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25주년, 그 연대기를 찾아서(2)
글_ 좌세준 변호사
민변의 탄생과 그 의미
민변 회원이기도 한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두레. 2003)에서 1988년 5월 28일에 있었던 민변 창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첫째, 인권변론을 담당하던 변호사들이 민변이라는 조직을 갖게 됨으로써 더 체계적이고 공개적이며 지속적인 변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민변은 변론수행 뿐만 아니라 법률과 제도의 개폐, 연구와 조사 등 다양한 사회의 법률수요를 감당할 체계를 갖추었다.
둘째, 민변에는 사법연수원 13기 이후의 30대 변호사들이 대거 합류함으로써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위 책, 456~457쪽)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들은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인권변호사’라는 말은 우스운 단어입니다. 「변호사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변호사’의 사명 자체가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라면, ‘인권변호사’라는 말은 ‘역전앞’이나 ‘족발’이라는 단어처럼 같은 의미의 말을 불필요하게 겹쳐 쓴 ‘겹말’이 되고 맙니다. 판사를 ‘재판판사’라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변호사의 기본 임무가 ‘인권’의 옹호라면 그냥 ‘변호사’이면 그만이지 굳이 ‘인권변호사’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제가 ‘인권변호사’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레 톺아보는 것은 민변 창립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당시의 ‘인권’ 상황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민변이 탄생한 1988년 5월은 노태우 정권 초기였습니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라는 합법적 수단을 통해 집권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준군사정권’에 다름없었던 노태우정권 하에서 “인권상황은 개선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양심수나 시국사범의 발생이 과거보다 더 폭주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민변은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모임(민변 회칙 제3조)으로 탄생했던 것입니다.
대한변호사협회와의 관계 : 보완과 비판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눈치를 채셨겠지만 그 문구만을 놓고 보면 「변호사법」이 규정하고 있는 ‘변호사의 사명’이나 민변이 지향하는 모임의 ‘목적’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변호사법」은 “변호사로서 개업을 하려면 대한변호사협회에 등록을 하여야 한다”는 규정(제7조 제1항)을 두고 있고, 민변의 회원들도 모두 변호사인 이상 대한변호사협회의 회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대한변협’)와 민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박원순 변호사의 책을 다시 한 번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법률에 의해 규정된 단체이다. 이에 비해 민변은 아무런 법률적 근거 없이 자발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따라서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다. (중략) 대한변호사협회와 그 지역조직으로서의 각 지방변호사회를 제외하고는 민변은 회원이 가장 많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변호사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변협과도 갈등적,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 관계를 지향했다. 변협 집행부가 친인권적, 친개혁적일 때는 당연히 보완관계를 이루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기 위한 노력을 변협이 방기할 때 민변이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위 책, 454~455쪽)
민변은 창립 이후 대한변협 인권위원회에 회원들이 대거 참여하여 “1989년도 인권보고서 가운데 13개의 분야별 주제 중 12개를 집필”하기도 하였고, 1999년에는 민변 회원인 김창국 변호사가 대한변협 회장에 당선되어 변호사공익활동을 의무화하는 등 변호사의 공익적 성격을 강화하고, ‘기본적 인권’의 옹호라는 변호사 본연의 사명에 보다 충실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민변은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기 위한 노력을 대한변협이 방기”할 때에는 이를 비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90년 9월, 당시 대한변협 박승서 회장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관련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변호를 맡아 2심 무죄 판결을 받도록 한 것과 관련하여 민변 회원들을 중심으로 108인의 변호사들이 사퇴권고 성명을 냈던 사례, 1991년 5월 대한변협 김홍수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과의 청와대 원로면담에서 “일부 야당과 재야권의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은 우리의 현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민자당의 국가보안법 날치기 통과를 두둔한 것에 대해 민변 회원인 유선호, 윤기원, 박찬운 등 10명의 민변 회원들이 공개질의서를 통해 항의했던 사례, 1991년 7월 강경대 사망사건에 대한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재판에서 발생한 민가협 회원들의 ‘법정소란’에 대해 대한변협이 “합리적인 질서를 잠식하는 무뢰한들의 무질서”라는 성명을 낸 것에 대해 당시 대한변협 인권이사였던 조준희 회원이 이를 비판하며 사퇴했던 사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여러 상황을 감안할 때 대한변협과 민변은 앞으로도 지난 25년 동안의 ‘보완과 비판’의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권문제 있는 곳이 민변이 있다
민변의 목적에 동의하여 회원이 되었던 변호사들은 군사독재정권, 권위주의 정권의 종말이 오면 우리 사회의 인권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민변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질 정도로 전반적인 인권상황에 크게 개선되는 상황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민변 창립 25주년이 되는 2013년 현재 우리의 인권현실은 위와 같은 희망이 너무나 멀리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인권문제가 제기되는 한 민변은 항상 그곳에 있어야 하고 또한 있을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