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김귀정양 사망
우여곡절 끝에 5월 20일 강경대의 시신이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됨으로써 노태우 정권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은 시위정국이 진정되는 듯 했으나 25일(토) 또다시 성균관대생 김귀정양(金貴井, 25살, 불문학과 3학년)이 시위대에 깔려 숨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겨레신문 1991. 5. 26.자 1면]
이날 전국적으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시민 학생 등 1만여 명이 참여하여 서울 퇴계로 대한극장 주변에 집결하여 오후 5시경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후 시위대는 시민, 학생, 노동자 등 3만여 명으로 늘어나 매일경제신문사 앞 3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였으나 5시 20분경 전경과 백골단이 명동방면과 퇴계로 6가, 스카라극장 3방면에서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몰아 부쳤다.
시위대는 처음 “질서”, “질서”를 연호하며 물러서다 3방향에서 포위공격을 받았다. 이날 동원된 경찰은 각 방향 5개 중대씩 15개 중대 1천8백여 명이었고 이후 계속 인원이 증가되어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경찰이 공개한 현장 진압부대(성북서 5개 중대, 서울시경 4기동대 소속 5개 중대, 송파서 5개 중대 등 15개 중대)의 진압 일지에 따르면 5월 25일 오후 5시부터 5시30분께까지 시위현장에서 다연발 최루탄 576발, 사과탄 384발, KP탄 1,692발, SY-44탄 137발 등 2700여 발을 집중 발사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면서도 경찰은 김귀정 사망현장에서는 최루탄 발사 사실을 부인하였다.
[한겨레신문 1991. 5. 26자 13면]
당시 경찰은 시위대를 포위하면서 김귀정이 발견된 골목 앞으로 시위대를 떠밀었다. 시위대의 절반 정도가 골목을 통해 빠져나가던 중 중간에 백골단이 골목의 입구를 차단하고 시위대를 U자로 포위하고 최루탄과 사과탄을 시위대의 머리위로 까 던지면서 방패와 곤봉으로 구타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부상당했다.
그런데도 최루탄은 쉬지 않고 터졌고 인근 골목은 자욱한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토하기 시작했다. 백골단은 그 쓰러져 있는 사람들 위를 뛰어다니며 진압봉을 휘둘렀다. “그만…”, “사람 죽겠어요”, “살려줘요. 숨 막혀요” 등등의 비명을 질러댔다. 한 여학생(김귀정으로 추정)이 “아저씨, 때리지 말아요. 저 죽어요”라고 울부짖었으나 백골단이 “이년아, 집에서 공부나 하지 데모는 왜해”하고 몰아부치며 구타하였다고 한다. 결국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숨진 것이다.
[한겨레신문 1991. 5. 28자 3면]
김귀정의 사망 직후 결성된 ‘고 김귀정 열사 폭력살인 대책위원회’(위원장 권영길 언론노련위원장)는 26일 김귀정의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 영안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양의 죽음은 최루탄 난사와 공격적인 진압방식을 바꾸지 않은 경찰에 의한 살인”이라고 성토했다.
이어 오후 6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문익환 목사 등 재야인사와 학생 시민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귀정양 폭력살인규탄대회를 갖고 그의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까지 3백여 미터의 거리를 가두행진했다.
부검을 하지 않았던 강경대와는 달리 김귀정의 경우에는 사인이 다소 불명확하여 부검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책위에서는 ‘김귀정양 폭행살인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였다. 단장은 강경대군 검안에 직접 참여하였던 양길승 원장(성수의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현 녹색병원장)이 맡았고, 강경대 범국민대책회의 파견되었던 필자가 다시 진상조사단에 합류하였다. 노동인권센터 김문수 소장(전 경기도지사)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파견한 소설가 서해성 등도 함께 하였다. 진상조사단은 부검이 직접 사인을 밝히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고 당시의 정황이 정확히 밝혀질 때 부검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전제에서 우선 확인 가능한 당시 상황을 먼저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6월 7일(금) 오전 11시40분 김귀정에 대한 부검이 시신이 안치된 서울 백병원에서 실시되었다. 부검에는 검찰측에서 임채진(전 검찰총장) 김수남 검사(현 서울중앙지검장)와 이정빈 이윤성 황적준 교수 등 부검의 3명이 참여했고, 대책위측에서는 양길승(인의협) 고한석(백병원) 변박장(순천향병원) 최병수 씨(백병원) 등 4명의 의사와 가족대표, 서정기 대책위 집행부위원장, 필자 그리고 성대 민주동문회의 추천을 받은 우리 민변의 이덕우 변호사가 입회하였다. 김양의 가족은 부검 장면을 차마 보지는 못하고 울먹이고만 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오후 4시 넘어서까지 진행된 부검을 통해 가슴압박에 의한 질식사인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사인을 정확히 밝히지 못한 채 김귀정은 6월 12일(수)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고 1993년 2월 성균관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김귀정양 영결식]
‘유서대필’이라는 희대의 조작사건
그러나 이러한 국민들의 거센 분노에도 불구하고 정권과 보수언론은 치밀하게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1년 5월 8일 김기설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했다.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사회부장이었다.
바로 그날 서강대 박홍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성경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 이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
그 며칠 전에는 당시 존경받던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선동적인(?) 글을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박홍 총장은 이후 ‘주사파’ 전도사(?)가 되어 한국판 매카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차회에 다룰 것이다)
김기설 분신의 배후를 찾던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을 유서 대필자로 지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잇따른 분신 정국이 ‘분신 조직’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며 배후세력을 수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보수언론들은 ‘유서대필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대서특필했다. 그 이후 일부 종교인들과 국민들은 서서히 민주단체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시위 참여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강기훈은 끝까지 부인했으나 유죄판결로 3년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2007년이 되어서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기설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마침내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는 2014년 2월 13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돼 1992년 7월 징역 3년이 확정됐던 강기훈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6년 만에 누명은 벗었으나 한 인간의 젊음은 송두리째 파괴된 뒤였다. 아니 민주화운동세력 전체가 부도덕한 ‘패륜아’로 매도당한 것이었다.
정원식 총리서리 ‘폭행’사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월 3일(월) 한국외국어대에 마지막 출강을 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날 오후 7시 20분쯤 외대 교육대학원 418호 강의실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오던 정원식 총리서리가 이 대학 학생회 간부 및 학생들에 의해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고 몇 차례 발길질을 당했다. 그가 전교조 관련 교사들의 해직을 당시 문교부장관으로 주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일보 1991. 6. 4자 1면]
이 사건은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집단폭행으로서 국민의 윤리의식을 자극하여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으며, 강경대 사망 이후 한 달 이상 계속된 재야의 ‘노태우 정권 타도‘ 투쟁을 무력화시키고 학생운동권의 도덕성에 큰 흠집을 주었다. 안정희구 세력인 중산층을 크게 자극한 이 사건은 얼마 뒤에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호남을 뺀 전국에서 민자당이 압승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정세반전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보수 언론들도 학생운동권의 도덕성 실추를 집중 보도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흠집내기로 일관하였다.
여론악화로 ‘시위정국’은 급격하게 냉각되었고 명당성당에 있던 범국민대책회의는 점점 검찰과 언론에 포위를 당하다가 마침내 자진출석하거나 강제 구속 등의 방법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당시 외대 학생 1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서울지법 북부지원 형사합의1부는 1991년 10월 14일 구속 기소된 박 모 피고인 등 외대생 10명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여, 박00 피고인에게 징역 3년6월, 김00 피고인 등 4명에게 징역 2년6월, 박00 피고인 등 2명에게 징역 2월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학생신분으로 노교수의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는 등 폭력을 행사한 것은 민주주의의 기초질서인 자기의사를 자유로이 표현할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강경대군 치사 전경에 실형 선고
한편 서울지검은 1991년 4월 27일 강경대를 폭행치사한 혐의로 이00 일경, 김00 상경 등 전경 5명의 신병을 경찰로부터 인계받아 28일 오후 이들을 구속했다.
이들은 명지대 정문 앞 시위현장에서 담을 넘어 달아나는 강경대를 뒤쫓아 가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가슴ㆍ머리 등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강경대 폭행치사 가담 전경들, 한겨레신문 사진]
이들은 1심에서 징역 3년~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항소심(서울고법 형사3부)은 1991년 11월 29일 이들 5명에게 상해치사죄를 적용, 3명에게는 징역 2년6월~1년6월씩의 실형을, 2명에게는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씩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이 당시 동료전경들이 시위진압과정에서 많이 부상해 흥분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과중한 업무로 심신이 지쳐있었던 점을 참작하여 1심보다 감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전경들이 재1심 재판을 받던 1991년 7월 4일 서울지법 서부지원 공판에 참석한 강민조 씨는 전경들은 죄 없으니 풀어주고 대통령, 내무장관, 경찰청장을 구속하라고 외치다가 법정소란죄로 오히려 구속되어 징역 8월의 실형을 받았다.
강경대 어머니 이덕순 씨는 ‘법정소란죄’로 재판정에 선 남편의 공판 참석을 막는 전경으로부터 얼굴을 방패로 찍혀 이가 석 대나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1억 3천여 만 원을 배상받다
이렇게 처절했던 1991년은 지나가고 1992년이 되었다.
강민조 씨의 만기출소 이후 강경대의 가족들은 경대의 사망 1주년을 맞이하여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심했고, 그 소송을 민변에 의뢰하였다.
당시 민변의 대표간사였던 홍성우 변호사님(민변 3대 대표간사, 1992~1994년)과 임재연 변호사님(연수원 13기) 그리고 필자가 소송대리인을 맡게 되었고, 실무적인 일은 범국민대책회의에 파견되어 어느 정도 상황파악을 하고 있던 필자가 맡게 되었다.
이 때 홍 대표님으로부터 형사소송뿐만 아니라 민사소송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노련함을 배울 수 있었다.
민사재판은 사망한 강군은 법정상속인이기도 한 아버지 강민조 씨와 어머니 이덕순 씨 그리고 누나 강선미 씨(명지대 중어중문과 3학년) 등 3명으로 하였고 소극적 손해(일실수익)와 적극적 손해(두 번의 장례에 따른 장례비 등) 그리고 정신적 손해(위자료) 등으로 총 6억3천만 원을 청구하였다.
사실 이 민사재판의 의미는 배상금액의 많고 적음 보다는 강경대의 사망원인을 검찰의 주장처럼 상해치사(즉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로 볼 것이 아니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즉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재판을 진행하면서 필자는 아들을 잃은 강경대의 부모님은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그 엄동설한에도 추운 방에 불도 피우지 않은 채 지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콧등이 시큰거렸다. 아들의 두 번에 걸친 장례식을 치르면서 엄청난 비용이 들었고 생업에 전념하지 못해 부친이 경영하던 국일기업이라는 건설회사도 거의 망하게 된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겨레신문 1992. 10. 7.자 15면]
마침내 1992. 10. 6. 서울민사지방법원 합의36부(재판장 구도일 부장판사)는 국가는 강경대의 부모님에게는 각 55,338,927원, 누나에게는 5,000,000원 등 총 115,677,854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92가합23938 판결).
판결문에 의하면 강경대는 당일 명지대학교 앞길에서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의 주관으로 개최된 구속된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여 모래내 쪽으로 진출하다가 시위진압을 위하여 출동한 전투경찰들에게 쫓기게 되자 학교 안으로 피하기 위하여 학교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약 50미터 지점에 있는 철책이 제거된 담장을 기어오르던 중 나무몽둥이를 손에 들고 뒤쫒아온 서울시경 제4기동대 94중대 3소대 소속 전투경찰1에게 붙잡혔고, 이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저장하다가 같은 소대의 다른 전투경찰2에게 길이 약 115센티미터 가량되는 쇠파이프로 가슴을 1회, 어개부위를 3, 4회 얻어맞으면서 그 쇠파이프에 오른쪽 이마 부위를 스쳤고, 같은 소대 소속인 또 다른 전투경찰3에게 길이 약 130센티미터 가량되는 나무몽둥이로 왼쪽 다리를 2회 얻어맞고 그 허벅지 부위를 2회 걷어차였으며, 같은 소대 소속의 또 다른 전투경찰4에게 길이 약 100센티미터 가량되는 쇠파이프로 왼쪽 다리를 1회 얻어맞고 발로 배를 3, 4회 걷어차였고, 같은 소대 소속 또 다른 전투경찰5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경찰진압봉으로 왼쪽 팔을 1회 얻어맞는 바람에 대동맥파열상을 입고 성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심낭혈종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전투경찰이 시위진압을 함에 있어서는 지급된 경찰봉 등의 경찰장구 외에 개인적인 진압장비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전투경찰들은 사건 당일 시위가 격렬해 질 것에 대배하여 미리 쇠파이프나 나무몽둥이를 준비해 가지고 와 시위진압에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강경대가 시위도중 전경들에 의해 구타당해 숨진 사실이 인정되는 만큼 피고는 원고측의 정신적 고통 등에 대해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면서도, 전경들이 강경대를 구타, 숨지게 한 것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행위라는 원고측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경들에 대한 형사판결 결과와 마찬가지로 상해치사 혐의만을 인정하였다. 게다가 강경대가 미신고 집회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본인과실을 30%나 인정하여 배상금을 감액했으며 서울시청 앞 노제를 두 번이나 원천봉쇄한 경찰의 처사에 대해서도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당한 직무집행범위이라고 면죄부를 주었다.
그럼에도 유가족들은 더 이상 법원에 기대할 것이 없다며 항소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국가 측에서 항소를 제기하였다. 원고측은 항소심 도중에 부대항소를 제기하였는데 서울고등법원은 1993. 5. 4. 피고의 항소와 원고들의 부대항소를 모두 기각하였다(92나63865 판결).
이것으로 경대와 관련된 모든 법적인 문제는 모두 종결되었다.
강경대의 부모님은 재판이 끝나자 아들이 묻혀 있는 광주광역시에 조그만 기념공간을 하나 마련하자는 생각으로 아들과 아버지의 이름 중 한 글자씩을 따서 북구 우산동에 1, 2층 합해 100평짜리 ‘경민회관’을 세웠다.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이자 포함 약 1억 3천여 만 원)을 헛되이 쓸 수는 없었다.
1층은 무료식당을 차렸고 2층에 아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도 그러한 심정일 것이다.
강민조 씨는 아들이 죽은 이후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평범한 사업가에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일을 하면서 민주화유공자 특별법 제정,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 전면에 나선 투사가 됐다. 한편으론 ‘강경대 한방무료진료소’를 열고 해마다 경대의 생일 때 경로잔치를 열었고 지역감정을 없애자는 운동도 벌였다. 전재산을 출연하여 장학·무료진료 복지법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강경대군 부모님]
1991년 ‘5월 투쟁’
1991년 ‘5월 투쟁’은 공안통치와 3당합당을 통해 권위주의적 통치로 회귀하던 노태우 정권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었다.
5월 투쟁은 이른바 백골단에 의해 강경대 사망 사건이 발생한 4월 26일부터 투쟁의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전개된 투쟁을 일컬으며, 노태우 정권 집권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표출된 공안통치적 폭압과 수서비리 사건과 페놀 사건, 민자당 당권 다툼 등 각종 비리와 실정, 그리고 물가 폭등과 주택 문제 등 민생 파탄의 지속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결합되어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2,300여 회의 집회가 열렸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의 시위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학생, 빈민, 노동자 등 11명이 분신했고,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와 강경진압으로 인한 김귀정 성균관대생의 죽음까지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사망하였다.
5월 투쟁 정국은 공안통치의 폭압에 의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해온 범민주진영이 강경대 치사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 대한 도전과 공세를 강화하는 것을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맞서 노태우 정권이 자신이 처한 정치적 수세를 이른바 ‘민심수습 방안‘으로 돌파하고 광역의회 선거국면으로의 전환을 통해 정세주도권을 재장악해가는 양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5월 투쟁의 의미나 특징을 떠나 투쟁과정 속에서 발생한, 역사상 전례 없는 타살과 자살의 비극적 반복이 대중들에게 준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죽음과 분신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투쟁의 의미는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몰라도, 분신이라는 수단은 절대 합리화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억울하게, 원통하게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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