한 다수의 불편과 비용을 전면에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소수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하여 광장에 모여 외치는 것을 일상적 불편을 이유로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집회 시위 자유에 대한 탄압입니다.
법원의 조건부 결정
이미 경찰이 출퇴근시간대의 행진을 교통 혼잡을 이유로 들어 금지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한 법원 결정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법원은 ‘전 차로가 아닌 일부 차로만 사용할 것’ 또는 ‘참가인원이 500명 미만이면 인도를, 1000명 미만이면 인도와 1개 차선을 이용할 것’, ‘이동을 멈추는 등 행진이 아닌 집회를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고, 위 행진 시간 내에 행진을 종료할 것’ 등의 조건을 붙이거나, 경찰이 금지한 시간대 중 일부만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집행정지 인용결정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반복되는 금지통고에 따라 대부분의 집회가 위와 같은 법원의 ‘조건부 결정’을 거쳐야만 진행할 수 있는 현재 상황이, 사실상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집회 시위에 대한 허가인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실제 이 사건 집행정지 신청에서 재판부는 경찰이 금지한 퇴근시간(17:00~20:00) 중에서, 일부(17:00-17:30, 19:00-20:00)만을 허용하는 방식의 일부인용결정을 했습니다. 막연히 퇴근길 교통 체증이 심화될 것이라는 경찰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저녁 5시로 예정된 행진시간을 앞으로 조금 당기던지 아니면 저녁 7시 이후로 미루라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는 이전의 결정례들에 비추어 보아도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결정입니다. 경찰의 반복되는 금지통고와 집행정지 신청, 그리고 재판부의 집회 시위의 자유의 중대성에 대한 인식 정도의 차이에 따라, 오히려 집회 시위의 자유의 범위를 제한하는 결정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집회 당일, 주최 측에서는 예정된 행사들을 최대한 일찍 마치고, 행진을 가급적 빠른 속도로 진행하여 법원의 결정 범위 안에 행진을 마치도록 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다행히 경찰과 큰 충돌 없이 행진이 마무리 되었지만 급한 마음으로 쫓기듯 행진을 마친 뒤 어쩐지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연대의 행진이라는 올해의 슬로건을 다시 곱씹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