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기
– 이지영 회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悲劇)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중
1. 들어가며 – 기시감
2008년 6월 그 유명한 ‘명박산성’을 본 이후 꼭 7년 만에 다시 ‘근혜차벽’을 보았다. 7년 사이에 그것은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명박산성보다 훨씬 빽빽해서 말 그대로 개미 한 마리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으며, 투명한 플라스틱 벽은 더욱 단단하고 세련되어져 있었다. 1800년대 프랑스 상황과는 달리 2015년 대한민국에서 다시 반복된 역사는 오히려 더욱 비극(悲劇)이 되어 있었다.
2. 4월 16일 세월호 1주기 집회 – 첫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
2015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원래 기일이란 돌아가신 분을 차분히 추모하는 날이지만, 명백히 인재인 참사의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고 이를 위한 특별법은 시행령에 의해 누더기가 된 상태에서 국가의 최종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마저 때맞춰(!) 출국한 상황은 유가족을 비롯한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개미 한 마리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청와대 가는 길 구석구석을 막은 차벽은 그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추모 분위기가 지배적일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차벽을 뚫기 위한 집회 대오의 싸움이 여기 저기 흩어져서 일어났고, 민변 가입 후 첫 집회라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은 결의하지 않고 단순히 민변 회원으로서 참가하고자 했던 계획과는 달리 나는 어느새 다른 변호사들과 함께 감시단 조끼를 입고 인사동·안국동 일대를 뛰어다니며 집회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결국 계획하지 않은 나의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 첫날은 모든 차벽, 경찰벽에 막혀서 뚫린 곳을 찾아 되돌아가고 되돌아가다 끝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3. 4월 18일 세월호 추모집회 – 변호사의 존재 이유
이틀 뒤인 4월 18일은 본격적인 세월호 추모집회였다. 이번에는 감시단 활동을 제대로 하리라 결의하고 사전 모임에 갔더니 인권단체 활동가·미디어팀과 한 조를 이루어 조별로 인권침해 감시활동을 하게 되었다. 인권침해 감시단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민변소속 변호사들이 조끼를 입고 집회 대오와 함께 걷는 사진이 실린 경향신문 기사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활동을 하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회사를 그만두었던 나조차 변호사가 법정이 아니라 거리에서 집회 대오와 함께 행진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고, 변호사가 되면 나도 그 ‘조끼’를 입고 행진하리라 마음먹었던 터였다.
그러나 감시단의 역할이 단지 조끼를 입고 집회대오와 함께 걷는 것만이 아님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감시단은 원칙적으로 집회 대오와 경찰 사이에서 공권력의 인권침해 행위를 감시하고 집회대오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집회 대오의 맨 앞(!)에 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그 날에는 이틀 전처럼 경찰이 막지 않은 빈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앞을 가로막은 차벽과 경찰벽의 위법성을 적극 폭로하고 자칫 일어날 지도 모르는 경찰과 시민 사이의 충돌을 막는 역할을 해야 했다.
종각역 4번 출구. 아직 청와대를 가기에는 한참 전인 그곳에서부터 차도는 차벽으로, 인도는 경찰병력으로 완전히 막힌 상태였다. 차벽은 이미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의해 ‘위헌적’인 행위였고, 경찰의 인도 통제 역시 저들이 우리에게 계속 말한 ‘일반교통방해’인 ‘위법적’인 행위였다. 형사법 시간에 많이 공부했던 ‘위법’한 공무집행행위였다. 인권침해 감시단으로서 이러한 위법적인 공권력 행사에 대해 항의, 시정을 요구하고 결국 적극 행동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경찰벽을 후퇴시켜 통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경찰의 위법한 채증에 대한 항의, 돌발적인 집회 참가자의 폭력행위를 막는 것도 함께 했다. 경찰 앞에서 일견 위축되던 사람들도 ‘변호사’가 앞에 서자 적극적으로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앞의 경찰벽은 분노한 대중들에 의해 약한 고리가 되어 무너졌지만 마지막 광화문 앞의 경찰차벽은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빈틈이 생긴 차벽 사이로 집회 대오 일부가 들어가 격렬히 싸우게 되자 다시 감시단으로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때부터 많이 다녔던 집회였지만 항상 집회 맨 앞에서는 주로 남성으로 구성된 사수대만 있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집회대오의 후미에나 있던 나로서는 형광색 인권침해 감시단 조끼를 입는 순간, 집회의 최전선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감시단, 변호사라는 지위가 가지는 무거운 의무이행의 순간이었다. 이 날 함께 했던 권영국 변호사님이 불법 연행된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옆 대오에 여성들이 너무 많다고 하기에 가 보았더니 수녀님을 비롯,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전경들 바로 앞에서 힘겹게 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치거나 혹은 연행될까봐 두려웠지만 감시단으로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학생 한명이 불법 연행되려는 순간 그를 구하고(?), 대신 경찰 한 명이 손을 때려 멍이 드는 정도의 경상을 입는 것으로 그 날의 감시단 활동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그 날은 무려 100여명이 연행되어 서울 시내 10여개 경찰서 유치장으로 접견이 조직되었다. 집회에서의 활동은 인권활동가, 미디어팀과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연행된 시민들에 대한 접견은 오로지(!) 변호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변호사시험 합격 후 6개월 의무연수기간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단독으로 접견을 할 수 없어 집회에 함께 했던 정병욱 변호사님과 함께 집회를 마치고 강동경찰서에 접견을 가게 되었다. 접견이야 학생회나 노조활동을 할 때 연행되었던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한 적은 있었지만 변호사로서의 접견은 처음이었다. 경험이 많은 정병욱 변호사님은 연행된 사람들에게 진술거부권, 피의자신문할 때의 자세 등을 상세히 알려 줌으로써 연행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형사소송법, 헌법 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권리인데도 몰라서 아니면 두려워서 누리지 못하는 권리들을 변호사가 알려줌으로써 용기를 내서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 새벽 1시 경찰서 접견실의 사람들의 눈빛이 처음과는 달리 다소 안도하는 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3. 5월 1일 노동절 집회 –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의로 감시단 활동을 한 첫 집회.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정면으로 맞은 첫 경험. 이후 심한 감기 몸살이 이어졌고, 손등의 멍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동시에 감시단 활동을 하다가 불법적으로 연행된 권영국 변호사님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와 영장기각 등 민변 차원에서의 일들도 일어났고 민주노총의 4월 24일 총파업과 5월 1일 노동절 집회가 돌아왔다. 역시 민변에서도 감시단 활동을 할 변호사들을 모았지만 4월 18일 집회 이후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없어 그저 단순 참가만 하기로 하고 집회 장소에 갔으나 다시 감시단 조끼를 받는 순간 집회 대오 맨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날은 4월 18일 집회에서의 차벽과 경찰벽, 집단 연행, 경찰의 위법하다 못해 저열한 해산방송 등에 대한 비난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그 날보다는 차벽이나 경찰벽을 덜 설치한 듯 했으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최종적인 차벽은 광화문에 훨씬 미치기 전인 안국동 입구에서부터 있었으며 그것은 그들 표현대로 사전에 미리 치지 않았다 뿐이지 집회가 시작되고 대오가 이동하자마나 미리 대기 중이었던 차와 병력으로 행진하는 대오를 막는 등 실질적으로는 더욱 조직적인 집회방해 행위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차벽 앞에서 우리는 맞은 것은 파바라는 최루액이 포함된 엄청난 양의 물대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캡사이신 세례였다.
차벽이나 경찰벽은 항의와 몸싸움으로 뚫을 수는 있었지만 첨단 장비의 물대포와 캡사이신 세례 앞에서는 제 아무리 감시단, 변호사라고 한들 어찌할 수 없었다. 집회 대오, 시민들과 함께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집회의 자유가 억압되고 권리가 침해되는 현장에서 감시단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동이었다.
4. 나가며 – 집회의 자유 쟁취, 그를 위한 감시단의 역할
생각해보면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공권력이다. 집회나 시위는 시민들의 위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다른 시민 혹은 집회 대오 내부의 질서와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하기에 집회나 시위에서의 경찰의 역할은 원칙적으로 집회 참가자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집회는 자유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고 공권력인 경찰은 집회를 억압하기에 여념이 없다. 나 역시 집회란 으레 경찰과 싸우는 것으로 생각되어 얼마 전 광주경찰들이 집회참가자들을 보호했다는 기사가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니 말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사회.
헌법적 권리이자 민주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특히 의회정치가 후진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국민의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거리, 생산 현장에서 직접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304명의 생명이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간 이유라도 제대로 알자는 외침은 권리 이전의 생명과 존재의 문제 아닌가? 집회의 자유는 우리가 인간임을 외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에 가장 보호되어야 한다. 그를 위한 감시단, 민변의 활동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
세 번의 자의 반, 타의 반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변호사 활동으로서의 작은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민변 노동위원회 신입회원 환영모임에서 권영국 변호사님의 발언에서처럼 민변에서의 감시단 활동이 지금보다 체계적, 조직적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전 교양, 실천 활동, 사후 평가로 이어지는 활동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며 서면작성, 법정변론 등과 함께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이야말로 변호사법 제1조의 ‘기본적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가장 실천적인 활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