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영화 속, 선과 악을 넘나드는 천생 배우 ‘김의성’, 민변행 열차에 탑승하다

2016-10-05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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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살아간다.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하며 이제 당신이 민변을 만날 때가 됐다 다소 억지스러운 말들을 늘어가며 배우 김의성씨에게 인터뷰 요청 글을 보내보았다. 요즘 대세인 만큼 천개가 넘는 메시지 속에서 뒤늦게 보았다며 이내 회신이 왔고, 그렇게 경리단길에서 김의성씨를 만나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영화 속 악역과 달리 현실에서는 의식 있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가 인터뷰 요청의 전부는 아니었다. 지치고 외로운 이들에게 그가 보여준 작은 행동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제목처럼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솔직히 아주 큰) 행동이었고, 그 행동이 우리 사회를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곳이자 따뜻한 연대가 남아있음을 보여주기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던 마음이 앞섰다. 인터뷰를 마치고 본래의 취지였던 위 소설의 내용을 소회로써 언급하자 김의성씨는 이야기를 거들며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라고 응답해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민변과 배우 김의성씨는 이미 통하고 있었다.

1. intro : 민변에 대하여

이혜정(이하 이) : 민변으로부터 처음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김의성(이하 김) : 글쎄요, 저한테는 민변이라는 단체가 아주 젊은 시절부터 기억들도 있고, 개인적인 기억은 아니지만, 80년대 민변에서 뭘 하고 어떤 성명을 내고, 이런 것들이 지금이야 조금 너무나 다양한 양상들이 벌어지니까.. 그때는 그게 굉장히 의미 있고 힘이 되는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젊은이들한테는. 그래서 저한테는 뭐랄까 믿음직한 어른들이 계시는 곳. 이런 느낌이 있죠.

이 : 그래도 제안 받았을 때 좀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김 : 네, 뜻밖이죠. 저랑 무슨 이야기를 하실지. 뜻밖이었죠.

이 : 그렇다면 민변에 대한 이미지라고나 할까?

김 : 민변에 대한 이미지는 너무 좋죠. 법의 영역 안에서 약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곳, 그런 이미지죠. 저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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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다행이네요, 좋은 이미지라서. 늘 김의성씨를 쫓아다니는 수식어죠. 서울대 84학번 경영학과 출신이고, 그리고 당시 또 운동의 일환으로 연극도 하셨고. 사실 서울대에서 운동하시는 분들 굉장히 많았잖아요. 그러면 훗날에 민변 변호사님들이나, 오다가다 만났던 사람들이 법조인이 되었거나 알고 계시는 분이 혹시 계신가요.

김 :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때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법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그때 저랑 같이 교회를 다녔었는데 교회 안에서 사회과학 공부도 같이 했었고, 사회에 대한 고민도 굉장히 깊게 했었던 친구인데, 어느 날 자신은 고시공부를 해야겠다, 고시공부해서 좋은 변호사가 돼서 변호사로서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고, 한동안 뒤에 다시 만났을 때는 검사가 돼야겠다. 연수원 성적도 좋고. 검사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러더니 이후 띄엄띄엄 들리는 소식으로는 청와대로 들어갔다가, 지금은 국정원에 들어갔더라고요.

이 : 그때와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다른데요.

김 : 그 친구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친구가 어디 있는지, 그런 단편적인 정보들로 사람의 길은 언제든지 그런 식으로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연기를 할 때도 그런 역할들을 연기한 경험이 있었거든요. 소수의견의 홍재덕 검사 같은, 그 역할이 저에게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언제든지 내 안에서 조금만 일이 틀어져서 출발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안에서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줬다고나 할까. 그 친구가 어디에 있었다는 소식들이요.

2. 영화 이야기

이 : 1996년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에서 유부녀를 쫓아다니는 찌질한 작가로 분한 김의성씨와 단역인 송강호씨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후 억수탕(1997), 바리케이드(1997), 머나먼 쏭바강(1994) 등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다가 2000년 경 느닷없이 배우 생활을 접고 베트남에서 사업가로 변신하다가 2011. 다시 홍상수의 북촌방향으로 복귀하더니 이후 건축학개론’, ‘남영동 1985’, ‘26’, ‘관상’, ‘암살’ ‘부산행등 거의 남자 라미란처럼 다작왕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렇게 90년대 주연급으로 영화를 했는데 갑자기 왜 중단을 하고 사업가가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김 : 아주 큰 결심이니까, 한 가지 이유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 중에는 너무 개인적이라서 공적으로 말하기 힘든 이유도 있었고. 그냥 배우로서 해낼 수 있는 삶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계속해서 잘해갈 수 있을까 하는 확신이 없었고요. 뭔가 인생에 다른 기회들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배우를 안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 다음에 이런저런 일을 찾다가 베트남까지 가게 되고.

이 : 그냥 무작정 가신건가요 아니면 계획을 하고 가신건가요.

김 : 처음에는 한국 영화를 배급하는 일을 하겠다고 갔다가, 거기서 방송물들을 제작하게 됐어요. 현지 드라마를 제작했어요.

이 : 직접이요? 나중에 감독 하셔도 되겠네요. 조재현씨도 감독으로 나오던데 요즘.

김 : 조재현씨는 감독을 할 만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이 : 베트남에서 사업도 하시고, 그러다가 또 다시 돌아오신 거예요. 지금도 사업은 계속 하시는 건가요?

김 : 아니요. 사업이 잘 되다가 잘 안되게 되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다시 정비를 하고 투자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냥 눌러앉게 된 거죠. 잠깐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그 때 홍상수 감독님을 만났었고, 영화 ‘북촌방향’을 할 때만 해도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뭔가 영화를 찍으면서 여러 감정들이 일어나고 다른 계기를 겪으면서 다시 배우가 되었죠. 5년 전 정도.

이 : 그렇게 2011년경 다시 배우로 돌아오더니 남영동 1985′의 강과장, ’26의 최계장, ‘소수의견의 홍검사, ‘오피스의 김부장, ‘내부자들의 편집국장, ‘부산행의 천리마고속 상무 등 영화에서는 온갖 진상의 중년 아저씨는 다 보여주고 있어요.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나와 비슷하거나 그래도 악역이지만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을 것 같아요.

김 : ‘소수의견’의 홍재덕 검사 역할이 가장 애착이 가요.

이 : 용산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잖아요. 왜요?

김 : 네, 그 캐릭터는 저와 굉장히 가까이 있다고 생각이 돼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출발점이 어떠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제가 갈 수 있었던 길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만약에 대학교 2학년 쯤 고시공부를 할 수도 있었고, 시험에 됐는데 성적이 좋아서 검사로 얼마든지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정의구현을 위해서. 그랬다가 되게 쎈 사람이 동아줄을 내려주면서 ‘야 내 밑으로 와’, 이러면 힘이 되게 좋고 뭔가 화려한 게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우병우처럼 되고 저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뭐 어마어마하게 다른 삶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역할은 저한테 오히려 경각심을 주는 그런 역할이라서 더 애정이 갔습니다.

이 : 오히려 악역이 개인적인 삶에 많은 도움도 되네요.

김 : 그 역할은 좀 반면교사 역할을 해줬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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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대사도 기억나요. 누가 나한테 전화 한 통을 했을 것 같아?

김 : 내가 다 한거다. 어떤 사람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어떤 사람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 그 희생자는 희생한거고 나는 봉사한 거다.

이 : 그 대사 좀 좌절스러웠어요. 사실 전화를 받고 그랬다고 하면 명확한데, 전화를 받은 게 아니라 그냥 그랬다고 하니까,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부정이 명확히 보이는 거라고 하면 부정을 깰 수가 있는데

김 : 저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전화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받았을 거고. 이미 만나서 이야기하는 장면들도 있었고. 그 대사, 제가 썼어요. 자랑스럽습니다.

이 : 방금 하신 말씀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진짜로 어떤 사람은 자기 신념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누가 오더를 내렸을 수도 있고요.

김 : 그 신념이라고 한 것 자체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자기가 살면서 삶이 신념을 만드는 거잖아요. 한 번 선택을 하면, 그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 점점 더 가니까.

이 : 가끔 조직이나 상황을 보면 본인이 몰랐을까.. 선택에 의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기도 하고. 결국엔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는 거잖아요. 무서운 일이다. 인간도 무섭고.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같은 질문인데, ‘남영동 1985’에서도 고문 많이 하시잖아요. ‘소수의견에서도 수사기록도 안주고 맨날 못된 이상한 소리만 하고, 이런 역할을 하면서 안 힘드셨어요?

김 : 안 힘들었어요.

이 : 이해가 되나요?

김 : 그렇지 않으면 연기를 못하죠. 나는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이러면 연기를 못하는 거고요. 그 사람은 직업으로서 접근했었을 거고, 아침 먹고 출근해서 하고, 그게 또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위급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나는 이만큼 생각을 열고 있었더라면, 그렇지 않은 경우들을 생각하고 이런 역할들을 하는 거죠.

이 : 고문을 할 때는?

김 : 고문을 할 때는 별로 안 힘들었어요. 그건 육체적으로 서로 짜고 하는 거니까. 박원상씨 눕혀놓고. 심지어 물고문을 하면 진짜로물을 먹거든요. 견딜 수 없는 순간에는 말을 못하니까 보자기, 수건 씌어놓고 하니까요, 그러면 손을 까딱까딱해라 힘들면, 그러면 촬영을 중단하겠다. 그런데 물을 붓자마자 까딱까딱하는 거예요. 이러면 못 찍는다, 싶어서 손을 꼭 잡았어요. 나중에는 너무 화를 내더라고요(웃음). 그거는 진짜 한 달 동안은 아침 먹고 나가서 고문하고 찍고, 점심 먹고 나가서 고문 하고 밤에 잠깐 쉬고 자고. 그런 육체적 약속들은 그냥 견딜만했어요. 어차피 이건 가짜다 이런 건 있는데. 마지막에 박원상씨를 벌거벗기고 기어 다니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정말 인간의 수치심이 느껴져서 대단히 충격을 받았어요.

이 : 힘든지 안 힘들었는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실제 이런 일이 있었고. 사람이 사람에게 저런 짓을 하고, 그게 오버랩이 되어서, 너무 괴로웠을 것 같아요.

김 : 배우는 양쪽을 이해하면 연기를 할 수가 없어요. 나만 이해해야지. 그 순간에, 뭐랄까, 지식으로서 접근해서는 안되는 게 있어요. 그냥 이 사람의 감정에 더 충실하고, 이 사람의 목적에 충실해서 내가 맡은 역할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해야지. 양쪽을 다 보면 막히죠. 그 순간에는 제가 그런 사람이 되는 거죠.

이 : 관객의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영화나 문화예술이 가진 힘이 엄청 커요. 그래서 좋은 영화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예전에 봤던 영화 중에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의 로제타라는 영화가 있는데, 청년 실업에 대한 거였어요. 대사도 별로 없는 영화인데 너무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영화 때문에 로제타 법이 만들어졌어요. 영화가 가진 힘이 저런 게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서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그 동안 해왔던 작품 속에서나 아니면 내 삶에 전환점을 가져다준 작품이 있나요?

김 : 영화가 삶의 전환점을 주진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주로 오락으로 접하는 거라서, 즐기는 쪽이라서. 영화로 삶이 바뀐다거나 생각을 바꿔본 경험은 없는 것 같아요. 저희는 일로 해요. 일이 주어지면 일로써 잘 수행해내는, 그렇게 하는 거지. 이 영화가 갖는 의미, 시대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오히려 노력해요. 저는 남영동이나 26년 같은 작품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많이 타락한 영화인이라서(웃음). 직업으로서 하는 일이라서. 환상이 좀 깨지실지는 모르겠지만.

3. 사회참여 활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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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민변하면 2008. 촛불집회를 빼놓을 수가 없고, 김의성씨도 2008. 촛불집회에 참여도 했는데 다행히 연행이 안됐네요(웃음). 

김 : 저야 뭐 살살 옆에서 구경했으니까.

이 : 당시 대학생이었을 때 운동했던 모습과 다르게 그때 촛불집회가 특이한 양상이었어요. 그때 촛불집회에 나갔을 때 느낌이나 기분이 어땠나요.

김 : 그때는 제가 연기를 다시 하기 전이었고, 베트남에서 잠깐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였는데, 그때 커뮤니티에 제가 개인적으로 글을 쓴 적도 있었어요. 저는 그 당시에 이런 싸움은 쉽게 질 싸움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뭔가 전선이 없고 굉장히 자발적이고 비조직적인 형태의 시위를 처음 봤거든요. 그래서 많이 놀랐어요. 어디를 막아봐야 돌아서서 그냥 다시 가버리고. 물론 나중에는 그것도 어떻게든 그걸 깨부시는 방법을 찾아내지만. 그래서 저는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구나, 다른 형태구나, 그리고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도 다르구나, 그게 좀 뭔가 세련되지 않은 그런 것에 대한 짜증이라는 것도 독려가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고, 소위 지도부가 없는 그런 무정형의, 이런 것들이 무척 인상적이었죠.

이 : 맞아요, 그런데 그 이후에 명박산성을 쌓고강경대응으로 나갔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져 세월호 집회 참여한 사람들도 거의 유죄로 나오고 있고, 채증사진을 마구 찍고 단순히 참여한 사람들을 다 찾아내요, 그리고 벌금을 부과하고요.

김 : 구체적인 사례들도 사례들이지만, 헌법의 가치라고 하는 걸 이렇게 맘대로 뭉개버린다는 게, 거기에 대해서 헌법에 책임지는 사람들이 눈감고 있다는 게 전 너무 속상해요 진짜. 민주국가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이잖아요. 시위를 하고 모임을 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주장을 하고 행진을 하고, 그런데 그걸 못하게 하면 그럼 나라가 아닌데. 어떻게 파업에다가 벌금을 때리고. 그러면 진짜 속상해요.

이 : 맞아요. 그럼 같은 연장선상에서 예전 시사인 기자들이 파업을 했을 때 뒤에서 물심양면 도움을 주기도 했고, 촛불집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1인 시위, 굴뚝데이 기획,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드린 티볼리, 이번 추석엔 세월호 단식 농성장을 다녀오셨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온갖 악역을 해서 그런지 마치 현실에서는 회개한 것처럼 너무 착한 모습만 보여주니 혼란스러울 때도 있어요. 내가 사회참여 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 : 그런게 엄청난 참여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 : 그래도 많은 연예인들이 사실 마음속으로 지지는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임에도 드러내기가 쉽지가 않잖아요.

김 : 그렇죠, 어렵죠. 잃을 것도 많고. 그런데 저는 잃을 게 많은 건 아니고, 그냥 참을성이 없는 거죠. 참을성이 없고 즉흥적이고.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이 야기한 연관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하는 법이 거의 없는 거죠. 그걸 보면 일단 가야겠다 그런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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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대협 Justice to the ‘Comfort Women’  페이스북

 

이 : 개인적으로는 티볼리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시고 운전을 하는 김의성씨의 사진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 사진은 보는 사람까지 행복하게 해주고 훈훈해서 참 기분이 좋았어요. 당시 할머니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어떤 마음으로 티볼리를 사서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나요?

김 : 그 당시에 제가 입이 싸서 잘못한 일인데, 이창근씨 김정욱씨 올라가있을 때 이 사람들이 복직이 되면 그분들이 만든 차를 내가 사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안될 줄 알고(웃음). 무슨 소리건 막 하는 거죠. 그런데 진짜 복직이 된 거죠. 특히 이창근씨가 딱 된 거예요. 물론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을 많이 했죠. 위안부 할머니들은 사실은 제가 고려를 많이 한 대상은 아니었어요. 첫째는 제가 약속을 하나 했으니, 지켜야겠다는 것과 복직이 되었다고 하지만 많은 숫자가 복직이 된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사회적으로 크게 이야기가 된 것도 아니었고. 이런데서 내가 뭔가 행동을 보태면 이건 그 반대쪽을 자극하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차를 샀다, 이건 미담이잖아요. 그런데 이 미담을 통해서 회사 측을 자극하거나 격려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이슈에 대해서 미담을 통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돈이 드는 미담을 해보자 그랬고. 그런데 미담이 미담으로 잘 윤색이 되려면, 이 차를 사서 내가 형을 줬다가 아니라 의미 있는 곳에다 보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여러군데 생각했죠. 쌍용 자동차 해고자 가족들과 관련된 치료센터 ‘와락’에 기증을 할까. 그럼 너무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우리 편끼리 하는 것 같다. 그럼 그냥 양로원에다 보낼까, 그건 너무 먼 것 같고… 그럼 조금 더 의미 있는 곳을 찾아보자, 이래서 할머니들한테 기증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위안부 이슈 쪽으로 너무 집중이 되어서 쌍용차 이야기는 좀 가려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런 면에서는 조금 아쉬워요. 게다가 위안부 이슈라고 하는 거는 독도 같은 것처럼 칭찬받기 쉬운 거잖아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안전한 거라서. 그런데 보람은 되게 있었죠. 할머니들 만나 뵙고 차로 모시고 식당가서 같이 밥 먹고 그랬거든요. 마침 변영주(편집자 주 : 영화 ‘송환’과 ‘화차’ 등 제작) 감독한테 이야기를 들었어요. 변영주 감독은 정대협과 계속 관계를 갖고 있었으니까. 정대협에 차를 한 대 기증하면 어떨까 물으니, ‘마침 봉고차를 10년 정도 타서 차가 언제 설지 모르는데, 차에 짐 싣고 할머니까지 모시고 집회까지 나가는데, 너무 불안하다. 그 차로 지방도 가는데, 마침 잘 됐다, 그 차로 주면 너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정대협이나 할머니들이 좋아하셔서 정말 기분 좋았어요. 제가 엄청난 사치를 했죠. 사실 평생에 이렇게 한 적이 없거든요. 대단히 조심스러웠어요. 제가 어머니에게 많은 돈을 못 드리고 형들도 넉넉하지 않아서 차 한 대 더 있으면 좋은 상황인데, 가족들 먼저 생각하지 않는 게 당시는 많이 미안했어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먼저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네가 우리 가족들을 대표해서 좋은 일 한다’고 말씀해 주셨고, 형들도 무척 좋아했죠. 그래서 마음 편하게 했어요.

이 : 다행이네요. 가뜩이나 위안부 할머니들 속상한 일이 많아서..아까 쌍용차 문제를 굴뚝데이로 만들면서 시민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사진도 올리고, 이창근씨도 만나고 하셨어요. 이창근씨와 만남의 계기부터 과정, 굴뚝데이 이벤트 그리고 현재 그들의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김 : 시작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조금 계기는 있었어요. 굴뚝 일 년 전에, 그때 철탑에 다들 올라가셨어요. 갈 데가 없으니까. 안 잡히고. 너무나 스스로를 깎아먹는 그런 싸움들을 하셨는데. 그때도 변영주 감독이 저한테 ‘거기 올라가 있는 양반들이 너무 외롭다’는 거예요. 혼자밖에 없으니까. 너무 외로워서 사람들이 노래를 하고 시를 읽고 해서 짧은 오디오 클립을 만들어서 보내주자, 그런 거를 한다. 김선우 시인도 그렇고. 같이 뵈었었는데 나도 그런 걸 해보자. 그래서 제가 소설책을 읽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진짜 긴 걸 몇 권 읽어가지고 조금씩 잘라가지고 계속 보냈는데, 그걸 이창근씨 계정을 통해서 보냈어요. 그래서 이창근 씨랑 트위터에서 알게 된 거고. 그 이후로 우연히 술자리가 생겨서 헛소리 한 거죠. 미남당을 만들자고..다들 못생긴 사람들이(웃음). 그렇게 알게 되었고 가끔 연락하는 처지였는데 쌍용차 문제가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친구가 굴뚝에 올라갔다는 기사를 본거예요. 너무 놀라고 너무 속이 상한 거예요. 이창근 씨 같은 경우는 밑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언론도 상대해야 하고. 그런데 이 사람이 올라갔다는 건 상황이 많이 안 좋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어쩌면 대단히 면밀하게 잘 준비해서 안 할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날씨도 진짜 추울 때. 여러모로 너무 괴로운 거예요. 마음이.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때 또 사려 깊지 않게 이창근이 내려올 때까지는 서있겠다, 매일 나가겠다, 그렇게 써버린 거죠(웃음) 그리고 쓴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나갔죠. 지금 했으면 더 효과가 있었을 텐데, 더 유명해져서(웃음). 그래도 계속 사람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고, 거기서 같이 서있어 주기도 하고. 대신 제가 어느 날 촬영을 해야 하는데, 비우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 거예요, ‘그럼 제가 할게요’하고 다른 분이 나가서 서주시고. 그렇게 1인 시위를 하고..제가 이것저것 관심을 가질만한 이벤트를 광고 기획사처럼 계속 한 거예요. 굴뚝데이도 만들고, 그것도 어떻게 될지 걱정했는데 사진이 200장 넘게 모였어요.

이 : 뿌듯하셨겠어요.

김 : 좋았죠. 그리고 힘이 되니까. 딴 이유는 없었어요. 일단 내려오게 하고 싶다는 거하고 외롭지 않게 누가 이렇게 보고 있다. 그런 느낌을 주는 게 그때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한거죠.

이 : 그 이후에 그 분들과는 연락을 하세요?

김 : 연락도 하고 그런데, 그때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창근 씨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많이 몰려 있었고 그 위에서 힘든 일들이 많았고…그걸 나중에 김정욱 씨가 인터뷰로 쓰기도 했고 상처도 많이 받고.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는 무척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안부 묻고 일 열심히 하니, 차 잘 나와 이정도. 뭔가 서로 그 이야기를 다시 잘 안하게 돼요. 혹시 아픈 걸 건드릴까봐. 이제는 추석 선물을 팔면 페이스북에 사람이 많으니까 거기에 링크해서 사람들 보게 하고 그래요.

이 : 옛날 투쟁방식이 맨날 모이고 단식하고 극단적인 것보다는 좀 더 운동도 세련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들 때가 있어요. 사회를 환기시키려면. 강남역이나 구의역 추모 행사처럼 요즘은 일반 사람들이 직접 조직하고 알음알음 모이는 경향이 있고 앞으로는 운동의 양상도 이렇게 갈 것 같아요. 이효리씨의 노란봉투나 김의성 씨의 굴뚝데이도 신선했고요. 청년들은 청년실업 해결해 달라고 외치기도 하고. 굴뚝데이 기획자로서, 혹시 다른 방식의 참여나 소통을 생각하신 게 있으신가요.

김 : 저는 우리나라가 소위 시민들의 힘으로 정권을 바꿔본 경험, 헌법을 바꿔본 경험이 있잖아요. 그게 30년 전이예요. 진짜 오래됐어요. 한 1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성공경험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금 백남기 선생님 돌아가시려고 그럴 때, 야 돌아가시기만 해라 이런 사람들이 운동권에도 있었고…누군가의 희생이나 죽음이 어마어마한 동력이 될 거라는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고요. 저는 정말 지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그런 문제들을 다뤄내는 사악함과 무지막지함이 몇 배 커졌는데 똑같은 방식으로 부딪혀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뭔가 소위 투쟁의 동력을 피해나 희생에서 찾으려고 하는 건 이제는 답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뭐가 보인다면 청와대 가자고 해서 부딪히고 드러눕고 싸우고, 그게 얼마나 소모적인가. 그리고 그건 진짜 왕조시대에 임금님한테 이야기하자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요. 제가 그래서 굴뚝데이를 한 것도 뭐냐면 어디 모이지 말고 내가 집에서 내 이야기를 하자. 내 방에서. 조금 용감한 사람은 집 앞에 있는 가까운 역에 가서 하고 부끄러운 사람은 집에서 하고, 창피한 사람은 얼굴을 가리고 하자. 그냥 그런 거에요. 내 이야기를 한마디 보태자. 그것도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런데 저는 이미 시대가 너무 어려워져서 각자도생이 제일 중요한 시대가 되어버렸잖아요. 진짜 살기가 바쁘잖아요.

이 : 맞아요.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요즘은 각자가 힘들어졌어요.

김 : 그런데 각자도생하면서 바로 옆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손을 잡는 거, 그런 경험을 쌓아나가는 거, 결국은 우리 사회에 작은 돌파구가 있다면 그런데서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 작은 행동들, 그리고 그 행동을 과시하는 행동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런 걸 했다고 자랑하고, 거기에 같이 자랑하고 싶어 하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뭔가 좀 다른 게 거기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 : 이승환씨가 세월호 집회에서 불러주는 노래, 김제동씨의 재미나면서도 따뜻한 위로, 이효리씨의 노란봉투나 김의성씨의 굴뚝데이 등 유명인이 사회나 정치에 관심을 보여주면 그 파급력이 엄청나요. 그런데 그렇게 눈물나게 고맙고 반가운 모습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분들이 어떤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또 걱정스럽기도 하고..치사하게 연예인들 생계로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세무조사 받으면 어떡하나, 방송에 못나오면 어떡하나..그런 걱정이 들어요. 혹시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해서 위축되거나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나요?

김 :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기 검열은 있죠. 안할 수가 없죠.

이 : 그럼 그 검열을 어떻게 극복하나요? 세월호 농성장도 가시고.

김 : 그건 검열에 안 걸리는 행동이에요. 제 기준에는 그게 검열이 아닌 거죠. 괜찮아요. 행동은 괜찮아요. 하지만 말은 조금 더 조심하려고 해요. 그건 별 거 아니죠. 명절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자식들 못 떠나보내고 거기서 명절을 보내시는데, 그냥 가서 보고 인사나 하고 싶다, 그게 무슨, 그것도 문제가 되면 되겠지만, 그건 아무튼 제 자기 검열엔 안 걸리는 거고. 욕을 한다거나 이런 건 자제하려고 해요.

이 : 그래서 요즘 정치인들에 대한 멘션은 자제하시는군요.

김 : 그건 불이익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나도 그런 걸로 배설하는 거 아닌가. 그 배설을 구경해보면서 사람들이 시원해하는 거.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무례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조금 자제하려고 하고. 차라리 그냥 혼자서 작은 행동들을 할 수 있으니, 말로 많이 떠들고 싶지 않아요. 요즘 이정현씨 보면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지만(웃음)…사람의 건강과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실제로 불이익을 당한 적 없어요. 영화계는 그런 면에서 조금 더 너그럽고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진보적인 생각을 공유하는 업계라서 그런 점에서 좀 괜찮은 편이고. 그런데 방송을 할 때는 조금 더 조심하는 편이에요. 방송이라는 건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배우가 다른 이슈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여러 사람에게 폐가 되니까요.

이 : 다행이네요. 불이익이 없으셨다니.

김 :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생기면 민변이 도와주시겠죠.

이 : 그럼요. 언제든 돕겠습니다.

김 : 저는 아직 돈을 많이 못 벌어서 세무조사 할 것도 없고..(웃음)

4. 삶 그리고 인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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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재미있게 살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어요. 공감이 갔어요. 어머님은 시사에도 밝으시고. 부모님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 :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까..저희 어머니는 모르는 게 없으세요. 지금도 굉장히 시사에 밝으시고 저보다 더 모르는 게 없으시고. 어머님은 늘 사랑을 주시는 존재죠.

이 : 배우인데 사회참여를 할 때, 저번에 TV를 봤더니 김제동씨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에 나가서 바른 말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가슴이 조마조마 한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어머니는 그러지 않으셨어요?

김 : 걱정하시죠. 한편으로는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시고. 그 두 가지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면에서 걱정을 하시지만 저질러진 일에는 책망을 하시지 않으시죠. 조심해라. 말을 조심해라 하시죠.

이 : 인생 50년을 사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어요?

김 : 힘들었을 때……. 힘든 건 되게 많았죠. 제 인생도 계속 꾸준히 실패이면서 계속 경험한 인생이었던 것 같아요. 연극하고. 뭐라 그럴까. 항상 소수의견적인 판단을 해오면서 실패들도 많이 겪었고. 베트남에서 돌아와서는 기껏해야 6년 전 정도인데 그때 정말 차비, 지하철 탈 돈이 없어서 걸어 다니고 그랬었어요. 46살인데…

이 : 심적으로 많이 힘드셨겠어요. 주변에 말하기도 그렇고..

김 : 어떤 날은 전화기를 들고 전화기에 있는 전화번호를 다 보면서 누구에게 전화를 걸면 돈을 좀 빌릴 수 있을까. 그것을 하루 종일 몇 번을 다시 보면서 아무한테도 전화 못하고 그럴 때도 있었어요.

이 : 소수의견 쪽에 있다가 선택을 직접 하신 거죠. 그에 대해 후회한 적이 있나요. 내가 다시 돌아가면 이런 선택은 안한다..이런거

김 : 일단 저는 하루 전으로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뭐, 후회가 있겠지만, 다른 선택을 했었을 때 역시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들이 지금의 저, 지금의 제가 꽤 큰 행복감을 느끼면서 잘살고 있거든요. 그것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그 일을 다시 다 겪고 싶지 않아요. 진짜 젊은 시절 이런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 : 지금은 행복하시죠?

김 : 네, 이렇게 행복하다가 빨리 늙어 죽고 싶어요.

이 :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나요? 어떻게 보면 이것도 다 선택이었겠죠.

김 : 2011.에 돌아와 배우를 다시 한 게 큰 전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여러가지 일들이 같이 일어났어요. ‘북촌방향’이란 영화도 찍게 되었고, 그 영화를 찍으면서 내가 왜 이런 걸 잊고 있었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하나 그런 걱정들을 고민하고. 되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아버지도 돌아가실 때 ‘재밌게 살아라’ 그런 이야기도 해주시고. 그러면서 제가 그냥 다시 연기를 해야겠다. 물론 제가 결심하고 나서 바로 ‘자 제가 합니다, 자 빨리 써주세요’ 이렇게 해서 써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 뒤로도 거의 1년 가까이 일 없이 있었어요. 그때 이후로부터는 버티기 쉬웠죠. ‘나는 배우야’라고 생각하니까. 막연히 버티는 삶과는 달랐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 변화의 시기고, 다시 연기를 하고 밥벌이를 하는 게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예요.

이 : 그럼 요즘 드라마 ‘W’부산행도 잘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잖아요. 요즘은 기분이 어떠세요. 예전에 작품이 없어 힘들 때도 있었는데 소위 말해서 지금은 많이 뜨셨잖아요.

김 : 만감이 교차한다고나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있죠. 그래, 기회야. 이런 생각도 있고. 그리고 이거 다 허망한 일이다, 이런 생각도 있고. 더 조심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있고요. 그리고 사실 이쪽의 일이라고 하는 게 다 이렇게 바람처럼 왔다 갔다 하거든요. 그래서 되게 허망해요. 제가 다른 인터뷰하면서도 그런 평을 했는데, 직업을 배우로 삼고 있는 사람들, 그 중에 밥을 연기로 벌어먹는 사람들, 그게 가능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3년짜리 계약을 하는 전문직이라고 생각이 돼요. 제가 올 여름처럼 좋은 결과물들이 생기고 대중들이나 업계에서 이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라고 생각하면 그게 한 3년 정도 밥을 벌어먹게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시기가 생기는 거고. 그 안에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게 재계약을 위한 조건이고. 그게 아니면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지금 저는 3년짜리 계약을 성공적으로 잘 만들어낸 시기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3년 동안 또 더 열심히 일해서 더 좋은 계약으로 이끌어내고 싶고, 그렇게 해서 2번만 계약하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 아까 말씀하셨을 때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실패도 많이 했었다고 했어요. 요즘에 어른이 된다는 거나, 나이 들어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앞으로 여러 가지 선택에서 예전과 다른 판단과 생각을 하실 것 같은데.

김 : 나이를 먹어버려서 좋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저에게 남은 시간이 아주 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돈이 떨어지기 전에 죽고 싶어요.

이 : 돈 빌려드릴게요. 왜 그러세요. 가슴 아프게.

김 : 빨리 돈을 버는 대로 다 쓰고 일정 시점에 죽는 거죠. 그런데 죽는 게 대단한 일인가요.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거고. 저희 엄마가 멋진 말씀을 하셨는데, 한 번은 죽는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죽는 게 좋다, 이렇게 말하셨어요.

이 : 아프지 않고 죽는 게 제일 좋죠.

김 : 네, 그런데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금 20대는 막막할 것 같아요. 앞으로 80년은 더 살아야할 것 같은데, 삶의 조건은 팍팍하고 사회가 내 삶을 보장해주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양극화는 점점 심해질 거고. 희망이 좀 없죠.

이 : 그럴 때 우리들이 조금씩 손을 잡고 바꿔나가면 안 될까요.

김 : 저는 되게 비관적이었는데, ‘비관적입니다’ 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요새는. ‘너희들의 미래는 어두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일자리는 없어’ 이렇게 이야기했었는데 근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은 좀 우습게 생각하고 비웃는 가치들인 꿈, 희망, 퇴색되어 버리는 그런 가치들이 의미를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안 그럼 너무 불행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행복할 수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행복할 수 있어. 심지어 그 행복이 내 마음속에만 있는 행복일지라도 행복할 수 있고 떳떳할 수 있어’ 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확률은 적더라도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자,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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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맞아요. 향후 다른 영화나 뭐 준비하고 있는 게 있나요?

김 : 올해는 그냥 놀려고요. 이렇게 말하면 좀 멋있거든요. 올해 얼마 안남았는데 ‘두어달 놀겠습니다’ 이런 것 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거든요(웃음). 좀 쉬지 않고 오래 달려왔고, 일종의 재정비랄까 그런 시간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일들은 다 거절하고 있어요. 정말 매력적인 일이 들어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그동안 작업해놓은 게, 더 킹이라는 영화가 11월 달에 개봉하니까. 여행 좀 다니려고요. 내년에는 또 열심히 해야죠.

이 : 마지막으로 민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김의성 : 글쎄요, 민변은 저한테 참 어색한 게, 민변은 저에게 어른이었거든요. 제가 20대 때 저보다 나이 많고 훨씬 더 큰일을 하고 되게 중요하고 언젠가 나에게 도움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그런 벽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민변이 저보다 젊은 느낌이라는 게 되게 어색해요. 그런데 좀 바꿔서 생각해보면, 여전히 민변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그 당시에는 민변의 한 마디가 굉장히 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는 시기가 있었어요. 세상이 이미 변했고 민변이 뭔가 큰 걸 대표하지는 못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너무 달라졌으니까. 그런데 여전히 민변이라고 하면 안도감, 안전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게 또 민변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분들을 생각하시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기쁨과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소수의견이 꽤 리얼했던 것 같아요. 보통 그런 영화들이 고증에 약한 경우가 많은데, 소수의견은 거의 뭐, 김두식 선생님은 이건 법대에서 교재로 써도 될 수준의 영화라고도 하셨어요.

이 : 김두식 선생님도 저희 회원이세요. 책 재밌죠. ‘불편해도 괜찮아’ 등등…

김의성 : 김두식 선생님은 저랑 좀 친해요. 다음 달에 술 마시기로 했어요. 몇 분 친한 분들이 있어요. 좋은 분들 모임이 있어요. 아무튼 민변에 바람이 있다면 자부심을 가지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이 : 촛불집회하면 민변을 빼놓을 수 없고, 박원상씨가 주연을 한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의 주인공도 민변 회원이고, 쌍용차, 세월호 문제 등 김의성씨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곳에 민변도 다 참여하고 있어요. 교집합이 나름 있다는 거에요. 굴비마냥 막 엮으려니 힘드네요. 향후 혹시 민변에서 월례회나 북콘서트 등에 초대하면 응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김 : 거기에 제가 끼어들어 있는 거죠. 그리고 ‘없습니다’ 그런 말을 못하게 물어보시면서….시간이 허락한다면 언제든지, 언제든지는 아니겠지만 몇 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여하겠습니다.

이 : 긍정적인 회신이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끝으로 인터뷰 소회 듣고 마칠께요.

김 :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예요. 제 어린 시절에 든든한 어른들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단체와 인터뷰를 하고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게 저에겐 아주 큰 영광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뭘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나름대로 제가 할 수 있는 발버둥을 치는 거고.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손잡을 수 있는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과 소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 제가 처음 김의성씨에게 연락을 드렸을 때, 우연히 제가 맡은 사건에도 멘션 날려준 적도 있고, 그런 것도 있지만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레이먼드 카버라는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제목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제목이에요. 어느 날 뺑소니를 당한 아들이 죽었는데, 3일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죽었어요. 그 날은 아들의 생일이었고 엄마는 아들 생일을 위해 케익 가게에 가서 미리 케잌을 주문했었고요

김 : 아. 케잌 주고…! 제일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데…

이 : 맞아요. 가게 아저씨가 이거라도 먹으라고, 이게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될꺼라고슬프지만 따뜻한 풍경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세월호 유가족들도 생각났고, 김의성씨도 생각이 났어요. 민변이나 김의성씨나 우리의 행동이 어찌 보면 별게 아닐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것이 그 사람한테는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사실 저희는 저희 일로 하기 때문에 당연한 건데, 배우나 유명인들이 목소리를 내준 것에 대해선 제 개인적으로는 정말 고맙고 그랬어요. 그래서 충동적으로 연락드린 것도 있었고요. 이건 제 소회였어요. 제가 영광이었고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 :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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