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면
일만 느는 남자? 일 만드는 남자!
– 인권활동가 박래군 인터뷰-
인터뷰_ 이재정 변호사
사진 / 녹취 _ 장수진 간사, 유신혜 변호사
정리_ 이재정 변호사, 최유라 인턴
대추리, 용산참사, 제주강정, 쌍용자동차, 눈물나게 서럽고 아팠던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함박웃음으로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그를 마주하면서도 별안간 눈물이 앞선 건,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에서 현장의 아픈 순간들이 겹쳐 보여서였을까.
법전을 들고서야 인권을 이야기하는 이리도 부족한 인터뷰어로서는, 그저 고맙고 고맙고 고마운, 그저 미안하고 미안하고 미안한 사람…
여름이 한 섶 앞서 와 있던 어느 6월, 서대문 한 카페에서, 그와 설레게 마주했다.
이재정 변호사(이하 ‘민변’) : 페이스북을 통해 보았는데, 동생인 박래전 열사의 기일이 얼마 전이었다고.
박래군(이하 ‘박’) :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동생은 1988년 6월 4일에 분신했고, 6월 6일에 결국 세상을 떠났어요. 매년 6월 4일은 동생의 모교에서 추모행사를 하고, 현충일인 6월 6일은 마석 모란공원을 다녀옵니다.
민변 : 박래전 열사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생운동에 열심이던 형님(박래군)을 보면서 사회에 눈을 떴다고 들었다.
박 : 그래서 (가족들로부터) 원망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3형제인데 제가 둘째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형이 있지요. 형한테도 원망 많이 들었지요. 바꾸어 제가 인권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도 동생때문이었어요. 만약 동생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을지도. 동생이 그렇게 죽고 나서 유가협을 알게 되었고, 유가협을 통해서 참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게 됐죠. 역사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역사책에서 보는 것 말고 생생하게 구체적인 사례들을 유가협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내 동생의 죽음, 나의 삶, 나의 운동 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생은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하고 단대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어요. 1988년이라는 시점이, 87년에 6월 항쟁이 있었고 노동자 대투쟁을 겪었던 시기인데, 그 뒤 야권의 분열로 김영삼, 김대중 두 명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바람에 결국엔 노태우가 당선되고 난 이후의 상황이었지요. 대통령선거 이후에도 야권이 서로 갈라지고 반목하던 것들이 아물지 않았던 때였고, 여소야대 국면이 열리면서 등장했던 것이 광주학살 진상규명, 5공 청산 같은 이슈들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야당이 여당과 타협적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원칙적인 해결을 강조하면서 분신을 한 것입니다. ‘광주’ 없이는 80년대 운동사를 설명할 수 없고, 그렇기에 그 시대의 우리들을 ‘광주 세대’라고도 하지요.
민변 : 80년대 학생운동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운동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다고.
박 : 당시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운동하다가 군대에 강제징집 당하여 최전방(양구)에 배치되고 노동운동하다가 감옥에도 갔다 오고 두들겨 맞으면서 살았어요. (민변: 시대의 트랜드-trand-를 쫓아 사셨네요. 함께 웃음)
민변 : ‘인권운동’이라는 단어로 떠오르는 그간의 각 종 이슈와 현장에는 늘 ‘박래군’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박 : (웃음) 그렇지는 않은데….. 다들 제각각의 분야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 인권운동사랑방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을 했는데, 그때가 1994년경 이지요. 한국인권운동의 역사는 70년대부터 시작되요. 엠네스티 한국지부가 만들어 졌는데, 당시 엠네스티는 한국의 인권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인권에 대한 캠페인 위주의 활동이 주(主)인 탓에, 실제적인 인권운동의 시초는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 생긴 NCC인권위원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더 넓혀서 생각하면 영등포 산업선교회를 포함해서 노동인권문제도 포함될 수 있겠습니다만.
처음의 인권문제는 양심수 문제였어요. 양심수 석방문제, 고문에 항의하는 등의 운동을 인권운동이라고 주로 생각하고, 다른 영역의 문제들은 인권운동으로 고민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정치적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이후 인권운동의 지평 자체를 전면화시켜 나가는데 기여했던 것이 인권운동사랑방이었어요. 당시 저는 30대 중반이었는데, 인권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운동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원 없이 일했어요. 사회복지시설 인권문제, 예를 들면 에바다 사건, 양지마을 사건 등을 시작으로 사회권위원회를 만들어서 ‘사회권적 인’식을 어떻게 확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책을 만들어도 보고, 감옥에 관한 인권문제에 대해 조사하다 ‘제소자 권리’에 대하여 관심도 갖게 되었지요. 이주노동자문제나 성소수자문제처럼 인권의 영역 안에 있지만 제가 관여하지 못한 영역도 있어요.
민변 :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권에 대한 폭넒은 논의를 하던 시기에서) 다시 자유권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로 후퇴했다. 어떤가.
박 :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종래에는 당연히 인정되던 ‘자유의 영역’을 아예 무시하고 침범해 들어오는 상황이 발생했지요. 언론분야만 보더라도 언론사들이 파업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였지요. MB 이전의 정권들도 사실상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방송사에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쫓아내는 등 이렇게 노골적으로 방송장악을 하지는 않았거든요. 또한 2008년 촛불시위현장만 보더라도 전경을 동원해서 탄압하는 방식이 무자비한 폭력이 동원되는 등 정도를 넘었지요. 단순히 집회·시위에 참가한 사람인데도 벌금폭탄에, 압수·수색까지 하고… 이런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여태껏 권리로 당연히 보장받았던 그 가장 기본적인 것마저도 일거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기본적인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자유나 평등을 지킬 수 있는 사회 경제적인 토대 자체가 무너져버리는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게 됩니다.
민변 :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고 대선을 앞두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의 상황보다 더 예측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박 : 그렇습니다. 지금 미래를 전망하기가 굉장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번 대선의 쟁점은 ‘복지’가 될 것이라고 봤었는데, 최근처럼 통진당 사태라든가, 안보문제, 이런 것들로 관심이 옮겨지는 바람에 주요하게 논의되어야하는 쟁점 자체가 흐려질까 걱정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자본주의의 위기, 복지문제, 불평등문제 이런 것들이 중요한데, 이런 중요한 이슈들을 놓치고 가면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없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복지문제에 관한 대중들의 불만이나 욕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완전한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중들의 불만이나 욕구를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는 보장해 줄 수 있는 향으로 가야만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라, 보수진영에서도 관심을 놓을 수 없는 쟁점입니다.
민변 : 그런 측면에서, 사실 지난 총선 공약을 보면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일정 부분 대중의 욕구는 받아 안고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는 분석도 있다. 어떻게 생각 하는지.
박 : 보수진영도 체제유지를 위해서 ‘복지’라는 큰 흐름의 요구를 피해갈 수 없겠지만, 분명한 차이는 있겠지요. 새누리당이 집권을 한다면 근본적인 변화까지 가는 것들을 막으면서 일정 수준까지만 허용하는 정도로 그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민변 : 오랜 기간 운동의 현장에 있었는데, 다른 역할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지. 얼마 전 총선에서도 운동현장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나아간 사람들이 많은데.
박 : 정치요. 그거 피곤하지 않을까요. 국회의원 하는 거,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하고 (웃음) 지역 관리해야 하고. 그렇다고 제가 정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야 말로 진정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민변 : 아직까지는 운동의 영역에 있으면서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기초부터 제대로 닦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치가 잘되려면, 진보정치가 잘 되려면 운동의 토대가 튼튼해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때도 나타났던 현상이기는 한데 정치가 운동을 흡입해버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니카라과이가 그런 경우인데요. 하지만 니카라과이에서 다시 운동이 살아난 것은 제도권에 들어가지 않았던 원주민운동, 여성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제가 얻은 교훈이랄까요. 정치할 사람은 정치하러 가야겠지만 사회운동의 영역을 지키는 사람은 이 영역을 지켜 줘야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해서 저는 제 자리를 지키겠다는 거예요.
민변 : 현재 추진 중인 인권센터 건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박 : 2011년말부터 시작해서 1년 정도가 되었어요. 2,000명 정도 참여했고, 4억 7천만 원 정도를 모았습니다. 어떤 분은 거금을 내주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만 원 내주시기도 했어요. 2,000명이 적은 숫자 같지만 인권운동에서는 굉장히 큰 숫자예요. 여기에는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도 있지만, 대략 1,500명 이상은 여태껏 인권운동과는 전혀 관련 없던 사람들이 새롭게 참여했어요. 인적 토대가 생겼다는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큰 성과인거죠. 이 사람들을 잘 꼬셔서(웃음) 인권센터 사업의 후원자로도 모시고, 또는 다른 단체들의 버팀이 되도록 안내도 하려 합니다. 큰 자산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권운동은 토양이 좋지 않아요. 굉장히 여러 가지로 대중적인 기반도 약하고 소수의 활동가들이 수많은 활동을 하는데 지속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지요. 후배들이 지쳐 떨어져나가고 특히 경제적인 문제로 떨어져나가는데, 안타까운 것은 경제적인 문제나 자기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떠나가는 후배들을 잡을 용기가 없어요. 그래서 제 꿈은 지속가능한 운동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에요. 인권운동의 토대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것이죠. 나처럼 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인권활동가들은 소수의 몇몇 사람들만이, 전국에 인권단체연석회의, 인권활동가대회 오는 사람들 보면 다해야 겨우 200명 정도인데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거죠.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굉장히 원칙적이고 헌신적으로 하는데, 대중들과의 교감은 점점 줄어들어요. 시민들과 함께하는 인권운동을 못 만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반성하는 것이 인권운동사랑방 모델로 가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에요. 인권운동사랑방 모델은 활동가 중심의 모델인데, 이런 인권활동가 중심의 모델이 아니라 회원과 함께 하는 대중적인 조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고민들로 인권센터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어요. 활동가들 간에 계속 파편화되던 운동들을 서로 모여서 교감할 수 있도록 하고, 시민들하고 만나서 얘기하고 시민들이 인권을 배우고 스스로 인권활동을 고민하고 활동을 직접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그런 물적 토대를 위한 모금 목표액이 10억 정도였는데, 막상 장소를 알아보니, 10억을 가지고도 서울 시내에서 100평짜리 건물을 전체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얻기가 어려워 걱정입니다.
민변 : 얼마 전 콘서트 ‘남산, 사람을 만나다’ 라는 콘서트를 접한 적이 있다. 남산의 안기부터를 인권 평화의 숲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고 들었다. 어떤 이유로 시작하였고, 진행은 어떤지.
박 :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하던 이듬 해인 1995년 무렵, 안기부 건물이 서울시 관리로 이관되던 당시에, 민주공원이나 민주열사묘역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처음 있었습니다. 외국의 경우 역사적 현장을 공원처럼 조성하여 사람들이 오감으로 느낄 있도록 하는 사례들이 많더라구요. 돌아가신 정기영 건축가, 그리고 홍성담 화백, 백원담 교수 이런 분들과 함께 남산 안기부터를 그런 공간으로 만들자며 뜻을 모았지요. 그런데 당시 서울시가 안기부 땅을 절대 내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른 장소라도 알아보려 하던 차에, 4.19묘지가 있는 수유리 쪽을 고민하게 되었는데 주민들이 반대를 하고 (이명박 서울시장이 재임 중이던) 서울시에서 사실상 훼방을 놓는 바람에 불발되었어요. 그러는 사이, 2009년도 제가 용산 참사 해결을 위한 과정에서 수배자가 되어 있을 무렵인데, 오세훈 시장이 ‘남산 르네상스’라고 하면서 한성 성곽을 복원하고 공원으로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남산에 있던 안기부건물을 다 밀어버리려고 하기도 했지요. 역사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역사의 흔적을 이런 방식으로 지우려는 세력들이 늘 있기 마련이지요. 사실 남산 안기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남산이 상당히 불편한 공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현장성’이 주는 교훈과 감동은 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기에 다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례로 보면, 광주항쟁의 기억이 있는 망월동묘역만 하더라도, 세련된 신 묘역에서는 오감으로 느껴지는 구 묘역의 감동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신 묘역에서는 사람들에게 광주학살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지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여기가 그런 곳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구묘역의 현장성, 역사적 현장이 갖고 있는 생생함은 다릅니다. 남산 안기부 터, 그곳에다 인권박물관, 고문박물관을 만들었으면 싶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고문박물관을 만드는 거죠. 고문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았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문 속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루어낸 사연까지 담을 수 있고, 인권의 소중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같이 배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는 ‘남산 안기부터 만한 곳이 없다, 이것을 잘 구성하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민변: ‘박래군’이라는 사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웃음) 대추리의 경우만 하더라도 미군기지 문제라 다른 단체가 떠오르는 데, 어느 새인가 나타나서 연대하고, 강정도 쌍용차문제도 그러하거니와, 남산 안기부터 프로젝트에서 희망버스, 인권센터 건립까지. 그렇게 바삐 ‘박래군’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박: 일을 제안 받을 때 사건만 보고는 잘 안 움직이는데, 그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외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요 (웃음) 그렇지만, 어려운 현장들의 어려운 이야기들을 나누면서도 그 현장을 고통스럽고 어렵다고만 느끼지 않는 이유 역시, ‘바로 그곳!’에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모르던 세계, 내가 몰랐던 삶을 내가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문제가 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에게 힘을 얻어서 박래군이 삽니다. 제가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사람’덕분입니다.
민변: 민변의 주 고객(?)이시다. 민변, 어떤가. 마음에 드시는지.
박: 민변이 참 소중하죠.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하고(웃음) 요즘은 옛날보다 참 마음에 들어요. 민변과의 관계가 지속된 게 어언 20여 년이네요. 옛날에는 민변 변호사들 왜 그러냐며 부족한 것들에 서운해 하곤 했는데, 지금은 ‘민변이 있어서 다행이지’라는 많이 생각을 합니다. 전체 변호사수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민변 변호사들이 여러 가지일 도맡아 하느라 고생하는 것이 이제야 보이네요. 하하하.
민변: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꼭하고 싶은 한마디.
박: ‘인권센터 주춧돌’에 참여해주세요.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인권센터 홈페이지를 참조해주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용산다큐 ‘두개의 문’ 21일부터 개봉인데 많이 봐주세요. 또 있어요!! ‘쌍용자동차 희망지킴이’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말미에 넣을 마지막 한마디만 하랬더니 채울 부탁들도 그렇게 많은 그이다. ‘사람이 두렵다’고 말하면서 늘 그들 가운데서 자신을 두고 행복해하는 그.
그런 당신을 마주한 모든 이도 그렇게 또 행복해집니다.
당신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