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6월 월례회 정지영 감독과의 만남
글_ 오경민 변호사
고백컨대 정지영 감독의 작품 중 ‘부러진 화살’ 외에는 본 것이 없습니다. ‘남영동1985’는 제목을 보는 순간 어두운 지하 고문실이 떠오르고 비명소리가 들리며 피비린내가 듣는 것 같아 도무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답니다. 비록 영화는 별로 보지 못했지만 감독님께서 만드신 영화는 뇌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기에(언젠가는 다 봐야 한다는 압박이랄까요) 감독님을 모신다고 하자 주저 없이 월례회에 가게 되었지요. 감독님은 6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고 눈빛이 빛나는 분으로 웃을 때 무척 시원하게 웃으셔서 보는 사람도 꼭 같이 웃게 만드는 분이셨답니다.
월례회 전에 인터넷으로 감독님께서 만드신 작품 목록을 살짝 읽어봤습니다. 1990년에 개봉한 ‘남부군’이라는 영화 이전과 이후에 만든 작품들의 성격이 꽤 달랐어요. 감독께서 찍은 첫 영화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이었습니다. 무슨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부터 이후에 찍으신 ‘남부군’, ‘하얀전쟁’.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최근의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1985’와 매우 다르죠. 감독님을 만나 그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영화를 찍기 시작한 무렵은 영화를 만들면 개봉에 앞서 감독과 제작진을 배제하고 검열 작업에 들어가는데 무려 안기부 직원이 나와 판단을 했다고 해요. 감독님은 영화감독을 시작했을 때부터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는 영화가 당신과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다지만 당시에 그런 영화를 찍으실 수는 없었죠.
감독님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와 이전은 완전히 달랐다. 6월 항쟁 이후에 ‘남부군’을 찍게 되었는데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시민들이 영화에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촬영하게 되었다.”고 하셨지요. 다만 ‘남부군’ 때만 해도 영화 제작 전에 어떤 영화를 찍는 것인지 계획안을 검토 받아야 했기 때문에 반공영화라고 거짓 계획안을 올려 통과되었다 합니다. 지금도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이 일어나는 등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이지만 그 당시에 비하면 참 세상 좋아졌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더군요.
‘부러진 화살’의 뒷이야기도 흥미진진했지요. 감독님이 재판 기록을 읽고 영화화해야겠다고 생각한 후 김명호 교수를 두 번 면회 가고 수 없이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박훈 변호사와 거듭 만나며 캐릭터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부러진 화살’는 두 실존인물이 워낙 개성 있고 걸출하신 분들이라 영화에서 덧붙인 것인 별로 없다고 하시더군요. 박훈 변호사는 본인을 영화화한 ‘박준’변호사 역을 맡은 박원상 씨를 자신의 분신으로 키웠다고 하고요. 영화에서는 재판 장면이 정말 생생했죠. 특히 문성근 씨가 맡았던 부장판사 역이 압권이었습니다. 감독님 본인이 재판을 몇 차례 받아봤기 때문에 재판이 어떤지 몸소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문성근 씨도 아버님의 영향으로 재판에 대해서는 무척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았다 하네요. 항소심 부장 역으로 분하여 변호사의 증거 신청에 대해 전부 기각하는 문성근 씨의 얼굴이 선하군요.
‘남영동1985’는 고 김근태 전 의원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모든 고문 피해자에게 바치는 영화이므로 주인공 역에 김근태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고 김근태 전 의원은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구금되어 고문당하셨기 때문에 날조 사건의 고문 피해자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찌되었든 국회의원도 하시고 나름 보상을 받으셨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고문 피해자들은 가족 등 주변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정신적, 육체적인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설령 금전 배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미 그의 옆에는 같이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는데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100만 명만 봤으면 좋겠다고, 100만 명의 사람들이 고문 피해자들의 아픔을 몸소 느끼고 친구 등 지인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지만 30만 정도에 그쳤다고 아쉬워 하셨지요. 영화를 보지 못한 저로써 죄송하기만 했습니다. 영화에서 고문을 당하는 피해자 역할로 분한 박원상 씨는 호스로 물을 코와 입에 붓는 등의 고문을 유사 체험했어야 하는데 코로 물을 붓는 것은 5초를 견디지 못하였다고 하네요. 코를 통해 머리로 물이 들어가 견딜 수 없어서 코에 실리콘을 바르고 입에 물을 넣는 것을 견디는 방식으로 찍었다고 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더군요. 감독님도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온몸이 저리고 아파오는 심정이었다며 “내가 배우들을 고문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9월에는 감독님이 촬영한 새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개봉됩니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토론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등장한 사람이 한 “아직도 천안함 폭침이 북괴의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종북 좌빨 세력이 있다.”라는 폭력적인 발언에 충격을 받아 작품을 만들게 되었답니다. 정부의 발표에 의문을 갖는 것만으로도 북한 추종세력이라는 논리인데 상대방 패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고 하네요. 지금 우리 사회 분위기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불이익을 받을지 염려하고 끝내 하고 싶은 말을 삼키게 만든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습니다. 이러한 세태에 일침을 가하는 감독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감독님은 이런 영화들을 만들며 불이익이라도 받을지 걱정하신 적은 없는지 지켜보던 변호사님 중 한 분이 질문하셨죠. ‘부러진 화살’ 등 영화를 만들 때부터 종종 듣는 질문이었지만 ‘이런 영화를 만들면 불이익을 받을지 걱정해야만 하는 사회인가?’ 새롭게 자각하실 정도로 어떠한 걱정도 없었다고 하시는군요. 당신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규정하고, 만들고 싶은 작품은 반드시-가족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될지라도-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한편으로 당신은 공익을 위한 투사는 못되며 낙천적인 리버럴리스트라고 하셨지요. 저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면 남들의 기대감과 스스로가 만든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고 소신대로 꿋꿋하게 사실 것이라 믿기 때문에 감독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죠.
저도 감독님께 하나 여쭤봤지요. ‘부러진 화살’ 등의 작품을 만들며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지가 고착화되었을 것 같은데 창작자로서의 부담은 없으시냐고 물었는데요, 감독님은 주변 사람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며 지금 계획하는 작품은 멜로드라마라고 하시네요. 감독님이 계획하시는 전후 한국 사회에서의 멜로드라마도 기대됩니다.
이번 월례회는 백주선 변호사님과 정지영 감독님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답니다. 참신한 시도였는데 상당히 좋았습니다. 백주선 변호사님의 진행도 매끄러웠습니다. 감독님이 워낙 달변이셔서 a를 질문하면 a부터 c까지 이야기하시는 분이라 진행하시는 백주선 변호사님 입장에서는 따라가기 어려웠을 법도 한데 충분히 호응하면서 그 흐름에 맞는 적당한 질문을 던지셨기 때문에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제가 감독님 말씀을 들으며 ‘그럼 이런 점은 어떻지?’라고 궁금해 하고 있으면 백주선 변호사님이 다 질문해 주셔서 나중에 질문할 게 없었다죠. 다음 강연 때도 꼭 사회 맡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이제 감상을 마치려 합니다. 감독님께서 해 주신 더욱 재밌는 뒷이야기들이 많은데 글에는 적지 않았답니다. 앞으로 있을 민변 월례회 때 좋은 말씀 전해주실 분들이 많이 오실 텐데 이 때 직접 들으셨으면 하는 바람에 그랬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민변에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