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8]전(前)과 후(後), 사전납본이라는 검열을 철폐하다!(2)_안상운 변호사

2014-02-25 822

칼럼5

<전호에 이어 계속>

 

헌법재판소의 사실상 위헌결정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1992. 6. 26. 헌법상 검열금지에 관한 최초의 결정을 선고하였다. 비록 주문은 납본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1987.11.28. 법률 제3979호, 개정 1991.12.14. 법률 제4441호) 제10조 제1항과 제24조 제1항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는 결정이었지만, 사실상 위헌 결정이었다. 이미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사후 납본제로 개정된 데다가 공보처가 납본필증의 교부를 지연시키거나, 나아가 납본필증 없이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제재를 가한다면 이는 사전검열에 해당되는 조치로서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가 된다고 판시하였기 때문이다. 1) 당시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이던 이석연 변호사는 이 결정을 1992년의 빛나는 판례 중 하나로 평가한 바도 있다.

 

헌재는 결정에서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금지라 함은 헌법 제21조 제1항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따라 모든 국민은 자유로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의사표현이 외부에 공개되기 이전에 국가기관이 그 내용을 심사하여 특정한 의사표현의 공개를 허가하거나 금지시키는 이른바 사전검열의 금지를 말한다”고 정의한 다음, 발행된 정간물을 공보처에 납본하는 것은 그 정간물의 내용을 심사하여 이를 공개 내지 배포하는데 대한 허가나 금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서 사전검열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헌재는 정간물을 발행 “즉시” 납본하도록 한 정간법 제10조의 발행 “즉시”라는 의미는 발행의 “이전에” 또는 “동시에”라는 의미가 아니라 발행의 “후에 지체없이”라는 의미이므로 공보처가 이를 배포 “이전에” 또는 배포와 “동시에”납본하도록 강제한다든가, 정간법시행령 제10조의 “공보처장관 또는 시․도지사는 법 제10조의 규정에 의하여 정기간행물의 납본을 한 자에게 지체없이 납본필증을 교부하여야 하며, 시․도지사가 납본을 받은 때에는 그 1부를 즉시 공보처장관에게 송부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악용하여 납본필증의 교부를 지연시키거나, 나아가 납본필증 없이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제재를 가한다면 이는 사전검열에 해당되는 조치로서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가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 이후 공보처가 납본필증의 교부를 지연한다거나 납본필증이 없이 간행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간행물을 불법서적으로 간주하여 압수하는 등의 탄압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대학가에도 진정한 의미의 학문의 자유가 성큼 다가선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가 제거된 것이다.

 

납본기간을 간행물의 판매 또는 반포 15일 ‘전’까지에서 그 15일 ‘후’(이내)로 단 한 글자가 바뀐 것뿐이나 납본을 빙자한 사전검열은 사라지게 되었다.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은 2002. 8. 26. 법률 제6721호로 폐지되고 대체입법으로 출판 및 인쇄진흥법이 제정되었고 2008년 출판문화산업 진흥법과 인쇄문화산업 진흥법으로 분리되었다. 2009년 개정된 출판문화산업 진흥법2) 에서는 간행물의 제출의무를 규정하고 있던 제10조를 삭제하였다. 3) 반면 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3조는 정기간행물사업자가 등록 또는 신고한 후 처음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을 때에는 그 정기간행물 2부를 즉시 등록·신고관청에 제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변 자체 건물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다

 

당시 납본제도를 개선하게 된 데에는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언론․출판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함께 애쓴 ‘한출협’ 관계자분들의 관심과 노고가 큰 힘이 되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정당한 보상 없는 납본제도는 위헌이라는 것이므로 헌재의 결정 이전 5년간 문공부나 공보처에 납본을 한 출판물에 대해 한출협을 중심으로 하여 출판사들이 국가에 대해 정당한 보상(정가)을 청구하기로 했으나 막상 사전납본의 규제가 풀리자 흐지부지되어 버린 점이다. 만약 실현되었으면 최초의 민변 수익사업(?)이 되었을 터이고, 그 수익금의 일부만이라도 보수를 받았으면 진작 민변의 자체 건물을 보유하게 되었을 것이다(연간 수만 종의 책이 발행되는데 과거 5년간 종당 6권씩의 정가를 곱해 보라!).

 

최근 긴급조치 사건 등 수많은 과거사 사건(재심 및 민사소송 등)이 민변의 조직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민변의 사업이 아니라 개별 회원들의 자체 사무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 더 아쉬운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증인이 될뻔한 변호인

 

여기서 박노해 시인과 필자와의 짧은 인연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1991년 3월 10일 국가안전기획부에 체포되어 남산 청사에 연행된 박노해 시인을 그 다음 날인가 접견가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변호인 접견을 맞은 박노해 시인은 나에게 대뜸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안기부가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하는 그 바쁜 48시간을 앞두고 그를 사상범이 아니라 여자관계로 얽힌 파렴치범으로 몰려고 하고 있다면서 향후 20여 일 간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혹 자신이 고문 등을 당하여 어떠한 진술을 하더라도 그런 문제는 전혀 없다는 것을 변호사가 증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젠장, 변호사보고 증인이 되어 달라니 ㅠㅠ

 

변호사는 업무상 위임을 받은 관계로 알게 된 사실로서 타인의 비밀에 관한 것은 증언거부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줄 수도 없고..나중에 재판할 때 법정 변호인석에서 증인석을 왔다 갔다 해야 하나, 대략 난감 ㅠㅠ…

 

그런데 실제로 안기부는 박노해 시인을 24일간 조사하고 검찰로 송치하면서 발표한 자료에서 그의 여자관계를 적시하기도 했으나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안기부의 졸렬한 의도를 눈치챘는지 묵살당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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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민변의 변론 간사이던 필자도 사노맹 사건의 변호인단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박노해 시인의 구속영장에 필자의 이름이 거명되는 바람에 동기인 이오영 변호사님 등에게 변론을 요청하고 뒤에서 지켜만 보게 되었다.

나는 당시 노동해방문학의 정기구독회원으로서 구독료를 은행계좌로 선납하였는데 그 돈이 ‘보투’(보급투쟁) 자금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수십 권의 신문, 잡지 등을 정기구독하고 있던 필자로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나중에 공소장에도 이름이 실릴 경우에는 변론활동을 하는 것이 서로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민변의 어느 변호사님은 안기부의 조사를 받았으나 별다른 일은 없었다고 전해 들었다.

 

‘인간’ 박노해

 

박노해 시인의 재판도 임수경 재판이나 문익환 목사님 재판처럼 뜨거운 사건이었다. 공판 때마다 재판의 열기가 뜨거웠다.

 

드디어 1991년 8월 19일 1심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공안부 이귀남 검사(2009~2011년 법무부장관 역임)는 국가보안법위반 혐의 등을 적용하여 박노해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당시 박노해 시인도 검찰이 사형을 구형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는지 약 2시간에 걸친 최후진술을 시작하면서 “사형! 사형입니까? 저를 기어코 처형해야만 하겠습니까? 이것이 당신들의 노동자에 대한 대답입니까?”라고 차분하면서도 비장하게 말하던 기억이 새롭다.4)

 

그런데 그런 박노해도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순간적이나마 다소 움찔하는 모습을 필자만 보았을까. 하지만 살인범도 아닌 사상범에게 사형이라니? 생명의 존엄성이랄까 사상의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인간 박노해’를 이해하게 되었다.

 

박노해 시인은 결국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1998년 특면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아직도 갈 길 먼 표현의 자유, 불온도서의 지정

 

국민의 정부시절이던 2002년 법무부는 이른바 ’불온서적‘이라는 이유로 교도소나 구치소에 반입이 금지되던 ’열독불허 도서목록‘을 폐기하였다. 법원판결에 의해 이적표현물로 규정됐던 도서 1,220종의 책을 교도소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금지도서 목록 중에는 한완상 전 총리의 ’민중과 지식인‘,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 시중 서점에서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일반 교양서적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그런 반면 2008년 이명박 정권의 국방부는 23종의 서적을 ‘불온서적’이라면서 군내 반입을 금지하였다. 이중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MBC 느낌표에서 권장도서로 뽑힌 바 있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2007년 10만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북한의 우리식 문화》는 대학 교양교재로 널리 쓰이고 있고, 《대한민국史》는 주간지에 연재하였던 글을 엮은 책이다. 게다가 이러한 지시가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고 헌법상 포괄위임금지 및 명확성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군법무관들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자 국방부는 오히려 군 위신 실추, 기강 문란, 복종의무 위반, 장교품위 손상 등을 이유로 군 법무관들에게 파면 등의 징계를 하였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2010년 10월 28일 국방부의 현행 군인복무규율은 군의 정신전력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다만, 법원이 파면처분을 받은 군법무관 두 명에 대해 파면처분취소를 명하는 판결을 선고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법원도 이러한 국방부의 시대착오적인 조치에 대해 13권의 저자 및 출판사가 국방부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책의 어떤 내용이 불온한 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은 채 “이유 없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국방부는 2011년에는 새롭게 19권을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합한 서적’으로 추가하였다.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도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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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이 말한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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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 萬歲’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4․19혁명 직후에 쓴 김수영 시인의 이 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찬양하는 시다. 평론가 김명인은 이 시를 언론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식의 표명이라고 평했다.

 

이 시가 나오고 50여 년이 흘렀지만 ‘김일성 만세’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 너머에 있다. 하긴 김수영 시인의 이 시를 실어줄 매체가 당시에도 없었다. 그의 사후에야 공개된 시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를 모두 모아 놓았다는 《김수영 전집 1(시)》(2판, 민음사, 2003년)에 ’김일성 만세‘ 시를 찾아볼 수가 없는가 보다.

 

빨갱이, 주사파, 좌빨, 좌좀, 좌익, 종북, 친북세력이라는 표현은 자유를 만끽하는데

과연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는 것일까?

 

적어도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아직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이라고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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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헌바26 결정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10조 제1항 등에 대한 헌법소원
2)[시행 2009. 9. 26.] [법률 제9530호, 2009. 3. 25., 일부개정]
3)제10조 (간행물의 제출) ① 출판사를 경영하는 자는 소설·만화·사진집 및 화보집(이하 이 조에서 “소설등”이라 한다)을 발행한 때에는 발행일부터 15일 이내에 그 간행물 2부를 관할 시장·군수·구청장을 거쳐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다만, 전자출판물(디스크 등 유형물의 경우를 제외한다. 이하 같다)의 경우에는 그 전자출판물의 파일 1부를 전송하거나 유형물에 고정시켜 제출하거나 그 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방법에 의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개정 2008.2.29>

②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소설등의 간행물을 제출한 자에 대하여 바로 제출필증을 내주어야 한다. 다만, 제1항 단서의 규정에 의하여 전자출판물을 전송받은 경우에는 전자문서에 의하여 제출필증을 내줄 수 있다. <개정 2008.2.29>

③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소설등의 간행물을 제출한 자에 대하여는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개정 2008.2.29>
4)박노해 최후진술에 관해서는 박노해 석방대책 위원회,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1991. 참조
5)김수영, 「김일성 만세」(1960. 10. 6. 인용은 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 천년의 상상, 2012, 259~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