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호에 이어 계속>
파행으로 시작하여 파탄으로 끝난 구속적부심사 재판
당시 군사법원에서 구속적부심사청구 사건은 흔치 않았다. 9사단 군사법원측은 구속적부심사 재판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군 측은 허둥지둥했고 절차도 졸렬하게 진행했다. 하긴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어 버린 이 사건을 사단급 법무참모(대위)가 감당하기에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원만한 재판 진행절차를 상의하기 위해 여러 번 면담신청을 했으나 법무참모로부터 번번이 거부당하였다.
4월 1일(수) 9시 30분 9사단 군사법원 법정에서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다. 부대 밖에는 이미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중위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군은 개정 전 부대 정문에서 변호인과 직계 가족이 아닌 보도진이나 일반 방청객들의 부대 출입을 통제하였다. 특히 민주당 소속 현역 의원(당선자)들인 장기욱, 장석화, 강수림 변호사와 안동수 변호사(법무부장관 역임) 등 4명은 변호인 선임계와 신분증을 제시하였는데도 출입을 한동안 제한당하다가 개정시간에 임박하여서야 법정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정치인이기도 한 변호사들과 함께 변론을 한다는 게 필자로서는 부담스럽기는 하였으나 그분들도 피의자가 선임한 변호인인 만큼 협력은 하되 변론준비는 민변 쪽에서 주도하기로 했다. 민변에서는 필자와 임종인 변호사, 이기욱 변호사가 참석하였다.
개정을 하자마자 나는 인정신문을 하기 전에 변호인 대표 자격으로 일어나 전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니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실체적 진실규명, 절차적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공개재판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재판부(재판장 군판사 대위 최영수, 심판관 대위 정승기, 심판관 대위 이종호)는 군사 재판의 특성상 군의 비밀문제로 인하여 방청을 제한했다며 거부했다. 그런 공방이 오가다 10시경에 변호인들은 잠시 휴정을 요청하여 법정 안에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10:35분경 군사법정 안에서 이지문 중위와 면담을 하고 있던 민주당 장석화 의원(변호사)을 상부의 지시라면서 헌병대 보좌관(대위)이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면서 헌병 4명을 시켜 장 변호사님의 두 팔과 두 다리를 각각 잡고 번쩍 들어 법정 밖으로 강제로 퇴정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헌병 십 수 명을 법정 출입문에 배치하여 필자를 포함한 변호인과 가족들의 법정 출입을 막아버린 것이다(당시 피의자는 법정 안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유신 독재 때에도, 그 시퍼런 (군사재판이 아닌) ‘군법회의’ 재판 때에도 군인들이 변호인을 강제로 법정 밖으로 끌어냈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
11시, 재판이 속개되자 필자를 비롯한 변호인들은 공개재판을 재차 요구함과 아울러 상부의 지시가 누구의 지시였냐며 헌병들이 변호인을 강제로 퇴정시킨데 대해 해명과 사과, 처벌 그리고 재발방지를 요구하였다. 재판장은 자기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며 사과는 하였으나 방청객 제한을 해제할 수는 없다고 버텼다.
11시 40분 경 변호인들은 구두로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면서 정식으로 기피신청서를 곧 제출할테니 재판을 연기해 달라고 했고 피의자는 그 때까지 진술을 거부한다고 했다. 재판장은 심문기일을 추후에 속행하였다며 날짜도 정하지 않고 휴정을 선언하였다.
재판장은 다음날 (4월 2일) 9:30에 2차 심문기일을 열겠다고 당일에야 통지를 해왔으나 필자는 11시경 법정에 잠시 나가 재판장에 대해 기피신청을 하였으니 그에 대한 결정부터 해야 한다면서 당일 11:45경 기피신청서를 정식으로 접수하였다.
이와 함께 법관이 아닌 관할관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군사법원법의 법률조항은 위헌이라는 취지의 위헌법률심판 제청신청서도 함께 접수하였다. 만약 이대로 구속적부심 심문을 종결해 버리면 위헌제청신청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릴지도 몰라서였다. 그럼에도 군사법원은 기피신청에 대한 결정은 추후에 하겠다면서 당일 오후 3시에 심문기일을 강행하다고 하므로 할 수 없이 출석하였다.
재판장이 먼저 구속영장에 기재된 범죄사실에 관하여 심문하고 이 중위는 범죄사실 자체는 일단 인정하였다. 이어 필자가 미리 준비한 변호인심문사항에 따라 이 중위가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생각한 시기와 발표 여부를 심문한 후 양심선언 발표를 하게 된 ‘동기’를 묻자, 갑자기 군검찰관이 일어나 이는 구속적부심사에서 심리될 사항이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군검찰관은 명색이 법조인인데 아무리 상명하복의 군사재판이라고는 해도 범죄의 동기를 묻겠다는 걸 가로막는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탈영에 있어서도 그 범죄의 동기가 제일 중요한 내용이라고 반박하였으나 재판장은 이 중위에게 직접 양심선언 발표를 하게 된 동기를 짧게 묻고는 이 중위가 이에 답변하자, 검찰관은 필자가 준비한 심문사항 중 3항부터 22항은 구속적부심사에서 심리할 사항이 아니라고 계속 발목을 잡았다.
심문사항 3항부터 13항까지는 이 사건 증언서 기재 내용에 관한 것이고, 14항부터 16항까지는 위 발표를 하기 이전의 이 중위의 행적에 관한 것이며, 17항부터 21항까지는 원고가 체포, 구속되어 수사받은 과정에 관한 것이고, 22항은 군부재자투표의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피의자의 입장을 묻는 내용이었는데 그 내용에는 이 중위가 ‘증언’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군부재자 투표에서의 부정행위의 보다 상세한 내용과 추가로 폭로하는 내용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재판장도 이에 가세하여 위 심문사항은 발표를 하게 된 동기가 발생한 경위에 관한 것으로서 구속적부심에서 심리할 사항이 아니라며 변호인의 심문을 제한하여 결국 제대로 심문을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 버렸다. 군이 이 중위가 공개된 법정에서 추가로 군 부재자 부정사실을 폭로하기 것을 막기 위해 군검찰관과 재판장이 ‘협력’하여 변호인심문을 막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필자는 ‘피의자에 대한 변호인심문사항’이라는 서면을 취재 중이던 기자들에게 건네주고 내용을 확인해 보시라고 했다. 거기에는 추가 폭로할 내용들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비록 법정에서 심문은 하지 못했지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을 보니 ‘변호인 심문사항’에 관한 내용은 없고 민주당 장석화 의원이 강제로 퇴정당한 내용으로 장식되었다.
필자는 아하~ 이게 법조 출입 기자와 국방부 출입 기자의 차이가 아닌가 싶었다. 법조 출입 기자들은 중요 사건의 재판 때 방청객으로 들어와 취재를 하면서 변호인에게 심문사항이나 변론서 등을 달라고 요청하여 취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런 경험이 없는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변호인 심문사항’이 어떤 의미인 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대로 묻힐 수는 없어서 그 다음날 기자들에게 추가 선거부정 사실을 공개하였다.
재판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군사법원측은 당일 바로 구속적부심청구를 기각하였다(제9사단 보통군사법원 92초 제2호).
그로부터 5일이 지난 4월 7일 9사단 헌병대는 이 중위를 군검찰에 송치하였다. 같은 날 제9사단 보통군사법원(재판장 심판관 중령 이기수, 군판사 대위 오태희, 심판관 대위 정호영)은 재판관 기피신청(92초 3)을 기각하였고, 위헌법률심판 제청신청(92초 4)도 기각하였다.
국방장관의 부정(不正)선거 부정(否定) 발표
이 중위가 청구한 구속적부심 재판이 끝나자 국방부는 사건을 빨리 종결하려고 서둘렀다.
보도에 의하면 최세창 국방부장관은 구속적부심 재판이 진행된 4월 2일(목) 국무회의에서 “군부재자 투표와 관련해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국민과 국무위원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현재 국방부는 언론에 보도된 내용과 일부 민간단체에 신고된 군부재자 투표에 대한 내용을 추적, 사실조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최 장관은 이어 “민주당-국민당 등 야당들도 군부재자 투표와 관련한 자료를 제시하면 이를 철저히 확인할 방침”이라며 “조사결과의 발표는 늦어도 이번 주말을 넘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고, 정부 대변인인 최창윤 공보처장관도 이와 관련하여 “현재 국방부가 사실조사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고, 그 발표도 금주 말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면서 “언론이 단지 신고된 내용만을 가지고 사실확인 전에 일방적으로 보도하기보다는 정부발표를 지켜봐 달라”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언론에서는 국방부는 이지문 중위가 양심선언으로 밝힌 육군 제9사단의 군부재자 투표부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그대로 공개하면서 군부재자투표의 문제점이 군 전체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데 대한 국민의 양해를 구한다는 입장인 반면 초기수사를 지휘한 육본측은 이 중위의 동료-상관들이 양심선언내용을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부재자투표문제점을 전면 부인한 초기수사결과의 발표를 강력히 내세우고 있어 조사결과 발표내용과 발표시기가 유동적 상태에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런데 최세창 국방부장관은 4월 3일(금), 국방부산하 5부 합동조사반을 구성하여 육군 제9사단을 비롯하여 해병 제2사단, 방공포사령부 등에 대해 수사한 결과 이번 총선의 군부재자 투표과정에서 공개투표-기표확인-대리투표 등의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자행됐다는 것은 사실 무근으로 확인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최 장관은 발표문에서 “군부재자 투표에서의 공개투표 여부에 특히 중점을 두고 수사했으나 이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로 판명됐으며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투표내용을 확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재확인했다”면서 최 장관은 투표함 이송중 기표확인과 대리투표 등도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으며, 이번에 문제가 된 서신 검열기는 군의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최 장관은 그러나 일부 지휘관들의 정신교육에 정치적 오해를 살만한 내용이 있었으며 군부재자 투표제도의 개선을 추진하겠다면서도 여전히 시비의 소지가 있으므로 의무복무중인 병사들에 대해선 군복무 기간 중엔 선거권을 유보하도록 법제화하는 방안이 최선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위헌적인 발언을 하여 또 다른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국방부장관의 발표는 국방부와 육군, 정치권 등의 상충된 관점으로 진통을 거듭하던 부재자투표 부정문제를 조직적인 투표부정이나 공개-대리투표 등의 의혹은 사실이 아니며 일부 지휘관들의 실수에 의한 정신교육내용 에 문제가 있었다는 수준으로 국방부와 군의 기본시각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진실 규명은 이제 일반(민간) 법원의 몫이 되었고,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법원은 국방부장관의 발표내용이 허위라고 판결하였다. 서울지방법원 1996. 4. 19. 선고 95가합38634 판결(확정)은 최세창 국방부장관이 1992. 4. 3. 원고의 1992. 3. 22.자 군부대 내 부재자투표 부정행위에 대한 증언을 통하여 문제 제기된 군부재자투표 부정행위에 대하여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군부대 내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공개투표, 대리투표, 기표확인 등의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은 사실무근으로 확인되었고, 일부부대 지휘관들이 정신교육을 통하여 여당후보 지지를 강요하였다는 것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발언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이 중위가 허위의 사실을 조작하여 ‘증언서’를 발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 중위의 명예를 훼손하였다 할 것이므로, 피고(대한민국)는 그 소속 공무원의 직무수행상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이 중위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로 1천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대한민국 국방장관이 대국민 거짓말을 한 것이다. 군의 사기가 ‘진실’보다 더 소증한 것인가?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받은 이지문 중위
군검찰은 4월 14일 이 중위를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하였다.
이미 국군통신사령부 소속 이원섭 일병이 자신이 직접 대리투료를 했다며 한겨레신문에 제보를 하여 구속된 마당에(이원섭의 제보 내용과 재판 투쟁에 대해서는 이어서 연재할 예정이다) 만약 이 중위를 기소하게 되면 법정에서 또 다른 군부재자 부정투표 사실이 드러날까 우려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난 이 중위는 그 다음날 접견을 간 필자에게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주어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이 중위는 편지에서 “군 당국은 내가 증언한 선거부정에 대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의 노력을 보이기는커녕 진실을 묵살하고 은폐하려 했다”며 “이는 순간적으로 군 조직을 살리는 길일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조직에 대한 불신만 초래할 뿐이며 이번 일을 계기로 군부재자 투표제도와 군의 정치적 중립입장에 대한 개선책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파면처분과 이등병 강제전역 조치
군검찰이 불기소처분을 하자마자 인사권자인 9사단장은 4월 17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 중위를 파면하기로 결정하였고 국방부장관은 약 보름이 지난 5월 2일에 이를 승인하여 이 중위는 5월 4일자로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강제전역을 당했다.
어찌되었던 이날 군부대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운 몸이 된 이 중위는 5월 26일 국방부장관 앞으로 파면처분에 대한 항고장을 우편으로 보냈고 국방부장관은 7월 2일 국방부 징계항고 심사위원회의 심사 결과라면서 항고를 기각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다
드디어 8월 12일 서울고등법원에 파면처분취소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행정소송이라서 민변 고문으로서 민사소송과 행정소송의 대가이신 유현석 변호사님을 변호인단 단장으로 모시고 나와 임종인 변호사, 임홍종 변호사가 대리인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유현석 변호사님의 노련하고 날카로운 변론과 증인(반대)신문은 이제 초보 수준인 필자에게는 큰 가르침이었다.
이 중위의 증언을 증명해 줄 증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현역 군인들은 이미 기무사와 헌병대에서 사실무근이라는 취지의 진술서를 받아 놓았기 때문에 이 중위의 양심선언 이후에 전역한 사병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자유의 몸이 된 이 중위(아니 이 이병인가?) 최근 제대한 사병들을 찾아 만났더니 선선히 선거 부정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고 하면서 그들이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을 때에 만약 선거 부정사실이 드러나면 부대가 공중분해된다, 그러면 말년에 고생한다고 하여 사실대로 진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9월 24일 1차 변론기일이 열리자 지난 4월에 만기제대를 한 이 중위의 소속 2소대원 김00를 증인으로 신청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9사단 28연대장 대령 김00이 1992. 2. 18. 14:00경 대대사병 식당에서 대대 전장병을 모아놓고 정신교육을 한 사실을 근무 때문에 참석은 안했지만, 후에 들어서 안다, 연대장이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노대통령이 32%의 지지밖에 못 받고 대통령이 되니까 북한이 대남방송을 통하여 30% 대통령하고는 그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회담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한 일이 있다고 들었다,
증인 소속 6중대 중대장 대위 김00는 육사 출신으로서 평소 강직한 성품으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장교였는데 1992. 3초순경 중대원들을 대상으로 선거의 유래, 선거권의 발달과정 및 올바른 선거권의 행사에 관한 정신교육을 하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선거시 투표하는 것부터 각자 소신껏 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증인 소속 중대에서는 1992. 3. 18. 및 3. 20. 양일간 군부재자 투표를 실시하였다, 증인은 1992. 3. 19. 영내 내무반에서 전 중대원들과 함께 대기(휴식)를 하고 있었는데 당일 15:30경 중대장은 소대장을 포함한 전중대원들을 정신교육을 한다며 화기소대 내무반에 집합시켰다,
중대장의 집합명령은 기무대에서 왔다는 대위가 중대장을 찾아와 면담을 한 뒤 그가 돌아간 직후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중대장은 전 중대원들을 모아 놓은 뒤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는데 평소와 다르게 중대원들을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약 10여 분간 뒤돌아서 흐느낀 뒤 침통한 표정으로 중대원들에게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다. 중대장은 “여러분에게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한 것은 기억이 나나 이것이 올바른 길이 아닌 줄 잘 알고 있지만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하지 않았으면 여당 쪽으로 투표해라”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나 여당을 찍을 것을 암시하는 말은 했고 당시 증인을 포함한 중대원들은 위 중대장의 정신교육내용이 여당을 찍으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1992. 3. 19. 기무대장교가 중대장을 만나고 간 후 불시에 집합해서 정신교육을 할 때 분위기가 어두웠는데 중대장은 평소와 다르게 중립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게 말을 하여 중대원들이 여당 쪽으로 투표를 했다.
중대장 정신교육이 끝난 뒤 원고는 소대원들을 따로 모아 너희 양심껏 투표하라고 말한바 있다, 중대장 정신교육 후 당일 저녁 6시경 소대 내무반장인 증인은 소대예하 내무반장 4명을 불러 그들에게 “우리 때문에 중대장님이 괜히 피해를 봐서 되겠느냐. 소대장님은 단기장교이지만 중대장님 육사 나와서 계속 직업군인의 길을 가야하지 않느냐. 나 같으면 중대장님 봐서 여당 찍어주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고 그들은 모두 증인의 말에 수긍하였다.
당일 저녁 점호를 마친 뒤 21:30경 각 내무반별로 내무반장 주재로 다시 점호를 취하였는데 각 내무반장들은 증인의 뜻을 소대원들에게 전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긍하는 반응이었다.
증인 소속 중대원 약 80여 명은 다음날인 1992. 3. 20. 부재자 투표를 하였고 같은 날 투표가 끝난 뒤 증인은 소대원들에게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고 말한바 있다.
증인은 만약 중대장의 정신교육이 없었더라면 자유롭게 후보자를 선택하였을 텐데 실제로 그러지 못하고 중대장의 뜻대로 투표하였다,
증인은 총선거 기간 중 부대분위기가 사병들이 자유로운 투표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증인은 부재자 투표 후 본부 중대소속 병장으로부터 본부 중대인사계인 이등상사가 중대원들에게 “군생활기간이 적게 남은 사람은 알아서 투표하고 군 생활기간이 많이 남은 사람은 ‘투표 잘해라”라는 말을 했으며, 또한 본부 중대원들은 중대장이 보는 앞에서 투표했다는 말을 들었다,
5중대의 경우 중대장이 기표소에서 1번 찍으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증인은 부재자 투표당시 사단에 가면 검열기가 있어 누가 몇 번을 찍었는지 다 체크하고 있으며 부재자 투표봉투도 일반풀이 아닌 뜯기 쉬운 딱풀로 붙였다는 말을 들었다,
증인은 원고가 “군부대 부재자 투표 부정행위에 대한 증언”을 한 사실을 3. 23. 월요일 아침에 T.V. 뉴스를 보고 알게 되어 놀랐고 그 내용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고의 “군부대 부재자 투표부정행위에 대한 증언”후 사단에서는 자체조사를 한다며 사단소속 준위, 일등상사 등이 증인소속 중대에 와 부재자 부정여부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사실이 있다,
그때 사단 조사관들은 중대원들에게 “너희들 평소에 구타가 있어도 설문조사시에는 구타가 없다고 쓰는데 이번일은 잘 알아서 쓰라”고 말하며 부재자 투표시 선거부정이 없다는 쪽으로 유도한 바 있다,
증인을 포함한 중대원들은 만약 사실대로 쓴다면 문제가 커질 것 같고 그럴 경우 사병들의 휴가, 외출, 외박, 면회금지 등 현실적인 불이익이 생길 것 같아 피해가 안 생기는 쪽으로 피해간다는 생각으로 사실대로 쓰지 못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 중위가 밝힌 내용 거의 그대로였다.
7중대 소속 서무병으로 복무하다 1992년 9월에 만기제대한 김00도 7차 변론기일(1993. 5. 20)에 출석했다.
그는 중대 서무병으로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시 부재자투표업무를 담당하였다면서 본부 중대의 경우 소속 중대원들은 중대장이나 인사계인 이등상사가 보는 앞에서 투표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타중대 동기들로부터 들었다,
원고의 “군부대내 부재자투표 부정에 대한 증언” 후 다음날 부대에서 선거부정이 없다는 쪽으로 신문조사를 하고 교육시킨 일이 있다,
증인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상급부대나 헌병대(군검찰)에서 조사 받은 일이 있는데, 당시 증인은 사실대로 진술서를 쓸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대장이나 중대장이 “대대가 공중분해 된다”며 간접적으로 교육했다, 증인은 그 교육 때문에 7중대의 경우 선거부정이 전혀 없었다고 거짓 진술서를 작성한 것이 사실이라고 증언하였다.
6중대 서무병으로 복무하다 1992년 11월에 만기제대를 한 김00는 9회 변론기일(1993. 7. 22.)에 출석하였다.
그 역시 1992. 3. 19. 15:30경 6중대장 김00 대위가 소대장을 포함한 전중대원을 정신교육한다며 화기소대 내무반에 집합시켰는데 당시 중대장의 정신교육집합은 예정되어 있지 아니하였으며 불시에 이루어졌다,
선거기간 중 증인소속의 중대장은 선거교육에 대해 자주 불만을 토로하였다고 증인은 생각하며 중대장은 성격이 곧아서 가끔 불만을 토로한 적도 있다,
증인은 대대 인사과에서 행정관 황00 준위가 부재자투표봉투를 일반풀이 아닌 딱풀로 붙이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렇게 시행하지 않았다,
증인이 중대에서 시험해보니까 딱풀로 봉투를 붙일 경우 뜯기가 용이하고 흔적이 잘 남지 않았다, 딱풀 준비를 하라는 말은 개봉을 해보기 위한 것이라고 증인은 생각했다, 증인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상급부대나 헌병대(군검찰)에서 조사받은 일이 있는데 사실대로 진술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반면 같은 날 출석한 장교 출신 김00 중대장은 선거관련 정신교육을 실시한 사실은 있으나 여당을 찍어달라는 말은 한 적이 없고, 부재자투표 직전 대대에서 전 대대사병들을 출신지별로 분로하여 성향을 분석한 바는 있는데 이는 부재자신고의 편의를 위해서였으며, 부재자투표 직전 중대장실로 계급별로 사병 몇 명씩을 불려 면담하면서 여당을 찍으라고 한 적은 없고 단지 간부연구실에 기표함을 설치해놓고 3~4명 정도를 모아 투표요령을 교육했다고 사병들과는 전혀 다른 증언을 하였다.
그런데 이 중위가 구속된 뒤인 1992. 3. 25.부터 이 중위의 직책이던 6중대 2소대장으로 근무하다 전역한 박00은 10차 변론기일(1993. 8. 26.)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앞선 장교의 증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언을 하였다.
그는 1992. 3. 20. 20:00경 경기 파주군 문산읍 소재 국제부페에서 증인의 전역 100일전 회식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참석자는 모두 학군장교출신인 증인, 원고, 5중대장 대위 음00, 7중대장 대위 김00, 본부 중대장 대위 문00 등 13명이었다,
위 회식당시 증인 등 참석자들은 식사를 하면서 증인의 전역에 대한 축하의 말과 건배를 한 다음 본부 중대장이 “우리는 인사계가 잘해주어 단 두표만 제외하고 모두 여당표다” 등으로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부재자투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이어 7중대장이 “우리는 계급별로 몇 명씩 중대장실로 불러 투표하였고 역시 평소에 의리가 있는 놈들은 중대장이 선거 때문에 고심하는 것을 알고 아무 말 않고 1번을 찍더라”라는 등의 이야기를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대략 그런 뜻의 이야기를 했다,
또한 5중대장은 “그래도 7중대장님은 이제 참모로 가시니까 다음 선거는 관계없지 않습니까. 저는 애들한테 인간적인 측면에서 호소하는 것이 중대장으로서 서글픕니다. 다음 선거 때가 더 걱정입니다. 우리중대와 8중대는 투표할 때 기표소에 중대장이 가서야 1번 찍으라는 말을 서너차례 했고 중대참관인인 중위 김00을 통해 알아보니 그의 말이 우리중대는 충분히 80퍼센트를 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본부중대장은 원고에게 “대대장이 ‘간부들은 다 1번을 찍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2번을 찍었더라’면서 섭섭해 하더라”고 말한 것은 위 회식당시에 들은 사실은 없고 위 회식하기 전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대대장은 1992. 3.중순 전간부회의에서 “군의 통수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충성을 다해야한다. 군은 대통령이 속해 있는 여당에 투표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말을 했고 중대의 여당지지율이 적어도 80% 이상은 나와야 한다고 중대장들에게 말한 바 있다,
회식시 본부중대장 대위 문00은 “우리 중대는 신병들이 있기 때문에 인사계가 인솔하여 기표소가 설치된 7중대로 가서 몇 명씩 모아서 투표를 했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위 본부중대장이 7중대장인 대위 김00에게 무효표 안 나오게 잘 되고 있느냐고 물으니 위 김00 대위가 “우리 중대는 평소 소대장들이 교육을 잘 시켰는지 투표를 잘하고 있더라”라는 말을 하였다,
증인은 본부중대의 경우 단 두표만 제외하고 여당표라든지, 7중대의 경우 중대장이 계급별로 몇 명씩 불러 투표하였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고 들었다,
위 회식시 5중대장 대위 음00가 선거에 관하여 한 말은 “이제 홀가분하다 선거 때만 되면 부재자투표에 관한 행정업무와 주소지 변동 등에 대한 정확한 확인 등이 어려워 중대장 생활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푸념조로 이야기를 하였고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몇 석이나 나올까”라는 선거에 대한 궁금증도 말했다,
증인은 5중대장과 8중대장이 기표소에서 1번을 찍으라고 말한 사실과 5중대의 경우 여당투표율이 80%를 넘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한 바는 없다,
증인은 증인이 근무하는 대대에서 대대장을 보좌하는 정훈장교이기 때문에 간부회의에 참석했으며 당시 간부회의에서의 주요회의의제는 1번 표가 많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고 여당을 찍으라는 대대의 직접적인 말은 없었어도 유도성의 발언은 했다,
증인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9사단 보통검찰부에서 진술한 사실이 있는데 당시 증인의 입장이나, 부대의 분위기 등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
전역은 하였지만 공개된 법정에서 증언하기가 어려운 입장이었을 증인들이 그래도 법정에서 진실을 증언해 준 것은 아직 우리나라 국민들의 양심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소판결, 마침내 진실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하다
13차 변론기일을 마친 뒤 재판부는 1993. 12. 30. 오전 10시에 판결을 선고하였다. 결과는, 독자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파면처분을 취소하라는 승소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서울고법 1993. 12. 30. 선고 92구21076호 판결1), 재판장 김종배 부장판사) 육군 중위로 보병 제9사단 28연대 6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원고가 소속 대대장인 중령 홍00의 허가 없이 1992. 3. 20. 23 : 00경부터 같은 달 21. 05 : 10경까지 약 6시간 동안 및 같은 달 22. 11 : 30경부터 같은 날 23 : 10경까지 약 12시간 동안 2회에 걸쳐 위 근무 장소에서 출타하여 서울에 체류하였고, 위 제2회 출타기간 중인 1992. 3. 22. 21 : 30경부터 같은 날 23 : 00경까지 어느 누구의 허가도 없이 서울 종로구 종로 5가 소재 공명선거실천시민협의회 사무실에서 각 방송국 및 언론사 기자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기자회견의 형식으로 이 사건 증언서 기재와 같은 내용의 발표문을 발표하였던 것과 관련하여 원고가 사단 위수지역 외의 외출, 외박에 관한 승인권자인 대대장의 승인을 받지 아니하고 사단 위수지역 밖으로 이탈하였고, 원고는 이로 인하여 외출, 외박에 관한 위 법령의 규정을 위반하였고(선거 부정을 사실상 지시한 직속 대대장에게 양심선언을 할 테니 외출, 외박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과연 이를 승인해 줄 대대장이 있을까?) 또한 원고는 군인의 신분으로 군인의 대외발표에 관한 승인권자인 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지 아니하고 이 사건 증언서를 발표하여 군인의 대외발표에 관한 위 법령의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전제한 다음(선거 부정 사실을 폭로할 테니 공선협에서의 기자회견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과연 이를 승인해 줄 육군참모총장이 있을까?), 가장 중요한 내용 즉 이지문 중위가 ‘증언서’에서 폭로한 내용이 진실인지 여부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다.
“증인 김00, 김00, 박00의 각 증언에 변론의 전취지를 종합하면, (중략) 이 사건 증언서 기재 내용 중 명예훼손과 관련된 부분은
① 원고의 소속연대장과 관련하여, 『연대장이 대대원들에게 다른 교육을 시키던 도중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 32%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자 북한의 대남방송에서 ‘30%짜리 대통령은 그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회담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는 집권 여당에게 투표함으로써 정치안정과 통일문제의 해결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내용을 약간 비쳤다』,
② 원고의 소속 대대장과 관련하여, 『대대장은 전 간부회의(하사관급 이상 간부)에서 “군의 통수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군은 대통령이 속해 있는 여당에 투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대의 여당 지지율이 적어도 80% 이상이 나와야 한다고 중대장에게 대대장이 교육 하였습니다”, 『제6중대 김병수 중대장은 1992년 3월 4일경 선거법 발달과정, 올바른 선거권의 행사를 위한 교육을 본인(원고)을 시켜서 대원들에게 실시한 적이 있는데, 이후 대대장이 중, 소대장을 불러서 “괜한 일을 뭣하러 하느냐”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대장이 20일 오전 10시 30분경 본인을 불러 “왜 너희 중대는 정신교육을 늦게 실시하느냐. 소대장이 나서서라도 해야 하지 않았느냐, 집단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 대 일로 했어야 했던 것 아니냐”면서 “네가 누구를 찍었는지 내가 연대에 가면 다 알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고 발언하였습니다』,
③ 본부 중대장과 관련하여, 『20일 20시 30분 경 대대급 학군장교들 모임을 갖고 있던 문산 국제뷔페에서 선거에 대한 이런 저런 말을 나누던 중 본부 중대장이 “우리 중대는 단 두 표만 제외하고 다 여당표다”라는 발언을 직접했습니다』, 『또 그날저녁에 있은 학군장교 모임에서 본부 중대장이 발연하기를 “대대장이 ‘간부들은 다 1번을 찍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2번을 찍었더라’면서 섭섭해 하더라”고 하였고』,
④ 본부중대 인사계 상사와 관련하여, “본부중대의 경우는 인사계(상사) 앞에서 공공연하게 공개투표를 하였으며”,
⑤ 5중대장 및 8중대장과 관련하여, 5중대와 8중대의 경우에는 기표소에서 중대장이 “1번 찍어라”라고 하여 투표행위에 영향을 미쳤으며, 5중대 참관인을 통해 여당표가 얼마나 나오는지 파악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결과 “우리 중대는 80%가 충분히 넘었다”고 5중대장이 직접 말했습니다』,
⑥ 6중대장(김00)과 관련하여, 『19일 오후에 기무대 사단 파견 반장(계급 : 대위-이름은 모르지만 얼굴과 출신은 알고 있음-보안반장[군단에서 사단 기무파견대]이 중대에 찾아와서 중대장과 면담한 후 바로 중대장이 중대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정신교육, 즉 “자신도 올바른 것이 아닌 것은 알지만 현실적 여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투표에서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않았으면 여당에게 투표하라”는 내용의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⑦ 7중대장과 관련하여, 『7중대의 경우 중대장이 계급별로 몇 명씩 불러 여당을 찍으라고 하였고, “의리가 있는 놈은 투표용지를 내 앞에 갖고 와서 ‘저 1번 찍겠습니다’ 하고서 1번에 기표하더라”고 의리 측면에서 발언하였습니다』
⑧ 보안반장과 관련하여, 『부재자 투표한 투표 봉투의 발송을 책임을 실질적으로 기무파견대(보안반장)에서 맡고 있습니다. 때문에 공공연하게 “투표행위를 서신 검열기를 이용해 중대별 대대별 표본조사를 하겠다”는 말을 하고, 이번 투표율을 가지고 4월 10일경 있을 장교 고과평점(진급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에 반영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인데, 원고가 위와 같이 발표하면서 위 관련 군인들의 위 제 ①, ②, ⑥, ⑧항의 행위는 관련 군인들의 그와 같은 행위를 원고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 위 제 ③, ④, ⑤, ⑦항의 행위는 1992. 10. 20. 20 : 30경 문산 국제뷔페에서 열렸던 대대급 학군장교들 모임에서 관련 중대장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것으로 각 발표하였고, 위 관련 군인들은 원고가 발표한 위 제 ① 내지 ⑧항 기재와 같은 말과 행동을 하였던 사실을 각 인정할 수 있고 이에 배치되는 수사기록 진술서 등의 기재나 증인 김00(중대장 출신)의 증언은 이를 믿을 수 없다.
다만, 재판부는 이 중위가 위 관련 군인들의 위와 같은 행위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공개함으로써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손상시켜 군인복무규율 등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법령을 위반한 것은 군인사법 제56조 소정의 징계사유인 『군인으로서 군율에 위반하여 군풍기를 문란하게 하거나 그 본분에 배치되는 행위를 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판시하면서도, “원고는 1968. 6. 22. 생으로 1991년 고려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학군 29기로 소위에 임관되어 보병 9사단 28연대 소대장으로 성실하게 군복무를 하고 있던 중 군복무 1년여가 지난 1992. 3. 30. 에 실시되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앞서 실시된 부대내 부재자 투표가 매우 혼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부대내 부재자 투표가 종료된 날인 같은 달 20. 에 있었던 앞서 본바와 같은 학군장교들의 회식 모임에 모인 장교들의 입에서 조차 혼탁한 부재자 투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위와 같은 군부재자 투표에 관한 혼탁상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고 근무시간이 끝난 저녁시간과 비번시간을 택하여 위와 같은 행위를 하였고, 이 사건 증언서에 의하여 군부재자 투표의 혼탁상을 발표하면서도 원고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다른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없기를 바란다는 요청과 군부재자 투표가 공정하게 실시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개선될 것에 대한 희망을 아울러 표명하였으며 발표 후에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원고의 행위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과를 잊지 아니하였던 사실, 원고는 이 사건으로 제9사단 보통검찰부에 무단이탈,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등으로 입건, 구속되었으나, 명예훼손의 점에 관하여는 위 관련 군인들이 원고의 처벌을 원치 아니하여 공소권이 없어졌고, 무단이탈의 점에 대하여는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던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는데 원고가 이 사건 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 및 경위, 이 사건 증언서의 내용, 법령위반의 정도, 원고의 나이와 학력, 형사상의 처분결과 등 앞서 본 바와 같은 사실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정을 종합해 볼 때, 원고에 대한 징계의 종류로서 파면을 택한 이 사건 처분은 비록 원고가 군인이라는 신분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원고가 저지른 위와 같은 위반행위에 비추어 지나치게 무거워 재량권을 일탈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판결하였다.
이 중위의 양심선언이 징계사유 자체에는 해당된다고 판단한 부분은 지극히 유감스러우나 그가 어렵게 공개한 군 부재자 부정투표의 진실을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럼으로써 그가 다시 장교로 복귀하여 명예롭게 전역할 수 있게 된 점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 판결은 양심선언으로 징계를 당한 사람에 대해 법원이 처음으로 복권을 결정한 것으로, 당시 양심선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파면되어 법원에 계류 중인 이문옥 전 감사관과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행정소송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이 중위나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동안 군 부재자 투표의 악몽을 몸소 체험해온 국민들과 현역 장병들에게도 더 이상 선거 부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장해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승소판결을 선고를 듣고 연말연시를 이용하여 아내와 함께 3박 4일의 대만 여행을 떠났다.
다음날 타이페이의 어느 허름한 호텔 앞에서 구입한 신문에서 이 중위의 승소판결 기사가 서울발로 실려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중위 사건은 국제적인 뉴스였던 것이다.
하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아직도 군대에서 부정선거를 자행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적인 웃음거리일 터일 것이다.
하지만 원고 승소 판결을 순순히 수용할 국방부(9사단)가 아니었다. 대법원에 상고를 하여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대법원은 마침내 1995. 2. 3.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94누 1531호 판결).2)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원심의 인정판단은 원심판결이 설시한 증거관계에 비추어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되고, 또한 원심이 인정한 바와 같이, 원고는 학군출신의 소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중 군부재자투표에 관한 혼탁상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껴 이 사건 발표에 이르렀고, 발표내용 중 관련자들의 행동과 발언의 내용이 진실에 부합하는 점, 원고가 위 발표를 함에 있어서도 근무시간을 엄수하고 비번시간 등을 이용하였으며, 발표 후에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 것으로 인정되는 점, 위 발표내용 중에 원고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고 있고, 관련자들이 명예훼손의 점에 관하여 원고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아니한 점 및 위 발표행위로 인한 법령위반의 정도, 원고에 대한 형사사건의 처리결과 등을 종합하면, 원고를 징계파면한 이 사건 처분은 원고의 군인신분과 군인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원고의 행위에 비추어 지나치게 중하여 재량권을 일탈한 것이라고 판단한 원심의 조치는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되고, 거기에 재량권의 범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판결이유가 다소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중위의 양심선언이 승리한 것이다. 이날 주요 뉴스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군의 2차 징계처분
대법원에서 파면처분취소판결이 확정되자 9사단장은 1995. 3. 16. 재차 징계위원회를 개최하여 파면처분사유와 똑같은 사유로 이 중위에게 정직 3개월의 징계처분을 하였다. 당시 군인사법에 의하면 징계처분은 중징계와 경징계로 하고 중징계는 이를 파면·강등·정직 및 감봉으로 구분하는데 강등 보다 낮은 정직 처분을 한 것이다.
육군참모총장은 아직 정직처분 기간 중인데도 1995. 3. 25.자로 중위로 전역명령을 하였다.
이 중위는 1995. 3. 23. 징계항고를 제기하였는데 국방부장관은 1995. 5. 16. 항고를 기각하였다. 이 중위는 1995. 3. 22. 9사단장을 상대로 징계처분 무효확인 등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서울고등법원 1995. 12. 14. 선고 95구7996호). 이 중위에 대한 종전의 1992. 5. 2.자 파면처분이 대법원 판결에 의하여 취소로 확정된 이상 파면처분은 소급하여 무효가 된 것이다, 단기복부장교인 이 중위는 의무복무기간인 3년(실제로는 2년 4개월인 1993. 6. 30.자)이 지났으므로 그 날에 전역이 된 것인데도 또 다시 징계처분을 한 것은 무효라는 등의 이유를 추가하였다.
이에 대해 피고는 원고가 국방부장관의 전역명령에 의하여 이 사건 처분이 있은 지 9일 만인 1995. 3. 25.자로 전역되어 정직처분의 집행이 불가능하게 된 이상 정직 처분으로 이 중위가 법률상 아무런 불이익을 받은 바 없으므로 이 사건 처분의 무효확인을 구할 소의 이익이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중위가 9일 만에 전역되어 정직처분으로 인하여 아무런 재산상 손해를 입은 바 없으며, 어떠한 신분상의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없고, 사회생활상의 어떠한 권리 또는 법률상의 지위에 대한 위험이나 불안을 제거할 필요성도 없다는 이유로 각하판결을 하였다. 정직처분을 한 다음 바로 이어서 전역명령을 내려 정직처분에 대해 법원에서 다툴 실익을 주지 않고 봉쇄해 버린 것이다.
손해배상청구를 하여 2,300만 원의 배상금을 받다
행정소송이 모두 마무리되자 이 중위와 나는 1992년 양심선언 이후부터 가장 최근까지 국방부와 군 당국이 저지른 위법행위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로 하였다.
이 중위는 소장에서 청구원인으로서, (1) 보병 제9사단장의 위법한 파면처분으로 인하여 원고가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입었고, (2) 피고가 원고를 불법구금하였고, (3) 변호인의 접견 요구를 거부하여 원고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고, (4) 접견거부처분에 대한 준항고장의 접수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준항고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아니하여 원고의 공정·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고, (5) 구속적부 심문기일의 휴정 중에 원고의 변호인인 소외 장석화를 위 9사단 헌병들이 강제로 법정 밖으로 끌어내고, 가족 및 변호인들의 법정 출입을 통제하는 등으로 원고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고, (6) 구속적부 심문기일에 변호인들의 심문을 제지하여 원고의 정당한 재판 및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고, (7) 국방부 대변인 및 국방부장관의 성명과 국방일보의 보도를 통하여 원고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하였고, (8) 원고에 대한 파면처분 후에도 원고를 감금하여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하였다.
서울지방법원은 1996. 4. 19. 피고(대한민국)은 원고(이지문)에게 금 2,3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하였다(95가합38634 판결). 3)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첫째, 수방사 헌병단 군인들은 1992. 3. 22. 23:00경 영장 제시 없이 원고를 체포하고, 같은 달 24.에야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여 발부받은 다음 같은 날 09:30경 이를 집행함으로써 결국 원고에 대한 위 체포행위 및 위 체포시로부터 위 구속영장이 발부, 집행될 때까지 약 34시간의 구금행위는 불법체포 및 불법구금에 해당하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2백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둘째, 수방사 헌병단 소속 군인들은 원고를 구금하고 있는 동안 원고의 변호인이 되려는 변호사들의 접견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원고의 변호인으로부터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으므로 원고에게 역시 2백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셋째, 9사단 보통군사법원이 1992. 4. 1. 원고에 대한 구속적부심사 청구사건의 심문을 진행하던 중 원고의 변호인들이 재판의 공개 여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서 휴정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여 휴정하는 동안 9사단 헌병대 소속 군인들이 위 군사법원의 재판장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아니한 채 원고의 변호인으로 출석하고 있던 변호사 장석화를 그의 팔, 다리를 들고서 강제로 법정 밖으로 끌어내고, 원고의 가족 및 변호인들의 법정에의 출입을 통제하여 원고와 접견할 수 없도록 방해함으로써 원고의 변호인으로부터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으므로 원고에게 1백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넷째, 국방부 윤창로 대변인이 1992. 3. 23. 원고의 1992. 3. 22.자 군부대 내 부재자투표 부정행위에 대한 증언과 관련하여 “언론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왜곡, 확대 보도하여 군의 사기를 위축시킨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국방부는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하여 왔다고 밝히고, 원고와 관련하여서는 원고가 증언한 공개투표, 기표확인행위 등에 대해서는 상식 밖의 일로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이것이 소영웅주의에 의한 것인지 외부의 사주를 받아 선거 직전에 의도적으로 행한 것인지는 철저한 진상을 가려 국민 앞에 밝혀야 할 사항이므로 5부합동조사에 착수할 것이고, 발표 내용 대부분은 원고 본인이 직접 간여하였거나 확인한 것이 아니라 주변이야기를 중심으로 작성한 것으로 허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는 내용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원고의 이 사건 증언 행위가 소영웅주의에 의하거나 외부의 사주를 받아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며 발표 내용이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므로 5백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다섯째, 최세창 국방부장관이 1992. 4. 3. 원고의 1992. 3. 22.자 군부대 내 부재자투표 부정행위에 대한 증언을 통하여 문제 제기된 군부재자투표 부정행위에 대하여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군부대 내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공개투표, 대리투표, 기표확인 등의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은 사실무근으로 확인되었고, 일부부대 지휘관들이 정신교육을 통하여 여당후보 지지를 강요하였다는 것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내용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하여 일반인으로 하여금 원고가 허위의 사실을 조작하여 이 사건 증언서를 발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므로, 원고에게 위자료 1천만 원을 지급하고,
여섯째, 국방부가 발행하는 1992. 4. 26.자 국방일보의 ‘안보의 창’란에서 국방일보 임수영 해설위원이 “일부 언론의 왜곡기사를 개탄한다.”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이충무공에 비유한 시중일간지의 기사를 비난하면서, 원고와 관련하여서는 “파면된 장교가 일부 언론매체의 부추김 아래 소위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함으로써 일파만파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국민의 의혹을 산 군의 공개투표와 개표확인 등 조직적인 부정투표행위란 전적으로 왜곡·조작된 것이라 함은 분명해진 사실이다. 군 내외에서 횡행하는 뜬 소문을 왜곡·과장하고 임의로 조작, 군위신에 먹칠을 하여 전체 장병들의 사기·단결·군기에 훼방을 놓은 것은 군기위반을 넘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범죄적 해군행위임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파면된 장교의 범죄적 해군행위는 북한의 대남적화침략에 전적으로 추종, 봉사하고 나서는 사회 일부세력의 반국가·반체제적 음해공작과 맥락을 같이 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충분히 있다. 군에서는 그런 반국가적 고의성은 불문에 붙인 채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소영웅주의적 행동으로 보고 징계위원회를 통한 파면으로 가장 가벼운 처분을 한 것이다.”라는 내용의 논설을 게재하여 그 독자로 하여금 원고가 발표한 이 사건 증언서 기재 내용은 뜬 소문에 불과한 사실을 원고가 왜곡·과장하고 임의로 조작한 것이며, 원고의 이 사건 증언 행위는 범죄적 해군(害軍)행위로서 북한의 대남적화침략에 추종하는 반국가적 세력의 음해공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므로 원고에게 위자료로 3백만 원 등 총 2천3백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명예회복 후 전역한 이지문 중위는 1995년 6월에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제4대) 최연소 서울시 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이후에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공익의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들’ 사무국장과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사회교육 실장, 경찰청 반부패교육 강사, 서울시교육청 시민감사관,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 부대표 등 다양한 시민운동을 하여 왔다.
영외투표를 허용하는 선거법 개정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아있는 비민주적인 법과 제도들이 대폭 개선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중위가 폭로한 군 부재자 투표의 부정행위를 제도적으로 막기 위하여 1992년 12월에 치러지는 제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선거법4)이 대폭 개정되었다.
후보자·정당 및 국민이 보다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치를 수 있고 선거관리기관으로 하여금 선거관리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선거운동은 정견·정책의 대결이 되도록 그 방법을 개선하고 부재자투표의 관리를 더욱 강화하는 등 당시까지의 각종 선거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개선·보완하였다.
즉, 부재자투표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부재자신고인의 대상을 확대하고, 원칙적으로 부재자신고인은 선거관리위원회가 설치한 부재자투표소에서 부재자투표관리위원회의 관리와 정당추천참관인의 참관 하에 투표를 행한 후 이를 우체국장에게 인계하여 우편 발송하도록 하였다.
또한 부재자투표기간(10일)중 특별한 사유로 계속하여 선거관리위원회가 설치한 부재자 투표소에 갈 수 없는 부재자신고인은 소속기관·시설의 장이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그 기관·시설 내에 설치한 부재자투표소에서 부재자투표관리위원회의 관리와 정당추천참관인의 참관 하에 투표가 행하여지도록 하고, 예외적으로 거동이 불가능한 자나 격·오지 등에서 근무하는 군인 등 부재자투표소에 갈 수 없는 특별한 경우에만 거소에서 기표하도록 함으로써 부재자투표의 공정성을 제고하였다.
우송중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회송용 외봉투의 봉함부분에 부재자투표관리위원회가 확인인을 날인하거나 거소투표인이 서명 또는 사인을 날인하도록 하였다.
이 중위가 ‘증언’에서 제안한 외부참관인제도 등이 마침내 입법화되어 그 이후 적어도 군에서의 부재자 투표에 관하여는 더 이상 공정성 시비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서 사실상 그대로 재현되었다. 군 당국이 이른바 ‘종북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여기에 ‘댓글’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이 깊숙이 관여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군 사법권의 독립을 위한 군사법원법 개정
공직선거법의 개정에 못지않게 중요한 군사법체계도 대폭 개선되었다.
이 중위의 구속적부심사 재판 등을 통해 전적으로 관할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군사법 체계를 바로잡아 군사법권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군법무관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부단한 노력이 진행되어 왔는데 그 가운데 안병희 군법무관(당시 소령, 현재는 변호사로서 서울지방변호사회 감사)의 역할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필자의 대학 1년 후배이기도 한데 1986년 제7회 군법무관시험에 합격하여(법무 7기) 1군단 법무참모로 복무하면서 예하 사단의 이지문 중위 사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필자가 군사법원법의 제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위헌소송을 제기하자 그는 이를 더욱 더 입법적으로 연구하고 여론화하여 국회에서 군사법원법을 개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1992년 4월 7일 9사단 군사법원이 위헌법률심판 제청신청을 기각하자 4월 10일 헌법재판소에 군인에 대한 구속영장을 군판사가 아닌 ‘관할관’이 발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군사법원법 제238조, 제250조, 제244조, 제252조 등은 헌법 제27조 제1항 및 제110조에 위반되는 위헌규정이라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그러자 1993년 정기국회에서 군사법원법에 개정되어 1994년 7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5) 국회는 당시 사회민주화 및 군의 발전추세에 따라 군사법제도의 불합리한 요소들을 개선함으로써 군사법권의 독립 및 군사법제도의 효율적인 운영으로 국민의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군의 민주화에 기여하려는 것이라고 군사법원법의 개정 이유를 밝혔다.
이를 위해 국방부 및 각군본부에 두던 고등군사법원을 통합하여 국방부에 설치하도록 하고 국방부장관을 관할관으로 하였으며, 보통군사법원 및 고등군사법원의 재판부구성을 개선하여 군판사의 비율을 높였다(보통군사법원은 군판사 2인과 심판관 1인으로 구성).
군검찰부를 군사법원으로부터 독립하여 설치하고 검찰수사관제도를 신설하였다. 무엇보다도 구속영장의 발부권자를 관할관에서 군판사로 변경하고, 다만 검찰관이 구속영장청구시에 소속부대의 장의 승인을 요하도록 완화하였다. 6) 관할관의 확인조치의 대상이 되는 판결의 범위를 제한하고, 형집행면제권을 폐지하며, 항소심에서의 확인조치권은 폐지하였다. 반면 약식절차제도를 신설하였다.
이처럼 군사법원법이 대폭 개정되고 나자 헌법재판소는 1995년 2월 23일 심판청구를 각하하였다(92헌바18 군사법원법 제238조 등에 대한 헌법소원). 7)
헌재는 결정문에서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2항에 의한 헌법소원에 있어서는, 법원에 계속중인 구체적 사건에 적용할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로 되어야 한다. 이 경우 재판의 전제가 된다고 하려면, 우선 그 법률이 당해 소송사건에 적용할 법률이어야 하고, 그 위헌 여부에 따라 재판의 주문이 달라지거나 재판의 내용과 효력에 관한 법률적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를 말한다는 법리를 전제로 한 다음, 청구인(이지문 중위)은 군사법원법 제238조에 의하여 관할관이 발부한 사전구속영장에 의하여 구속되었고, 구속적부심사청구를 관할관에 할 경우와 직접 군사법원에 할 경우와는 재판의 내용과 효력에 관한 법률적 의미가 달라지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군사법원법 제238조 제1항, 제3항, 제4항 및 제252조 제1항에 관하여는 그 위헌 여하에 따라서 전제되는 재판의 주문이 달라지거나 재판의 내용과 효력에 관한 법률적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에 해당하여 재판의 전제성이 인정되고, 위헌여부심판의 제청신청을 받은 법원은 법리상 늦어도 본안사건에 대한 재판을 마치기 전까지는 제청신청에 대한 재판을 하여야 할 것인데도 이 사건의 경우 위헌여부심판의 제청에 대하여는 결정을 하지 아니한 채 먼저 구속적부심사청구를 기각한 다음 제청신청을 기각하여 사건을 부당하게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할 당시 청구인이 계속 구속상태에 있었고 또한 새로이 구속적부심사청구를 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헌법소원심판청구 당시 일단 구속적부심사청구가 기각되었다고 하더라도 재판의 전제성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판시하면서 다만, 청구인은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청구 후 1992. 4. 14.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석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4. 1. 5. 법률 제4705호로 군사법원법 제238조 제1항, 제3항, 제4항 및 제252조 제1항이 군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군사법원에 직접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할 수 있도록 개정되어 1994. 7. 1.부터 시행되었으므로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청구는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고 밝혔다.
비록 형식은 ‘각하’이지만 사실상 승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부고발자 보호법 및 공익신고자 보호법이 차례로 만들어지다
“내가 양심선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나만 기밀누설죄로 구속되었다”
이 말은 1990년 5월, 삼성 등 23개 재벌 계열사의 비업무용 부동산 보율비율이 43%로 드러났는데도 업계 로비를 받은 상부 지시로 감사가 중단됐다는 사실을 고발한 이문옥 전 감사원 감사관이 했던 말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진전과 함께 본격적으로 표출돼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뒤흔든 내부고발의 역사는 이 전 감사관의 양심선언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조직 구성원이 내부의 부정부패, 비리, 불법, 비윤리 행위를 알리는 행위’로 정의할 수 있는 내부고발은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양심선언자라는 표현이 더 익숙했다.
1990년대 초반은 가히 ‘양심선언’의 시대였다.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구속되고 파면처분 받은 이 전 감사관은 6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1996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고발 내용이 직무상 얻은 비밀로 볼 수 없으며, 당시 부동산 투기 문제가 심각하던 상황에서 국민의 알 권리 등에 비추어 볼 때 이를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하다면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 전 감사관은 같은 해 파면처분청구 소송에서도 승소하여 감사원으로 복직하여 감사교육원 교수로 근무하다가 1999년에 정년퇴직했다.
이어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이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였다. 그는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등 후일 대통령이 되는 대한민국의 야당 정치인들을 포함해 재야인사, 종교계 인사 등 1300여 명의 개인 정보와 사찰 기록이 담긴 디스크와 관련 서를 들고 국군보안사령부를 탈영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찾아가 양심선언을 했다.
당시 보안사는 친위 쿠데타 등으로 인해 계엄령이 내려질 때 미리 검거해야 할 인사들의 명단을 추려 그 인적사항과 도주로, 예상되는 은신처까지 파악하고 실제 검거 훈련까지 거치고 있었다. 윤석양 이병이 갖고 나온 디스크들은 그 치밀한 도상훈련과 계획의 결과물이었다.
윤 이병은 “고문 협박에 굴복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에 동참한 나약한 나에 대한 양심의 자책으로 인한 산물”이었다고 자신의 양심선언의 이유에 대해 밝혔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 후 특수군무이탈 혐의로 수배됐다가 2년 만인 1992년 9월 체포돼 이듬해 군 사법부에서 2년 실형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 후 출소했다. 당시 윤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보안사는 기무사로 개편되는 등 역할이 대폭 축소됐다.
1992년 3월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고발한 이지문 중위에 이어 그 해 8월에는 제14대 총선 당시 자행되던 관권선거를 한준수 전 충남 연기군수가 폭로했다.
한 전 군수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신분 보장을 위해 양심선언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은 되레 선거법 위반 이유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의 유죄를 확정했으며, 파면처분취소 소송에서도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복직 권고가 됐지만 행정안전부가 수용하지 않았다.
2001년 7월 마침내 양심선언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부패방지법이 제정되어 2002년 1월부터 시행되었다.8)
이 법은 부정부패의 발생을 예방함과 동시에 부패행위를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청렴한 공직 및 사회풍토를 확립하기 위해서라고 제정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법에 따라 공공기관·정당·기업·국민·공직자의 부패척결을 위한 제도개선 노력 및 부패방지시책에의 협력의무가 규정되고, 부패방지에 필요한 법령, 제도 등의 개선과 정책의 수립·시행 등을 위하여 대통령 소속하에 부패방지위원회가 설치되어 누구든지 부패행위를 알게 된 때에는 부패방지위원회에 부패행위를 신고할 수 있도록 되었다.
공직자는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 다른 공직자가 부패행위를 한 사실을 알게 되었거나 부패행위를 강요 또는 제의받은 경우에는 지체없이 이를 수사기관·감사원 또는 위원회에 신고해야 하며, 국민은 부패행위를 신고하거나 이와 관련한 진술 그 밖에 자료 제출 등을 한 이유로 소속기관·단체·기업 등으로부터 징계조치 등 어떠한 신분상 불이익이나 근무조건상의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신분상 불이익처분을 당하였을 때에는 위원회에 신분보장조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공기관의 사무처리가 법령위반 또는 부패행위로 인하여 공익을 현저히 해하는 경우 일정수 이상의 국민이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할 수 있는 국민감사청구제도도 새로 도입하였다.
이어 2011년 3월에는 공익신고자 보호법이 제정되었다.9)
복잡·다난한 행정현실 속에서 행정기관의 조사능력만으로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공익침해행위를 적발·단속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공익침해행위를 신고하는 자와 그 협조자를 보호함으로써 공익신고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궁극적으로 국민 생활의 안정과 깨끗한 사회풍토의 확립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라고 제정이유를 밝히고 있다.
누구든지 공익침해행위를 알게 된 때에는 공익침해행위를 한 기업 등의 대표자나 관계 행정기관 또는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 있도록 하고, 공익신고자등의 신변보호제도로서 조사기관에서 공익신고에 대한 내용을 조사하는 경우 작성하는 조서 등에는 신고자 인적사항의 전부 또는 일부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하고, 누구든지 이 법에 따라 보호되고 있는 공익신고자의 인적사항이나 그가 공익신고자임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을 공개 또는 보도하지 못하며, 공익신고자가 이 법에 따른 신고를 이유로 불이익조치를 받았거나 받을 것이 예상될 때에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보호조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지문 중위 등 양심선언자들이 흘린 희생과 노력으로 우리 사회는 이들의 활동을 처벌하거나 제재를 가하는 대신 오히려 이들을 보호함으로써 부정부패의 발생을 예방함과 동시에 부패행위를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TI)에서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 CPI)에 의하면 10)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177개국 중 몰타보다도 못한 46위(55/100점, 2013년)에 그치는 것일까?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지문 중위와 같은 양심선언자들이 고초를 겪어야만 우리나라의 부정부패가 줄어들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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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판결은 하급심판결집 1993(3), 490쪽 이하에 실려 있다.
2)이 판결은 법원공보 1995. 3. 1.자(987호), 1169쪽 이하에 실려 있다.
3)이 판결은 하급심판결집 1996-1, 105쪽 이하에 실려 있는데 쌍방 항소하지 않아 이대로 확정되었다.
4)[법률 제4495호, 1992. 11. 11., 일부개정], 당시에는 대통령선거법과 국회의원선거법, 지방의회의원선거법, 지방자치단체의장선거법이 따로 있었는데 1994. 3. 16. 이를 모두 폐지하고 통합하여 공직선거법(법률 제4739호)을 제정하였다.
5)[시행 1994. 7. 1. ] [법률 제4704호, 1994. 1. 5., 일부개정]
6)군사법원법 제114조(구속영장의 방식) ① 구속영장에는 피고인의 성명, 소속, 계급, 직업, 군번, 주민등록번호, 주거, 죄명, 공소사실의 요지, 인치하거나 구금할 장소, 발부 연월일 및 유효기간과 그 기간이 지나면 집행을 시작하지 못하며 영장을 반환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적고 재판장이나 군판사가 서명날인하여야 한다.
제246조(준용규정) 검찰관 또는 군사법경찰관의 피의자 구속에 관하여는 제110조제2항, 제111조, 제114조, 제119조제1항 본문, 같은 조 제3항·제4항, 제120조부터 제127조까지, 제129조부터 제131조까지, 제133조, 제141조제1항·제2항, 제142조제2항 본문(보석의 취소에 관한 부분은 제외한다) 및 제232조의5를 준용하되, 제122조에 따른 수사와 구속영장집행의 촉탁은 검찰관만이 할 수 있다.
[전문개정 2009.12.29.]
7)이 결정은 헌법재판소 판례집 7권1집, 177~187쪽에 실려 있다.
8)[시행 2002. 1. 25] [법률 제6494호, 2001. 7. 24, 제정], 이 법은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시행 2008. 2. 29] [법률 제8878호, 2008.2.29, 폐지제정)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9)[시행 2011.9.30.] [법률 제10472호, 2011.3.29., 제정]
10)http://cpi.transparency.org/cpi2013/resul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