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28차 총회 수상자 김기남, 박종훈 변호사 인터뷰.

2015-06-26 49

 

이번 인터뷰는 모범회원 인터뷰 2탄! 김기남 변호사와 박종훈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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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자기 소개로 시작할까요? 김기남 변호사님부터.

 

김기남 저는 국제연대위 간사변호사로 있는 김기남입니다. 반갑습니다.

 

박종훈 이전 인터뷰를 봤더니 이렇게 했더라구요. 저는 변시 3회 출신이고 교육청소년위원회에서는 간사 변호사를 맡고 있고, 그리고 출판홍보팀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동대문에서 개업해서 있는 박종훈 변호사라고 합니다.

 

김지미 두 분은 이번 총회에서 모범회원과 신인모범회원상을 수상을 하셨는데, 방금 김기남 변호사님 소개를 듣고 두 분의 공통점이 떠올랐는데 두 분 다 위원회에서 간사변호사를 맡고 계시다는 거예요. 위원장이 대외적으로 위원회를 대표한다면 실무라든지 가장 일이 많은 게 간사변호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국제연대위의 간사변호사로서 국제연대위는 이런 일을 했다는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김기남 자기자랑 하라는 이야기죠? 다른 위원회는 위원장이 대외적인 일을 하시고 실무는 간사나 동료변호사님들이 같이 하는 시스템이라면 저희는 위원장님도 실무를 같이 하시면서 수평적인 관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들 현직에 있는 분들이다 보니까 일정이 바쁘고 저희 같은 경우는 외국에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일단 가능한 사람이 최대한 열심히 하고 의사결정이나 이런 것들도 집행위 구조 내에서 유기적으로 결정되는 그런 구조인 것 같고요, 그렇다보니까 저는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주어진 일들을 조금씩 한 거 뿐이예요. 사실 일을 열심히 안해서 위원장님께 몇 년 동안 미안했었는데 최근에 제가 시간적인 여유가 예전보다는 생겨서 변호권 TF라든가 정당해산이라든가 자유권규약 대응 문제라든가 이런 활동에 예전보다는 조금 더 정상적인 업무를 했던 그런 이유 때문에 힘내라고 모범회원에 추천해주신 것 같습니다.

 

김지미 김기남 변호사님은 총회에 참석을 못해서 정식 수상소감을 저희가 듣지를 못했어요. 방금 말씀하신 걸 수상소감 대신으로 이해를 해도 될까요?

 

김기남 네. 감사합니다.

 

김지미 이번엔 박종훈 변호사님.

 

박종훈 제가 수상소감에도 말을 했지만, 위원회 중에서도 공룡위원회가 있고 소규모 위원회가 있거든요. 교육위는 밖에서는 오해를 많이 하세요. 겉으로 보기에는 위원수가 많기 때문에 잘 되고 있는 것 아니냐. 또 교육위라고 말하면 뭔가 엄청난 것 같고. 그런 이미지를 이용해서 제가 신입회원을 많이 유치하긴 하는데 신입회원들이 한 번 나오면 다신 안 나오는..(웃음). 근데 제가 평소에 징징대기는 했지만 상패에 그런 게 적혀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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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뭐라고 적혀있었죠?

 

박종훈 ‘위원회 신입회원이 전무한 가운데서도..’(웃음). 제가 그것 때문에 상을 받고도 어디 가서 보여주면서 자랑을 못하겠어요. 큰 위원회와 작은 위원회를 비교해보자면 큰 위원회는 젊은 피들이 많이 들어온단 말이죠. 그러면 분위기에서나 활동력에서나 큰 추진력을 받는데 교육청소년위원회 같은 경우에는 그런 부분이 몇 년 동안 끊겨있었어요. 저랑 가장 가까운 기수가 강영구 변호사님 정도니까. 물론 그 사이에 한두 분 계셨지만 개인적 사유와 아까 말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나가시기도 하고. 그 가운데서 간사 변호사의 역할이라는 것이 선배 변호사님들의 활동의 촉매 역할을 하고 한편으로는 신입회원들을 데려와서 같이 활동을 하고자 하고 잠들어 있던 위원회를 활성화시키는데 최대한 노력을 했다는 그 점이 고려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지미 작년부터 올해까지 변호사 징계나 정당해산 같이 국제사회에 알려야 할 이슈들이 있었고 국제연대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런 일들은 기존에 국제연대위원회가 유엔을 상대로 민변의 활동을 알린다던지 한국의 인권상황 등에 대해서 보고서를 낸다던지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활동이었을 것 같은데, 관련해서 지난 1년 간 국제연대위의 활약상에 대해서 자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릴게요.

 

김기남 저한테만 이런 거 질문하시는 거죠? 어려운 것 같은데(웃음). 예전부터 국제연대위가 유엔 인권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활동들은 꾸준히 해왔었고요. 다만 최근에 우리 사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그런 부분이 좀 두드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국내에서 어떤 인권침해 사안이 발생했을 때 유엔에 특별보고관 내지는 특별 절차를 활용한 진정을 한다든가 이런 부분들이 있고. 또 하나는 개인 진정이라고 해서 국내에서는 안되니까 국제적인 인권기준에 의해서 이게 침해다 아니다 라고 하는 것들을 확인 받는 거죠. 그리고 조약기구에서 국가심의, 유엔 총회의 인권이사회에서 하는 국가 정례 검토라고 해야 하나요? 이런 부분들에서 조금씩 개입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는데, 최근에 말씀드렸다시피 변호사 징계라든가 정당해산이라든가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 사안이다 보니 조금 더 열심히 했고 특히 개인진정 같은 경우에는 그 동안은 할 만한 사안들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계기들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좀 드러난 것 같습니다. 제 요지는 예전부터 잘 해왔다(웃음).

김지미 두 분은 조금은 특이한 이력이 있다는 점도 공통점인 것 같아요. 우리 회원들의 전형적인 이력은 법대 나와서 사시를 보거나 로스쿨을 간 경우인 것 같은데 김기남 변호사님은 학부는 법학을 전공하셨지만 대학원에서 국제평화학을 전공하시고 조지워싱턴대 로스쿨 졸업 후에 미국변호사 자격증을 따서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신 케이스고, 박종훈 변호사는 사범대 출신이시죠? 박종훈 변호사님부터 로스쿨에 가서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과정,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좀 말씀을 해주시죠.

 

박종훈 이건 짧게 못하겠네요. 보통은 짧게 한다고 하는데, 제 인생이잖아요? 민변에서 뭘 잘했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제 인생 제가 말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웃음). 원래 제가 경남 마산 출신인데 마산이 굉장히 거칠어요. 만남을 욕으로부터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웃음). 제가 지금은 이렇지만 보기보다는 심성이 고운 학생이었어요. 소심하고, 어디가면 말도 잘 못하고. 어릴 때 아버지가 엄하셨거든요. 그러다보니까 목소리가 작고 착한 학생이 항상 손해를 보는 거에요. 초중학교때는 예를 들면 축구를 하더라도 거기에는 오프사이드 이런 게 없잖아요. 그러면은 항상 싸움 잘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 공격에 가있고 저 같은 쩌리들은 우리 편 골대 쪽을 지키고 있는 거에요. 지네들은 실컷 놀다가 골을 넣으면 세레모니를 하고 우리는 골을 주면 더럽게 욕을 먹는 거죠. 어릴 때부터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선생님에게 기대는 게 많았던 것 같아요. 좀 해주지, 왜 이것을 못 보지? 특히 우리 부모님이 교육에 관심이 전혀 없었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이거 지어낸 게 아닙니다- 매일같이 비를 맞고 들어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부모님은 나오지 않으셨어요.

 

김지미 교육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들한테 관심이 없는 거 아닌가요?(웃음)

 

박종훈 가끔은 제가 물어볼 때가 있었어요. 저 다리 밑에서 주어온 거 아니에요? 항상 우산쓰고 기다리시는 부모님들 보면 부러웠어요. 입학식도 저 혼자 갔어요. 혼자 쫄래쫄래 갔다가 그 어린애가 축구공을 맞아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 뒤로 제가 축구를 안 좋아하게 됐어요. 아 웃으시면 안 됩니다. 강렬한 기억이에요. 초등학교 1학년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그렇게 지내다보니까 제가 문제학생처럼 됐어요. 학교를 맨날 지각을 하는 거죠. 머리를 1주일에 한 번 감고 갔던 것 같아요. 옷도 맨날 할머니 옷을 입고.

 

김기남 할머니 옷을 입었다고요?

 

박종훈 네. 사실 확인서 제출할까요? 그렇게 어릴 때부터 너무 관심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항상 새벽에 들어오시고, 어머니가 관심을 두시는 건 밥 먹이는 거. 밥 안 먹으면 바늘로 찌르셨거든요(웃음). 진짜로. 저희 어머니가 요리를 너무 못하셔서 어린 마음에 제가 “먹기 싫어” 이러면 바늘로 찔러서 먹게 했어요(웃음). 저는 고문에 대해서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밥도 억지로 먹이고 옷은 또 그런 거 입히고, 도시락을 싸 가면 항상 반찬은 인스턴트 식품이었어요. 용가리너겟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면 친구들이 부러워했어요. 너희 집 잘 사나보다.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진실은 어머니가 요리를 못하셨던 거. 밥도 아직도 물을 못 맞추세요. 죽이 됐다가 딱딱하다가 그러거든요. 너무 사족이 길었는데.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김기남 변호사에게)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김기남 재밌어요. 계속하세요. 아직 초등학교를 벗어나지 못했네요.(웃음)

 

박종훈 제가 초등학교를 좀 오래 다녔거든요. 가방끈이 길어서(웃음). 초등학교를 겨우겨우 마치고, 정말 문제아였어요. 너희 부모님 뭐하시냐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왜냐하면 아이가 맨날 옷은 넝마 같은 것을 입고 오는데 지각을 맨날 하니까요. 조례하고 있는데 학교 들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얼마나 창피한지 모르시죠? 전교 학생들 다 모여서 교장 선생님 훈화하고 있는데 교문으로 들어가면 다 보이잖아요. 집에서는 전혀 터치를 안하니까 숙제는 한 번도 안 해가고, 선생님은 혼내고. 그런데 초등학교 공부라는 게 별로 안 어렵잖아요. 성적이 웬만큼 나오니까 선생님이 의심을 하는 거에요. 컨닝을 한 거 아니냐. 그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를 들어갔더니, 중학교는 정말 지옥 같은 거죠. 이 학교가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그런 학교 같은 거에요. 제가 이런 얘기하면 다 농담이라고 하는데 정말 학교폭력을 많이 봤어요. 복도에 피가 흥건한 것도 몇 번이나 봤고요.

 

김지미 중학교 때요?

 

박종훈 네. 어깨를 툭 치면 싸움이 붙잖아요. 강냉이를 턴단 말, 저는 진짜 봤어요. 이가 다 빠지는 것도 봤어요. 코뼈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고요. 그렇게 학교가 굴러가는데 도대체 왜 그런가. 물론 선생님들도 학생들을 많이 때렸어요. 또 학교가 오래돼서 선생님들이 대부분 노인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다보니까 통제가 안 되고 가끔은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건 아닌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보면 최민식이 나오기 전까지 그 전 교사는 나이 많은 교사인데 엄석대가 반을 통솔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단 말이죠. 잘 돌아가니까. 이 학교도 그랬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잘 돌아가요. 이런 모습이 중3때 절정에 이르렀는데 반장이 공부를 되게 잘했어요. 근데 얘가 자기 공부 안 되면 애들을 패는 거에요. 그리고 그 뒤에는 소위 말하는 학교짱이 비호를 하고 있고. 그런데 중3때 선생님은 1년이 지나도록 그걸 모르는 거에요. 정말 몰랐어요.

그러다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얘가 학생회장 선거를 나갔는데 떨어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눈치 없는 어떤 선생님이 와서 참 이 반은 단합이 잘 안 된다고. 이 반에서 표가 잘 안 나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길 해버린 거에요. 그때부터 어땠겠어요. 지옥이 펼쳐졌죠. 지금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잖아요. 민중들이 뭉쳐서 왜 못하느냐. 저는 그때부터도 그런 걸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뭔가 시스템이 안 되어 있고 위에서 의지가 없으면 뭉칠 용기가 안 생기는 거에요. 같이 일어나주지 않으면. 그런 중학교를 지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니까, 또 고등학교는 정반대로 공부만 시키는 거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기숙사에 가둬놓고 집에도 못가는 거에요. 토요일 저녁 되면 집에 가고, 월요일 아침이면 학교에 오고. 그렇게 학창시절이 너무 재미가 없다가 고2때 만난 선생님이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줬는데, 처음 상담을 하는데, 보통 첫 상담에서는 성적이 어떠냐 부모님은 뭐하시냐 이런 걸 물어보는데 이 선생님께서 ‘등하교 길에 오다보면 어떤 생각하느냐’, ‘인생에서 가장 환희에 찬 순간이 언제였느냐’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때 대답도 기억나요. 1999년에 롯데가 플레이오프 올라갔을 때라고 대답했던 것 같아요. 그 선생님 영향을 받다보니까 꿈이 생긴 거죠. 선생님이 또 반 통제를 잘하셨어요. 소위 말하는 문제 아이들을 잘 이끌었고 시스템을 되게 잘 만들었거든요. 이 선생님처럼 살면 저 같은 학생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겠다. 그래서 교사가 되고 싶어서 대학을 갔는데, 막상 사범대를 왔는데,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짧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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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드디어 사범대를 왔어요(웃음).

 

박종훈 이제 다 끝났어요. 법대 출신들은 알겠지만 법대 갔다고 다 정의감에 불타는 게 아니잖아요. 사범대 왔더니 대부분은 착하니까 교사하려고 하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교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고요, 제가 교육에 대해서 토론하자고 학회 같은 거 만들려고 해도 되게 소극적인 경우가 많았고. 답답한 거에요. 그리고 그 당시 임용고사는 서울 임용고사 외에는 학점을 안 봤어요. 그러니까 공부를 안 했겠죠. 학생회 활동하고 이러다가, 교생을 가게 됐는데, 모교로 갔거든요. 선생님이 뵙고 싶어서. 그런데 또 안에서 본 학교는 너무 다른 거에요. 교사가 학급단위의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전체 학교의 교육현장이라는 것은 제가 보기에 참담한 생각이 들어서. 뭘 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가지고 군대를 갔어요. 교육행정고시를 봐서 교육부 관료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교육운동가가 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군대를 갔는데 마침 육군 법무실로 가게 돼서 그때 법무관이라든지 사법고시 붙고 온 형들하고 같이 2년 동안 생활을 했어요. 그러면서 법이라는 것이 정말 좋은 도구인 것 같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군대 마치고 나와서 마침 로스쿨이 생겨서 저는 변호사가 되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이거 공부하고 나오면 교육적으로 더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로스쿨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김지미 한 사람의 일대기를 본 것 같아요.

 

박종훈 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할 얘기 다 한 것 같아요(웃음).

 

김지미 김기남 변호사님은 학부는 법학이신데 대학원에서 국제평화학을 전공하셨어요. 국제평화학은 사실 되게 생소한, 이런 학문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 텐데 대학원 전공을 이렇게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김기남 원래는 심리학이나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배고프다고 법학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대학 와서도 뭔가 세상을 알고 싶었어요. 항상 갇혀있다 보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알게 되고, 알게 되니 사시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무 오랫동안 밖에 나가고 너무 늦었던 것이죠. 다시 생각을 했죠 인생을. 죽을 때 내 인생 돌아보는데 살려고 바둥바둥 거리는 그 모습만 떠오르면 참 슬프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1년 정도 해외여행을 다녔어요. 대한민국 내에만 있다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면서 국내에서는 파이를 나누는 싸움을 하는 것이라면, 동북아시아나 이런 데는 파이가 너무 없어서 외부에서 오지 않으면, 그리고 뭔가 협력이라든가 연대의 어떤 흐름이 없으면 너무 힘든 상황들을 보고 이런 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들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국제평화라든가 이런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었고. 운 좋게 공부를 또 할 수 있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내가 뭘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좀 해야 되겠다. 그래서 NGO에서 생활도 했었고,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김지미 대학을 졸업하고 1년 정도 외국에서 생활하셨던 게 시야를 넓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을까요?

 

김기남 그때가 단초였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 캄보디아나 개발협력의 현장들 이런 데 봉사활동이나 그런 그룹들에 속해서 활동했던 경험이 사실은 좀 더 컸었고요.

 

김지미 평화의 친구들이라는 단체에서 꽤 오랫동안, 5-6년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평화의 친구들이라는 단체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 곳인가요?

 

김기남 국제평화를 표방하는 곳이고, 평화운동단체인데 긴급구호하고 평화교육이라든가 개발협력 이런 영역에서 활동을 펼쳐가는 곳입니다. 제가 주로 맡았던 것은 긴급구호여서 아이티지진이 났을 때 아이티 구호활동을 갔었고. 그리고 그 전에는 미얀마에 갔었고, 얼마 전에는 필리핀 이런 곳에 긴급구호 활동들을 쭉 다녔었고요, 그리고 캄보디아라든가 네팔 등등 이런 곳에 프로젝트 등 여러 가지 하느라고 돌아다녔었고. 그렇게 좀 살았었죠.

 

김지미 대학을 갈 때 심리학이나 철학을 하고 싶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해서 법학으로 갔다고 하셨는데, 결국은 배고픈 일을 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요.

 

김기남 많이 먹으려고 하면 배가 고픈데 제가 소식하기 때문에. 한 두끼 안 먹어도 죽지는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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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박종훈 변호사님은 민변 교육위원회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드디어 내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뭐 이런 생각이었을 것 같은데.

 

박종훈 지금 위험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은데.(웃음)

 

김지미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교육운동을, 아주 유효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할 수 있게 됐잖아요. 본인의 애초의 기대를 충족하고 있나요, 아니면 교육위원회가 좀 다른 방향으로 했으면 좋겠다든지 이런 이야기들을 좀 해 주시죠.

 

박종훈 다른 위원회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다른 위원회에 있는 분들하고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 자체적인 tf팀을 만들어서 대안을 만든다든지 입법에 대한 어떤 정책을 내놓는다든지, 선제적 대응을 많이 하는 편이잖아요. 그것도 아까 말한 공룡위원회 들이죠. 교육청소년위원회가 아직까지 인적구성이나 실제로 활동하는 분들의 수가 적다보니까 그런 선제적인 활동들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항상 현안에 대한 대응 밖에 없어서 다른 변호사님들도 고민을 많이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교육이라는 것이 법과 정치 사이쯤에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우리가 무죄추정원칙이라고 하면 이런 문제는 이론의 여지가 없잖아요. 그런데 교육위 최근 이슈를 하나 들자면 전교조에서 저희에게 자문을 의뢰한 게 한자 병기안을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교과서는 한자를 무조건 400자 정도 병기를 하는 것. 단순히 노출시키는 것을 떠나서 목적은 능력까지 고취시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제 개인적인 견해는 반대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이견들이 있거든요. 동아시아 시대 열린 사회에서 필요하다는 의견도 상당히 많고. 인성교육진흥법이라든지 인성교육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런 것들이 법으로만 풀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아요. 사실 제가 교육위에 오면서 변호사 활동 외에 시민단체 활동 부분에 대한 기대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교육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라든지 어떤 교육이 옳은지에 대한 논의가 되면 좋은데, 그러기보다는 교육적 철학들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교육위원회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교육철학이 있다고는 생각되질 않거든요. 노동위원회에서 노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공통된 것들이 있는지 잘은 모르지만 교육 분야에서는 그런 논의가 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이 조금 아쉽고요. 그래서 이런 방향으로 교육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많이 드는데, 혹자는 그런 말을 하니까 못 바꾼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습니까? 교육감이 되어야 한다(웃음). 이런 농담으로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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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사실 이전에 국제연대위 김하나 변호사, 교육위 강영구 변호사 인터뷰를 했었기 때문에 이번에 두 분은 위원회 얘기보다 개인사에 맞춰서 소개를 더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위원회 활동은 열심히 하시는데 전체적인 행사에는 잘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은 사실 우리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박종훈 변호사는 출판홍보팀이니까 우리는 잘 알지만 사실 박종훈 변호사를 모르는 회원들도 굉장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질문을 조금 더 드리자면 김기남 변호사님 이번에 총회 전에 수상자로 선정된 거 알고 계셨죠?

 

김기남 네.

 

김지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을 받으러 오지 않으신 이유는 지금 사모님께서 2세를 임신 중이시라는.

 

김기남 네. 그것도 있고, 그리고 문상을 가야할 일이 생겨서.

 

김지미 지금 첫 아이를 가지신거죠? 임신초기라고 들었는데, 예정일은 언젠가요?

 

김기남 연말이요.

 

김지미 올해 안에 아빠가 되는데 김기남 변호사님이 올해 39살이잖아요.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는 소감은 어떠신가요?

 

김기남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실감이 안 나고 낳아봐야 알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는 옆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참 나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 그러면 옆에라도 있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김지미 보통 외국변호사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국제변호사 그런 명칭이 통용되기도 하고 그랬었잖아요. ‘국제’ 이런 말이 붙으면 돈도 많이 벌 거 같고 그런 느낌을 가지기 쉽단 말이죠. 그런데 변호사님은 외국변호사의 자격을 가지고서 사실은 하기 어려운 NGO단체에서 긴급구호현장에서 나가서 일을 한다든지 그런 일들을 하셨잖아요. 지금의 사모님께서는 변호사님의 활동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를 해주시는 편인가요?

 

김기남 제가 아내를 아이티에서 만났어요. 아내는 의료진으로 와 있었는데 그때 인연이 돼서 결혼까지 하게 됐고요. 이런 일에 대해서 이해를 해주고 있고 본인도 적당한 미래에 하고 싶어 하고. 귀국하면 앞으로 10년은 국제인권이든 평화든 하고 싶은 일 한다 이런 선언을 했을 때 알았다고 담담히 받아줬던 사람이라서. 항상 감사해하면서 살고 있죠.

 

김지미 긴.급.구.호 현장에서 연애를 하셨다는 건가요?

 

김기남 그때는 호감만 가지고 있었어요. 티는 내지 않고 항상 내 옆에 두는 식이었죠.

 

김지미 그럼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따로 연락해서 만나신거에요?

 

김기남 뭐 그렇다고 봐야죠. 그때 걸그룹 원더걸스 멤버가 아이티에서 캐나다 선교사를 만나서 결혼을 했거든요. 그거 보고 친구가 누구는 아이티 가서 결혼도 하는데 너는 가서 뭐했냐고 말한 적도 있어요.

 

박종훈 속으로 웃고 계셨겠군요.

 

김기남 그때는 아니었다니까요. 결국은 그렇게 됐지만..

 

김지미 아이티 현장에서의 에피소드 하나만 이야기 해주세요.

 

김기남 그때 워낙에 상황이 안 좋아서 호텔 이런 거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 텐트치고 자야 되는 상황이었고, 텐트가 없을 경우에는 말 그대로 비닐 덮고 자고 그랬었는데, 먹을 것도 많이 없을 것 아녀요. 라면 끓어 먹거나, 계란 쪄 먹거나 바나나 먹거나 이런 위주로 많이 먹고. 운 좋으면 피자도 먹고. 마침 피자 건물은 안 무너져서 피자가게 영업을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다 무너져 있는 사이에서 피자도 한 번 먹어보고 그랬었는데. 그쪽 가면 바나나가 두 세 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그냥 까서 먹는 것이 있고, 하나는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 있어요. 튀겨서 튀김처럼 많이 먹고 그러거든요. 되게 맛있는데, 제가 잘 모를 때니까 사람들 먹여야 하는데 요리를 해서 먹어야 하는 것을 그냥 먹으라고 풀었어요.

 

김지미 그건 그냥은 못 먹는 건가요?

 

김기남 현지 사람들은 절대 손 안대더라고요. 우리가 먹어도 되게 맛이 없어요. 요리를 해서 먹어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사람들 반쯤 먹고 나서 제가 고백을 했죠. 이거 먹으면 안 되는 거라고(웃음). 그런 일도 있었어요.

 

김지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출홍팀 이야길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박종훈 변호사님은 교육위로만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출홍팀의 팀원으로서 활약이 대단하셨는데, 출홍팀은 어떻게 해서 활동을 하시게 된 건가요?

 

박종훈 사실 저는 출홍팀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교육위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출판홍보팀에서 각 위원회마다 1명씩 요청을 한다, 그래서 저는 출판홍보니까 모든 위원회들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돼서 하는 거구나 하고 좋은 뜻에서 왔습니다. 선의로 왔더니 저밖에 안 온 거에요. 나왔더니 김지미 변호사님이 명함을 주셨고. 왔더니 갑자기 환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김지미 그래서 후회하는 건 아니죠?

 

박종훈 저는 출판홍보팀에 들어오게 된 것을요 태어나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그렇게 이야기하면 거짓말 같잖아요.

 

박종훈 예, 거짓말입니다(웃음). 출판홍보팀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애정이 많기 때문에. 어느 단체든지 들어가면 눈에 띄는 부서가 있고 눈에 잘 안 띄는 부서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데 야구도 항상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하는 선수들이 있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선수들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한 번 위해준다고 하다가도 금방 잊게 마련이고요. 순간적으로 띄어 줬다가 또 항상 스타들에게 열광하기 마련이잖아요. 사실 제가 이번 총회에 가서 느꼈지만 그 많은 영상이며, 저는 그것을 보면서 웃을 수만은 없었어요.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아른거리니까. 주위사람들은 영상이 불만인 사람도 있을 거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저는 그런 게 보이는 게 아니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다 알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출판홍보팀 수고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거에요. 제가 출판홍보팀에 있으면서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서라도 인정을 받고 힘을 받고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요. 제가 그런 쪽에 조금이라도 일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앞으로 캠페인을 하겠습니다. 출판홍보팀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페북에 링크를 하던 만나서 대면을 하던 꼭 민변 회원이라면 한 번씩 하는 걸로(웃음). 그렇게 안하면 안 됩니다.

 

김지미 역시 우리 에이스다워요(웃음). 김기남 변호사님은 특별회원이시잖아요. 특별회원이 수상을 한 게 제가 알기로는 처음이 아닐까. 사실 정회원과 큰 차이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특별회원들은 활동을 제대로 안하든지 아니면 사정상 못하든지 그런 경우가 많은데 특별회원들에게 활동을 독려하는 말씀을 한마디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김기남 출판홍보팀 감사합니다(웃음). 제가 1번으로 했어요. 저는 굳이 특별회원이라고 해서 뭔가 활동하는데 장애가 있거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요, 100% 개인사정으로 못하는 부분들이 좀 많은 것 같다. 특히 외국변호사들 같은 경우는 인하우스가 많고 아니면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분들이 많기 때문에 특히나 시간적인 면에서 활동을 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시간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활동을 하기가 쉬웠던 것뿐입니다.

 

김지미 이번 총회에서 특별회원 관련된 규정이 바뀌었잖아요. 이제 특별회원은 본인의 신청에 따라서 정회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김변호사님은 정회원이 되실 거지요?

 

김기남 제가 사실 지금까지 총회를 한 번도 안 갔는데, 그 이유는 투표권이 없어서였어요. 이번에는 개인사정 때문에 못 갔던 거고. 정회원으로 신청할 생각이 있습니다.

 

김지미 박변호사에게 제가 장난으로 먹튀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신인모범회원상은 앞으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이고, 그래서 좀 더 부담이 될 것 같아요. 사실 박종훈 변호사가 수상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1년차인데 간사변호사를 했단 말이죠. 신입변호사가 간사변호사를 하는 위원회는 없는 것 같고 1년차 신입변호사로서 간사변호사로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 차원에서 상을 수상하게 된 게 아닌가 싶거든요. 교육위의 사정으로 봤을 때 간사변호사로서의 장기집권 예상되는 가운데(웃음) 앞으로 활동의 포부라든지 이런 것들을 말씀해 주시죠.

 

박종훈 먹튀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이 상의 이름을 바꿔서 부르고 싶습니다. 도망가지 마라 상. 제가 항상 출판홍보팀 오면 농담 삼아서 요즘 이런 점이 애로사항이다 이런 것들을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그걸 충분히 아시는 분들이 저를 도망가지 못하게, 니가 감히 먹튀를 하겠어. 상을 주면 아무래도 못 도망가겠지. 그래서 준 상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 교육청소년위원회에 애정이 많아요. 말씀드렸지만 교육자체에 애정이 많기 때문에 안에서 제가 꿈꾸던 것들을 많이 이루고 싶고, 그러려면 안에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어요. 거기서 주어진 역할이 간사변호사이든 또는 다른 역할이든 간에 내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몫이라면 해야 될 것 같고. 더 나가서 욕심이 있다면 신입변호사님들이 많이 들어오고 제 또래 동년차 아니면 3년차 위 선배님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제가 꿈꾸던 그런 토론의 장이라든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앞으로도 노력할 생각입니다.

 

김지미 김기남 변호사님도 앞으로 활동의 계획이나 포부를 밝혀 주세요.

 

김기남 우리나라에서 국제인권 특히 아시아지역에서의 인권활동을 전문적으로 전업으로 하는 단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단체를 설립하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 준비들을 하고 있고 좀 정리가 된 걸 가지고 사람들 만나가려고 하는 단계입니다. 아쉬운 점은 조금은 뻔한 스토리여서 사람들이 볼 때 새로운 주제나 영역, 사람의 이목을 끌고 뭔가 할 수 있는 그런 활동이면 좋겠는데 아직까지는 구태의연한 방법들, 유엔 인권 메커니즘 활용하고 아시아 국가들한테 인권상황에 대해서 유엔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거라든가, 이런 부분들로만 아직 생각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것들 보강을 해서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간다는 것 이게 중요할 것 같아요. 회원분들 중에서도 혹시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같이 일하고 싶으신 분들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고요.

 

김지미 시기는 언제 정도를 목표로 하고 계신 거에요?

 

김기남 목표는 내년 하반기부터는 좀 시작해보자. 사실은 상반기였는데 하반기로 늦춰졌고, 이게 내 손에서 정리가 잘 안 된 부분이 있어서 사람들 만나는데 조금씩 더뎌지고 있어요. 좀 더 속도를 내고 사람들 만나가면서 좋은 거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요. 그게 가장 큰 고민인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김지미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올해가 가장 바쁜 한 해가 될 수도 있겠네요.

 

김기남 한 가지만 더. 국제연대위를 신입회원들이 많이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서. 여행 좋아하시는 분들 오시면 됩니다.

 

박종훈 영어는 어떻게?

 

김기남 영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에 이슈들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알리고 옹호 활동하는 부분에서 최종적으로 외화 되는 것이 영어지 사실상 그 내용적인 것은 국내잖아요. 한글이고. 그게 사실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걸 외화해서 번역하는 사람들은 소수면 되지요. 모두가 영어를 잘 할 필요는 없어요. 저희가 미얀마 활동 계속 했었고, 베트남 활동 계속 하잖아요. 과거사 관련해서. 보면 저 영어 안 써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오시면 오시는 대로 저희가 또 준비하는 것들이 있어요. 오리엔테이션이라든가 한 분이라도 새로 오신 분들이 있으면 위원장님이 회의 주재하면서 설명을 친절히 잘 해주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담만 없애시면 많이 오시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국내이슈도 좋지만 더 이상 우리는 국내에서만 그 이슈만 가지고 사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얼마 전에 네팔에서 지진이 나고 그랬지만, 그걸 보면 어떠세요? 가슴이 먹먹해지시잖아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충분히 본인도 그걸로 활동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국제연대위 꼭 많이 오시면 좋겠습니다.

 

김지미 교육청소년위원회도 한마디 하시죠.

 

박종훈 요즘 신입회원들 중에 아동인권이나 그쪽에 관심 있는 분은 상당히 많아요. 그런데 지금 제가 쉽게 말씀 못 드리는 이유가 아동인권위 준비모임 생겼기 때문에 교육위와 영역 조정에 대해서 논의 중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장기적으로는 이 두 개가 별개로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교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학교 교육을 말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당연히 아이들, 청소년 나아가서, 물론 더 나아가서 성인교육도 있겠지만 우리가 주로 이슈로 하는 인권이라는 주제는 대부분 청소년, 아동에게 집중되기 마련이고, 그런 교육제도와 관계된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문제기 때문에 특히 신입분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시면 제가 다른 건 못해드려도 웃겨드리겠습니다. 오시면 함께 웃으면서 즐겁게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한마디 하면요,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데 혹시 민변에 야구 소모임 만들 생각 있으신 분 있으면 저에게 연락주시면 한 번 진지하게 논의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야구에서 보면 신인상을 받으면 잘 못하더라고요..

 

김지미 2년차 증후군이죠?

 

박종훈 소포모어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제가 그런 징크스에 시달리더라도 예쁘게 봐주시고.(웃음) 항상 모든 변론에는 약간 여지를 만들어놔야 하니까요. 또 제가 이 말씀 꼭 드리고 싶었는데 저보다 훨씬 열심히 한 변호사님들이 많아요. 제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사실 그 상을 받고도 준비해준 간사님들의 그런 현수막이나 이런 걸 보면서 너무 행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너무너무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했거든요. 그 분들에게 제가 감사히 생각하고, 민변도 그 분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다 알아줬으면 좋겠고, 마지막으로는 오늘 드레스 코드는 맞춘 거 아니다(웃음). 절대 맞춘 게 아니다. 꼭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김지미 맞춘 듯 안 맞춘 듯 너무나 재미있는 인터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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