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나선 민변
1995년 10월 17일.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변호사들의 ‘거리 시위’ 장면을 담은 사진을 싣고 있습니다. 사진에는 “5·18 진상규명 학살책임자 처벌-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이돈명, 한승헌, 최영도, 고영구 변호사와 어깨띠를 두른 민변 변호사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변호사도 ‘5·18’ 거리 시위」라는 제목이 달린 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고영구) 소속 변호사 1백 여 명은 16일 정오께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대검찰청까지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거리시위를 벌였다. 변호사들이 시국 문제와 관련해 시위를 벌인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이다.」 (한겨레. 1995. 10. 17.치 23면)
이날 민변 변호사들의 거리 시위는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자행된 1980년 5월 광주학살과 5·18 군사 쿠데타에 대해 검찰이 ‘공소권 없음’ 결정(1980년 7월 18일)을 한 것에 대한 항의와 함께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직접행동이었습니다. 이날 시위에 앞서 발표한 민변의 선언문 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법정을 무대로 법논리로써 우리 사회의 법치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던 우리 변호사들이 오늘 이렇게 거리에까지 나서게 된 것은 이 시점에서 5·18 문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각성과 함께 정부 당국에 의한 문제 해결이 불투명해진 현실적 상황인식 때문이다. 80년 광주학살은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이고 불법 불의한 사건으로서 이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과 단죄 없이는 법치주의도 민주주의도, 온전히 정착될 수 없고 진정한 평화와 정의도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최근 ‘전두환 추징법’(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별법 일부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어 전두환의 미납 추징금 1,672억 원을 회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만, 18년 전인 1995년 당시에는 ‘전·노 처벌’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공소시효와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해괴한 논리와 맞서 싸우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민변의 변호사들도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항고, 재항고 등 법적 절차를 동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조영래 변호사님(1990년 12월 12일 작고)은 5·18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광주학살 사진전’에 가보라. 그 참혹한 상처 하나 하나가 하늘로 입을 벌리고 그날의 악몽을 증언하며, ‘진실’과 ‘정의’를 외치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늦은 밤 지하철을 타보면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석간신문을 펼쳐든 서민들의 눈빛이 그날도 어김없이 사회면을 가득 메운 전씨 일가·이씨 일가의 비리 소식에 새삼스런 놀라움과 노여움으로 타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가슴 속에 쌓여가는 울분과 원한, 그리고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였던 ‘체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경멸은 이제 어떠한 정치적 술수로 얼버무려 덮을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벗어나 있음을 나는 직감한다. <중략>
불행하게도 과거란 그저 덮어버린다고 하여, 그저 잊어버린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중략>
생각해 보라. 우리 군인들이 우리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어 수없는 무고한 목숨이 희생된 사태가 일어났는데,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누가 무엇을 잘못하였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간다면, 우리에게 어떤 앞날이 있을 것인가?」 (「노태우 정부의 시험대, 전두환 조사와 광주문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206쪽)
조영래 변호사님이 1988년 7월에 쓰셨다는 글을 위와 같이 길게 인용하여 여러분들 앞에 내어 보이는 것은 당시 조영래 변호사님이 느끼셨던 절박한 역사인식을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1995년 10월 17일 민변의 변호사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은 절박함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너무나도 일찍 우리들 곁을 떠나버린, 그러나 그야말로 ‘보석처럼 빛나는’ 조영래 변호사님의 그 명징한 역사인식은 후배 변호사들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진보적 법률가 단체, 민변의 ‘직접행동’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의 책 『직접행동』(Direct Action and Democracy Today)을 번역한 조효제 교수는 “직접행동 민주주의는 사회의 갈등구조가 통상적 정치 채널로 소통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결손’(Democratic deficit) 지점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직접행동』, 옮긴이 서문)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통해(주기적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그 대표적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의 요소가 일정 부분 강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통상적 정치 채널(국회, 정당 등)을 통한 갈등의 해결이나 문제해결에 있어서는 일정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검찰과 법원을 포함한 사법영역마저 구체적인 갈등 해결에 있어 시민들의 눈높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사실입니다.
민변의 변호사들은 위와 같이 ‘5·18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에 나섰던 것 이외에도, 2003년 10월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 2004년 12월에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직접행동으로서 가두집회와 시위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미국산쇠고기 수입 저지를 위한 촛불집회에서는 민변 변호사들로 구성된 ‘인권침해 감시단’이 100여 일 동안 계속된 촛불집회 현장에서 경찰의 과잉진압과 강제연행 등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민변의 변호사들이 법정에서의 변론, 악법 개폐와 입법개선 활동이라는 법률전문가로서의 역할을 넘어 서서 직접 거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통상적 채널’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결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결손’이 존재하는 한 민변의 변호사들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직접행동’으로 나아가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