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 고시랑] 내게 밭을 다오

2011-04-14 162


[고시랑 고시랑] 내게 밭을 다오


글_황희석 변호사


 


  나는 농부의 아들이다. 요즘은 무슨 기업농도 있다 하더라마는 물려받은 재산 없이 식구들 입에 풀칠할 정도의 논밭에서 어른들 모시고 주렁주렁 자식들 키우며 평생 농사만 지어오신 농부의 아들이다.



  농부의 자식이라면 대개 비슷한 경험이 있겠지만, 어릴 적 나는 해만 뜨면 눈이 떠지곤 했다. 여름이면 일찍 눈을 뜨고 겨울이면 늦게 눈을 뜨고. 여름날 내가 눈을 일찍 뜬다 해서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여름이면 아무래도 곡식과 채소를 돌볼 일이 많기도 하거니와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슬로 젖은 논밭에서 일하시다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그제야 내가 눈을 떴으니까. 겨울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전날 군불의 열기를 다 잃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구들장에 누은 자식들 따뜻하게 재우려 캄캄한 새벽에 불을 지피시곤 했다.



  그렇게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가끔 혼잣말하시듯 나지막이 ‘희석아, 너는 이 일 안하도록 공부해라!’고 하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 때문에 나는 힘든 농사일을 면하고 대신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머리를 굴리고, 타이핑에 손을 놀리고 있게 되었다. 남들은 이 직업을 갖지 못해 안달한다고 하니, 그만하면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몇 해 전부터 내 손이 참 보기 싫어졌다. 아마도 민변 공부모임에서 책을 읽어가면서 든 생각일 것이다. 남들은 ‘손, 참 곱네’라고 할지 모르지만, 군살 하나 없고 미끈한 내 손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딱히 손만 싫겠는가! 얼굴도 싫고, 다리도 싫고, 머리도 싫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곱상한 샌님의 그것이니, 좀 과장하면 그 모든 게 싫었다. 어디 놀러 가서 덜컥 밀짚모자를 산 것도, 평소 쳐다보지도 않아 베란다에 나뒹굴고 있던 화분에 눈길이 갔던 것도, 그리고 시골에 가서 어른들께 호미랑 낫 한 자루씩 달라고 해서 받아온 것도 그 무렵이다.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나는 농사를 짓고 싶었던 것이다.



  어릴 적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모습을 다시 살려보고 싶은 욕심. 아마도 그게 내 몸 속에서 꿈틀대었던 모양이다. 여름이면 에어컨, 겨울이면 온풍기 바람 앞에서 철 없이 책걸상을 친구삼아 계절을 넘기기보다는 봄, 여름엔 땅에게 땀을 내주고, 가을이면 흘린 땀을 땅에게서 곡식으로 거두어 겨울이면 저장하는 이 자연의 순환에 맞게 사는 게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생각대로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나마는 농사라는 게 쉬운 게 아니다. 뙤약볕 아래 허리 구부려 일하는 노동도 노동이지만, 도시에서는 상치 한 포기, 풋고추 한 줄 심을 땅 구하는 것부터 만만치 않다. 작년 봄 내 입에 갖다 넣을 상치라도 심어볼까 하여 조그만 텃밭을 구하려 했지만 그것도 바쁜 일상에 실패하고 말았다. 올핸 기필코 애기농사라도 지어보겠다 작정하고 땅을 수소문했지만 지금껏 아무런 진척이 없다. 허공에다 씨를 뿌릴 수 없는 노릇이니 보통 난관이 아니다. 내가 사는 서초동 일대에 텃밭 임대하는 곳은 여럿 있지만, 이미 임대가 끝나기도 했다. 또 그곳은 농사꾼이 씨만 뿌리고 거둬만 갈 뿐 임대료 받은 텃밭 주인이 김매고 거름 주는 곳이라 애당초 생각에서 제외했었다.



  읽었던 책 중에 ‘자기 땅이 없으면 국공유지 임대라도 해서 농사 지어보라’던 문구가 기억났다. 서초구청 홈페이지를 뒤지고, 전화를 걸었더니 작년까지 사용하던 사람이 더 사용하지 않는다 하여 놀고 있는 30평짜리 밭이 있단다. 재빠르게 신청서를 써 냈더니, 며칠 뒤 예전 사람이 마음을 바꿨다며 신청을 취소해 달란다. 몇 년째 묵힌 땅이라며 다시 추천을 받은 120평짜리 밭은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여긴 땀 흘린 보람을 찾기 어려운 땅이다. 북쪽으로 난 비탈에 여러 갈래로 쪼가리 나 있는데다 남쪽으로 열 척은 될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한 여름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으니, 어디 종자 값이라도 나오겠는가.



  멀리 가면 땅이야 구하겠지만, 멀리 있는 땅이 내 땅이 되기는 쉽지 않다. 다들 벌써 거름 주고 씨 뿌리기를 마쳤는데, 이 도시의 한량은 농사짓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으니, 나에게 밭 한 뙤기 쓰게 해 줄 사람 없을까… 삶의 틀을 바꾸는 것은 이렇게도 힘들다. 작은 변화의 시작도 곧 큰 변화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는 점차 들어가고 힘은 갈수록 떨어지는데, 그 큰 선택에 다가가는 것이 두렵지만 새록새록 솟아나는 흥분은 나를 젊게 한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지만, 농사일에 기꺼이 다시 도전해야 겠다. 아직도 내겐 많은 시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