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 민주사회의 창문을 열어 젖히던 품성 – 조영래 변호사 30주기에 부쳐 / 박연철 변호사 (민변 창립회원)

2020-12-29 66

민주사회의 창문을 열어 젖히던 품성

– 조영래 변호사 30주기에 부쳐

 

– 작성: 박연철 변호사 (민변 창립회원)

 

그가 변호사 활동을 한 기간은 1983년부터 1990년도까지 7-8년 정도로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들을 어떻게 하였던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는 사법연수원을 마치기 전에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형사처벌을 받았고, 그 후 ‘민청학련사건’의 배후자로 수배를 받게 되어 오랜 기간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군사독재정부와 투쟁하였고 노동자와 민중의 삶의 현장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의 사상, 이념, 목표에 관하여서 밝히는 집중적인 저서를 남기지 않았으나, 그가 20대에 공들여 기록한 ⟪전태일평전⟫, 그리고 그의 각별하였던 변론, 논설등의 문건들에서, 그의 철학을 육성인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담당하였던 ‘망원동 수재(水災)사건’, ‘상봉동 진폐증 사건’, ‘여성 전화교환원 조기정년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원진레이온사건’ 등 우리들의 귀에 익은 사건들은 그가 수행함으로써 중대한 국가적·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의의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내면에 축적된 지혜, 성품, 역량, 의지 등이 어떤 사건들을 만나 강렬한 빛을 발하여 재판부를 설득하였고, 일정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그 사건들이 우리나라와 사회의 지표와 방향을 한 걸음씩 전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군사독재, 개발독재정부 하에서 적폐된 것들이라서, 그의 성품으로써 묵과할 수 없었던 사건에 관하여 가장 성의 있게 임하였기 때문에 이룬 업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망원동 수재사건’을 수행할 때 사무실 바닥에 산더미같이 쌓였던 서류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수백 수천의 서민들의 이해관계를 떠안고 끝까지 밀어 나갔던 것이다. ‘부천서 성고문사건’만 해도 다른 변호인에 의하여는 그에 의해서만큼 강렬하고 철저하게 문제성이 인식되고 상향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작성한 고발장의 첫마디부터가 예사롭지 아니하였다. 민주사회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부숴버려야 할 모순과 비리와 혼란을 척결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그가 부딪친 사건들을 첫 관문으로 만들어 나가는 책임성이 그에게는 무척 강하였다. 나는 그를 늘 존경하는 마음, 감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6.10 항쟁 이후, 김영삼-김대중 야권후보단일화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으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신속하고 강력한 민주적 전환이 좌절된 데 대하여 몹시 마음이 상하였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그가 좌절하지는 않았었다. 그 이후 ‘정법회’는 곧 청년변호사들과 합하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설립하였고, 그는 이 모임의 대들보 역할을 다하였다. 민변의 최대의 장점이자 강점은, 사심을 떨쳐 버린 성향의 인사들이 모여, 매사 활발하고 지혜로운 토론 가운데 의사결정을 하고 합심해서 추진하여 나갔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변협의 첫 번째 인권보고서(1986)는 그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당시 인권위원장은 인권보고서 발간을 막으려는 당국의 추적과 압력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인권보고서 발간은 변협의 주요한 연례업무가 되었고, 오랫동안 민변이 중심이 되어 작성하다가, 민변 회원이 아닌 이들도 참여하여 작성하였고, 민변은 독자적인 인권보고서를 발간하게 되었으며, 변협은 북한인권보고서도 작성·발간하게 되었다. 유엔인권위원회에 반박보고서를 제출하고 발언하게도 되었다. 그로 인해 인권을 파악하고 진단하는 시야가 크게 확대되었다.

민변이 성숙하여 가는 데에 따라, 의견과 성향이 다른 헌변, 시변, 한변 등 법조인들의 임의단체들이 결성되었다. 모두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가 주목한 사건들이 노동자와 민중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사건의 내용 자체가 현장성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전적으로 현장에 투신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변호사들이 현장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가 가고 싶었던 길을 걷고 있다 할 것이다.

그가 지지하여 선출된 김은호 변협 회장은 당시 무시로 변협을 제집 드나들 듯 하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일갈에 쫓아내 버리는 담력을 지닌 분이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공을 다투거나 앞세우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30년 세월 속에 그가 곳곳에서 기억되고 기념되고 있음을 본다.

어린이들을 위한 책, 곧 위인전기 중에 ⟪소년 조영래⟫(박상률 저, 사계절 출판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저자는 출판사의 위촉을 받아, 가족, 친구, 동료, 직장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청취하면서 핵심어로 그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던 소년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그는 가장 강력한 투쟁의 일선현장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는, 그의 흉상을 제작하여 서초동회관에 설치하였고, 광화문회관의 한 층을 조영래홀이라 명명하였다. 그의 모교 서울대 법대에서는 조영래의 이름을 붙인 강의실을 두고 그가 작성한 서면들을 전시해 두었다. 박정희 시대에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못 이겨 돌아가신 최종길 교수, 국제형사재판소장을 지내신 송상현 교수와 함께 동문 법학도의 표상으로 떠올라 있다. 그의 육필을 살펴보는 후배들에게 깊은 영감, 사명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금년에는 그에게 국민훈장모란장이 수여되었고, 재야단체가 아닌 검찰에서 그분의 삶을 조명하는 토론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그가 사후에 영웅으로 추앙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 생전의 있는 그대로의 그를 더 아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의 업적과 정신이 널리 계승, 전파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선운사 등에서 요양하다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사실이 일간지에 짤막하게 보도되고 난 후, 너무나 위중하여 가까운 이들의 병문안조차 금지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후 얼마 아니 되어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를 알고 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였던 이들을 망연자실하게 하는 흉사였다. 그해 12월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그의 묘소에 세울 비석에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던가를 약전하는 비문은 보류되었다. 그가 어떤 분이었던가를 짧은 문장으로 그려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풍모와 업적을 망라해 기록해 두는 일도 굼떴다. 그가 떠난 지 10년쯤 되었을 무렵에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이들이 모여 그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의논하였고, 당시 법대 학장이던 안경환 교수를 집필자로 위촉하여 그분에 관한 기록을 만들어 보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탈고한 내용이 마뜩잖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유족들이 그 출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교수는 그에게 지급되었던 저작비를 반환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의사로 책을 출판하였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이들도 그가 어떻게 기억되고 그려져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확고한 생각을 갖기가 어려울 것이라 짐작된다. 그가 존재하였던 그대로 잘 그려내고 그의 참모습이 살아 움직이고 전파되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의 인물됨이 어디까지 발현될 수 있을 것인가는 세상의 자연스런 관심사였다. 그러한 그가 허망하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아쉽고 슬펐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사회와 국민주권은 한 두 사람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모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지난한 과제이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이들, 잃어버린 이들, 버려진 이들” “언제나 주류에서 벗어난 통계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소수자들” 곧 소외된 이들을 잘 살피는 마음과 눈을 지녔었다. 그가 자기 앞에 놓인 사건들을 잘 처리함으로써 민주사회를 열어 나가는 길을 넓혔는데, 그 뒤에 생존하고 있는 이들은, 계속 더욱 많은 어려운 사건들을 겪고 있다. 누군가 선구적인 분을 기억하고 기리는 가장 좋은 방도는, 그가 지금도 살아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가 뿌려 놓은 싹을 틔우고 더 크게 자라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해마다 연말연시면 책 한권쯤 다시 읽는 것으로 보내는데, 올해는 그의 ⟪전태일평전⟫ 개정판을 읽어볼까 한다. 그가 전태일을 살펴보던 따뜻한 눈으로 나 또한 살펴보았을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