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논리를 비판한다(외대 이호중교수)

2004-10-26 214

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재 논리비판/이호중교수

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재의 위헌결정 이후 헌재결정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도 관습헌법이라는 논거에 대하여는 섣불리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이 헌법교과서에 몇 줄 나오는 정도에 불과하고 또 그동안 헌법학계나 헌재의 결정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매우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 아래는, 외대 이호중교수가 민변에 보내온 글입니다. 이에, 민변의 공식입장과는 다를 수 있는점 양해바랍니다.

1. 법치주의적 정당성과 민주주의적 정당성

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재의 위헌결정 이후 헌재결정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도 관습헌법이라는 논거에 대하여는 섣불리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이 헌법교과서에 몇 줄 나오는 정도에 불과하고 또 그동안 헌법학계나 헌재의 결정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매우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헌법을 전공한 학자는 아니지만 법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볼 때, 헌재가 인용한 관습헌법이라는 개념과 논리 속에는 법치주의적 정당성과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관계에 대한 헌재의 오해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오해는 단순한 오해의 차원을 넘어 헌재가 사법의 역할에서 정치의 역할로 자기변신을 추구하는 시초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헌법은 정치와 규범(법)이 교차하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헌재의 “헌법적 판단”은 정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헌재의 결정을 놓고 이것이 정치적 판단이냐 법리적 판단이냐 하는 식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의 핵심은 정치와 법을 단선적으로 구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와 법규범이 교차하는 헌법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것과 법적인 것이 구분되는 지점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관계에서이다. 헌재의 역할도 그러한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헌재의 역할은 무엇일까?

헌법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가치와 이념을 선언하고 국가정책의 큰 틀과 지향점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헌법은 국가정책추구에서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한계지점을 설정해 주는 역할도 한다. 한가지 쉬운 예를 들어보자. 100까지 눈이 그려진 컵이 있다. 그 컵에 물을 부어 100까지 가득 채우는 것이 헌법이 추구하는 정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하자. 그러나 현실은 100을 다 채울 수 없다. 100은 이상향일 뿐이다. 이 때 헌법은 100이라는 정책의 지향점을 설정함과 아울러 최소한 50보다 밑으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정책의 한계지점을 설정해 주는 기능을 한다. 그 50이라는 눈금이 말하자면 위헌과 합헌을 가르는 기준점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헌재의 역할은 어떠한 국가정책이 100을 채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여부와 50이라는 눈금 이상 채워져 있는지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다. 50을 채워도 합헌이고, 60, 70을 채워도 똑같이 합헌이다. 하지만 60을 채울 것인가 70을 채울 것인가는 정책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50을 넘는 이상 헌재의 대답은 “합헌” 그것뿐이다. 그러나 국가정책을 조율하는 정치의 영역에서는 60이냐 70이냐는 매우 중요한 정책과제가 된다. 60이 옳으냐 70이 옳으냐는 헌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선거가 심판하는 영역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잠시 국가보안법 이야기를 하자면, 헌재는 국가보안법 상의 찬양고무죄 등의 조항에 대하여 합헌이라고 결정한 바 있다. 이는 헌재의 입장에서는 – 나는 위헌이라고 확신하지만 – 찬양고무죄가 “위헌기준인 50은 넘었다”고 판단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기껏해야 50.000001 정도로 위헌을 피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헌법은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천명하고 국가에게는 기본권신장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의 영역에서는 50.000001에 불과한 국가보안법의 기본권보장수준을 60, 70 아니 100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므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하여 일부에서 헌재의 결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느니 하는 식으로 반론을 펴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그러한 무책임한 반론이 헌재 재판관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뛰어넘어 월권을 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처럼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바로 법치주의적 정당성과 민주주의적 정당성 개념을 정확히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우리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원칙으로 이 개념을 여기에서 재차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양자는 서로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개념은 아니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하여 성립된 법에 의한 지배를 말하며, 민주주의 역시 법치주의의 준거틀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할 정치의 영역에서 지켜야 할 룰을 설정해 주는 기능을 한다. 정치는 법치주의 원칙에 의하여 설정된 룰 속에서 자율적 정책결정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영역이다. 정치와 정치가 추구하는 정책은 선거제도를 통하여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조율되는 영역인 반면에, 법치주의적 정당성에 대한 심사를 하는 것은 헌법재판의 역할이다.  
헌법재판의 역할은 국가의 입법과 행정, 정책 등이 민주주의적으로 설정된 법치주의 틀과 한계를 일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헌법규범은 바로 “민주주의적으로 설정된 법치주의의 틀과 한계”를 표현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 법치주의의 틀과 한계를 벗어나는 입법이나 정책에 대하여 위헌이라고 심판하는 것이 헌법재판의 고유한 업무영역이다. 정치와 정치에서 산출되는 정책들이 법치주의의 한계를 일탈하지 않는 한 헌법재판은 “합헌”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헌법재판은 이러한 자기절제를 통하여 정치의 영역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헌법이 설정한 이념과 가치를 최대한 꽃피울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헌법(재판)의 개방성이다.  

2.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심사하고자 유혹하는 개념도구로서 “관습헌법”

이제 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재판단으로 들어가 보자. 헌재 다수의견은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을 동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은 헌재가 법치주의적 정당성을 심사하는 고유의 임무에서 벗어나 정치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스스로 심판하고자 하는 탐욕을 드러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관습헌법은 헌법이 정치의 영역에 보장한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두가지 차원에서 훼손하고 있다.

첫째,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은 헌법제정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앞에서 헌법은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설정된 법치주의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정치와 법의 영역을 관통하는 헌법규범의 정당성은 그 제(개)정절차의 민주주의성에서 나온다. 국민은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합리적 토론과 절차를 거쳐 헌법규범을 만들고 또 개정할 수 있다. 헌법규범은 국민들의 민주적 토론과 합의를 통하여 결정되는 국가의 근본이 되는 가치결단이며, 또 그래야 한다. 헌법규범이 그야말로 최고규범으로서 생동하는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적으로 정립되었다는 데 있다. 그런데 관습헌법이라는 것은 헌재에 의하면 오랜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국민들로부터 규범적 신뢰를 부여받은 헌법적 규범이라고 하는데, ‘서울이 수도이다’라는 관습헌법규범(?)은 무엇보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부여받을 자격이 없다. 그것은 관습일 수는 있어도 “헌법규범적 지위”는 획득할 수 없다. 비단 수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애국가), 국기(태극기) 등등 어떠한 명제라도 대한민국헌법이 규정하지 않은 한 관습헌법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적 지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은 헌법규범의 민주주의적 정당성기초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위험성이 대단히 큰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 헌법의 민주주의적 정당성기초를 훼손함과 아울러 헌재가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을 동원함으로써 헌재는 민주주의적 자율성이 작동하는 정치의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민주주의적 정당성에 대한 두 번째 차원의 도전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헌법은 국가의 근본적인 가치결단과 이념적 지향점을 설계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의 영역에 일정한 한계기준을 설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어떠한 정책이 그 한계기준을 일탈하지 않는 한 “합헌”이며, 그 범위에서 정치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국가정책을 조율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정치가 지니는 민주주의적 자율성의 영역이다. 헌법은 이를 국회의 입법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자율성과 정당성은 일차적으로 국회의 입법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헌재의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는 법치주의라는 외관을 뒤집어쓰고서는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민주주의적 자율성과 정당성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헌재의 말대로 수도가 어디냐의 문제는 한 국가(내지 국민)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모두 다 헌법적 차원의 논의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정체성에 관련된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헌법규범 속에 녹아 있다. 헌법규범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항은 “민주주의의 영역” 즉 정치의 영역에 개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관습헌법이라는 이름으로 끌어오는 것은 헌법이 정치에 부여한 민주주의적 자율성과 정당성을 침범, 훼손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적 자율성에 대하여 헌법이 취해야 할 개방성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헌법을 경직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수도가 국가의 정체성에 관련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수도이전의 문제는 헌법이 직접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은 이상 정치라는 민주주의적 자율성의 영역에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올바른 헌법해석이며 따라서 헌재의 결론은 ‘각하’여야 한다. 물론 수도의 문제가 국가의 정체성에 관련되는 한, 그것은 정치의 영역 중에서도 다른 문제보다는 좀더 높은 수준의 민주적 정당성을 요구하는 영역이라는 논리는 가능하다.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국민투표부의권은 바로 이처럼 일반 정책사안보다 높은 수준의 민주적 정당성이 요구되는 사안에서 써먹으라고 부여한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국민투표 등의 방법으로 좀더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고자 노력하지 않은 것은 개인적으로 유감이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분명 대통령의 국민투표부의권을 정책입안 및 집행의 최고지위에 있는 대통령의 판단에 일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민투표부의권은 정치의 영역에서 대통령이 어떤 정책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음을 헌법이 인정한 것이다. 그것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즉, 수도이전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지 않았다고 하여 이것이 법치주의적 정당성을 훼손한 위헌은 아니다. 그러므로 김영일재판관처럼 헌법 제72조 위반을 들먹이는 것은 국민투표부의권을 잘못 이해한 소치일 뿐만 아니라, 헌재가 국가정책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직접 심사하여 결정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점에서는 다수의견과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적 정당성은 선거와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심판받는다.

3. 탄핵심판사건에서 시작된 헌재의 정치개입의 유혹

이처럼 헌법의 민주주의적 정당성기초와 헌법이 정치에 부여한 민주주의적 자율성을 침해하면서까지 헌재가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을 동원함으로써 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하여 위헌결정을 한 것은 헌재가 법치주의적 정당성에 대한 심사라는 고유의 역할을 벗어나 민주주의적 자율성이 작동해야 할 정치의 영역에 개입함으로써 헌재 스스로가 수도이전이라는 정책에 대하여 그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심사하겠다고 나선 꼴이다. 이러한 실체를 교묘하게 감춘 논리가 바로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헌재의 이러한 경향은 이미 탄핵심판사건에서부터 감지된 것이다. 탄핵은 그야말로 100년에 한번도 경험하기 힘든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헌재가 정치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직접 심판하고자 하는 유혹을 지니게 된 결정적 사건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탄핵사건은 그동안의 일반적인 위헌심판사건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으로 헌재 재판관들에게는 아마도 색다른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위헌심판사건은 어떤 법률이 헌법이 정한 법치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인가 여부를 심사하는데 초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헌재가 일반 위헌심판사건에서 법치주의적 정당성심사라는 본연의 업무에서 일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탄핵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 판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탄핵이 기각됨으로써 정부와 열린우리당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헌재는 이미 탄핵사건을 통해 정치개입이라는 사탕맛을 본 것이다. 탄핵심판사건에서 헌재가 기각이라는 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노대통령의 행동 하나하나에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음을 상기해 보라.  

4. 관습헌법 논리의 허점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관습헌법이라는 헌재의 개념은 헌법이해의 월권이자 오류이며, 헌재의 정치개입 경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우려스럽다. 헌재가 자신의 고유한 업무영역을 벗어나면서 이를 감추기 위하여 동원한 것이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이라면, 그 개념과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헌재는 관습과 관습법 내지 관습헌법의 개념을 사실상 혼동하고 있다. 관습은 오랜 기간 동안 사회적 사실로서 기능해 온 관행을 말한다. 반면에 관습법은 사실로서의 관행에 법규범으로서의 신뢰가 덧붙여질 때 비로소 인정되는 개념이다. 만약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법적 신뢰 이상으로 헌법적 가치결단에 상응하는 규범적 신뢰가 주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헌재도 관습헌법의 개념을 그렇게 정의하였다.
그러나 헌재는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헌법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장황하게 조선시대의 도읍이 한양이라는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는 했지만, 헌재의 이 설명은 기껏해야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로서의 관행”을 입증한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조선과 대한민국은 국가의 정체성이 단절되어 있다. 조선의 도읍이 한양이라는 사실은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관습“법”을 증명하는데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헌재가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이 사실적 차원을 넘어 “법규범” 더 나아가서 “헌법규범”으로 인정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어떠한 증명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사실로 존재하는 관습이 관습법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법적 확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적 확신이라는 것은 일정한 관습이 국민들에게 “법규범”으로 승인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국민들이 어떠한 사실을 사실로서 인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말이다. 규범은 당위이다. 규범적 확신이란 모든 국민들이(최소한 대다수가) ‘수도는 서울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인식을 갖추고 있을 때 유지되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고 인식하고 있더라도 이는 사실로서의 인식차원이지 규범적 인식차원은 아니다. 더구나 그러한 사실인식 속에 “법적 확신”을 넘어 헌법적 가치결단의 의미를 부여할 만한 규범적 확신이 정립되어 있는지는 대단히 의문이다.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규정 혹은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는 헌법규정과 동등하게 헌법적 가치결단이 내포된 규범적 인식으로 볼 수 있을까? 이는 헌재의 결정에서 증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헌재의 일방적인 선언에 불과하다. 그 일방적인 선언에 헌법규범이 지녀야 할 민주주의적 정당성기초가 결여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둘째, 위와 연관되는 문제인데, 헌재는 서울이 수도의 지위를 갖는다고 규정한 법률규정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았다. 서울이 수도의 지위를 갖도록 한 법률규정은 당연히도 국민들의 인식 – ‘서울이 수도이다’라는 인식 – 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울이 수도다’라는 국민들의 인식은 명문의 법률규정에 의하여 뒷받침된 규범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2002년부터 – 아니 그 이전부터 – 줄곧 정치권에서 수도이전의 문제에 대하여 정책적 공방을 벌여 왔으며 그 논의 가운데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헌재에 헌법소원이 제기되기 훨씬 전부터 수도이전의 문제가 공론화되어 왔으며 수도이전이 정치적 민주주의의 공론으로 다루어져 왔다는 사실(즉 헌법개정의 차원으로 인식되거나 그러한 차원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들의 인식 속에 – 수도이전에 찬성하던 하지 않던 간에 – 수도가 서울이 아니라 다른 곳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아울러 비록 수도이전에 반대할지언정 수도이전을 위해 헌법개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떻게 서울이 수도이라는 명제가 관습헌법인 헌법규범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가? 헌재의 논리처럼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헌법으로 굳어져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 국민들은 수도이전의 문제를 헌법개정의 문제로 접근하는 공론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동안 수도이전의 문제가 헌법개정의 차원이 아닌 정치의 민주주의적 자율성의 영역에서 공론화되어 왔음은 수도가 서울이다라는 헌법규범적 확신이 결여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국민들이 ‘수도가 서울이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그것을 헌법규범의 차원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헌재가 관습헌법의 개념요소로서 말하는 항상성과 계속성, 규범적 확신은 이미 깨져 버렸거나 아예 없었던 셈이다. 나는 수도이전의 문제가 헌법개정의 차원이 아닌 정치의 민주적 자율성의 영역에서 공론화되는 과정을 도외시하고서, 과연 관습헌법의 개념요소인 “헌법규범적 확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관습헌법 운운하려면 정작 헌재는 보았어야 할 것은 첫째, 서울이 수도의 지위를 가진다는 법률규정이 일정한 규범력을 지닌다는 사실과 둘째, 수도이전의 문제가 헌법개정의 차원이 아니라 이미 정치의 민주주의적 자율성의 공론장으로 들어와 논의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헌재는 이 두가지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셋째,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헌재는 수도의 문제는 국가정체성 문제이므로 관습헌법이고 따라서 헌법개정의 문제라는 형식논리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중요한 헌법적 가치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헌법은 인간다운 삶의 권리, 환경권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국가는 이러한 국민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기본권보장의 책무를 지고 있다. 또한 국가가 국토의 균형발전을 추구해야 함은 헌법적 요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하는 것, 국토의 균형발전 등은 헌법의 명문규정으로 뒷받침되는 것들이다.
수도인 서울의 과밀화현상, 그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오염, 수도권과 지방의 심화되는 격차 등의 문제를 다양한 정책수단을 동원하여 해소해 나가야 함은 헌법적으로 요구되는 정치지향점이다.
백번 양보하여 서울이 수도라는 것이 관습헌법으로 헌법규범의 지위를 갖는다고 인정하더라도, 헌법의 명문규정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수도권과밀화해소라는 정책방향과 수도가 서울이라는 관습헌법규범이 서로 상충한다면 관습헌법이 후퇴되어야 함은 자명한 이치이다. 관습헌법 개념을 인정하는 헌법학자들도 관습헌법은 명문으로 규정된 헌법조항들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헌재는 수도를 정하는 문제가 오로지 국가 정체성의 문제라고만 말할 뿐 인간다운 삶의 보장 및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규범을 후퇴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관습헌법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명문의 헌법규정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 명문의 헌법규정으로 표현된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가치지향과 모순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관습법 내지 관습헌법의 보충성의 원리이다. 헌재는 이러한 논점을 회피하였다.  

5. 맺으며

헌재의 이번결정은 헌법재판이 법률과 정책을 산출하는 정치의 영역에 개입한 첫걸음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으로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헌법에는 법치주의적 정당성의 원리와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원리가 혼재되어 있다. 헌법재판의 역할은 정치의 영역이 법률이나 정책을 산출하는 과정에서 법치주의 틀과 한계를 일탈하였는가 여부, 즉 법치주의적 정당성에 대하여 심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정치가 법치주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정치에 요구되는 민주주의적 정당성에 대한 심판은 국민들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하는 것이다.  헌재가 인용한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은 법치주의의 심사를 한다는 외관 하에 실제로는 정치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헌재 스스로 직접 심판하겠다는 의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헌재의 이러한 태도는 국회와 국민들의 민주주의적 공론정치 영역을 잠식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이번 헌재결정의 의미라면 의미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식의 헌법재판의 민주주의적 취약성을 이미 경고한 바 있다.

– 2004. 10. 23   이호중(한국외국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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