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논픽션, 다이어리’ 시사회 후기
– 심재섭 회원
2013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케이블로서는 유일하게 시청률 10%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기의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충만했던, 그래서 누구라도 마음껏 꿈을 꿀 수 있었던 90년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아니었나 싶다. 군사독재가 드디어 끝이 나고 새롭게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너도나도 ‘세계화’와 ‘신한국’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기대했던 기억. 한편, 이제는 잔악한 조직범죄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지존파’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도 1994년이었다. 국민 모두는 그들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고, 반성은커녕 ‘오렌지족, 야타족들을 다 못 죽인 것이 한’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뻔뻔함에 더욱 분노했다. 우리에게 지존파 사건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한데, 난 ‘응답하라 1994’의 방영 예고를 보면서 곧바로 지존파 사건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나만 그랬을까. 역동적이고 희망찬 시대라는 90년대의 이미지가 동시대에 일어났던 잊을 수 없는 엽기적 범죄로도 희석되지 않은 사실이 새삼 놀랍다. 지존파 사건 당시의 사회와 전혀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유명한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이면을 깊이 파헤쳐 보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떤 다른 사정이 밝혀졌다’는 정도의 흐름을 예상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지존파 사건에 대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굳이 무리하게 사건을 비틀거나 재구성하지도 않는다. 영화엔 당시에 전파를 타고 방송되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영상, 그러니까 자신들의 살인 방법을 재현하는 장면, 검거 후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들이 그대로 들어 있다. 지존파가 저지른 범행의 현장에 남겨진 타다 남은 피해자의 유골을 찍은 장면은 영화 전반에 걸쳐 간간이 등장하면서 지존파 개개인에 대하여 동정하거나 연민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지존파가 이런 짓들을 했었지, 분개하면서 이에 대한 평가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데 대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영상들이 이어서 등장한다. 오열하는 피해자들, 흉물스럽게 기둥만 남은 백화점의 잔해. 영상은 온통 아비규환이다. 영화는 지존파 사건을 다 매듭짓지 않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사건을 연결하여 보여준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어설픈 재연 없이, 허구를 더하지 않고 실제 발생한 사건을 사건일지에 따라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논픽션 다이어리’라는 제목이 적확하다.
이 사건들의 병렬적 배치는 ‘지존파의 목표는 10억을 모으는 것, 삼품백화점의 목표도 돈을, 지존파보다 훨씬 더 큰 액수의 돈을 버는 것이었고, 두 경우 모두 사람이, 후자의 경우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의 말로 설명된다. 영화가 공리주의 원칙을 단순하게 적용하여 지존파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사고의 책임자가 도덕적으로 더 비난받아야 함을 주장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일련의 사건을 연속하여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관객에게 각각의 사건이 특별히 악한 몇몇 개인의 일탈에서 비롯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아닌 사회 전반의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존파 사건이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 깊은 곳까지 침투하면서 야기된 인간의 소외 등 사회적 환경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당시 대한민국 사회는 지존파 사건을 패륜범죄, 인간성 파탄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시사 토론프로그램의 토론자들은 지존파 개개인의 인격을 욕하기에 급급하다. 영화는 이 대목에 주목하는 것 같다. 지존파 사건의 원인이 사회 전반의 모순이라는 사실보다,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미련하게 이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의 하자를 키워오고 있는지에 말이다.
이 시스템은 자신의 적에 대응할 수 있는 막강한 무기로서 사형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지존파 6명에게 신속하게 사용했다.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고병천 전 반장은 한참을 고심하다 말한다.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존치시켜야 하지 않을까. 지존파 개인을 특별한 악인으로 보지 않은 지금까지의 관점과 좀 다르지 않나 싶은 대답이다. 이후 영화의 전개는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 일단 사형제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죽일 놈’을 죽이는 것이 정의라면, 아니, 정의까지는 모르겠고, 사형제도의 존치를 통해서 국가라는 시스템의 붕괴를 방어할 수 있다면, 백번 양보해서 존치해야 한다고 하자. 그럼 대한민국은 사형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서 스스로의 완결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자신의 처지와 다른 ‘있는 놈’에 대한 분노로 5명을 살해한 지존파를 사형시킴으로써 법질서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려 한 대한민국은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일반 대중의 안전을 등한시한 결과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삼풍백화점의 사장을, 구성원의 안전보다 국가 행정 시스템의 편의를 우선하여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성수대교 붕괴 관련자를, 정권 장악을 이유로 시민을 학살한 5.18의 책임자를 적절하게 사회에서 배제시켜야만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구체적인 범죄인 지존파의 살인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 및 국가 시스템의 하자에 의한 여타의 다른 사고들을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고 전자를 엄하게 처벌함으로써 사회 그 자체는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잘못은 개인이 하는 것이고, 사회는 무죄다. ‘우리 청년은 오렌지족도 아니고 지존파도 아니다, 나는 힘들어도 웃어른 공경하며 열심히 잘 살겠다.’는 편지에 시사 토론프로그램의 토론자 일동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낸다. 개개인이 착하게 맘을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니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건강할 테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미리미리 방지해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성수대교 피해자 유가족의 외침은 슬프게도 올 봄에 다시 반복되었다. 자본의 가치가 인간에 우선하는 사회.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 손에 잡히는 이익 앞에서 인간의 가치는 뒷전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안전 따위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까운 세상. 수많은 사건, 사고도 바꾸지 못했다. 언제나 사회는 무죄였고, 어쨌든 개인은 처벌을 받아 왔다. 그 때 그 때 해결이 된 듯 했지만 다시 반복된다.
2034년은 2014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2014년과 세월호를 동시에 떠올릴 수 있을까.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한 사회 전반의 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선주를 잡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양 몰아가는 일부 언론과 정부를 보면 2014년의 한국 사회와 유병언의 세월호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기억될까 무섭다. 다이어리에 기록이라도 해 두어야겠다. 나중에 누군가 또 지금의 기록들을 늘어놓고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때, 포스터에 적힌 문구 중 ‘대한민국의 죄와 벌’은 여전히 유효할 테고, ‘살인의 탄생’은 좀 식상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