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화교남매간첩사건 1심 무죄판결의 전말

2013-10-0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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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2013. 1. 새해 탈북자 사회를 혼돈으로 몰아갔고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7개월이 지난 2013. 8. 22. 위 간첩사건은 법원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국정원의 부실한 수사와 검찰의 무리한 기소 그리고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가 공동으로 만들어 낸 한편의 엉성한 추리소설이었습니다. 공동변호인단은 소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으로 불리던 위 사건에서 정치적 의도를 배제시키기 위해 화교남매 간첩사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에서는 화교남매간첩사건이 어떻게 무죄가 선고되었는지 그 경위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2. 공소사실의 요지

 

가. 국가보안법위반

피고인은 2006년 북한 보위부에 인입되어 지령을 받고 남한에 잠입하여 북한 보위부에 노트북 등 편의제공을 하고, 인입된 이후 3차례(2007년 8월, 2011년 7월, 2012년 1월) 밀입북하여 탈출하였으며, 탈북자 명단을 수집하고 3차례(2011년 2월, 2011년 5월, 2012년 7월) 여동생에게 탈북자명단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국가기밀을 누설 내지 전달하였고, 지령을 받은 여동생을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회합, 편의제공 등의 행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첨부 1. 공소사실과 증거요약 참고).

 

나. 북한이탈주민의보호및정착지원에관한법률위반, 여권법위반

피고인은 화교신분을 숨겨 북한이탈주민 보호결정을 받아 정착지원금 등 약 2,500만원을 지원받았고, 거짓을 기재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3. 사건진행 경과

 

가. 유우성은 재북화교로서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한편, 유우성은 북한에서 준의사로 근무하다가 북한사회에 대한 염증과 남한에 대한 동경으로 2004년경 탈북하여 한국에서 정착해 살고 있었고, 2011. 6.경 서울시에 계약직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습니다. 한편 유우성은 2006. 5. 21. 북한에 있던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회령에 있던 어머니가 북한 보위부 전파탐지 요원에 적발되어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유우성은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2006. 5. 23.경 북한에 밀입북하였고 어머니 장례를 치른 이후 중국으로 나와 연길, 장춘 등의 친척집에 머물다가 북경에서 온 여자친구와 함께 북경으로 갔는데 그 무렵 수두를 앓아 북경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 유우성은 위 밀입북으로 2009년경 국정원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결국 남북교류협력법위반에 대하여 공소시효 만료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습니다.

 

다. 한편, 유우성은 남한에서 성공적인 정착생활을 하였고, 북한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와 여동생은 2011. 7. 9. 중국으로 완전히 이사를 나옵니다. 유우성 가족은 재북화교이기 때문에 이사를 나올 수 있었으며, 당시 어머니 유골을 화장하여 중국 장춘으로 이장을 하였습니다.

 

라. 유우성은 여동생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어하였고, 여동생 역시 한국에 오고 싶어하여 여동생이 2012. 10. 30. 제주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였고, 즉시 탈북자로서 보호신청을 하였습니다.

 

마. 국정원은 여동생 유가려를 중앙합동신문센터에 수용하고 조사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유가려가 진성탈북자인지 여부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약 5일 만에 화교라는 사실을 추궁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유가려도 화교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바. 유가려는 합신센터에서 약 6개월 동안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고, 조사 초기 강도 높은 조사와 두려움 등을 이기지 못하고 오빠 유우성이 간첩행위를 했다고 허위진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유우성은 2013. 1. 10.경 긴급체포되었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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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013. 1. 18.경 유우성의 사건이 천주교인권위원회를 통해 민변에 접수되었고, 장경욱 변호사가 국정원에 접견을 다녀 온 뒤 공동변호인단을 꾸리게 되었습니다(공동변호인단 천낙붕, 장경욱, 양승봉, 김용민, 김진형, 김유정, 설창일, 이광철, 김남국 변호사, 간사 장연희).

 

아. 이후 공동변호인단은 국정원 및 서울구치소에 유우성을 수시로 접견하면서 변론을 준비하였습니다. 당시 유우성은 국정원 조사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고, 식사조차 거의 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감을 보였으나 너무 억울한 심정에 용기를 내어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유우성은 동생이 그런 허위 자백을 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고 하여 수사기관에 계속 대질을 요구하였으나 끝까지 대질신문이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자. 유우성은 검찰조사 과정에서는 동생과의 대질이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하여 결국 묵비권을 행사하고 조사를 마쳤습니다.

 

 

4. 재판진행 경과

 

가. 검찰은 2013. 2. 26. 유우성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하였습니다.

 

나. 검찰은 유우성 사건의 거의 유일한 증거인 유가려에 대하여 출국가능성 및 진술번복 가능성을 이유로 증거보전신청을 하였고, 기습적으로 2013. 3. 4. 안산지원에서 증거보전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변호인들은 검사의 증거보전절차의 부적법성을 주장하여 증거보전신청의 기각을 구하였고, 이미 기소를 한 상태에서 다른 법원에 증거보전절차가 진행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이송신청을 하였으며, 기록 복사를 간신히 하여 재판준비가 부족한 상태임을 피력하여 연기신청을 하였으나 모든 신청이 기각되고 증거보전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다. 증거보전절차에서 유가려는 계속 울면서 답변을 잘 하지 못하였고,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보는 등 매우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우성에 대한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취지의 증언을 하였습니다. 이후 변호인과 유우성의 반대신문 과정에서 중요 사항에 대한 증언을 번복하게 되었고, 국정원의 회유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습니다 . 그리고 변호인들의 접견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변호인들의 합동신문센터에 접견은 거부당하였고, 현재 준항고를 한 상태입니다.

 

라. 변호인들은 유가려의 증거보전절차 증언과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2013. 3. 23.경 중국으로 조사를 다녀왔고 사진 등 유용한 증거를 확보해 왔습니다.

 

마. 2013. 4. 4. 첫 공판준비기일이 열렸고, 유우성은 국가보안법 사건 최초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검사가 반대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재판부는 변호인의 반론을 받아들여 증인신문 등의 재판일정을 고려하여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바. 한편, 공동변호인단은 유가려에 대하여 인신보호법상 구제신청을 청구하자는 의견을 모았고, 공동변호인단이 직접 청구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으로 보여 천주교인권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공감에서 청구대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사. 유가려에 대한 인신구제청구는 2013. 4. 22. 국정원에 부본이 송달되었습니다. 그러자 약 6개월 동안 독방에서 방치되어 있던 유가려에게 갑자기 다음 날(4. 23.)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에 따른 비보호결정이 내려졌고, 강제출국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아. 2013. 4. 26.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유가려에 대한 인신구제청구 재판이 열렸는데, 재판장은 유가려에 대하여 비보호결정 및 강제출국명령을 근거로 유가려가 더 이상 합신센터에 있을 근거가 없으니 자유롭게 거주지를 결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재판 직후 공동변호인단과 국정원의 날 선 대립 끝에 유가려는 하루만 변호인을 따라가겠다고 합신센터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 유가려는 민변에서 가족과의 통화 및 지인과의 만남을 가진 이후 자신이 국정원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 날 합신센터에 돌아가지 않고 오빠의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유가려의 의지에 따라 2013. 4. 27. 간첩조작사건 기자회견이 있었고, 공동변호인단은 유가려를 증인신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국민참여재판을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차. 그 후 재판에서는 유가려에 대한 증인신문과 유가려를 조사한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증인신문 및 대질신문, 탈북자들의 증인신문 등을 진행하였고, 공동변호인들이 3차례 중국 방문을 통해 수집한 증거제출 및 검사의 증거에 대한 반박 등을 담은 증거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카. 유우성 재판은 4차례의 공판준비기일과 15차례의 공판기일을 진행하였고 2013. 8. 22. 선고하였습니다.

 

타. 재판부는 유우성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 9가지 모두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고, 북한이탈주민보호법위반 및 여권법위반에 대하여 유죄로 인정하면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습니다.

 

 

5. 1심 판결 요약

 

가. 법원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 9가지에 대하여 유가려의 진술 증거인 8가지 혐의와 기타 증거로 기소된 편의제공(노트북제공)에 대하여 분리하여 판단하였습니다.

 

나. 유가려의 진술에 대한 증거능력

유가려가 비록 수사기관에서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피의자 신분이었음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유가려의 각 진술서는 진술거부권이 고지되지 않고 작성된 것으로서 증거능력이 없고(위법수집증거), 국정원 작성 유가려에 대한 진술조서는 유우성과 공범관계가 있기 때문에 유우성이 증거로 함에 동의하지 않고 있어(내용부인) 그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다만, 유가려의 증거보전절차에서의 진술과 증거능력이 부인되지 않은 수사기관에서의 진술(검찰 진술조서 및 국정원 진술조서 일부)에 관하여 변호인의 고문으로 인한 임의성 없는 진술 내지 위법수집증거라는 주장에 대하여는 모두 이를 배척하고 증거능력을 인정하였습니다.

 

다. 유가려 진술의 신빙성

증거능력이 인정된 유가려의 진술에 대하여 법원은 유가려의 진술이 객관적인 증거와 모순되고(2012. 1. 23.행적, 2012. 10. 30. 아버지의 행적), 진술의 일관성이 없으며(진술전부 번복, 메신저 변경, 해외도피처 변경 등), 합리성이 없는 부분이 있어(두만강 도강할 이유가 없음, 중국으로 이사한 내용 등)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라. 법원은 국가보안법 8가지 범행에 대한 검찰의 다른 증거(명단, 탈북자 진술 등)들에 대하여도 유우성의 범행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마. 편의제공(노트북제공)에 대하여

유우성이 2006. 8. 23.경 외당숙 국상걸을 통해 북한 보위부에 노트북을 제공하였다는 공소사실에 대하여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는 국상걸의 진술서와 수사기록 그림 등이 있다고 할 것이나 반대신문권이 보장되지 않은 진술서를 주된 증거로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그 신빙성도 담보되지 않으며, 다른 증거들도 유죄로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바. 재판부는 유우성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에 대하여는 전부 무죄를 선고하였고, 북한이탈주민보호법위반, 여권법위반 등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하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고, 유우성은 선고 당일 서울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하여

 

가. 화교남매간첩사건은 탈북자 1만명의 정보가 북한에 넘어갔다는 언론 보도에 따라 탈북자 사회에 엄청난 혼란과 불신을 가져왔고, 탈북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증폭되어 향후 공무원 임용이나 취업 등에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습니다.

 

나. 한편, 화교남매 본인들과 가족들에게는 치유되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1심 판결에서는 국정원의 수사방식에 대한 위법성을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유가려는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과 검찰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차단하기 위해 계속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이 국정원과 검찰의 이러한 수사관행에 대해 위법하다고 판단하였는데 이러한 판단은 향후 다른 대공수사 및 일반 수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라. 기존 국가보안법위반에 대하여 법원은 증거의 상당수가 북한이나 중국 등 국외에 있음을 이유로 증거가 불충분 할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하여 쉽게 유죄판단을 한 경향이 있었는데 위 판결에서는 그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완화되거나 후퇴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마. 다만, 법원에서는 유가려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유가려에 대한 국정원의 폭행, 협박, 회유가 없었다고 판단하였으나 이는 유가려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과 오빠를 파멸로 몰아 갈 수 있는 진술을 왜 하게 되었는지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모순점이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유가려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을 배척하면서도 국정원의 고문행위를 인정하기까지는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남습니다.

 

바. 한편, 기존의 국가보안법 사건과 달리 유우성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 전체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우성이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한 초기 약 10일 동안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면서 허위자백을 하지 않았던 용기와 그 이후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면서 변호인들과의 견고한 신뢰관계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나아가 국정원 수사의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변호인들의 현장조사였다고 할 것이므로 이 사건은 향후 유사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현장조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선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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