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원 인터뷰는 제28차 총회에서 모범위원회상을 수상한 ‘민변 대구지부 인권센터 청도 송전탑 TF팀’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대구지부 서상민 간사가 수고해주셨습니다.
서상민 총회 이후로 다섯 분이 모이신 것은 처음이죠? 총회 이후에 모범회원상 받으신 분들 인터뷰가 뉴스레터에 나가고 있는데, 특별히 이번에는 제가 김지미 변호사님 대신해서 인터뷰를 맡게 됐습니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주실까요? 이주현 변호사님부터.
이주현 저는 연수원 41기이고 대구 서부지원 가정법원 앞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고 소속을 대구 지부로 옮긴지 이제 한 7개월 정도 된 이주현 변호사라고 합니다.
박경찬 저도 연수원 41기이고 법무법인 참길에 있는데 참길에 들어온 인연으로 대구 민변에 가입하게 되었고, 민변에서의 인연으로 청도사건도 하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를 한지 이제 4년차인데 너무나 급격한 경험을 해서 좀 부담이 되지만, 그래도 상을 받았으니까 힘내서 생활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도현 저는 김도현이고요. 법무법인 참길에 있습니다. 경북대학교 법학과 93학번이고, 사법연수원 43기입니다. 이상.
서상민 역시 깔끔하십니다.
하성협 저는 하성협 변호사고요.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고 변시 1회 출신입니다. 지금은 대구 범어동 법원 옆에서 혼자서 사무실 근근이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승익 이승익 변호사입니다. 지금 현재 법무법인 참길에 소속변호사로 있습니다. 연수원 기수는 37기입니다. 경북대 89학번이고, 94년도에 졸업했습니다.
서상민 기자회견 같아요. (웃음)
박경찬 저도 이야기 할래요. 저도 경북대 94학번입니다.
이주현 저도 해야 되나? 저는 이화여대에서 법학과 여성학을 복수 전공했고, 02학번입니다.
김도현 이대 학생회장 했던 것도 말씀하셔야죠.
이주현 아, 네. 법대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박경찬 하성협 변호사님도 어디 학생회장 출신 아니십니까?
하성협 저는 경북대 경제학과 89학번이고, 서울 법대 00학번인데, 경북대 다닐 때 경제학과 학생회장을 했었습니다.
서상민 학생회장을 한 번씩은 다 해봐야 하는 거에요?(웃음)
박경찬 저도 94년도 2학기 때 과대표였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어느 날 자고 눈떠보니까 타인에 의해서 되어 있더라고요(웃음).
서상민 나머지 두 분은 회장 안 하셨어요?
김도현 없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도 아무 일 없었습니다.
서상민 뭔가 경쟁적으로 자기소개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박경찬 아! 맞다. 저도 얼마 전에 선출직에 있었습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 회장이었습니다(웃음).
하성협 본인이 여태까지 맡고 있던 직책 중에 제일 높은 직책 아닙니까.
박경찬 선출직에서 제일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제가 680세대 대표였습니다. 그런데 이사 가는 관계로 그저께 사퇴했습니다.
서상민 첫 질문이 너무 길어졌네요.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저희 청도 송전탑 TF팀, 원래 풀네임이 뭐였죠?
박경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구지부 인권센터 산하 청도 송전탑 TF팀.
서상민 맞습니다. 원래 풀네임이 이렇게 길었는데, 아무도 길게 안하고 청도팀 이렇게 불렀었죠. 청도 송전탑 TF활동으로 모범위원회 상을 다섯 변호사님이 수상하셨는데, 총회에 이승익 변호사님이 참석을 못하셨으니 이승익 변호사님이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이승익 의미 있는 상을 받아서, 다만 앞으로도 이 상에 맞는 활동을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서상민 너무 간단한데요. 박경찬 변호사님이 살을 좀 붙여 주세요.
박경찬 송전탑 관련해서 저희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만 해도 밀양에서 서울 본부, 부산지부, 경남지부들이 참 많은 노력을 했고, 저희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저희가 송전탑을 대표해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분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저희가 찬사를 보냈으면 합니다.
서상민 안 그래도 총회 때 부산지부장님인 변영철 변호사님이 우리가 TF팀을 안 만들어서 상을 못 받았다고, 그런 질투어린 시선이 있었잖아요. 미리 선견지명을 가지고 TF팀을 기획한 것인지, TF팀을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시죠.
박경찬 제가 할게요. 제가 원죄를 지고 있으니까. 밀양 송전탑 관련해서 몇 번 가보니까, 본부에서는 대구, 부산, 경남지부에서 맡아서 해 주기를 요청했었는데 밀양 같은 경우에는 부산지부하고 경남지부가 잘 맡아서 해주셨고 그래서 대구에서는 청도 쪽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지부차원에서 팀을 구성하면 정보공유도 하면서 좀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서상민 풀네임도 박경찬 변호사님이 직접 지으셨잖아요. 이름은 왜 그렇게 길게 지으신 거에요?
박경찬 정확한 소속을 밝히기 위해서(웃음). 대구 지부는 아무 일도 안하느냐 그런 말씀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대구지부에서 인권센터를 만들어놨고 그 인권센터에서 청도 송전탑 TF팀을 구성했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어서 이름을 아주 길게 지었습니다.
서상민 TF팀의 주요활동 이런 것들 설명해주실까요? 김도현 변호사님.
김도현 주요활동으로는 크게 민사와 형사가 있지 않겠습니까. 민사는 공사중지가처분을 저희가 낸 적이 있고, 상대방 한전 측에서 제기한 방해금지가처분, 대체집행신청, 이행강제금소송 이런 것들에 대해 대응을 했는데 민사는 일단 일단락되면서 형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40건의 소송을 전담한다고 했는데, 병합 사건 같은 게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다고 알고 있구요. 다섯 명의 변호사들이 형사사건을 나눠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박경찬 그런데 진짜 저는 법정에 들어가잖아요. 다른 변호사님들이 제가 엄청 잘 되는 줄 알아요. 계속 나오니까(웃음) 심지어 국선도 아니고 다 사선이야. 그것도 형사사건을. 그런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민사사건은 끝난 건 아니고 가장 큰 부분, 이행강제금 집행문 부여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을 이승익 변호사님이 하고 계시는데, 지금 잠을 못 주무셔서 손까지 떨린다고 스트레스 받고 이래서.
이승익 그렇진 않습니다(웃음).
서상민 TF팀 활동이 초반에는 박경찬 변호사님, 이승익 변호사님, 김도현 변호사님 이렇게 세 분이 먼저 활동을 하시고, 이주현 변호사님하고 하성협 변호사님은 뒤에 들어오셨잖아요. 청도 송전탑 사건이 다른 사건하고 다른 점, 특이한 점이 있으면 이야기 해주세요.
이승익 그 전에 먼저 두 분 변호사, 박경찬 변호사하고 김도현 변호사가 이 일을 담당했고, 제가 나중에 좀 뒤늦게 합류했죠. 지원한다는 의미로 합류했고. 그리고 나머지 두 분 변호사님은 좀 늦게 참가한 거죠.
서상민 그런가요? 그런 시간차까지는 제가..
박경찬 두어 시간 정도 시간차가 있었어요(웃음).
이승익 제가 기억에 제일 남는 것은 초반에 구속영장실질심사를 했었는데, 실질심사 단계에서 두 번 정도 영장이 기각됐던 것 그 일이 제일 기억에 남고. 마을주민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큰 일 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서상민 그때가 대체집행 들어올 때였나요?
박경찬 공사재개되기 전이죠. 되기 전에 우리가 공사중지가처분을 제기했을 때 즈음이죠.
이승익 그때 쯤 해가지고 체포 되어서 대부분 사람들이 구속된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영장이 기각됐으니 주민들의 입장이라든가 다른 분들도 대단히 큰 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박경찬 제가 하성협 변호사님께 여쭤볼 것이 있는데, 제가 TF팀 사건이 많아서 도와달라고 말씀을 드렸을 때 흔쾌히 도와주시겠다 하셨는데 그때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말씀을 듣고 싶었어요.
하성협 이게 뜻 깊은 활동이니까 어떻게든 제가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하게 됐죠. 사건이 너무 많아서 힘드신데 같이 갈 사람은 적고 하니까 어떻게든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했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되어 미안합니다.
박경찬 아닙니다. 진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상민 아직 끝나려면 멀었는데 마무리를 하성협 변호사님이 다 하시는 것 아니에요?(웃음)
박경찬 저희 보따리 이만큼 지고 있거든요. 앞으로도 같이 질 수 있는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성협 계속 지시면 되겠습니다(웃음).
서상민 진짜 생각해보니까 그러네요. 세 분은 이렇게 사건이 많을 거라고는 예상 못하셨겠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맡으셨으니까 계속 하시더라도 뒤에 오신 두 분, 이주현 변호사님하고 하성협 변호사님은 이렇게 사건 많은 거 알고 오셨잖아요.
이주현 처음에 제가 청도 송전탑 TF팀이 있다는 사실을 민변 대구모임에서 들었는데 서울에 있을 때부터 밀양 사건에 대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경찬 변호사님 사무실에 사건을 받겠다고 갔더니 A3용지에 엄청 크게 표로 정리한 사건 내역을 떡하니 펼치시는 겁니다. 아,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 생각 했었죠. 제가 맡았던 사건은 피고인 두 명에 대한 형사사건이었는데 그 두 분이 아무런 전과가 없었어요. 심지어는 수사경력도 전혀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내가 해서 받을 수 있는 건 선고유예겠다 생각이 들어서 의견서도 열심히 쓰고, 기사 중에 괜찮은 거 찾아서 본문에도 넣고 이런 식으로 나름 노력을 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판사님께 두 분 다 범죄경력, 수사경력이 없으니까 최대한으로 선처를 해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법정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결심하는 날 판사님께서 다른 송전탑 사건들과 형평을 고려해서 선고를 하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구형은 벌금 200만원이 나왔는데, 선고가 벌금 100만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판사님이 법정에서 했던 그 말이 저로 하여금 되게 고민하게 만들었어요. 형평을 고려한다 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판결이 될 수 있는가. 형사처벌이라는 것이 한 개인이 잘못한 범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인데 이 청도 사건 전체 형평에 맞추어 벌금형을 선고 하는 것이 정의로운 판결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르게 생각을 하면 법원이 일관되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유죄로 보고 이 정도의 형벌은 주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좀 고민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박경찬 저는 변호사님이 이런 고민을 하는지 모르고 그 정도면 정말 고생하셨다 그랬는데 형평을 고려한다는 게 그런 문제가 또 있을 수 있네요.
서상민 모범위원회상 추천을 받을 때 첨부자료를 달라고 하는데 하도 경쟁률이 치열하다고 해서 제가 사건 진행내역을 뽑아서 프린트해서 보내드렸었거든요. 진행하고 있는 사건이 40여건이다 그러니까 거기에 높은 점수가 있었나봐요. 그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시더라고요. 다른 지역 변호사님들이.
김도현 그것도 아직 진행형이죠. 40건은 지금 현재 상태고 지금 청도 주민들이나 이런 분들이 가만히 계신 게 아니고 도청에도 가시고 이렇게 하니까는 계속 병합이 되든지 아니면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나중에 최종 보고를 할 때는 아마 40건 이상이 될 것 같습니다.
박경찬 그런데 또 중요한 게 TF팀 일하면서 이렇게 다 같이 모인 자리가 처음이잖아요. 사무실에서 모이는 것 말고. 지방 같은 경우에는 어떤 이슈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건을 한꺼번에 해보는 경험을 하기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대구 지부가 청도 송전탑 사건에서 이렇게 대처해봤다는 경험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상민 이제 변호사님들 개인사에 대해서 좀 여쭤볼게요. 먼저 이주현 변호사님, 연수원 수료하시고, 그 힘들다는 민주노총 법률원에 계셨다가 대구로 내려오셨잖아요. 변호사님 처음 오셨을 때 대구지부에서 다들 이런 친구가 있을 수 있냐, 또 대구지부에 여성변호사님이 적잖아요. 그래서 엄청 기뻐하시더라고요. 특별히 민주노총 법률원에 있다가 다른 법무법인에 가시거나 서울에서 개업을 하지 않고 대구에 내려오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이주현 사실 저는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2년 정도 일을 하다가 다른 법무법인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짧게. 그러고 나서 조금 쉬다가 대구에 내려오게 됐는데, 대구 내려오겠다고 결심하고 짐 싸고 내려온 것은 1달도 안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려온 계기에 그렇게 거창한 이유가 있지는 않습니다. 부모님들, 그리고 친척분들 다 대구에 살고 있고, 그래서 언젠가는 대구에 내려가고 싶다라고 생각만 해왔었죠. 그러다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로 일을 하는 것이랑은 다르다는 말을 듣기도 해서 일단은 개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는데, 그러면 어디서 개업을 할까. 서초동을 가야하나 아니면 불광동의 시장에다가 개업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고민스러울 것 같으면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대구를 그냥 좀 더 일찍 내려가자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느끼기에도 그렇고 확실히 대구 변호사 수가 인구대비해서는 너무 적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박경찬 그런 기밀을 말씀하시면 안됩니다(웃음). 민변 변호사님들 내려오실 수 있어요.
서상민 저는 많이 오시는 걸 바라는데. 변호사님들 안 그러신가 보죠?
박경찬 시장성을 위해서는 비밀을 지켜야 해요.
이주현 네, 그렇게 해서 대구에 사무실을 알아보고 이사도 하고 그렇게 해서 내려오게 된 거고 굉장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더 일찍 올 걸, 생각도 들었습니다.
박경찬 저는 하성협 변호사님이 궁금합니다. 사실 각자 신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
서상민 하성협 변호사님은 민변 가입으로 따지면 제일 막내시잖아요. 변호사를 하신지도 얼마 안되셨죠?
하성협 제가 변호사를 꿈꾼 것 자체가 30대가 되어서니까요. 그 전까지는 아예 변호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도 못했죠.
서상민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죠?
하성협 사실 저는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집에서 가라고 해서 대학은 그냥 경제학과를 갔어요. 저는 대학교도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래서 공부도 안하고 솔직히 이야기 하면 신부님이 되고 싶었는데..
서상민 말씀하신거로는 대학활동을 제일 열심히 하신 것 같던데. 89년도에 돌을 던졌다 이런 얘기도 하시고.
박경찬 일어나니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고.
하성협 진짜 대학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집에서 하도 가라고 하니까. 대충 시험치고 들어갔는데.
서상민 정말 이건 자랑이신데요. 대충 시험치고도 경북대를 들어가시고.(웃음)
하성협 아니 그런 건 아니고..신부님을 안 하면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대중음악 평론가 이런 거 하고 싶었는데, 예전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사내가 음악하는 것은 허용 안했으니까. 아예 그런 것은 꿈도 못 꾸고. 경제학과 나와서 그냥 금융계통에 취직하게 됐는데 입사한 첫 날, 이건 내 길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그때 지금의 아내랑 연애 중이었거든요. 아내가 들어가면 3년은 있어라 그래서 알았다 3년만 있을게. 그래서 3년 딱 되고 바로 나왔어요. 그때가 결혼하고 3개월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무얼 할까 처음으로 고민해봤어요. 나이 서른 살 돼가지고. 고민하다가 변호사를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사법시험 공부를 할까, 법대를 들어갈까, 법학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 일단 법대를 들어가자. 그래서 재수학원에 들어가서 2년 공부했죠. 그래서 서울대 법대 00학번으로 들어가게 됐고. 뭐 그렇게 흘러 왔던 겁니다.
이승익 같이 락밴드나 합시다.
하성협 아, 진짜 하고 싶어요. 내가 예전엔 기타도 쳤어요. 나는 앞으로라도 만약에 누가 라디오 디제이 시켜준다고 하면 하고 있는 거 당장 그만두고 할 수 있어요.
박경찬 그러면 제가 하나 질문. 금융이나 뭐 이런 쪽 소송에 많이 관심을 두고 계신가요?
하성협 별로 관심 없습니다(웃음).
박경찬 민변은 그러면 어떻게 가입을 하신건가요?
하성협 우리가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대학 다닐 때 그때 민변이 생겼다 아입니꺼. 굉장히 동경을 가지고 있었죠. 그때는 변호사 할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혹시라도 변호사가 되면 정말 민변에 들어가고 싶다. 이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변호사가 되고 나니까 바로는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내가 민폐 끼칠 것 같아서. 민변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같이 속세에 찌든 사람이 민변에 들어가서 물 흐리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 때문에 들어가길 망설였는데, 박경찬 변호사님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서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들어가자. 꿈을 이룬 거죠. 음악을 하고 싶은 꿈은 못 이뤘지만 변호사가 돼서 민변에 가입하고자 했던 꿈은 이뤘으니까 저는 제 꿈을 이뤘다고 봅니다.
이주현 저도 하변호사님 말씀 듣다보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저 대학교 다닐 때 광화문 집회 같은데 많이 나갔었는데 좀 큰 집회 가면 대오 안에 항상 민변 깃발이 있었습니다.
서상민 깃발이 있어요? 서울 본부에?
이주현 네, 특히 제가 고시생이던 2008년에는 명박산성이 광화문에 지어지던 그때였는데, 제가 신림동에서 공부하다가 진짜 너무 못 참겠어서 독서실을 나와서 대학교 동기들이랑 같이 광화문을 갔는데 그때도 민변 깃발을 딱 찾은 거에요. 그래서 민변 깃발 밑에 걸어가시는 분들 뒤에 따라가면서 아, 나도 내년에는, 그때가 2차 시험 공부할 때였기 때문에, 나도 내년부터는 이 깃발을 따라 나오리라.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저도 정말 민변에 가입하는 꿈을 이룬 거네요.
서상민 대구에도 깃발 하나 만들어야겠네요. 이승익 변호사님, 여기 다섯 분들 중에 제일 선배님 아니십니까? 사무국장까지 하셨잖아요. 청도 TF팀 다섯 분 중에 누가 팀장님이냐고 하면은 왠지 이승익 변호사님일 것 같잖아요. 나이나 연차나 여러 면에서.. 이승익 변호사님이 청도 송전탑 TF팀에서 또 제일 힘든 민사 사건을 하고 계시고. 그런데 이승익 변호사님에 대해서는 제가 들은 바가 없어요. 어떻게 민변에 처음 들어오시게 된 건가요?
이승익 민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사시 공부하는 과정에서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님 관련한 책인데요.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그걸 읽고 조영래 변호사님이 하신 일들 그리고 민변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민변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됐고, 운이 좋게 시험이 돼서 민변 대구지부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서상민 가입하신 지 6년? 7년 이렇게 되셨다는 거죠? 저는 6년차부터가 제일 좋아요.
하성협 왜요?
서상민 회비가 다르거든요(웃음). 6년차부터 회비가 오르기 때문에 재정에 도움이 되지요.
박경찬 내년에는 생각 잘 해야지. 올 연말에.
하성협 탈퇴할지 안 할지(웃음)?
서상민 지금 대구 지부는 노동 관련은 김도현 변호사님이나 구인호 변호사님, 또 노무사 경험 있으신 분들이 계속 상담을 하시고 하는 식으로 일을 약간 분담해서 하잖아요. 변호사님이 민변 들어오셨을 때는 분위기가 어땠어요?
이승익 사건 수도 적었고, 실제 활동하시는 분들도 적었죠. 지금은 실제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스무 명이 넘으니까 지금하고 그때하고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는 거죠. 지금은 어느 정도 체계화가 되어서 인권센터도 꾸려져서 사건도 배분되고 그런 식인데, 옛날에는 주먹구구로 지부장님이나 국장이 지정하는 형식으로 담당자를 정했죠. 지금은 많이 발전한 거죠.
서상민 사무국장님 할 때는 어떠셨어요? 여기 지금 사무차장님 계시네요.
박경찬 제 2차장입니다(웃음).
서상민 본부에는 국장까지만 기재된다는.. 그래서 안타깝다는..
이승익 좋아요. 경찰에서는 국장까지만 하고 회원은 그냥 이름만.
박경찬 시경에서는 제 이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게 있었어요. 어느 변호사님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디 경찰서 계시는 분이 상담을 왔다가 저희 법인에 제 이름 있는 것을 보고 안 하셨대(웃음). 이 변호사님 계시는 곳이냐고. 이 변호사님 인권변호사에요? 묻더라고.
서상민 박경찬 변호사님 입회원서에 관심분야를 환경이라고 쓰셨어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청도 송전탑 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활동인가요?
박경찬 제가 사실 기억이 없어요.(웃음) 가입할 때 어느 변호사님인지 모르겠지만 밥을 한 끼 사주시고 저희 사무실에 커피를 마시러 꽤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그때부터 입회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냐. 하고 며칠 지나서 입회원서가 왔고요, 입회원서에 뭔가를 적어야 한다고 해서 적었는데, 기억은 잘 안나요. 근데 아마 이렇게 적었다고 하면 제가 자연과학이나 공학에 관심 있거든요. 환경보다도 재생에너지 이런 거에 관심 많아요. 저는 고등학교까지 이과였습니다. 저도 대표적인 마마보이라서 어머님이 법대 가길 원해서 법대를 간 거거든요. 송전탑 사건은 제가 집에서 한번 이야기했어요. 밀양 갔다 와서 이야기 하니까 집사람이 보통은 오지랖 넓은 짓 하면 별로 안 좋아 하는데, 송전탑 사건 관련해서는 발끈하더라고요. 이 사람들 제정신이냐고 하면서. 아파트 옆에 송전탑 세워봐라. 가만 있겠나.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면서 그래서 제가 그러면 내가 함 한다 해서 TF팀을 꾸려보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서상민 아마 그게 어떤 나비효과로 인해서 송전탑 TF팀을 하게 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지만 김도현 변호사님, 사실 인권센터에 웬만한 임금상담이라든지 이런 노동법 관련한 상담은 거의 다 하십니다. 김변호사님은 작년 3월에 개업하시면서 바로 민변에 가입하셨는데.
김도현 좀 불운의 아이콘이죠. 세상을 좀 알고 민변에 가입했어야 되는데, 연수원 퇴소하기 전에 계속 대구 민변을 기웃거리다가 변호사의 등록과 동시에. 기웃기웃 거리다가(웃음).
서상민 김도현 변호사님은 노무사 자격증도 있으신데 노무사 자격증은 언제 따신 거에요?
김도현 노무사 자격증을 따게 된 이유는 사법시험이 늦게 돼서,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제가 노동법 관심이 있어서 대학원에서도 노동법을 공부하고 이랬는데, 계속 사시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래선 안 되겠다, 2트랙으로 가자. 그래서 공부를 같이 했습니다. 좋게 포장할 수도 있으나, 일단 노무사가 시험이 먼저 됐고, 노무사 되고 나서 잠깐 일 좀 하다가 마지막에 운 좋게 43회로 시험이 돼서 연수원 졸업하고 대구에 내려왔고 학교 때부터 친하신 분들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가입을 해야 하는 거구나. 이렇게 해서 가입을 한 것 같아요.
박경찬 저하고 김도현 변호사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를 사시 2차 치면서 보냈어요. 매년.
김도현 됐다 그런 말 하지마라.
박경찬 요런 것도 해줘야죠. 궁금해 하잖아요. 사람들이.(웃음)
서상민 특별히 노동 분야에 관심을 가지신 이유가 있나요?
김도현 학부 때부터 제가 노동법을 좋아했고, 성적도 잘 나왔고, 공부를 하다보니까는 노동법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도 됐고, 그래서 대학원에 가서도 노동법을 전공하게 됐고, 노동법을 전공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노무사도 하게 됐고, 변호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노동전문이라고 되어 버렸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물 흐르듯이 흘러 간 겁니다.
서상민 다섯 분이 모두 대구가 고향이긴 하지만 요새는 지방 출신들도 서울에 직장을 잡고 사는 경우가 많은데 대구로 내려와서 일을 하는데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는지.
김도현 망설임이 없었느냐… 서울에 계시는 분들과 지방에 연고가 있는 사람은 생각이 다른 거 같아요. 대구가 고향이라 당연히 대구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고 망설임 같은 건 없었습니다. 망설이지 않았냐는 질문이 오히려 좀 의아스럽고 그렇습니다.
이주현 제가 대구에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그 애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주변에서 엄청 놀라는 거예요. 계속 서울에서 살았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왜 내려가려고 하느냐고 해서. 한 순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상민 민변 활동을 하기에는 아마 대구가 다소 척박한 거 아닌가. 그런데 다들 대구에서 민변 변호사를 하겠다고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주변에서 의아하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대구는 좀 더 하기 힘들지 않나.
이주현 제가 개업을 하고 집에 있던 책들을 사무실에다가 갖다 놓았는데 제 방에 오셨던 어떤 변호사님께서 의뢰인들이 찾아오는 변호사 방에 정치적인 색깔이 묻어나는 책을 꽂아 두는 것은 웬만하면 좀 피하는 게 좋겠다. 이런 조언을 하시더라고요. 물론 개업한 변호사 입장에서 내가 하고 싶은 소송 사건을 찾아서 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일정부분은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나의 일과 역할과 이런 것들을 만들어 주는 부분도 있어서 굳이 그 조언을 들었다고 해서 책을 치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대로 꽂혀져 있지만 실제로 대구에 오니까는 그런 조언도 듣게 되더라고요.
김도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찾아오시는 의뢰인들이 아, 민변이다 이래서 수임을 안 한다. 그런 거는 아니지 않아요? 민변 활동을 하기가 척박하다는 것은 대구의 정치적 성향이나 이런 것을 봐서는 어렵다는 거지 개인적인 영업활동이라든지 송무활동이라든지 변호사 활동을 하는 데에 크게 장애가 된다. 그렇지는 않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아니십니까?
박경찬 아! 근데 저도 그런 일이 한 번 있었어요. 지난 번 대선 때 개인적인 모임이 있는데, 다들 친하니까 그날 모임에서 누구를 찍었는지 묻기 시작한 거에요. 누군가가 대구에서도 20%정도 민주당을 찍었다고 하더라. 누구냐? 하면서 농담 삼아 이렇게 묻고 있는데 다들 자기는 안 찍었대. 그런데 이제 나한테 묻는 거야. 박변호사는 찍은 거 아니에요? 예, 저 2번 찍었습니다. 순간 5분간 분위기가 아무 말이 없는 거야. 조용히.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한테 사건을 안 가져오느냐. 자기들이 문제 생겼을 때. 다 가져와요. 그런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민변 변호사라고 그러면은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그래도 사건을 좀 신경 써서 잘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그런 건 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승익 선배 변호사님들, 김준곤, 송해익, 그리고 최봉태 변호사님 그 분들이 활동하시던 그때는 사실 좌파 내지는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약간 그런 소리들이 있는데, 그때보다는 덜 하겠죠. 그때는 그만큼 힘들었다는 거고. 지금도 대구는 여전히 어려운 분위기도 있지만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민변 변호사인 것하고 사건 수임하는 것하고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잘 되고 안 되고 이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김도현 정확하게 결론을 내보면, 민변 활동은 척박하다. 그러나 민변 변호사라고 해서 변호사의 기본적인 변론활동을 하는 데 마이너스를 받지는 않는다.
서상민 제가 간사로 들어와서 느낀 건 아무래도 서울 변호사님들 활동하는 것보다, 아까 말씀하셨지만 광장에서 깃발을 나부끼며 이렇게 활동하잖아요. 대구는 그런 류의 활동은 많이 안하지 않습니까.
이승익 서울 본부 같은 경우는 상근 변호사가 있잖아요. 상근 간사도 많고. 그래서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고요. 대구는 상근 간사가 재작년에 생겼고, 그 전에도 있었다 없어졌거든요. 그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요. 그만큼 수요도 잘 안 됐고. 그래서 서울 본부와는 활동 방향이나 이런 것들이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지요.
서상민 이제 향후 변호사로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들어보고 마치면 될 것 같습니다. 민변에서 하고 싶은 활동이라든지.
이승익 변호사 8년차인데, 해보니까 내가 변호사로서 잘했는지, 대충 시간 때우기로 했는지 그런 걱정되는 부분도 있고, 좀 반성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변호사의 길을 가는 것인지 좀 생각해보고 그에 따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주현 제가 대구로 민변 소속을 이전했다라는 이야기를 저희 동기 변호사한테 했더니 제 동기가 저한테 대구 민변에서는 어느 위원회 소속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서울에서는 활동을 많이 하진 못했지만 여성위원회, 그리고 노동위원회 소속으로만 있었는데, 사실 대구는 인원도 적고 별도의 위원회를 꾸리고 세미나를 열고 할 만큼의 여력이 되지는 않아서 위원회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이야길 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구 민변에도 위원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서상민 지금 첫 위원회에 들어오신 거에요. 모범위원회상 받으셨잖아요.
이주현 청도팀이 첫 위원회에요? 그럼 다행이네요.
서상민 앞으로 이주현 변호사님이 대구지부에서 여성인권위원회나 노동인권위원회를 만드시면 되겠네요. 그런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도현 포부가 만드시겠단 뜻인데요.
이주현 네, 그런 걸로 하고,(웃음) 개인적으로는 서울에서 나름 열심히 살았던 그런 경험들이 지금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굉장히 많은 보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지낼 때는 하루하루 살기 바빠서 내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잘 생각을 못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대구에 내려와서 이제야 다시 생각을 하니 참 소중한 기회였고 경험이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서울에서 치열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파이팅 하겠습니다.
김도현 일단 대구지부가 어떻게 활동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소망이 있다면 빨리 청도 사건이, 언제 마무리 될지는 모르겠지마는 빨리 사건이 마무리 돼서 이 TF팀이 명예롭게 해산을 하는 날을 기다려보겠고, 해산하고 나면 민변에서야 여력이 닿는 데까지 또 맡은 사건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고. 이제 2년 정도 변호사 한 것 같은데 계획이야 뭐 있겠습니까. 그냥 열심히 하다보면 길이 있겠고, 답이 안 있겠습니까.
박경찬 민변 대구지부에서는 청도사건을 일단 마무리를 잘 해야겠죠. 마무리 잘하고 이 청도 TF팀에서 얻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발판삼아서 제가 이주현 변호사님 위원회 만드는데 적극 동참하도록 하겠습니다(웃음). 그런데 저는 민변 활동하면서 진짜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경찰서 가는 것도 두렵지 않고 피의자 신문 참여하는데 이제 농담 따먹기 할 정도도 되고.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민변 활동 잘하고 돈 많이 벌고, 그런 변호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