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9]군부재자 투표 부정을 고발한, 시대의 양심 『이지문 중위』-안상운 변호사

2014-03-19 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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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추억

 

1987년 12월,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된 뒤 처음으로 치르는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얼마 두지 않던 그 어느 날이었다.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예하 52사단 213연대 인사과에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근무하던 필자는 오후 5시가 지나자 업무를 마감하고 힘차게 군가를 부르면서 퇴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대 위병소 앞에서 갑자기 인사과 사병들은 모두 복귀하라는 명을 받고 투덜투덜 대면서 인사과 사무실로 갔다. 오후에 부대 보안대 장교가 다녀간 뒤였다.

인사과장은 사병들에게 부대 전 사병들의 성향을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성향분석이라니?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무슨 수로 분석하나? 라는 우려도 잠시, 인사과에 비치된 사병들의 인사기록카드 등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주소지를 파악하여 대구․경북 출신은 1번 성향, 부산․경남 출신은 2번 성향, 광주․호남 출신은 3번 성향, 대전․충청 출신은 4번 성향으로, 서울․경기․강원 등은 본적지나 출신 학교 등을 참작하여 분류하라는 것이었다.

12월 16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의 후보자는 기호 1번 노태우 후보(민주정의당), 기호 2번 김영삼 후보(통일민주당), 기호 3번 김대중 후보(평화민주당), 기호 4번 김종필 후보(신민주공화당)이었다.

 

하루 밤 사이에 성향분석(?)을 마치고 나자 그 자료를 가지고 중대장 등은 소속 사병들을 대상으로 하여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기 전에 ‘정신교육’을 빙자하여 여당인 노태우 후보의 지지를 유도하고 반면 야당 후보를 비방하거나 깎아내리는 작업을 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모른 척 해야 하는 필자의 입장이 영 불편하였다.

정신교육의 대상은 단지 사병들만이 아니었다. 장교들도 ‘작업’의 대상이었다. 필자의 직속 상관이던 중대장(대위)은 호남 출신인데도 선거철이 되자 평소와 다르게 군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승진에 목매달고 있는 장교들로서는 자기 부대원들 중 여당 지지표가 많이 나와야 승진에 유리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다행히 필자는 부재자투표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마지막 대통령 (직접)선거였던 1971년의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와의 대통령선거에서 60여 만 명의 군인 부재자 투표가 당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암암리에 이심전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필자마저도 <군대표=여당표>라는 인식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던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감히 이를 검찰이나 선관위 등에 고발하거나 언론사 등에 제보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아니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대선 패배, 세상은 변한게 없는 데 ‘이별’이라니

 

무려 89.2%의 유권자들이 참가한 대통령 선거에서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건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3김을 누르고 당선되었다(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

개표방송을 하던 KBS․MBC 방송사들은 애써 여당 후보의 승리에 대해 표정관리를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CBS 라디오 방송에서는 개표결과와 함께 구로구청 등 곳곳에서 벌어지는 선거부정 사실을 보도하면서 울먹이던 목소리가 지금도 새롭다.

이날 밤을 꼬박 새우며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필자는 처음부터 민정당 후보의 득표율을 보면서 당시 한창 유행하던 가수 최성수의 <이별이래> 노래를 뇌깔이고 있었다.

 

<이별이래>

 

조용한 그대의 눈동자 말없이 서있는 내모습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것이 이별이래

 

하늘에 흐르는 조각달 강물에 어리는 그림자

세상은 변한게 없는데 이것이 이별이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대의 슬픈 얼굴

세월이 흐른 뒤에 하얗게 지워질까

 

추억이 밀려와 쌓이는 우리의 남겨진 시간들

이대로 발길을 돌리며 이것이 이별이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대의 슬픈 얼굴

세월이 흐른 뒤에 하얗게 지워질까

 

추억이 밀려와 쌓이는 우리의 남겨진 시간들

이대로 발길을 돌리며 이것이 이별이래

 

 

어떻게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인데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여 독재정권에게 정권을 그냥 내주다니!

최종 개표가 완료되기도 전에 벌써 김대중․김영삼 후보는 대선 패배의 책임을 떠않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노래 가사처럼 (독재정권의) 세상은 변한 게 없는데 이것이(민주주의와) 이별이라니, 충격적인 대선 결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단지 필자와 같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88년 4월 실시된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국회가 출현하자 1노3김(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시대가 부활하게 되었다. 짧은 ‘이별’로 그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전두환 독재정권과 ‘일란성 쌍둥이’ 정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였다.

 

상식을 일깨운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

 

그러고 나서 4년 후, 1992년 3월 24일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육군 보병 9사단 28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 이지문 중위가 군 부재자 투표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을 폭로하였다.

이 중위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ROTC 출신으로 제9보병사단 예하 부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운동권 출신 대학생이 아니었고 호남 출신도 아닌 부산 출신이었다. 입대하기 전에 이미 삼성그룹에 입사를 한 상태였다.

 

장교 임관 갓 1년이 지난 그가 제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3월 22일(일) 밤 9시 반경 서울 종로구 종로5가에 있는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약칭 공선협)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부재자 투표과정에서 공개투표를 통해 여당을 지지하도록 강요하는 등 부정행위가 있었고, 부재자투표에 앞서 연대장과 대대장이 간부 및 사병들에게 여당을 지지하도록 교육, 탈법-부정행위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지문양심선언 (1)

[이지문 중위 양심선언 기자회견]

 

 

이 중위는 「군부대 내 부재자투표 부정행위에 관한 증언」(이하 ‘증언’)이라는 문건을 통해 이번 국회의원 선거의 군 부재자 투표에서 심한 부정행위가 이루어져 공명선거에 막대한 훼손이 있었다는 점에서 군인이기에 앞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문제점을 느껴 공선협에서 군 부재자투표가 공정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외부 참관인제 도입 등 제도적 개선이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시민운동을 펼쳐 주시기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그는 먼저 군 부재자투표를 앞두고 정치적 중립에 역행하는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점을 들었다.

대대 부재자투표가 1992년 3월 18일부터 20일 사이에 진행되었는데 투표에 앞서 먼저 연대장이 대대원들에게 지난번(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 30여%의 지지 밖에 받지 못하자 북한의 대남 방송에서 “30%짜리 대통령은 그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회담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했다면서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는 집권 여당에게 투표함으로써 정치안정과 통일문제의 해결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내용을 약간 비쳤고 이어 대대장은 하사관급 이상 간부들이 참석하는 간부회의에서 “군의 통수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군은 대통령이 속해있는 여당에 투표해야 한다. 내 생각이 이러하니 간부들은 자기 병력에 대해서도 교육을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고 폭로하였다.

그러나 대대급 이상에서는 직접 노골적으로 대원들을 상대하여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정도의 언급만 하고, 노골적인 압력과 대원교육은 중대장급에서 이루어져 사후에 일이 생기더라도 하급지휘관의 과잉충성이었다고 간주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면서 대대장이 중대장들에게 중대의 여당 지지율이 적어도 80% 이상이 나와야 한다고 교육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어느 중대장은 중대원들에게 “4월 10일 경에 있을 고과평점에 투표의 여당지지율이 반영되므로 인간적인 면에서 나(중대장)를 봐서라도 여당을 찍어 달라”는 식의 교육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위가 근무하는 6중대의 중대장은 육사 출신으로서 대대급에서 내려온 이러한 정신교육 지침을 실시하지 않고 선거에 대해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겠다고 중대원들에게 약속하였는데, 1차 부재자 투표가 실시된 3월 18일에 이 중위를 포함하여 16명만이 투표를 하고 나머지 약 80명은 3월 20일에 투표를 앞둔 상황에서 ‘정신교육’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일 오후 사단 기무대 보안반장(대위)이 찾아와서 1:1 면담을 한 직후에 소대장들을 불러 모아 “보안반장 말이 서신검열기가 있어 누구에 투표했는지를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중대만 여당 투표율이 낮게 나오면 대대, 연대에까지 다 영향을 미치니 그래도 70%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어 중대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자신도 올바른 것이 아닌 것은 알지만 현실적 여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투표에서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않았으면 여당에게 투표하라”는 내용의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밝혔다.

 

이어 이 중위는 부재자 투표에 있어서 공공연한 공개투표 행위가 자행된 사실도 폭로하였다.

당시 군 부재자투표 방식은 보통 각 중대별로 적당한 곳에 기표소를 설치하고 장교 포함 계급별로 한명씩을 참관인으로 하여 투표를 실시하고 투표가 끝나면 연대 인사과장(소령)이 무장헌병을 동반하여 투표봉투를 한꺼번에 수거해서 발송하는데, 어느 중대의 경우는 인사계(상사) 앞에서 공공연하게 공개투표를 하였다는 것이다.

 

부재자 투표가 끝난 3월 20일(금) 20시 30분 경 대대급 학군장교들 모임을 갖고 있던 문산 국제부페에서 선거에 대한 이런 저런 말을 나누던 중 본부 중대장이 “우리 중대는 단 두표만 제외하고 다 여당표다”라는 발언을 직접 했고, 7중대의 경우 중대장이 계급별로 몇 명씩 불러 여당을 찍으라고 하였고, “의리가 있는 놈은 투표용지를 내 앞에 갖고 와서 ‘저 1번 찍겠습니다’ 하고서 1번에 기표하더라”고 의리 측면에서 발언하였으며, 5중대와 8중대의 경우에는 기표소에서 중대장이 “1번. 찍어라”라고 하여 투표 행위에 영향을 미쳤고, 5중대 참관인을 통해 여당표가 얼마나 나오는지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는데 그 결과 “우리 중대는 80%가 충분히 넘었다”고 5중대장이 직접 말한 것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중위는 부재자 투표 후 투표봉투 발송 등 처리과정상의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부재자 투표한 투표 봉투의 발송 책임을 실질적으로 기무파견대(보안반장)에서 맡고 있어서 공공연하게 “투표행위를 서신 검열기를 이용해 중대별 대대별 표본 조사를 하겠다”는 말을 하고, 이번 투표율을 가지고 4월 10일경 있을 장교 고과평점(진급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에 반영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대대장이 부재자 투표일인 3월 20일 오전 10시 30분경 이 중위를 불러 “왜 너희 중대는 정신교육을 늦게 실시하느냐. 소대장이 나서서라도 해야 하지 않았느냐. 집단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1:1로 했어야 했던 것 아니냐”면서 “네가 누구를 찍었는지 내가 연대에 가면 다 알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그날 저녁에 있은 학군장교 모임에서 본부 중대장이 “대대장이 ‘간부들은 다 1번을 찍을 줄 알았는데 한명이 2번을 찍었더라’면서 섭섭해 하더라”고 하였고, 6중대장은 선거 때문에 많은 압력을 받고 있는 문제에 대해 소대장들과 상의하면서 “투표결과가 중대별로 나오기 때문에 중대에 초래될 불이익을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하면서 고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 당국은 매주 주말에 있는 사병 정기 외출, 외박 및 면회 외출, 외박도 선거 직전에는 금지시키고, 사단 지침으로『면회사병들에게 이번 선거에 관한 ‘정신교육’을 시킬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지문 중위는 ‘증언’에서 이러한 군 부재자 투표의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부재자 투표를 할 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외부 참관인제도를 도입해야 하며, 투표를 마친 투표봉투 발송이 군대라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외부참관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밤 11시경 이지문 중위는 현장에서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헌병들에게 연행되었다.

이지문 한겨레 만평

[한겨레신문 박재동 만평(1992. 3. 23)]

 

사진(연행되는 양심,한겨레,920323)

[한겨레신문 1992. 3. 23.]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한겨례신문 vs. 22면 단신으로 보도한 조선일보

다음날 아침 집으로 배달된 한겨레신문에 1면 머리기사로 실린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문을 보고 필자는 즉시 당시 민변 최초로 상근간사를 자원한 천정배 변호사님(4선 국회의원․법무부장관 역임)에게 전화를 드려 어제 밤에 수방사 헌병단에 연행된 이 중위를 신속히 변호인 접견을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천 변호사님은 필자에게 바로 수방사로 출근하여 접견을 해 달라고 요청하고 아울러 민변 회원 중 군법무관 출신(예비역 중령)인 임종인 변호사(법무 4기, 17대 국회의원 역임)님과 이기욱 변호사님(법무 4기, 민변 부회장 등 역임)에게도 접견을 요청하겠다고 하였다. 다행히 이 중위의 부모님들과 연락이 되어서 임종인, 이기욱 변호사님과 함께 접견요청을 받았다.

이 중위의 부모님들이 공선협에 변호인 선임을 요청하였고 공선협은 회원단체인 민변에 변호사 선임을 요청한 상태여서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필자는 즉시 변호인 접견신청서와 변호인 선임계를 챙겨 남태령(서울 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수방사로 갔다.

아직 위병소에서는 이 중위의 사건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듯 법무참모님을 면회왔다고 하니 별다른 제지 없이 출입증을 발급해 주므로 얼른 법무참모실에 찾아가서 이지문 중위에 대한 변호인 접견을 신청하였다. 법무참모는 다소 난감해 하면서 군 부재자 투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협조적이었다. 그는 이 중위가 수방사에 신병이 확보되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해 주고 현재 수방사 헌병단에서 조사 중이라서 변호인 접견은 장담할 수가 없다고 하며 어려워했다.

 

당시는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서 부대 내에서 민변이나 외부에 연락을 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변호인 접견을 하러 갔다가 마냥 있을 수도 없어 헌병단을 찾아가서 접견을 요구했다.

헌병단장(대령)은 만나지도 못한 채 헌병단 수사과장에게 접견을 요구하자 그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느니, 보고를 해야 한다느니 하며 계속 시간을 끄므로 12:30경 헌병단장 면담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엄청 위세를 떨치면서 감히 이 중위 같은 자에게 접견이라니? 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 동안 안기부 등의 변호인 접견거부에 대해 민사소송, 준항고 등을 통해 풍부한 경험을 쌓은 필자 등은 법원의 판결 사례 등을 설명하면서 접견거부의 부당함을 강조하였다.

 

그러자 권 아무개 헌병단장은 오후에 이 중위의 신병을 원소속 부대인 9사단으로 보내기 전에 변호인 접견을 해주겠노라고 하므로 그 약속을 믿고 법무참모실에 돌아와서 마냥 기다렸다.

검찰청 같으면 일단 외부에 잠시 나가 일을 보고 다시 찾아가도 되나 군부대에서는 일단 그곳을 나오게 되면 다시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냥 눌러 앉았다.

그 사이에 법무참모실에 있는 조선일보를 슬쩍 훑어보았는데 1면은커녕 어디에도 이 중위의 양심선언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입만 열면 일등신문이라고 자랑하는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없다니!

그 때가지도 권언유착의 보수본색 조선일보가 정론지라는 ‘화장발’로 위장하고 있던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어서 혹시 기자회견이 어젯밤 늦게 이루어져서 그런가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총선 당일 사설을 통해 한편으로는 이 시점에서 이 중위의 폭로내용의 진실여부에 어떤 결론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다며 마치 중립적인 모습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투표일을 하루 앞둔 중요한 시점에 또다시 양심선언과 허위조작이 교차하는 선거풍토가 우리의 민주주의 역량을 약화시키고 있음을 개탄해마지 않는다”는 사설을 접하고 나서는 조선일보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런데 며칠 뒤에 우연히 어느 기자와 통화를 하다가 조선일보에도 23일에 첫 보도가 나가기는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확인해 보니 22면에 조그맣게 기사가 실려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얼마나 작게 보도를 했기에 필자와 같은 사람도 기사를 쉽게 발견하지 못했는지 독자들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한겨레신문기사(이지문,920323) 이지문 조선일보 1보(920323)

[한겨레 1992년 3월 23일 1면 기사] [조선일보 1992년 3월 23일 22면 기사]

 

군 당국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변호인 접견 투쟁

그런데 필자 등이 헌병단장실을 나오고 난 뒤 위병소에 변호사를 출입케 해주었다며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 중위도 다음날(3월 24일) 필자와 첫 접견을 할 때 전날 10시경 수방사 헌병단 1층 수사계실에서 수사를 받을 때 수시로 밖에서 쪽지가 들어왔는데 기무사 수사관들이 “멍청한 놈들, 변호사를 여기까지 들여보내”라고 하여 변호사가 온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2시 30분쯤 되었을까?

법무참모실 창문을 통해 헌병단 건물을 감시하던 차에 갑자기 헌병단 차량에 이 중위를 태우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어~하던 사이에 차는 떠나 버렸다. 완전 ‘닭 쫒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접견 약속을 무시한 데 항의를 하려고 급히 헌병단장실에 찾아갔으나 헌병단장은 만나 보지도 못하고 부하 장교로부터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면서 변호인 접견은 불허하고 보냈다는 말만 들었다. 이렇게 식언을 일삼는 게 고급장교란 말인가?

허탈했다. 아무런 보람도 없이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때만 해도 용맹스러운(?) 민변의 젊은 변호사가 수방사 헌병단의 변호인 접견 거부 행태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필자는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임종인 변호사님과 연명으로 육군수도방위사령관을 상대로 하여 이지문 중위와의 접견을 거부한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준항고장을 내용증명우편으로 접수하였다. 그런데 수방사 군사법원은 1992. 6. 12. 준항고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명백한 변호인 접견거부에 대해 피청구인이 관할관이자 결재권자인 군사법원 체제에서 군사법원이 수방사령관의 위법을 인용할 만한 독립성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필자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이 중위가 파면처분처분취소 판결이 승소로 확정되자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이 중위가 변호인으로부터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한 데 대해 국가는 이 중위에게 금 2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해가 바뀌어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할 때 하나회 출신인 수방사령관(중장)과 수방사 헌병단장(대령)도 교체되었다. 헌병단장은 향토사단의 연대장으로 쫒겨갔다가 전역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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