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링~” 어젯밤 늦은 귀가에도 불구하고 눈이 번쩍 뜨인다. 오사카노변단과의 세미나를 위해 오사카로 출발하는 오늘을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인천공항으로 향해 내달리는 버스가 오늘따라 느림보 거북이 같아 혹시나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마음이 급하다.
인천공항 아시아나 카운터. 약속시간 8시가 다되어 가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전명훈 간사님과 통화 끝에 티켓을 받아 들고, 짐을 부치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줄 끄트머리에 섰다. 중반을 넘어설 무렵, 줄 끄트머리에 서 있는 이선경 변호사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함이 역력해 보이지만 역시 신이 난 표정이다.
비행기는 2시간여를 날아 간사이공항에 도착. 추운 날씨 때문에 두텁게 껴입었던 옷들이 조금 거추장스럽다. 즐거운 정오를 갓 넘은 시각, 즐거운 점심을 고대하며 입국심사를 받았다.
공항에는 재일동포 양심수동우회 이동석 선생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이동석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지하철로 이동하여 숙소로 향하는데 환승 후 김명진, 백신옥, 이선경 변호사님이 사라졌다. 다들 걱정은 하면서도 세 사람 모두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버틸 믿음직한 분’들이기에 숙소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오전에 한바탕 빗줄기를 퍼붓고도 아쉬움이 남은 듯 하늘은 아직도 먹구름이 가득하다. 한국과 참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나라 일본, 낯선 거리 곳곳에 반가운 한글이 보인다. 일본어 아래 선명하게 적힌 한글이 한국과 일본의 오랜 역사와 인연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재일교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쓰루하시로 향했다. 그 사이 다행히 김명진, 백신옥, 이선경 변호사님이 무사히 일행에 합류했다.
한복집, 이발소, 떡집, … 이곳이 일본인지 한국인지 신기해하고 있는데, 재일동포 양심수동우회 이철 회장님이 안내를 시작하셨다. 어릴 적 고향에서 보았던 정겨운 풍경들로 가득한 이곳이 재일교포들이 일본에 와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란다.
처음 들른 국제시장에는 한국 김치며, 젓갈, 한복 등 한국과 관련된 상품들이 넘쳐났다. 한쪽에서 구수한 기름 냄새와 함께 전 부치는 풍경이 그야말로 한국의 재래시장 같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쓰루하시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은 타향살이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그러다 한류 열풍이 일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선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게다가 국제시장 내 대부분을 차지했던 일본 상점이 문을 닫고 점점 한국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이 늘어났다는 설명을 들으니 한국과 재일동포 사회에 한류가 미친 영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국제시장을 거의 빠져나갈 무렵 문이 닫힌 가게가 제법 있었다. 경기 탓인가 걱정을 했는데, 새벽에 시장이 서는 어시장이란다. 어시장은 해질 무렵인 지금이 한창 휴식시간이란다. 내일을 위해 잠이 든 시장, 그 고요함이 평화롭다.
코리아타운에 들어서는데, 점심을 건너뛴 탓인지 다들 지쳐 있었다. 이때, 눈이 번쩍 뜨이는 광경이 펼쳐졌다. 빠알간 고추장 양념 속에서 쫄깃쫄깃 익어가고 있는 떡볶이, 달콤한 팥앙금을 가득 품은 채 알록달록 빛나는 바람떡, 지글지글 ‘쏴~’ 노릇노릇 익어가는 지짐이… 결국 애처로운 후배들의 모습에 선배 변호사님들이 떡볶이를 사셨다. 길 한복판에서 창피한 줄 모르고 빙 둘러서서 먹은 떡볶이는 정말 꿀맛이었다.
코리아타운을 지나 아담한 신사에 다다랐다. 인덕천왕을 모신 신사였는데, 인덕천왕의 태자 시절 스승이 백제의 유명한 왕인 박사다. 그래서인지 신사 곳곳에 백제와 관련된 설명이 유난히 많다. 특히 왕인 박사가 일본에 도착한 직후 인덕천왕의 선왕 앞에서 불렀다는 노래 가 적혀 있었다. 이철 회장님은 왕인 박사가 백제 말로 노래를 불렀을 텐데, 그 노래가 일본어로 전혀 내려오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일본어가 옛 백제어와 유사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니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일 관계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신사를 나와 초등학교로 향했다. 코리아타운에는 일본에서 설립한 공립초등학교와 재일교포들이 설립한 사립학교인 조선제4초급학교가 있었다. 공립초등학교 학생의 50% 이상이 우리 교민들의 자녀란다. 일본의 연휴기간이라더니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공립초등학교에서 마침 재일교포들의 삶을 담은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기에 잠시 들렀다. 개구쟁이 꼬마의 환한 웃음, 한복을 차려 입고 한껏 멋을 낸 아주머니,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아저씨… 흑백 사진 속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은 작가가 근처에 있어서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분은 제주 4·3 사건의 화마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온 후 지금까지 일본에 계속 살고 계시단다. 조국을 등지고 타국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교민들의 아픔이 우리의 슬픈 역사와 오버랩 된다.
공립초등학교에서 골목을 조금 돌아가니 작은 학교가 하나 보인다. 이철 회장님, 이동석 씨, 정갑수 씨가 졸업한 조선제4초급학교였다. 조선제4초급학교는 일본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전적으로 학생들의 수업료로만 운영되고 있단다. 학교 건물도 책상도 모두 낡아 불편하기 이를 데 없고, 수업료 자체가 없는 공립초등학교와 비교하면 수업료를 내야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지만 이동석 씨는 아들 둘 모두들 이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 이 점 때문에 아이들이 불편해 하고 등록금 때문에 생활이 쪼들려도 조선인 학교를 보냈단다. 일본의 우익들이 휘젓고 다니는 요즘,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유지하는 일이 갈수록 쉽지 않아 보인다. 재일교포의 후손들이 힘든 상황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니 내 나라 말과 내 나라 역사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큰 혜택을 입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조선인 학교에 국내에서 먼저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나설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리의 가로등이 어둠을 밝힐 무렵, 쓰루하시 방문 일정이 끝이 났다. 저녁식사에는 오후 내내 우리를 안내하느라 고생하신 이철 회장님, 이동석 씨, 정갑수 씨 등 재일동포 양심수 동우회 회원들도 함께 했다. 재일동포 양심수 동우회는 70-80년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인연이 되어 결성된 단체이다. 낯선 일본인 두 분도 와 계셨다. 몸이 불편한 일본인 다나마 씨는 이동석 씨가 한국 유학 시절, 간첩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되자 일본에서 모금 운동을 하고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다방면으로 구명운동을 하셨던 분이었다. 이철 씨가 한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간첩으로 몰렸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분들은 내일 만날 오사카노동자변호단이란다.
함박웃음을 터뜨리고는 있지만 시리고 몹시도 아팠을 시간들. 그리고 ‘간첩’이라는 누명. 누명을 벗기 위해 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예나 지금이나 발 벗고 나설 줄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한 줌의 덤으로 마음 훈훈하게 하는 재래시장, 국적에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그 누구에게라도 손을 내밀어 주는 곳, 쓰루하시에는 거대한 빌딩 숲, 갈수록 고독한 정글로 변해가는 한국,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그리운 과거가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사카의 야경을 감상할 겸 숙소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도톤보리를 가로지르는데 젊음으로 거리가 들썩인다. 만화영화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은 젊은이들을 보니 낮과 다른 또 다른 일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사카의 명물인 다코야끼를 사서 먹었는데 너무 뜨거워 입천장이 델 지경이다. 그제야 일본인들이 다코야끼를 맥주와 함께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명훈 간사님이 생수를 사러 얼른 뛰어가신다.
초행길이라 방심은 금물인데, 익숙한 풍경 찾아가다 길을 조금 헤맸다. 자정이 다 되어 숙소로 도착하니 낭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이 불허되어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귀국하실 줄 알았던 오윤식 변호사님이 김진국 변호사님과 오사카 노변단의 소라노 변호사님의 특별상륙허가를 받아 내일 세미나에 참석하시게 되었단다. 3일 동안 한 방을 쓰게 된 이선경 변호사님과 방에서 맥주나 마실까 하고 맥주를 사들고 방에 들어갔다가 강 변호사님 방에서 조촐한 뒤풀이가 벌어졌다기에 합류했다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오 변호사님은 벌써 잠자리에 들고 남은 일행들은 오 변호사님 소식에 기뻐하며 건배를 들었다.
아침 8시, 눈 뜨자마자 이선경 변호사님과 숙소 4층의 식당에 내려갔다. 여행 중에는 언제 밥을 먹을지 모른다는 어제의 경험을 교훈 삼아 주먹밥은 물론 샌드위치, 와플, 빵, 요구르트 등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이 변호사님과 호텔 주변 거리를 한 바퀴 도는데 어제 숙소 돌아오던 중에 헤맸던 길이 나타났다. 호텔을 코앞에 두고 찾지 못해 삼십 여분을 헤맸다니 다니, 웃음만 나왔다.
4층 대중탕에서 피로를 좀 풀고 전명훈 간사님과 이선경 변호사님을 따라 도톤보리 시내에 다시 나갔다. 흥청대던 어제의 한밤의 도톤보리는 온데간데없고 깔끔하고 정갈한 일본의 전형적인 모습이 얼굴을 내민다. 한국 여행책자에 맛집으로 소문난 ‘라멘’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는데 김치와 마늘, 부추가 놓여 있다. 김치, 마늘, 부추를 한꺼번에 넣어 먹고 밥도 조금 떠먹는데 한쪽에서 일본인 아저씨가 똑같이 라멘에 김치, 마늘, 부추를 넣어 먹는다. 한국에서 설렁탕이라도 드셔 보셨던 듯하다.
오후 2시. 오사카노변단과의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오사카노변단은 하시모토의 공무원노조 탄압에 관련된 사건과 이에 대한 노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발표를 했다. 민변은 전영식 변호사님이 한국의 공무원노조의 상황에 대해, 최용근 변호사님이 박원순 서울시장이 선출된 후 공무원 노조에 대한 서울시의 정책에 대해 발표했다.
한국과 일본의 노동조합에 대한 법률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어떤 대표자가 선출되느냐에 따라 사회제도와 인권의 상황이 매우 달라질 수 있음을 절감했다. 세미나 시간이 부족해 저녁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세미나에 곳곳에서 세미나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삼삼오오 이루어졌다.
내 옆에는 두 분의 일본 법학 교수님과 오사카 노변단의 실무자인 야마구치 상이 함께 했다. 일본어 공부를 중도에 그만둔 것이 몹시 후회되는 순간이다. 눈치코치, 콩글리시를 총 동원해 들을 수 있었던, 내 나이보다 오래된 이분들의 활동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져온다. 항상 돈과 성공이 화두인 한국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인권, 약자들의 인권을 위해 싸워 오신 민변과 오사카 노변단의 활동을 듣다 보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이 떠올랐다. 악한 인간을 대변하다 지상으로 쫓겨난 천사 미하일과 그 천사를 구해 준 구두장이 세몽, 여기 모인 한 분 한 분이 바로 천사 미하일이고, 소박한 구두장이 세몽이었다.
저녁식사 후 자리를 옮겨 조촐한 술자리가 다시 이어졌다. 일본 사법수습생 유카리상과 마주앉았는데 둘 다 언어의 장벽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회색 정장에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말끔히 묶은 그녀에게서, 연수원 입소를 앞두고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더듬더듬 일본어를 나열하고 때론 김진국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한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 법률가를 다룬 드라마 등등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니 어색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있었다. 민변과 오사카노변단에서 교대로 변호사님들이 앞으로 나가셔서 두 단체의 교류에 대한 감회, 활동에 대한 감상 등을 쏟아내셨다. 특히 권영국 변호사님이 오사카노변단에 자이마 변호사님에 대해 칭찬과 존경을 표하는데, 옆자리의 이선경 변호사님이 두 분이 참 많이 닮은 것 같다며 웃으신다.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놓고 사투를 벌일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며, 누구보다 자상하신 면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으로 응축된 발표를 통해 민변과 오사카노변단의 우호 관계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배 변호사님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인한 귀한 결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지도 생생히 전해져 왔다.
유카리 상과 헤어지면서 명함을 건넨 뒤 이메일로 꼭 연락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아직 해외여행 경험이 없다는 유카리 상에게 한국에 놀러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하고자 했던 수많은 말들이 상대에게 얼마나 전해졌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는 그 섬’에 다녀온 기분이다.
아직 먼동이 트기 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선경 변호사님이 후다닥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가신다. 엊그제부터 강 변호사님이 꼭 가보라고 신시당부하신 오사카성을 이른 새벽 혼자 다녀오신단다. 첫날 길에서 미아가 되신 적이 있어 걱정이다.
아침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선경 변호사님이 돌아오셨다. 강 변호사님이 내 주신 숙제를 말끔히 해결하신 이 변호사님은 강 변호사님처럼 “오사카성은 오사카에 왔으면 꼭 봐야 된다”며 오사카성 예찬론자가 되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전명훈 간사님을 따라 세계문화유산인 히메지 성을 향해 출발했다. 한국은 겨울의 문턱에 서 있는데, 이곳은 아직 가을이 한창이다. 제법 따스한 햇볕 덕분에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졸음이 몰려온다. 한신선 마지막 종착역에 위치한 히매지 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이혼한 후 와 재혼하면서 살게 된 성이다. 수백 년 된 성이라고 하기에는 무색할 정도로 하얀 벽이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다. 아쉽게도 히메지 성의 주요 건물인 천수각은 보수 공사 중으로 거대한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30분 넘게 기다린 끝에 천수각 지붕 보수 공사를 볼 수 있었다. 보수 공사조차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다니, 일본다웠다. 문득 몇 년 전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남대문이 생각난다. 남대문도 이렇게 수리현장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히메지 성에서 길을 헤매다 겨우 찾아간 고코엔 정원은 아직도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었다. 한국에서 놓쳐 버린 아쉬운 2012년 가을을 이곳에서 만났다. 대나무 정원, 차 정원 등 갖가지 주제에 맞게 꾸며진 정원은 작은 연못, 정자, 다리, 천연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려한 기모노를 차려입은 중년 여성 한 무리가 수다를 떨고 있다. 한 명의 여성이 사진사 앞에서 우아한 포즈를 취하자 나머지 부인들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명절에도 길거리에서 한복 입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우리와 달리 일본은 명절은 물론 불꽃축제, 마을 축제 때에도 자주 기모노를 입는 듯하다. 고코엔을 빠져 나오는데, 젊은 기모노를 입은 남녀노소가 제법 눈에 띈다. 전통 의상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일본의 풍토만은 새삼 존경스럽다.
역 근처에서 간단히 소바와 맥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고베로 향했다. 달콤한 케이크와 빵 등 제과가 특히 유명해서일까 역에서부터 고소한 빵 냄새가 가득하다. 물어물어 찾아간 유명한 케이크 전문점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처럼 빛깔과 자태로 눈과 코를 사로잡은 케이크는 그 맛 또한 일품이었다. 주문한 커피와 함께 케이크 한 조각을 베어 무는데, 향긋한 과일 냄새가 코를 간질이더니 입에서는 탱글탱글 과육이 씹힌다. 예쁜 케이크를 앞에 두니 집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 생각이 절로 난다.
어느 새 거리의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진다. 고베의 마지막 목적지, 고베 항구에 가보니 커다란 나무에 작은 꼬마전구들이 깜박깜박 빛을 뿜어낸다. 거대한 관람차가 또한 빛을 내며 돌아가고 항구 한 켠에 서 있는 거대한 범선 모양의 호텔이 카지노의 불빛을 연상시킨다. 모자이크라는 상가 건물, 범선 모양의 호텔, 거대한 관람차… 고베의 항구의 야경은 마치 어린 아이가 검은 도화지에 노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처럼 단순하면서도 이채롭고 신비하다. 고베 항구에서 전철역까지 꽤 먼 거리를 걸으면서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풍경을 눈에 넣어 본다.
숙소로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운 시간,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전 변호사님, 강 변호사님이 호텔 근처 호프집에서 신입 변호사들과 뒤풀이를 한다고 하기에 이선경 변호사님과 함께 갔다. 고야 산에 간 일행은 아직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고, 교토에 갔던 일행과 히메지성에 갔던 일행만이 모였다. 각자 오늘 다녀온 여행지에서의 감회가 끝나자 선배 변호사님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간다. 군대시절, 변호사 초년 시절 등, 깊어가는 밤과 더불어 이야기도 깊어간다.
마지막 날, 보슬거리는 비를 뚫고 간 곳은 일본의 자치노 오사카본부(편집자주.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 오사카본부, 한국의 전국공무원노조와 같은 공무원노동조합의 오사카지부)였다. 하시모토 시장이 선출된 후 공무원노조의 어려움을 보다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왜 이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일본 사회 분위기가 복종에 익숙한 문화인데다 공무원이라는 신분이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특권층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이들의 행동이 자칫 민심의 외면을 받을 수 있기에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오사카 공무원노조관계자들과 점심을 먹고 일본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호류지로 향했다. 고구려의 담징이 금당에 벽화를 남긴 곳으로 유명한 호류지. 호류지에 들어서니 한국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교토에서 보았던 직선 중심의 기와 능선은 찾아 볼 수 없다. 유려한 곡선의 지붕 능선과 살짝 들린 처마의 모습이 꼭 한국의 사찰처럼 보였다.
김진국 변호사님에 의하면 백제의 후손들이 일본 아스카 지방에 자리를 잡으면서 탄상한 아스카 문화인데, 호류지는 아스카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에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백제의 모습이 이곳에서 더 많이 존재하는 듯하다. 일본의 국보인 ‘백제관음상’에 ‘백제’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를 아직도 명확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단다. 그 미스터리가 풀리는 날 한일 양국의 역사에 대한 논쟁의 일부도 종지부를 짓게 되지 않을까.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일본에서의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 일본 오사카노변단에 대한 인상과 그 분들의 한결같은 열정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혼자서 떠나는 배낭여행에서 낯선 곳에서 성장하는 ‘나’를 발견했었다. 그런데 이번 오사카여행에서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다양한 삶을 보았다. 쓰루하시, 오사카노변단, 자치노 오사카본부, 호류지…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관되게 느낀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내가 가진 것을 나눠 주고, 내가 가진 재능을 남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행복해 하는 사람들… 한국의 겨울 속으로 떠나는 나는 벌써 따스한 봄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