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인터뷰] 법무부 ‘국적 난민과장’ 출신 변호사 차규근 변호사 인터뷰

2013-01-31 555


법무부 ‘국적 난민과장’ 출신 차규근 변호사 인터뷰


인터뷰 :  좌세준 변호사, 9기 인턴 박진선

녹 취 : 9기 인턴 박진선, 이경빈


2013년 민변뉴스레터의 첫 인터뷰 손님은 차규근 변호사입니다. 1995년 변호사 개업과 동시에 민변에 가입한 차규근 변호사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5년 동안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국적난민과 과장을 역임했습니다. 법무부를 떠나 다시 변호사로서 맹활약하고 있는 차규근 변호사. 차규근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공존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를 통해 법무부 재직 당시의 소회와 현재 변호사 활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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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변호사로서 많은 활동들을 하고 계신데,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다면.


차규근 변호사(이하 ‘차규근’) : 대학교 들어가서 1학년 때 시위 때문에 구속이 되었다. 구속되고, 석방되고, 복학하고, 사면 복권되는 과정 속에서 사실 방황도 많이 했었다. 법대생이었기 때문에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구속되었던 경험이 사법시험 준비를 할 때부터 변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민변 : 86학번이신데, 방금 이야기하신 것처럼 대학 재학 시절 4개월 동안 구속되었던 경력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 사건을 포함해서 대학 시절을 회상한다면 어떤 기억이 있는지.


차규근 : 아시겠지만 그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여서 혼란스러웠다. 학내에는 항상 최루탄 가스가 매캐했다. 고향이 대구인데 대구에서 올라올 때 고등학교 동기들하고 “우리는 절대로 데모하지 말자”고 약속하고 올라왔다. (웃음) 그래서 첫 학기 때는 서클 같은 데는 눈도 안주고 평범하게 지냈다. 그러다 그해 5월에 김세진, 이세호 학형의 분신이 있었다. 그냥 이렇게 외면하면서 학교 다니는게 맞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2학기 개학 후 법대 편집실에 찾아가서 등록했다. 가입해서 첫 세미나가 11월 13일이었는데, 그날이 전태일 열사 추모일이었다. 세미나 준비로 『전태일 평전』을 읽어오라고 했다. 세미나 전날인가 읽었었는데 밤새도록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었다. 그런데 다음날 세미나가 취소되고 전태일 열사 추모집회에 참석하게 됐다. 그전까지 학내외 시위에도 단 한번도 참가한 경험이 없어서 겁이 많이 나긴 했지만, 전날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 때문에 겁 없이 나갔다가 처음 나간 시위에서 체포가 되었다. 신길동에서. (웃음) 처음에는 훈방이나 기소유예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재판까지 받고 4개월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다음 해 3월 20일엔가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나왔다. 나온 이후 방황을 굉장히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졸업할 무렵이 되면서 더 이상 방황할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어 사법시험 준비를 했고 변호사가 되었다.


민변 : 민변에는 곧바로 가입한 것인가.


차규근 : 그렇다. 변호사 개업과 동시에 가입했다.


민변 : 개업 후 10년 동안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2006년에 개방직인 법무부 출입국관리국 국적난민과 초대 과장을 맡으셨는데, 당시 그 자리에 지원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차규근 : 아마 계속해서 국내에서 변호사 활동만 했다면 그런 결정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04년에 일본 문부성 초청 프로그램으로 1년 반 정도 일본 유학을 가게 됐다. 유학을 마칠 때쯤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와서는 법무부에서 국적난민과장직을 새로 만들어서 공개 모집을 하는데 내가 관심있어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했는데 어떻겠냐고 지원을 권유받았다. 그래서 법무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알아보았더니 마음이 끌렸다. 사실 일본에 건너갈 때 사무실 정리를 하고 간 터라 부담이 없었다.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없진 않았는데 계약기간도 2년 정도라서 지원을 했고 일을 하게 되었다. 결국 계약 연장을 하고 해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되었다.


민변 : 법무부에 5년간 재직하셨는데, 정부 부처에서 일을 하다보면 출입국이나 난민 분야의 공익 변호사나 활동가들로부터 비판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힘든 점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차규근 : 물론 비판은 있었다. 황필규, 김종철 변호사나 피난처라는 이름의 난민지원단체를 운영하시는 이호택 선배가 대표적이셨다. (웃음) 하지만 비판해 주시는 분들과 오래된 신뢰관계가 쌓여있었고, 그래서 그 분들의 비판을 좀 더 잘하라는 격려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비판적 협력관계라고 생각했다.


민변 : 재직 당시 개인의 신념과 다르게 일을 집행해야 했던 적은 없었나.


차규근 :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신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면 공직자로서 합리적인 결정을 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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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난민 전문변호사라고도 불리는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난민’이라는 개념은 생소하다. 간단한 설명 부탁드린다.


차규근 : 난민 전문변호사라고 하는데, 사실 법무부에서 국적난민과장을 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자리에 나와서부터는 난민들이 찾아오시질 않더라. (웃음) 사실 김종철 변호사님이나  양동수 변호사님과 같은 젊은 변호사님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저를 난민 전문 변호사라고 하는 건 조금 어색하다. (웃음)

하지만 5년 동안 국적난민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접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한  건 사실이다. ‘국적’과 ‘난민’이란 업무를 한 부서에서 처리하다보니 생기는 문제점들인데, 아무래도 ‘난민’을 포함한 외국인 관련업무보다는 ‘국민’과 관련되는 국적업무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국적업무를 처리하다 여력이 생기면 난민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실 난민과가 따로 독립되어 있었다면 좀 더 의욕적으로 많은 업무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국적업무보다는 난민업무에 관심이 있어서 지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난민 업무에 대한 제도개선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인적, 물적 인프라가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한국이 92년에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하 난민협약)에 가입했는데 법무부에 들어간 2006년에는 난민 신청자 누계가 천명을 돌파했다. 아마 작년만 한해도 난민신청자가 천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 상황이 많이 바뀐 것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도 한국이 난민제도와 관련해서 동아시아의 선두주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개선할 의지나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

1년에 난민 신청자가 1,000명이 넘는 상황인데도 아직까지 ‘난민’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인적, 물적 인프라 또한 매우 부족하다. 사실 난민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외국인 문제 전반에 대한 제도나 인식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민변 : 영종도에 난민센터를 만들기로 했었고 이는 많은 논란이 되었다. 담당자로서 많은 비판을 받으셨을 것 같은데 그때의 심경은 어땠는가? 그리고 난민센터 건설은 얼마나 진척이 되어있나?


올해 7월이나 8월 쯤 완공되는 것으로 안다. 말씀하신 것처럼 위치선정에 있어서 많은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난민센터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이나 지자체의 입장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상적 모델로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같은 나라를 들 수 있는데. 이들 나라들은 역사·문화적으로 ‘이민국가’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이고 땅덩어리도 넓다. 이주민에 대한 인식자체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개방적이기 때문에 난민에 대한 의식도 상대적으로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유럽 국가들은 식민 종주국으로서 식민지 국가 이주민들에 대한 역사적인 부채의식도 있고, 2차 세계대전 젊은이들이 많이 사망하여 이후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난민이나 이주자들에 대해 포용적 정책을 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유럽 국가에서도 이민자와 거주자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 신화가 강한 상태에서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다 난민센터를  건설해서 접근성을 높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 외국인 체류자가 많은 지역 자치단체장에게 난민센터 건립 가능성을 비공식적으로 문의를 하면 손사래를 쳤다. 아쉽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부분이 고려된 결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민변 : 현재 우리나라의 난민제도 시스템에 있어서 가장 취약하다거나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차규근 : 일단 심사시스템이나 인정 절차 등에 필요한 인적, 물적 인프라가 부족하다. 법무부 내에 난민문제를 담당하는 독립된 부서가 없다. ‘난민과’와 같이 난민 문제를 별도로 담당하는 부서와 담당자만 생기더라도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


민변 :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귀화제도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로 귀화하려는 사람들이 급증했는데, 귀화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차규근 : 귀화시험만 보더라도 제가 법무부에 들어갈 당시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 2007년도경부터는 시험출제 자체를 외부용역을 통해 전문가가 출제하도록 했다. 귀화의 요건으로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외국인이 국내에 체류할 때 국제법규에 맞는 보호를 해야 하는 것은 인권의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귀화제도를 통해 국민으로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데 있어서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의 능력을 요건으로 삼는 것은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서 합리적 기준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혼인귀화자의 경우 완화된 기준을 적용한다거나 하는 것이 실례이다.


민변 : 최근 오원춘 사건 등으로 국민 정서가 중국 동포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중국 동포들에 대한 출입국이나 체류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


차규근 :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대비를 잘 해야 하는 문제이고, 그냥 방치했다가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룰 수 있다. 오원춘의 범죄행위는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런 극단적 사건 때문에 중국 동포들을 비롯한 선량한 외국인들이 출입국과 관련해서 피해를 입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국 동포나 외국인들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볼 때가 있는데 외국인혐오증을 드러내는 글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사실 고용허가제 하에서 중국동포나 외국인 노동자들은 국내업체들이 내국인 구인노력을 한 후에 내국인 채용을 할 수 없을 때 고용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먼저 국내 업체에서 과연 내국인을 채용하기 위한 구인노력을 재대로 다하고 외국인 고용신청을 하는 것인지도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 중소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인건비 등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점 등이 얽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입국규모를 더 늘이기 원한다는 취지의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 ‘나는 수도권 대학 출신도 아니기 때문에 중소기업에 갈 의사가 충분히 있다. 그런데 중소기업들은 원서를 내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다. 청년실업 문제가 외국인 고용문제와 부딪히고 있는 부분이다. 사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경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력의 이동은 단순한 재화의 이동과 달리 근본적으로 복잡, 다양한 양태를 띠며 사회전반적으로 미치는 영향도 훨씬 크다.

중국 동포들의 경우는 대부분 단순노무에 종사하기 때문에 국내 단순노무자 중심으로 굉장한 반감이 형성되고 있다. 중국 동포들 같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시대 때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난 사람들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분들 중에는 독립 유공자 후손들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들의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도 상당 부분 필요하다.


민변 :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지난 번 박원순 시장님 초청 월례회 때 국내 체류 화교들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어떤 문제점들이 있나.


차규근 : 법무부에 일할 때 접하게 되었는데, 국내 체류 화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화교 체류자들의 시초는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 따라서 온 상인들이었다. 주로 산동성 출신이 많은데 일제시대 때는 12만 명까지 늘었다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화교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정책을 취해 화교들이 외국으로 많이 떠났다. 지금은 현재 15,000여 명에서 20,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화교들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2대, 3대째 생활하고 있고 세금도 낸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할지라도 거주자 과세원칙에 따라 세금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들과 동일하게 세금은 다 내고 있고, 차이가 있다면 병역의무가 없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 지난번 박원순 시장님께 질문했던 것은 65세 이상 화교들에게 지하철 요금을 면제해주는 가능성을 물었다. 현재 부산과 대구에서는 화교들에게도 요금 면제가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경우는 지하철 적자 등의 문제 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내국인들과 동일하고 납세하고 있다면 화교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대우는 해주는 것이 형평의 차원에서도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재일동포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것처럼, 국내 화교들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서는 꼭 같이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변 : 법무부 재직 중 ‘제한적 복수국적 허용’을 담은 국적법 개정안 등에 관여한 것으로 안다. 일부에서는 예컨대 우수 인재들에 대한 복수 국적을 허용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견해는.


차규근 : 개정안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복수국적 인정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고민이 있었던 문제이다. 참여정부 때부터 많은 검토와 연구가 있었다. 왜냐하면 국적법 자체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던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일 국적주의가 과도하게 적용되면서 오히려 본의와는 무관하게 복수국적이 된 국민들을 국민으로부터 배제하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감정적으로만 적대시하고 방치했기 때문에 복수국적 관리 자체가 안 되고 부작용이 겼던 것이다. 오히려 일정한 조건 하에서, 예를 들어 대한민국 내에서는 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고, 공직자가 돠는 경우에는 외국 국적을 포기한다거나 하는 조건을 부과하고 그것을 어길 때에는 국적선택 명령 등을 통해서 정리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는 것이다.


민변 : 법무부 퇴임 당시 출입국이나 난민분야 전문가로서 법원이나 대형 로펌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을 법도 한데


차규근 : 로펌에서는 제의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마음 편하게 제 사무실을 운영하고 싶어 개업을 선택했다.


민변 : 우리나라는 이주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이주결혼 여성의 문제나 다문화 가정 지원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적극적인 편이다. 아직까지 유럽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단적인 인종차별 등의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잠재적으로 그런 차별의식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는데, 출입국 분야 전문가로서 이에 대한 견해는.


차규근 :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140만 명 넘었다. 국내 체류 화교,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유학생도, 관광객 등 다양한 외국인에 대한 정책들이 부서별로 시행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책들이 어긋나거나 중복되는 경우가 많고 예산이 낭비되는 면도 있다. 결혼 이주 여성 정책과 관련해서는 예산이 상당히 늘고, 어느 지방자치단체 같은 경우는 이주여성이 아이를 낳기만 하면 1000만원을 주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외국인에 대한 어설픈 시혜성 정책 때문에 오히려 반 외국인 정서가 생기는 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종합적인 외국인 정책을 입안하고 콘크롤할 수 있는 ‘외국인청’ 또는 ‘출입국이민청’과 같은 별도의 관청을 고민해보아야 할 때다. 현재 법무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등에 분산되어 있는 외국인정책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본다.


민변(좌세준 변호사) : 개인적으로 출입국 사건을 담당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공무원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이주민들을 대하는 자세가 매우 고압적이다. 민감한 인권문제를 담당하는 이들 공무원들이야말로 인권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많다.


차규근 :  법무부에서도 그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인권교육을 하고 있기는 하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면, 법무부 출입국 담당자들이 이민정책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소모임이 있다. 그 모임에 가서 보니 젊은 직원이 소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서 식사자리에서 어떤 경위로 참여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직원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근무할 때 어느 중국동포 여성분이 불법체류가 문제가 되어 강제퇴거명령이 났는데 울면서 자기가 쫓겨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동포 여성이 인천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렸다. 그때 이 직원이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자기는  단지 직업으로서, 공무원으로서 업무를 하는 것인데 그 대상이 되는 외국인들에게는 생사여탈권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출입국업무의 무게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보다 많은 공무원들이 자신이 처리하고 있는 업무의 무게감과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면서 일을 한다면 보다 더 인권친화적인 여건이 많이 조성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좀 더 많은 인권교육이나 인권감수성을 좀 더 높이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법무부도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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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경력 중에 이목을 끄는 것이 한센병 환자들과 관련한 경력이 있는데 어떤 사건이었나.


차규근 : 일본 변호사들이 일본에 있는 한센병 환자들을 대리해서 부당한 격리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정부가 소록도에 한국인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 격리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안 일본 변호사들이 한국에 있는 변호사단체에 연락을 취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당시 민변 선배 회원인 박찬운 변호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한센병 지원변호단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소록도도 몇 번 방문하고, 일본으로 유학 간 이후에는 동경에 있는 일본 변호사, 시민단체들과 함께 집회에도 참가했다. 재판 기일에 법원 근처에서 열린 행진에도 참석한 기억이 난다. 당시 두 개의 재판이 진행 중이었는데, 하나는 승소했고 하나는 패소했다. 하지만 초기에만 관여한 셈이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는 법무부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저보다 열심히 활동하신 박영립 변호사님, 조영선 변호사님이나 나중에 한센병지원변호단에 가입하시어 열정적으로 활동하신 변호사님들에 비하면 제 역할은 부끄러울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다.


민변 : 변호사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나, 출입국 또는 난민분야 전문 변호사를 꿈꾸는 후배 법조인들에게 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차규근 : 사실 제가 법무부에 지원한다는 말을 했을 때 대학 동기인 친구는 저에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진담반 농담반의 말을 하기도 했다. 유학 다녀왔으면 가족들 생각해서 먹고 살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말이었다. 사실 지나고 나서 느낀 것이기는 하지만 지난 5년 동안의 법무부 생활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게 해주었고 묵묵히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공무원들도 많이 알게 되어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변호사가 되고 싶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후배 법조인들에게도 미지의 분야에 대해 과감하게 도전을 해보라는 말을 던지고 싶다. 급여나 직급에 염려하지 말고 일 자체에 대한 보람을 얻기 위해, 미래를 위해 그러한 일들에 과감하게 지원을 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민변 : 오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데 감사드린다.


차규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