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hear the people sing? 영화 <레미제라블>
글_ 9기 인턴 전민규
올 겨울 추위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을 춥게 하는 소식들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는 요즈음, 영화 <레미제라블>에 참 많은 사람들이 공명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3시간여 동안만큼은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다친 마음을 이 영화가 어루만져줄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는 것이었겠지요. 저 역시 그러한 기대를 안고 올해 첫 영화로 <레미제라블>을 보고 왔습니다. 이미 개봉한 지 꽤 된 평일 오후에도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더군요.
먼저 영화 자체로만 봤을 때 <레미제라블>이 <Singing in the Rain>과 <사운도 오브 뮤직>, <쉘부르의 우산>처럼 고전으로 기억될만한 뮤지컬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21세기에 넘어와 원작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들과 비교해봐도 2004년의 <오페라의 유령>과 2005년의 <렌트>가 저에겐 조금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뮤지컬을 원작으로 둔 영화는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이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화될 정도라면 이미 검증이 된 작품이기에 아무리 잘 찍어도 본전이라는 점 등의 제약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그러하기에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팅 및 대형 배급사의 지원이 이루어지기에 용이하지요. 후자의 차원에서 <레미제라블>은 성공적인 원작 뮤지컬과 휴 잭맨과 러셀 크로, 앤 해서웨이, 아만다 사이프리드라는 거물급 배우의 캐스팅, 그리고 유니버설 픽처스라는 대형자본이 있었기에 가능한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차원, 즉 뮤지컬을 영화로 옮겨 담는 과정에서 <레미제라블>은 다소 특이한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연출을 맡은 톰 후퍼는 전작인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내면을 비추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영화에서 언어 ‘치료’가 주된 요소였음을 감안하더라도 톰 후퍼는 내러티브를 깔고 그 위에 캐릭터를 얹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를 따라가며 내러티브를 풀어내는 방식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이러한 연출 성향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영화 속에서 판틴이 ‘I dreamed a dream’을 부르던 장면을 많이들 기억하실 텐데요. 이 장면에서 감독은 매우 긴 호흡의 클로즈업으로 판틴을 담아냅니다. 그리고 그 클로즈업을 통해 판틴의 감정을 오롯이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에게 전달하죠. 비단 이 장면만이 아니라 극 속에서 감정선이 중요한 장면들, 예를 들어 자살하기 직전의 자베르, 시위대와 코세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마리우스를 담는 장면들에서 여지없이 카메라는 얼굴을 전면에 담아냅니다.
뮤지컬 무대 자체를 영화 숏으로 본다면, 롱숏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클로즈업과 롱숏은 매우 대비되는 카메라입니다. 뮤지컬에서 배우가 감정을 전달할 때 이용되는 건 얼굴이 아니라 노래와 대사, 그리고 과장된 몸짓입니다. 더 나아가 설치된 무대와 조명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들이 고조됩니다. 뮤지컬이라는 무대 예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특성이지요. 그렇기에 뮤지컬은 선이 굵고 큼직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웅장하다고 할 수도 있지요. 뮤지컬이 영화로 옷을 갈아입어도 이러한 웅장함에 결을 더하는 방식으로 영화화가 이루어지는 게 보통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빈번한 클로즈업 사용은 이처럼 웅장함에 결을 더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물 개개인의 내면을 그리는데 초점을 둔 감독의 연출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후시가 아닌 동시녹음을 고집했던 감독의 선택도 뮤지컬의 현장감이 아닌 이러한 내면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레미제라블>을 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기독교적 용서와 사랑의 측면에서 이 영화를 봅니다. 대개 이 경우 장발장과 그에게 촛대를 내어준 신부님에게 주목하죠. 코세트를 위해 머리카락과 치아, 심지어 몸까지 파는 판틴을 통해 내리사랑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19세기 당시 프랑스의 왕정복고와 공화정 수립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레미제라블>을 봅니다. 이때는 영화 후반부 배경인 6월 혁명에 더 눈이 가고 시민군의 봉기와 마리우스의 선택에 감정이입을 하죠. 영화 속 시민군의 봉기와 궤멸을 보며 광주가 떠오르는 건 기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마리우스와 코세트의 사랑에, 또 그런 둘을 보며 슬퍼하는 에포닌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레미제라블> 속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듯 다층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저는 <레미제라블>에서 한 명의 캐릭터와 하나의 시퀀스가 기억에 남습니다.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베르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참 많이들 죽습니다. 그러나 자베르를 제외하곤 모두들 신의 품에서 구원을 받고 평안하게 잠들거나, 혁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그들의 죽음엔 구원이 있고, 대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베르의 죽음엔 그 어떤 것도 덧대어지지 않습니다. 자베르에게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를 들이미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베르가 목숨과 맞바꿔가면서까지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의 신념의 가치가 그렇게 쉽게 무어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죠. 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자베르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밀기 어렵습니다. 다만 혁명을 완성시키는 것이
사랑이듯,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 또한 바로 사랑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그의 선택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베르란 캐릭터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법률가에게 참 많은 생각거리와 공부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흥얼거립니다. 여러 소리가 모여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있나 싶을 만큼, 함께 노래 부르는 건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함께 노래 부른다는 건, 함께 밥 먹는 것만큼이나 사람과 사람 마음 사이에 단단한 다리를 놓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 퍼지는 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꼬마거지 가브로쉬가 첫 번째 전투를 치르고 나서 불안하고 지친 시민군 사이에서 홀로 이 노래를 시작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정적과 두려움의 공기로 가득한 바리케이드에 생기를 불어넣은 순간이었죠. 아무도 노래 부를 생각을 하지 못한 그 순간,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한 소절의 노래, 그 노래로 모두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노래였습니다.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목소리를 더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모두가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도록 노래 첫 소절을 뱉어낼 수 있는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우리 사이의 바리케이드를 허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