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변호사에게 있어 자신만의 전문영역 찾기는 영원한 숙제 같은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변호사가 된 지 이제 만 1년이 채 되지 않은 새내기가 당당히 자신의 영역을 소개하는 것을 보니 마냥 부럽다가도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스스로 공부하고 부딪쳐 얻어낸 결과라니 선배로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못하는 게 없는 민변의 팔방미인 노주희 변호사를 만나 보시죠.^^
김지미 노주희 변호사님, 자기소개로 시작할까요?
노주희 예. 저는 광주에서 자라나서 대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서울에 오게 됐고, 그 뒤에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로스쿨에 진학을 해서 최근에 변호사가 된, 연식은 좀 있지만 변호사로서는 2년차인 국제통상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노주희 변호사라고 합니다.
김지미 노주희 변호사를 구글에 검색해 보면 두 명이 나오는데 처음엔 우리가 찾는 노주희가 누구지? 했다가 쭉 보니까 통상이나 쌀 관련 기사들이 우리가 찾는 노주희더라구요. 2년차 변호사이긴 하지만 국제통상이나 FTA 관련해서는 새내기답지 않게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어요. 국제통상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신다면?
노주희 그건 제가 변호사가 된 계기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요. 제가 대학원에서 개발경제학이라는 분야를 공부했어요. 한국에 많이 알려진 분야는 아닌데 그 분야의 공부를 하면서 당연히 20세기에 가장 큰 화두였던 통상 이슈들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졸업을 한 다음 기자가 되었을 때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됐고 미국산 쇠고기 문제라든지 이런 통상의 이슈들이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드는 그런 때였어요. 운 좋게도 좋은 회사에서 열심히 한·미 FTA와 관련된 취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민변의 변호사님들하고 많은 접촉을 했었어요. 그런데 법이라는 게 전체적으로 어떤 큰 그림 안에서 큰 숲 안에서 나무를 봐야지 그냥 나무만 봐서는 너무나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침 도입된 로스쿨 제도의 도움을 받아서 더욱더 통상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 변호사가 되고 또 민변에 소속될 수 있어서 벌써 꿈은 이룬 게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지미 학부 전공은 경제가 아니죠?
노주희 학부는 영어교육과를 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영어가 좀 친숙한 편이라 국제통상 하는데 특히 도움이 되고 있죠.
김지미 학부는 영어교육인데 대학원은 경제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기자가 되었다가 다시 변호사가 되어 있네요. 진로가 일관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꿈은 뭐였어요?
노주희 어렸을 때의 꿈은 예술가였어요. 공부는 못하는데 대신 예술 쪽에 재능이 좀 있었지요
김지미 예술이라고 하면 좀 포괄적인데 어떤 분야에 특히 재능이 있었나요?
노주희 일단 음악을 하셨던 할아버지,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신 건 아니지만 피아노와 각종 악기를 다루셨던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예고 진학과 음대 진학을 목표로 피아노 레슨을 한 10년 이상 받았었고요. 지금은 제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를 않는데 시를 좀 잘 썼어요. 그림도 잘 그렸고. 공부 빼고는, 아주 특수하게 잘 하는 것은 없었지만 두루두루 재기발랄하다고 하잖아요. 그런 아이였죠. 공부는 음대 진학 포기하고 대학 가려고 준비하면서부터 열심히 했죠.
김지미 음대 진학을 왜 포기 하셨어요?
노주희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좀 많은 편이었는데 대학을 가려고 생각하니까 미래 직업을 생각 안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직업을 선택할 때 당연히 1번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돼요. 그런데 저는 2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번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죠. 3번은 사회에 유의미한 것. 어떤 의미로든지 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기여는 할 수 있을 것. 요 3개가 있었는데, 제가 2번이 좀 자신이 없었어요. 그냥 적당히 잘 하는 것 같긴 한데 아주 노력을 많이 해야 잘할 수 있는 거고 원래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방황기를 거쳤죠.
김지미 그건 고등학교 때 일인가요?
노주희 중3, 고1 그때쯤이요. 고민을 좀 하다가 새롭게 길을 찾은 게 언론인의 꿈이었는데, 진지하게 언론인이 돼야겠다 이런 생각이라기보다 남들이 글을 잘 쓴다고 하니까 솔깃해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하는 게 뭐지? 아 기자가 있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꿈이 옮겨갔던 것 같아요. 대학을 진학하려고 할 때, 언론인이 되고 싶다 라고 했더니 언론인이 되려면 신문학과·언론학과에 진학하지 말고 차라리 영어와 관련된 실용적인 과를 가서 언론 활동을 하는데 도움을 받도록 하고 혹시 모를 리스크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교사 자격증도 가지는 게 어떠냐 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권유가 있어서 영어교육과에 갔는데 결과적으로 득이 된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언론인이 되고 싶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언론고시를 본다든지 아니면 대학원을 가더라도 언론대학원을 간다든지 뭐 그럴 수 있는데, 왜 경제 쪽으로 갔을까요?
노주희 제가 대학교를 97년도에 들어갔어요. IMF가 있었던 해이죠. 대학생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 문제들의 전형이 확 바뀌는 시기가 바로 97,8년이었어요. 97,8년에 소위 신자유주의적 개혁 이런 것들이 나라 안팎으로 일어나면서 이전에 관심이 있었던 환경이라든지 여성, 페미니즘 같은 모든 이슈들의 기저 또는 아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경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관심이 옮겨 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공부가 좀 부족하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만 더 공부를 해보자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됐죠.
김지미 대학원에서 공부하셨던 개발경제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노주희 개발경제학은 원래는 주류 경제학의 한 분야에요. 소위 개발도상국들을 어떻게 하면 선진국의 상태로 개발시킬 수 있는가. 서구 유럽 국가들이라든지 미국 국가들이 성장해온 그 발자취를 따라가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그런 분야인데, 저의 포커스는 거기에 있었던 건 아니고, 저는 한국이 정말로 자랑스럽고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그 짧은 시간 내에 폐허를 딛고 경제 개발을 이뤄냈고, 또 민주화를 이뤄 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자들과 너무나 많은 사회적 모순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우리 사회가 치유할 수 있는 방안. 그 다음에 우리나라보다 발전이 덜 된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모델로서 삼되, 우리가 가졌던 부작용은 최소화했으면 좋겠는 그런 측면에서 공부를 하려고 많이 노력을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통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고요.
김지미 초반에 우여곡절 끝에 변호사가 됐다고 했는데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을까요?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다고 들은 적은 있어요.
노주희 영어 선생님도 했고요. 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도 해보고 MBC 시사교양국에서 1년 일하기도 했었고요. 국제기구에도 잠깐 있었고 기자도 했구요. 제가 이렇게 다양한 직업이라든지 다양한 일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면서 할 수 있었던 건 사실 가정환경 덕이 제일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전라도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시진 않지만 어쨌든 간에 지방의 보수적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보면 험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한결같이 이해해주시고 지지해주시고. 저는 그런 것도 일종의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욕심이 많다라고도 말씀하시지만 욕심이 많을 수 있도록 양보나 포기를 안 할 수 있었던 환경, 그런 게 많이 작용을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김지미 지금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교사, 기자, 방송국, 국제기구, 변호사. 이게 청소년들이 장래 희망으로 1, 2, 3, 4, 5순위로 다 꼽는 거예요(웃음). 이게 어떻게 욕심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이거야말로 욕심과 운과 능력, 3박자가 다 맞아야 하는 일인데 이런 다양한 직업을 다 거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노주희 이거 하다 안되니까 다음 걸로 가보고, 안되니까 다음 걸로 가고 이런 건데.. 운이 있었다는 건 정말 부인을 못하겠어요. 만약에 제가 법을 좀 더 공부하고 싶은데 라고 생각을 했을 때, 로스쿨 제도가 없었다면 저는 아예 엄두도 못 냈을 것 같아요. 사시를 봐야 했다면 기회비용이라든지 비용상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 때문에 도전조차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로스쿨 제도가 마침 생겨서 운이 좋았던 것은 부인 못 할 것 같은데. 이게 남들 듣기에는 되게 멋있게 들리잖아요. 다 해보고. 그런데 사실은 이게 다 우여곡절이 많고 순간순간 고비도 많고 이랬습니다.
김지미 어찌 됐든 애초에 꿈 꿨던 기자가 됐잖아요. 그것도 아주 좋은 회사를 만났다고 했는데 그 회사가 프레시안이죠? 프레시안이라는 매체가 주류 언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깊이 있는 기사를 써내기로는 유명한 매체이잖아요. 프레시안에서의 기자시절 얘기를 조금 해주신다면.
노주희 프레시안은 기자가 쓰고 싶은 거 다 쓰게 해주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언론 활동이 가능한 그런 구조였어요. 그 다음에 페이퍼라든지 잡지라든지 이런 게 아니고 인터넷 공간을 주매체로 활용을 하다보니까 공간의 제약이라든지 시간상의 제약 이런 것들에서 굉장히 자유로워요. 그 다음으로 좋았던 것이 한참 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이 발달하고 포털사이트들이 생기면서 기사와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요. 그러면서 어떤 것이 좋은 기사고 어떤 것이 읽어야 될 가치가 있는 기사인지에 대한 선별기준 자체가 상당히 혼탁해져 있는 상황이었어요. 선별과정 그 자체에서 부터 가치관이 개입되는 것인데 우리는 그 가치관, 관점, 이런 것들이 당연히 반영된다는 가정 하에 기사를 쓴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공표하고 그런 관점이 있고 가치가 있는 기사를 쓴다는, 언론으로서의 지향점을 가진 회사였기 때문에 더욱 더 활발하고 깊이 있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 다음에 외부 연대 활동 잘 되는 편이고. 칭찬을 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은데 딱 한 가지만 더 하면, 인터넷 매체는 클릭에 되게 민감해요. 종이신문이 얼마나 팔리는 지, 잡지가 얼마나 부수가 나가는가 중요한 것처럼 당연히 클릭 수가 중요하죠. 클릭이 있어야 광고가 들어오고 광고의 단가가 달라지니까요. 적어도 제가 있을 때에는, 지금도 그럴 거라고 확신을 합니다만FTA 기사 쓰면 클릭 수 안 나와요. 재미없잖아요. 어렵고 왠지 전문가들이나 알아야 될 것 같고. 그런 기사를 저는 주구장창 썼는데 말리지 않고 든든하게 지원해주고, 뒷받침해주고. 기자로서는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에서 활동을 했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프레시안이 지금 협동조합 형태거든요. 조합원 가입을..(웃음)
김지미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기자가 됐고 내가 쓸 수 있는 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근무환경도 너무 좋고 사실 그런 환경에서 안주하기 쉬운데 뭔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 그래서 로스쿨을 진학해야겠다 라고 방향을 확 틀기가 쉽지는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보면 욕심도 많고 어떻게 보면 좀 과감한 성격인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주희 가끔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것보다 남들의 이야기가 훨씬 더 정확할 때가 많잖아요. 난 욕심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궁금해서 하는 건데 그런 평가가 많은 거 보니까 욕심이 많은 것 같아요.(웃음)
김지미 내가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거쳤던,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들이 현재의 나의 직업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노주희 딱 꼬집어서 말씀드리기는 어려운데 일단은 다양한 사회적인 경험을 하면서 쌓였던 인맥들, 네트워크들이 아무래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지식이라는 것이 처음에 접할 때는 파편화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지식, 저 지식, 이렇게 저렇게 파다보면 이것들이 어느 순간 만나요.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이 사회와 내가 살고 있는 우주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또 파다보면 어느 한 분야는 계속 파서, 깊게 어느 한 분야는 파여 있어요. 저는 이게 교양이고 전문 분야라고 생각해요. 요즘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가지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직은 자기의 전문 분야를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풍토가 안 되기 때문에 개인이 스스로 노력을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 것들을 갖추는 데는 이런 방황들이, 저는 방황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런 방황들이 아주 큰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제 운에 대한 자랑을 좀 더 하자면 제가 기자를 할 때 제 주요한 취재원이 송기호 변호사님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법을 좀 공부해볼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랬더니 적극 찬성해주시고 지원해주셨어요. 민변도 자꾸 전화해가지고 가입하라고 독촉하시고. 당연히 가입할 테니까 그냥 빨리 해라. 그렇게 해서 가입을 하게 되고, 이 사무실하고도 인연이 됐고. 그 덕에 좀 편하게 활동할 수 있구요. 제가 전에 이런 저런 방황을 거쳤던 것들이 사실은 지금에 와서 운으로 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김지미 지금 노변호사님이 있는 사무실이 송기호 변호사님이나 김종우 변호사님이 있는 국제통상의 본거지, 수륜아시아죠? 그런 면에서 봐도 행운아가 맞는 것 같아요.
노주희 저는 지금 참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통상 분야 얘기를 점심 먹다가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얘기를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죠. 다만 국제통상은 너무 덩어리가 크고 내용이 너무 큰 것들이다 보니까 구체적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기쁨도 느끼기가 사실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이게 맞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통상위는 밥벌이의 수단이라기보다 그냥 저의 좋아하는 분야로 남겨두고 있어요. 김종우 변호사님이 그 이야길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좋은 세상이 와서 정말 우리가 통상협상에도 협상가로서 들어가 볼 수 있는 그런 때가 오지 않겠느냐. 생각을 해보니까 아 그렇네, 그럼 월급도 받을 것 아니에요. 그럴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냥 머릿속에서 그냥 편하게 내버려두고 있어요. 저는 그래서 머릿속에서 계산을 좀 해놨어요. 50%는 돈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통상 관련 일을 하고, 50%는 그래도 변호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송무와 자문 활동하면서 자기 밥벌이는 하고. 그러면 남들보다 딱 절반만큼만 벌면 되는 거잖아요. 남들의 절반을 벌면서 대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김지미 소고기 촛불 때부터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FTA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한·미 FTA, 한·중, 한·호주 기사들은 많이 나오지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FTA 기사는 눈이 잘 안가고. 개인적으로는 어렵다. 그리고 당장 나의 실생활과 관련이 없다 이런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FTA, 현재 문제되고 있는 게 어떤 거고 이게 왜 문제가 되며, 왜 관심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지 간략히 설명해 주세요.
노주희 그 전에 기자들이 하는 농담 중에,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 것 같은데, 저 사람은 변호사 하기 아깝다 기자해야겠다 이런 말이 있어요. 김지미 변호사님이 내가 보기에는 기자하면은 정말 인터뷰 엄청 잘 따낼 것 같아요. 섭외 능력이(웃음). 제가 아직 신입이고 활동도 미약해서 인터뷰 못하겠다고 계속 거절하는데도 진짜..대안을 내 놓아도 다 쳐내시고.
이번에는 통상위 소속의 변호사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저는 통상위라고 하면 또 몸을 사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어서 이제 나온 건데, 그래도 막상 FTA 얘기 하라니까 어렵네요. 지금 FTA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쉬운 예를 들려 드릴게요. 예를 들어 우리가 시장에 브로콜리를 사러 가면 이게 제주산인지-국내산은 제주산 밖에 없거든요- 중국산인지 미국산인지 꼼꼼히 따져봐야 돼요. 이걸 다 따져 본 다음에 고민을 하면서 골라야 돼요. 저희 어렸을 때 그런 거 없었어요. 시장가면 다 100% 우리 농산물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됐단 말이에요. 왜 그렇게 됐냐. 소위 WTO의 농업협정이라는 것을 맺어서 1995년에 우리 농산물 시장을 쌀을 제외하고 몽땅 개방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 실생활하고 관련이 없다? 아니잖아요. 바로 관련 있잖아요. 바로. 이건 아주 간단하게 눈에 들어오는 상품만 예로 드는 거고요. 사실 그 뒤에 통상협정들은 상품을 그 나라에 가서 팔자 수준을 넘어서 소위 국제기준이라는 명목 하에 그 나라의 제도나 규범을 없애고 낮추고 깎고 이런 것들 위주로 진행이 계속 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모든 제도와 규범이 다 통상협정의 테이블에 올라가고 있어요. 당장 와 닿지는 않지만 어마어마하게 개인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무역을 찬성해요. 자유무역은 풍요롭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가 외국의 좋은 음악도 접하고, 맛있는 커피도 한 잔 먹을 수 있고. 하지만 그 무역의 이점이 어떤 한 나라의 제도와 정책과 근간을 흐트러뜨리는 수준으로 발전되면 그건 괴물이잖아요.
1995년에 WTO 협정이 체결이 되고 나서 한 번 많이 무너졌어요. 시장이 개방되고 많은 제도들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돈이 있는 사람, 힘이 있는 나라, 힘이 있는 기업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그걸로 부족해요. 그러니까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계속 해왔어요. 그런데 그게 원래는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다 같이 낮추자 라는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그게 안되니까 우리끼리라도 어떻게 더 낮춰보자 해서 둘둘씩 하는 게 FTA에요. 우리나라가 거기 전선에 뛰어든 게 10년 전에 한·칠레 FTA에요. FTA를 해서 야금야금씩 계속 개방하고 있어요. 제도와 규범은 다양하게 깎이는 데 하나는 마음대로 못하게 묶이는 방법이 있고, 하나는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있어요. 또는 앞으로 할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있어요. 되게 다양한 통상의 방법이죠. 그런데 이 와중에 우리나라가 택하고 있는 통상 전략이라는 것은 이 확 낮아지는 거에 동참하자 에요. 1995년에 우리의 시장이 확 바뀐 것처럼. 그건 사실 천지개벽할 일이었어요. 그거는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미친 거잖아요. 그런 통상 협정들이 지금 맺어지려고 하고 있고 준비가 되고 있고, 거기에 우리나라가 적극 동참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통상을 하시는 변호사님들이 좀 힘을 써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될지. 해야 될 일이 가장 많은 시기인거죠. 그래서 통상에 관심을 가지는 동료들, 후배들이 조금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김지미 변호사님 말씀 들어보면 올해가 힘을 모아야 되는 시기인데, 사실 통상위도 소수에 의해서 움직이는 위원회잖아요. 선배 층도 두텁지 않고 이번에 위원장님도 다시 돌아오실 수밖에 없는(웃음). 통상위 내부에서도 약간 고민이 있을 것 같은데. 통상위는 관심만 가지고 활동하기는 언어장벽도 있고. 통상위 내부적으로 회원 확충이나 회원 강화와 관련해서 혹시 뭔가 복안이 있을까요?
노주희 제가 그런 말하기에는 활동의 경력이 미천해서.
김지미 얼마 전에 감금 워크샵 갔다 왔잖아요.(웃음)
노주희 그 감금 워크샵이라는 게 제가 제안한 건데 덤터기를 썼어요(웃음). 일단 민변의 모든 조직이 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통상위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가 기여하고 싶은 만큼 기여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일을 정말 많이 하고 싶다. 그러면 직책과 나이와 모든 것을 다 뛰어 넘어서 다 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아 나는 진짜 관심은 많은데 여력이 좀 이거밖에 안 된다, 회사가 너무 바쁘다 라든지 아직 아는 게 좀 적다, 그러면 그 한도 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사정이라든지 이런 것을 잘 반영하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으니까 관심 있는 분은 좀 편한 마음으로 오셨으면 좋겠고.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FTA가 뭐의 약자인지도 모르는데 해보고 싶다 그런 분이 오시면 제가 집중강의를 개인적으로 해드릴 의향이 있어요. 신입회원이 오시면.
김지미 배우고 싶은 자여, 오라! 이거군요. 전직 교사의 1:1 맞춤 강의!
노주희 네. 부족하지만 비공식적으로 과외수업을 해 드릴 의향이 있어요. 제가 요새 외부 강연을 조금씩 하는데 저는 지금 고등학교 논술 특강 왔다고 생각을 하고 그냥 한 2시간 동안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WTO 협정이 뭐고 FTA는 뭔데 이게 왜 우리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협정문의 내용은 뭐고 그게 우리한테 무슨 영향을 미칠 것인지 정말 그냥 교과서의 개론 정도 되는 것을 강연을 해요. 그러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올해 개인적인 숙원 중 하나인데 FTA나 통상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요. 책도 좋고.
비유를 들면, 처음에 스타벅스 같은 커피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되게 힘들어 했어요. 메뉴가 어려워서. 그래서 메뉴 공부하고 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알고 보면 별 거 아니에요. 커피를 꽉 눌러가지고 즙을 짜서 요만큼 나와요. 그게 에스프레소에요. 거기다가 따뜻한 물을 타면 아메리카노. 우유 타면 라떼, 우유 타고 계피 가루 뿌리면 카푸치노가 되는 거고, 별 것도 없어요. 그런데 너무 어려워요 처음에는. 그러니까 WTO 협정이라든가 FTA도 사실은 통상협정을 하는 정부가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해줘야 돼요. 그게 제가 되게 하고 싶은 일이에요. 가능한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민변 변호사님들 대상으로 아주 쉬운 강의를 한 번 하면 어떨까. 제가 감히 선배 변호사님들한테 저한테 와서 설명을 좀 들으세요 이건 말도 안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어렵다고 생각해서 아예 접근 자체를 못하시니까 최소한 접근이 가능한, 뉴스가 나오면 저건 저거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런 활동을 하고 싶은 게 개인적인 소망이예요.
김지미 그럼 업무적인 거 말고 정말 개인적으로 올해는 이걸 꼭 하고 싶다 하는 계획을 들으면서 인터뷰 마칠까요?
노주희 진짜 개인적인 소망은 제가 같이 살고있는 고양이 두 마리 중에 한 마리가 비만이라 다이어트를 시키는 게 올해 가장 큰 계획 중에 하나예요. 그게 너무 간절해가지고 그게 큰 소망이고. 그리고 오늘 되게 잘난 척 많이 했는데, 저도 사실은 통상을 많이 공부해서 통상의 어떤 법적인 측면, 또 진지한 얘기로 돌아왔어(웃음). 너무 안 맞네요. 고양이 다이어트하고 통상하고(웃음). 사적으로는 고양이 다이어트를 시키고, 고양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 그리고 올해는 부모님과 같이 해외여행도 가고 하는 그런 소망이 있고요. 부모님과 시간을 좀 보내야겠다. 그 다음에 올해는 좀 많이 공부해가지고 내년 이맘때쯤에는 조금은 더 전문가가 되는 거? 지금은 병아리 단계니까, 한 중닭정도, 영계정도 되는 그런 게 올해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