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10]군부재자 투표 부정을 고발한, 시대의 양심 『이지문 중위』(2)-안상운 변호사

2014-04-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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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호에 이어 계속>

 

국방부의 무책임한 선거부정 부인 발표

 

이지문 중위의 선거 부정 폭로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진실을 규명하려거나 책임자 문책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은 일치단결(?)하여 이지문 중위에 맞섰다.

 

군 당국은 선거 부정 사실을 전면 부인하면서 이 중위의 양심선언 다음 날 기자들을 현지 부대에 데리고 가 이 중위가 지목했던 장병들을 만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 중위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케 했다. 이들 장병들은 집권세력의 안정을 위한 여당지지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은 있었으나 공개투표, 검열 등의 부정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조선일보 1992년 3월 24일자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의 공방’ 사설).

 

이 중위가 『증언』에서 부정선거를 하였다고 지목된 대대장 등 장교들은 한겨레신문 등을 검찰에 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를 하였고, 부대원 수백 명의 연대 서명을 받아 “그런 일 없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부정을 또 다른 부정행위로 덮으려고 한 것이다.

 

당시 국방부 윤창로 대변인은 총선 하루 전 날인 1992. 3. 23. 이 중위의 ‘군부대 내 부재자투표 부정행위에 대한 증언’과 관련하여 언론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왜곡, 확대 보도하여 군의 사기를 위축시킨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국방부는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하여 왔다고 밝히고, 이 중위가 증언한 공개투표, 기표확인행위 등에 대해서는 상식 밖의 일로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이것이 소영웅주의에 의한 것인지 외부의 사주를 받아 선거 직전에 의도적으로 행한 것인지는 철저한 진상을 가려 국민 앞에 밝혀야 할 사항이므로 인사․헌병․감찰․법무․정훈 등 5부 합동조사에 착수할 것이고, 발표 내용 대부분은 이 중위 본인이 직접 간여하였거나 확인한 것이 아니라 주변이야기를 중심으로 작성한 것으로 허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당시는 이 중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때였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조사도 해보지 않고 허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는데 그러한 국방부의 발표 내용 그 자체가 ‘허위’로 밝혀지는데 10여 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중위의 ‘증언’ 이후에 익명의 제보들이 쏟아져 나왔고 마침내 국군 통신사령부 이원섭 일병이 나서서 자신이 상관의 지시에 따라 대리투표를 하였다고 밝혀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뒷받침했다.

 

나는 이처럼 무모하고도 도발적인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대해서도 꼭 그 진상을 밝혀 그에 따른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필자가 이 중위를 접견하기 위하여 헌병대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부대 안에 국방일보(발행인 이흥식)를 살펴보니 국방일보 1992년 3월 24일자(제8257호) 1면에 당시 국방부 윤창로 대변인의 발표내용이 크게 실려 있어 이 중위가 불기소처분을 받은 직후인 4월 22일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하였다(92서울중재54). 5월 1일 10시에 중재기일이 열렸는데 역시나 국방부 측에서 정정보도를 거부하여 조정이 불성립되었다. 하지만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국방부의 발표내용이 허위이고 그로 인해 이 중위의 명예가 훼손되었음을 인정받아 위자료 5백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서울지방법원 1996. 4. 19. 선고 95가합38634 판결).

 

집권여당 민자당의 총선 패배

 

국방부의 발 빠른 대응을 배경으로 하여 당시 민자당 김영삼 대표는 가수 조영남 씨, 코미디언 쟈니윤 씨 등이 초청된 정당연설회에서 “이 땅의 미래와 안정을 위해 한 번 더 생각하여, 민자당에 표를 몰아달라”고 마지막 호소를 하였고, 반면 야당인 민주당 김대중 대표도 정당연설회에서 안기부의 선거개입과 이 중위가 폭로한 부정선거 획책음모를 강력히 규탄했다.

드디어 1992년 3월 24일(화).

총 299명(지역구 237명, 비례대표인 전국구 62명)을 선출하는 제14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개표 결과 1988년 여소야대의 13대 국회를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218석이라는 거대 여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과반수 의석에 한 석이 부족한 149석에 그쳤고, 김대중의 민주당이 97석을 정주영의 국민당이 31석을 차지하였다. 현대그룹의 주가는 폭등하였다. 그러자 민자당은 총선 하루 뒤인 3월 25일에 경북 점촌-문경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이승무 씨(봉명그룹 부회장)를 입당시키기로 해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다.

 

10-1 기사(동아일보,여소야대,920325)

[“여소야대 정계개편 회오리”(동아일보 1992. 3. 25.자)]

 

흥미로운 점은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의 전체유권자 지지율은 38.5%이나 부재자투표의 지지율은 47.0%로 8.5%포인트 높은 것으로 집계된 반면 민주당은 전국적으로는 29.2%의 지지율을 얻었으나, 부재자투표에서는 오히려 27.6%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전국적으로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어 부재자 투표의 결과가 당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선거구가 적지 않아 이 중위가 밝힌 군 부재자 투표의 부정행위가 진실인지와 군 부재자 투표가 당락에 영양을 주었는지가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총선에서 부재자투표를 한 군인-경찰은 모두 621,781명으로 이들이 전국 237개 선거구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고 할 때, 선거구당 평균 2,624명이란 계산이 나오는데 그 수치이내에서 당락이 결정된 선거구가 28개에 달했다. 이 때문에 원내 2당이 된 민주당은 이 중위의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에 대한 국방부의 발표에 대해 “민자당, 민주당, 공선협, 국방부의 대표가 공동으로 이 중위를 면담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원내 3당인 국민당도 부정선거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대정부 투쟁의 고삐를 죄어가고 있었다.

 

9사단에 접견가다

 

이 중위가 구속된 상태에서 필자가 변호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지런히 접견을 하여 이 중위에 대한 군 내부의 부당한 압력을 막아내고 적법한 절차에 따른 수사가 진행되는지를 감시하는 일과 구속된 이 중위의 양심선언이 왜곡되지 않고 사실대로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14대 총선 당일 오전에 투표를 하고 오후 3시경 이 중위의 부모님과 형, 누나 등 네 명과 함께 파주에 있는 백마부대 9사단(헌병대)을 찾아가 면회와 접견을 요청하였다.

 

9사단이 어떤 부대이던가?

1979년 10․26 사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두 달이 체 되지 않는 12월 12일,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정치군인들이 공수특전여단 병력 등을 동원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제압할 때, 당시 9사단장이던 전두환의 최측근 노태우 소장이 29연대 병력을 중앙청 앞으로 출동시켜 12․12 군사반란을 성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부대 아니던가. 그 부대의 장이 바로 현직 대통령이 아니던가. 이렇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9사단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 중위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이고 싶은데 군 영창에 갇혀있는데 가능할까 걱정했으나 나는 1989년 남산 안기부에 구금된 리영희 선생님을 민변 선배 변호사님이 중부경찰서에서 접견하실 때 사모님이 정성껏 준비해 오신 식사를 드신 것을 지켜본 경험을 들어, 부모님이 아들에게 밥 한 끼 먹이겠다는데 아무리 군대라도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말씀드렸고 군에서도 특별히 제지는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 중위에게 “가족이나 형제를 생각하지 말고 굽히지 말고 소신껏 행동하라”, “건강유지에 힘쓰고 공선협 등 외부에서 도와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용기를 주었다.

 

변호인 접견 투쟁

 

가족들과의 면회가 끝난 뒤 나는 이 중위와 별도로 변호인 접견을 하였다.

이 중위와의 접견을 통해 이 중위가 3월 22일 밤 11시 10분경 연행되어 24시경 수방사에 도착하여 약 1시간 동안 수방사 헌병단에서 조사를 받았고, 3월 23일 밤 1시부터 오후 2시 반경까지 기무사 수사요원 6명으로부터 수사를 받고 난 뒤 4시경 9시단에 이첩되어 소속 중대장과 면담을 하고 밤샘 조사가 이어져 3월 24일 아침 8시까지 조사를 받았고 당일 오전 9시 반경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헌병대 영창에 구금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어 나는 이 중위에게 공선협에 증언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 중위는 3월 20일(금) 저녁에 파주군 문산에 있는 국제부페식당에서 대대 학군장교 13명이 참석하여 식사를 하던 중 당일 오전에 실시된 부재자투표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와 사실을 확인한 후, 23:30경 광화문에 도착하여 한겨레신문이면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공중전화 박스에서 신문사로 전화를 하여 당직 근무자에게 ”9시단 보병장교인데 부재자투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고 하였더니 신문사로 와 달라고 하여 21일(토) 0시부터 1:30경까지 한겨레신문사 편집국 회의실에서 선거부정 사실과 그에 대한 개선방향 등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명이 아닌 보병 9시단 장교 정도로만 밝혀 기사화할 수 없느냐고 물어 봤더니 신문사 측에서 사실 확인의 필요성 때문에 제보자의 신분을 알려달라고 요청하였고 일요일(3월 22일)에 서울에 올 수 있으면 그 때 꼭 연락하도록 하자고 한 뒤 어전 5시경 복귀하였다가 3월 22일 11:30경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 2시부터 3시경까지 대한 선배 누나를 만나 ”누나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양심에 반하는 것을 봤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니 ”소시민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이 중위는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이라도 택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 대대에서 선거부정이 행해지고 있으며 양심에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신문사에 제보할 생각이다.“라는 내용의 대화를 나눈 뒤 오후 4시경에 한겨레신문사에 도착하여 이병효 기자를 만나 재차 익명 보도가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여당으로부터 반박이 나온다면서 익명으로 하더라도 군에서 찾아내려고 하다보면 엉뚱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잇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면 어렵겠지만 잘 판단해 달라는 말을 듣고 이 중위는 20여 분간 앉아서 심사숙고 끝에 없던 일로 하기에는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공개할 마음을 먹고 그 뜻을 기자에게 전하니 이 기자가 “공선협에 가서 증언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여 신문사에서 한 시간 동안 초안을 작성한 뒤 오후 7시경 이 기자와 함께 공선협에 도착하여 7:30경 서경석 사무총장을 만나 신분을 확인하고 그 때부터 밤 9시경까지 증언할 유인물을 작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어 이 중위는 기무사 조사를 받을 때 진술거부권이 있음을 고지받은 사실이 없고 더욱이 진술거부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였으며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전혀 고지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구속영장을 제시받거나 일기장에 대한 압수수색영장도 제시받지 못하였다면서 그가 수사기관에서 어떤 진술을 하더라도 「증언」한 내용을 믿어달라고 부탁했다.

 

필자가 헌병대나 기무사에서 진술번복이나 구타 등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등을 물었더니 그는 이틀 전에 한 「증언」 내용 중 기무사 수사요원들의 강압수사로 인하여 일부 진술이 번복되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한 양심선언이 그의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겨레신문 이병효 기자의 부추김에 의한 것이라고, 즉, 이병효 기자가 이문옥 감사관, 1990년 군 명예선언을 한 이동균 대위의 예1) 를 들면서 부추기고, 초안도 이 기자가 작성해 주었으며 결국 자신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고 번복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틀 만에 너무 쉽게 진술을 번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진술을 번복하게 된 이유를 묻자, 이 중위는 기무사 수사요원 여러 명이 돌아가며 고함을 치고 수방사로 연행된 이후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잠을 한 숨도 재우지 않아서 심신이 매우 피로한 상태였으며, 특히 기무사 수사관들이 한겨레신문 이병효 기자가 썼다는 자술서를 들이대면서 “이 기자가 사주했다고 이미 진술했는데 왜 아니라고 버티느냐”면서 진술 번복을 끈질기게 요구하므로 나중에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면 될 것으로 생각해서 기무사 수사요원이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작성해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처음 수방사에서는 사병들이 장교 대접을 했으나, 기무사 요원이 직접 조사를 할 때에는 기무사의 개입폭로에 대해 죽일 수도 있다는 폭언과 함께 6~7명이 빨갱이로 몰아붙이다가 여러 가지 위협을 했고 이틀 동안 오늘 오전 2시간을 제외하면 잠을 안 재웠으며, 숙소에 있는 일기장에 써 놓은 독후감을 복사하여 문제를 삼았고 대학 생활의 서클활동에 대해 시비를 걸면서 한겨레신문에서 사주한 것으로 몰아 붙였다는 것이다.

접견을 마치고 나와 한겨레신문 이 기자에게 확인하니 그는 진술서는커녕 조사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조작된 증거로 자백을 유도하는 게 비단 안기부나 요즘의 국정원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이 중위에게 「증언」에 적힌 내용 이외에 또 다른 선거부정행위는 없었는지를 묻자, 그는 부재자 투표일인 3월 18일에 소속 중대 서무병인 김00 상병이 그에게 와서 하는 말이 “대대 행정관 준위 황00가 부재자투표봉투를 일반 풀이 아닌 딱풀로 붙이라고 지시하는데 중대장님은 못하게 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하였고, 3월 21일 2소대 상병 석00과 대화하였는데 그가 “중대장 정신교육 뒤 분대장이 또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하고 서신검열기 이야기를 하면서 “기무사에서 뜯어보는 것 아닙니까?”하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군인들은 기무사가 병사들의 편지쯤이야 무시로 검열하고 있다고 믿고 있고, 그러한 ‘믿음’이 오히려 기무사의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를 정당화 해주는 기묘한 심리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본의 아니게 악의 대열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이 중위에 의하면 그의 직속상관인 김 모 중대장은 정의를 숭상하고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는 육사 출신의 에프엠(FM) 군인이었다고 한다. 보안대 장교를 만난 직후 그 중대장은 선거와 관련하여 정신교육을 하다가 그만 뒤돌아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는데 “1번을 찍어 달라”고 말하며 내무반을 황급히 떠났다고 했다.

 

이 중위가 9사단 헌병대에서 중대장을 마주했을 때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양해를 구하자 중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 일이 있기 전부터 정신교육을 시키지 않아서 연대, 사단, 나아가 군단에까지 찍혀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너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은 없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군의 잇달은 양심선언 번복 회유 작전

 

기무사나 헌병대도 안기부와 마찬가지로 피의자와 변호인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회유와 협박, 허위 정보 제공 등 온갖 방해 책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3월 27일(금) 오후 2:10부터 1시간 동안 2차 변호인 접견을 하였다. 1차 접견 이후에 국방부가 5부 합동 조사를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2부 소속 2명의 조사관이 약 10여 분간 「증언」 내용이 사실이냐고 묻고 그 이상의 사실을 캐묻지 않아 형식적인 조사를 하는데 그쳤다고 한다.

 

그런데 3월 25일(수)에 고대 ROTC 모임인 무호회 부회장인 원00(모 경제신문사 논설위원)가 찾아와 3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중위에게 “남자가 칼 한 번 뺄 줄 아는 용기가 있으면 집어넣을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내가 신문사에 있어 신문시가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신문기자는 불이 났을 때 3층에 있는 사람보고 뛰어내리라고 이야기하여 사람이 뛰어 내리면 밑에서 구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어 특종을 잡으려는 사람들이다”는 말을 하면서 증언을 번복하도록 회유했다는 것이다.

 

또한 육군 소령으로 복무 중인 이 중위의 자형도 찾아와서 “너의 뜻은 공감하나 너가 나갈 길을 잘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이야기하자 이 중위는 “지금은 선택의 순간이다. 어느 쪽으로 가는지가 도움이 되는 지는 생각하지 않겠다. 눈치 보지 않겠다. 양식과 상식에 따라 해결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3월 31일(화)에 3차 변호인 접견을 하였는데 3월 28일(토) 저녁에 조사계장이라는 사람이 ‘개인 생각’이라는 것을 전제로, 재야 변호사들이 문제를 자꾸 크게 하려고 한다, 너가 임수경이 아니지 않느냐, 문제를 잘 마무리 짓자, 민주당과 국민당에서 진상조사단이 면담요청을 하고 있는데 이 중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므로 면담에 불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대대장, 사병들과 공개토론하고 마무리 짓자, 공개토론 후 최고 책임자인 사단장님을 만나 “이것으로 끝내 주십시오. 열심히 근무할테니 소대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고소한 것도 취하할 수 있다고 회유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중위는 정당 관계자들은 국방부와 함께 진상조사를 하자는 것인데 국방부에서 거부하는 것이므로 그 분들이 면담을 요청할 경우 만나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또한 조사계장이 고대 출신 학군 2기 소장님이 이 중위를 만나보려고 오늘 오셨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변호사가 폭로할 것 같아 자신이 막았다고 하여 이 중위는 굳이 피하지는 않겠다, 만나 보겠다고 했다고 한다.

 

조사 방식과 관련하여 묻자 이 중위는 수방사에서는 상호 경칭으로 약 1시간가량 조사를 하였는데 그 후 기무사 수사관들이 수사할 때는 처음부터 “이지문, 야 임마” 등 반말을 하면서 “사회에서 너를 찢여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 줄 아느냐.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는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면서 “다시 진술을 번복할 경우 니가 사회에 나가서 똑바로 살 수 있는지 두고 보면 알 것이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4월 6일(월) 오후 4:30부터 1시간 동안 4차 변호인 접견을 하였는데 이틀 전인 4월 4일(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소속 부대 대대장 및 중대장 4명과 대질조사를 받았을 때 대대장은 “정신 나간 놈이 아니면 이런 말 하였겠느냐. 간첩이 아니면 대대장만 잡아먹으면 되지 그 이상까지 거론하느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공개적인 선거부정 폭로를 위해 구속적부심사를 청구

 

3월 27일 2차 변호인 접견을 하면서 이 중위의 의사를 확인한 후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하였다.

나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사건이므로 공개된 법정에서 이 중위가 ‘증언’에서 밝힌 군부재자 선거부정 내용을 공개적으로 확인해 보고, 추가 선거부정 의혹을 합법적으로 폭로하는데 있어서 구속적부심사절차가 매우 유용한 제도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이번 기회에 사단장 등 군 지휘관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등 군사재판을 좌지우지하는 군사재판제도도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민주적으로 개정되도록 법적 투쟁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이런 전략에 따라 나는 구속적부심사청구서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구속영장을 군판사가 아닌 직업 군인인 ‘관할관’이 발부한 것을 따졌다(구속영장에는 “제9사단 보통군사법원 관할관 소장 이규환” 명의로 기명날인되어 발부되었다).

헌법 제110조 제1항은 “군사법원을 관할하기 위하여 특별법원으로서 군사법원을 둘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도 헌법 제27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당시 군사법원법(제114조 제1항)은 구속영장에는 피고인의 공소사실의 요지 등을 기재하고 재판장 또는 군판사가 서명날인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이는 수사절차에서의 구속시에도 준용하면서도(제246조) 구속영장의 발부권자는 군판사가 아닌 관할관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3)

관할관은 법관이 아니므로 사법사무가 아닌 행정사무만을 관장하여야 하는데도 법관의 자격이 없는 관할관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헌법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일반 법원의 구속영장이나 판결문에 반드시 법관이 ‘서명날인’ 하도록 되어 있듯이 군사법원의 구속영장에도 관할관의 서명날인을 요구하는 것은 인신구속이 헌법 제12조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므로 이를 엄격히 규제하여 인신구속의 남용을 방지하고 인신구속에 있어 신중을 기하자는 취지라 할 것인데도 관할관의 기명날인만 있을 뿐 서명날인이 없는 구속영장의 발부는 무효라고 주장했다.4)

또한 ‘현행범’으로 체포하였으면서도 ‘사후영장’을 발부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헌법 제12조 제5항에서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받지 아니하고는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방사 헌병단 소속 수사관들이 이지문 중위를 체포할 때 그러한 사실들을 고지한 바 없으므로 헌법 위반이니 이 중위를 불법구금하지 말고 즉각 석방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중위가 밝힌 ‘증언’ 내용은 진실이므로 죄가 되지 않으며 근무외 시간에 이탈한 것이므로 무단이탈죄도 성립하지 않고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필자는 구속적부심사청구서에서 위와 같은 증거와 법리에 근거하여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비상식이 상식을 누르고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최근 ㅂㄱㅎ 대통령이 말한 ‘비정상의 정상화’를 상기해 보라!).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한 군 부재자 부정선거, 부정인 줄 알면서도 군대이니까 라며 쉽게 체념해버린 비상식. 그런 정도는 집권여당의 프리미엄이 아니냐며 강변하는 비상식을 거부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과 자존심 그리고 공정선거를 위하여 ‘증언’한 이지문 중위의 상식은 바로 이 시대의 양심이며 이 나라 민주주의의 산 증인이다. 그런 이 중위를 빨갱이로 몰거나 외부세력의 사주로 매도하는 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국토방위의 신성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대다수 군인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짓밟는 자해행위일 뿐이다. 이지문 중위의 상식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강조하며 결론을 대신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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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법원 1991. 4. 23. 선고 90누4839 판결, 이동균, 김종대 등 장교 2명이 그들을 포함한 장교 5명 명의로 명예선언이란 의식행사를 가지고 기자회견을 한 행위가 군인복무규율 제38조가 금지하고 있는 “군무 외의 집단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사례.
2)군사법원법 제252조 (구속의 적부심사) ① 구속영장에 의하여 구속된 피의자 또는 그 변호인·법정대리인·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호주·가족이나 동거인 또는 고용주는 보통군사법원관할관에 대하여 구속의 적부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

②제1항의 청구를 받은 보통군사법원관할관은 그 군사법원의 검찰관으로 하여금 수사관계서류와 증거물을 첨부하여 48시간이내에 구속된 자를 당해 군사법원에 송치하게 하여야 한다.

③제2항의 송치를 받은 군사법원은 청구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때에는 제4항의 심문없이 결정으로 청구를 기각할 수 있다.

1. 청구권자 아닌 자가 청구하거나 동일한 구속영장의 발부에 대하여 재청구한 때

2. 공범 또는 공동피의자의 순차청구가 수사방해의 목적임이 명백한 때

④제2항의 송치를 받은 군사법원은 지체없이 구속된 피의자를 심문하고 수사관계서류와 증거물을 조사하여, 그 청구가 이유없다고 인정한 때에는 결정으로 이를 기각하고, 이유있다고 인정한 때에는 결정으로 구속된 피의자의 석방을 관할관에게 통고하며, 관할관은 그 통고에 따라 즉시 석방을 명하여야 한다.

⑤제3항 및 제4항의 결정에 대하여는 항고하지 못한다.

⑥검찰관·변호인 또는 청구인은 제4항의 심문기일에 출석하여 의견을 진술할 수 있다.

⑦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구속의 적부심사를 청구한 피의자의 가족·동거인 또는 고용주는 독립하여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

⑧구속된 피의자에게 변호인이 없는 때에는 제62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⑨제4항의 심문을 함에 있어 군사법원은 공범의 분리심문 기타 수사상의 비밀보호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⑩군사법원이 수사관계서류와 증거물을 접수한 날로부터 결정을 한 날까지의 기간은 제239조·제240조 및 제242조의 적용에 있어서는 그 구속기간에 산입하지 아니한다.
3)군사법원법 [시행 1988.2.25.] [법률 제3993호, 1987.12.4., 전부개정]

제114조 (구속영장의 방식) ① 구속영장에는 피고인의 성명·소속·계급·직업·군번·주민등록번호·주거·죄명·공소사실의 요지·인치 또는 구금할 장소·발부년월일 및 유효기간과 그 기간을 경과하면 집행에 착수하지 못하며 영장을 반환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기재하고 재판장 또는 군판사가 서명날인하여야 한다.

제246조 (준용규정) 제111조, 제112조, 제114조, 제119조제1항 본문·제3항 및 제4항, 제120조 내지 제131조, 제133조제1항, 제141조제1항 및 제142조제1항 본문(보석의 취소에 관한 부분을 제외한다)의 규정은 검찰관 또는 군사법경찰관의 피의자구속에 준용하되, 제122조의 규정에 의한 수사와 구속영장집행의 촉탁은 검찰관만이 할 수 있다. 이 경우 제114조제1항의 “재판장 또는 군판사” 및 제130조의 “군판사”는 이를 각각 “관할관”으로 본다.
4)대법원 1995. 8. 16. 자 95모9 결정은 “법관의 기명 날인만 되어 있을 뿐 서명날인이 되어 있지 아니한 결정은 형사소송법 제41조에 위반되어 위법하다.”고 판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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