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강경대
대학 1학년 꽃다운 청춘
1991년 4월 26일(금) 학원자주화투쟁에 참여한 명지대 학생 강경대군(20세․경제학과 1학년)이 백골단 소속 사복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이틀 전인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4월 18~19일의 학내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연행되어 25일 경찰에 구속되자, 명지대 학생들은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 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였는데 동료 학생 300여 명과 함께 참석한 강경대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해 교내로 진입한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을 피해 정문 옆 허물어진 담장을 넘으려다 경찰에 붙잡혀서 그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집단 구타당한 것이다. 학생 100여 명이 화염병을 던지며 몰려가자 백골단은 강경대를 놓아두고 달아났다.
[한겨레신문 1991. 4. 27자 1면]
강경대는 입학한지 얼마 안된 3월 22일에도명지대 등록금 인하 주장을 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학교 내에 진입한 경찰의 최루탄에 의해 안면 부상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비싼 대학등록금이 대학생들의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다.
강경대는 인근 성가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강경대를 검진한 성가병원 의사는 숨진 강경대의 오른쪽 눈썹 위가 둔기로 맞은 듯 사선 방향으로 7cm가량 찢어졌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오후 6시쯤 강경대의 시신을 연세대 부속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다. 강경대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명지대생과 서총련 소속 학생 등 2,000여 명이 영안실 주변과 연세대 정문 등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사건 발생 다음날 노태우 대통령은 안응모 내무장관을 문책경질하여 사태를 조속히 매듭지으려 했으나,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연세대학교앞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범국민대책회의에 민변 연락책으로 파견되다
국민연합·전대협·신민당 등 44개 단체와 정당으로 구성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약칭 “범국민대책회의”)는 4월 29일(월) 오후 6시 연세대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폭력살인정권 규탄 범국민결의대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경찰의 저지를 뚫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일부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폭력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당시 민변에서는 이석태 변호사님과 필자를 범국민대책회의에 파견하였다.
연세대 집회에 나가보니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최대의 규모가 아닌가 싶었다.
민변에서는 강경대군 부검 실시 문제나 장례식 문제 등 범국민대책회의의 법률적 자문에 응하였고 두 달 뒤 범국민대책회의의 간부들 대부분이 구속되었을 때에는 이들의 변론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같은 날 전남대학교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하였고 이어서 5월 1일안동대학교학생 김영균, 5월 3일경원대학교학생 천세용, 5월 8일전민련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정국’ 이 조성되었다. 안기부 개입의혹을 불러일으킨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투신 등 극한 투쟁이 꼬리를 물었다.
범국민대책회의는 5월 2일 발표한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현 상태에 대한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채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이 진정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진다면 국민에게 공개 사과하고, 공안내각 총사퇴와 내무부장관 등 관련자 5명 구속, 백골단 해체 등 3개의 요구사항에 대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백골단과 전투경찰의 살인적 폭력에 대한 범국민적인 분노를 모아 백골단을 해체시키고 현 정권의 퇴진을 위해 각계각층과 공동투쟁해가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1991년 5월 4일(토) 오후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정권의 회유공작 그리고 부검 거부
그런데 강경대군의 사망이 전국민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자 노태우 정권은 가족들을 상대로 비열한 회유와 협박공작을 일삼았다.
강경대의 아버지 강민조 씨는 5월 4일 열린 범국민대회에서 딴 사람은 5억짜린데 경대는 20억을 주겠다느니, 지구당 위원장 자리 하나 맡으라느니 하다가 씨가 안 먹히자 나중에는 50억을 주겠으니 시키는 대로 장례를 빨리 치르라는 말을 들었으며, 말 안 들으면 앞으로 사업해먹기 어려울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전부 공개해버렸다.
이날 강경대 구타치사에 항의하는 가두시위에는 전국 21개 도시에서 수 만여 명이 참가하여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강경대의 가족들과 범국민대책위원회는 목격자가 있고, 맞아 죽은 것이 명백한 이상 검찰이 실시하는 부검을 거부했다.
대신 검안(주검을 해부하지 않고 외관만 관찰하는 시체검사)을 하여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를 하였는데 혈심낭(hemopericardium)이라는 사인이 밝혀져 부검은 필요 없게 되었다. 검찰로서는 치욕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5월 13일에는 전대협 구국결사대 소속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등 7개 대학생 47명에 의해 민자당 중앙당사 점거농성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강경대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내건 뒤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다가 전원 연행되었다.
경찰의 서울시청 앞 노제 원천봉쇄로 장례식을 두 번 치르다
강경대군 장례식은 사망 19일째인 5월 14일(화) 강경대의 모교인 명지대에서 발인과 영결식을 갖고 오후에 신촌로터리에서 추모집회를 가졌으나 범국민대책회의가 당초 계획했던 서울시청 앞 노제를 경찰이 불허하고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신촌로터리에서 있은 6인 열사추모집회에는 7만~8만 명이 주변도로를 가득 메웠고 강경대의 장례행렬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모인 시민은 50만 명이 넘었다.
영결식과 신촌로터리 앞 추모집회에는 당시 신민당 김대중 총재와 민주당 이기택 총재 등 야당의원들도 대거 참석했다.
경찰은 186개 중대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화여대 입구에서부터 운구행렬의 시청 앞 진출을 막았고 운구차가 이대 앞 사거리에 이르자 아현동 고개에서 최루탄을 난사했다. 서울시청 광장은 87년 이한열과 조성만의 노제가 열린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여서 경찰은 시청 쪽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운구차는 결국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되돌아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겨레신문 1991. 5. 15.자 1면]
분노한 집회참가자들은 오후 6시40분쯤부터 격렬한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저녁 8시20분쯤부터는 도심으로 진출, 명동성당 주변 을지로입구 종로2가 일대 등지에서 2만여 명이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부산 광주 마산 등 전국 47개 지역서도 밤늦게까지 시위가 이어졌다.
[한겨레신문 1991. 5. 15자 3면]
유가족들과 범국민대책회의는 5·18광주민중항쟁 11주년인 5월 18일(토) ‘노태우 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를 강경대 장례식과 함께 거행하여 다시 세브란스병원을 나섰다. 전국 81개 지역에서 40여 만 명이 거리에 나섰고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군과 여성 노동자 이정순 씨가 분신했다.
강경대의 장례 행렬은 이번에도 신촌로타리에서 시청 앞 노제를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하여 4시간 이상 대치한 끝에 결국 시청 앞 노제는 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이날 저녁 마포구 공덕동 로타리로 장소를 바꿔 노제를 치른 뒤 사망 23일 만에 장지인 광주광역시로 행했다.
장례행렬은 다음날인 19일(일) 오전 4시15분쯤 광주광역시 북구 동운동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에 도착하였고 전남도청 앞에서 노제를 치르기 위해 광주시내로 들어가려했으나 여기서도 경찰이 진입로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지하면서 망월동으로 직행할 것을 요구해 이날 저녁까지 경찰과 대치하며 격렬한 공방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서 대치 16시간만인 오후 8시쯤 시위대중 2명이 영구차를 빼내 금남로3가 광주은행 본점 앞 네거리에서 자정을 넘긴 심야에 노제를 치렀다. 운구차가 도착한 금남로 3가 일대는 학생들과 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0만여 명의 인파로 메워졌으며,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광주의 운전기사 차태권 씨가 분신하였다.
전남 도청 앞에서 치렀던 노제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경찰이 고속도로에서 망월동으로 통하는 길만 열어놓고 시내 진입로를 봉쇄하자 운암동으로 장례행렬을 마중을 나왔던 시민·학생들이 100여 명의 전경들을 무장해제시킨 것이다. 그리고 고속도로변의 넓은 배수로를 메우고 야산의 나무들을 뽑아내며 길을 열어 결국 도청 앞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광주 학생들은 그 싸움을 일컬어 「운암대첩」이라 불렀다.
강경대는 그런 여러 가지 일을 겪은 뒤에야 망월동에 묻혔다.
강경대가 망월동 제3묘원내 5 18묘역에 묻힌 시각은 이튿날인 5월 20일(월) 새벽 4시였다. 강경대의 유가족은 이날 유가협에 가입했고 강민조 씨는 추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장을 지냈다.
이렇게 하여 강경대의 장례식은 파란만장하게 끝났다.
[강경대 추모동판]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강경대가 사망한 4월 26일부터 그의 유해가 광주 망월동에 묻히기 직전인 5월 19일 밤까지 24일 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된 시위·집회 때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은 101,409발(하루 평균 4,225발)로, 이는 90년 한 해 동안 사용한 25만여 발의 40%에 해당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전국을 한 달 남짓 태풍으로 몰아치게 했던 강경대 사망사건은 1991년 5월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국회의원 외유사건, 수서비리사건, 페놀사건, 물가고 등의 악재로 10% 미만의 지지율을 기록하던 집권여당 민자당이 기초의회 의원선거로 겨우 숨을 돌리던 차에 일어나 노태우 정권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 것이었다.강경대 사건과 일련의 집회를 치르면서 재야 세력의 구심체로 등장한 범국민대책회의는 명칭을 ‘공안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바꾸고 전국 87개 시․군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상설기구로 전환했다. 투쟁 집행부를 연세대에서 명당성당으로 옮겼다.
범국민대책회의는 달아오른 투쟁열기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노태우 정권 실정에 대한 불만을 흡수해나간다는 전략 아래 5월 25일(토) 제3차 국민대회를 열었다.
116호 뉴스레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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