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회 후기]변산공동체 윤구병 선생님과 함께한 민변 9월 월례회
민변 9월 월례회 후기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다”
– 윤구병 선생과 변산공동체
하늘은 날로 높아져 가고 있지만, 몰인정한 비바람이 휩쓴 산하에 황폐한 흔적이 곳곳에 그대로다. 서민들은 날로 거칠어지는 승자독식사회에서 매일 상처입고 웅크린다. 이때 무슨 희망이 있을까?
낮은 짧고 대기는 서늘해진 가을 저녁, 민변 월례회에서 윤구병 선생을 모셨단다. 선생은 충북대 철학교수자리를 박차고(사회는 내던져 버렸다고 했던가 걷어차버렸다고 했던가. 바로 어제 일인데 이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때려치웠다고 했던 것 같다) 전북 부안에 변산공동체를 일구고 출판사 보리를 꾸리고 계시다. 그 밖에도 재단을 설립해서 앞으로 30여년 계획으로 민족의학자료를 되살리는 일에도 진력하고 계시다.
30명 가까운 회원과 간사들이 모였다. 먼저 10분 정도 변산공동체 생활에 대한 다큐영상을 보았다. 일을 놀이 삼아 살면서 산하를 살리고자 하는 농사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이다. 나이, 전직, 학력에 상관없이 참여하고 꾸려나가는 공동체다. 중학생 또래들이 몸에 밴 듯 자기들끼리 척척 일을 해 내는 것이 인상 깊다. 입성이나 먹는 것이나 생활 모두가 담박하고 수수해 보였다.
이어 선생은 수줍은 듯 탁자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나지막이 함평에서 태어난 9형제 이름 내력부터 푼다. 아버지는 19세기 분이고, 선생은 1943년 생이다. 일병부터 구병까지 형제 가운데 육병까지 배운 형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단다. 남은 자식들을 무지랭이로 키워서 목숨을 살리려 아버지는 자식 데리고 고향 함평으로 내려갔단다. 소년 구병은 결국 초등학교 2학년 중퇴 학력에 사돈집 꼴머슴으로 4년을 지냈다. 그 4년 동안 자기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밀고 나가는 자세와 태도를 키웠다. 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대 철학과를 나왔다. 꼴머슴 4년이 정말 행복했고 그 다음으로 가장 행복한 때가 변산공동체 이후란다. 나머지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략 이쯤에서 선생은 청중이 만만하게 보이는지,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린다. 칠판도 쓴다. 철학강의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평소 공부를 멀리한 탓인지 어렵다.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야 할 것은 없는 게 좋은 세상이다. 지금은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이다. 물론 좋지 못한 세상이다. 그걸 깨부수기는 쉽지만,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변산공동체, 문턱 없는 밥집이나 기분 좋은 가게 같은 사업들은 1호가 2호를 낳고 2호가 3호를 낳아 결국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는 사업들이라는 뜻으로 들었다.
문득 청중들이 시시해 보였는지 아니면 변호사로 사는 것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는지, 대뜸 머리 굴리는 일 그만 하고, 농촌으로 가서 손발 놀리고 살란다. 그러다가 결국 농사꾼으로는 쓸만해 보이지 않았는가, 머리 굴리는 일이나 잘 하란다.
선생 삶과 생각의 씨줄과 날줄을 제대로 풀어놓기에 시간은 턱없이 짧다. 잡초는 없다, 경쟁과 분업이 지나치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협동과 공생,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끈질기게 해나가기 등등 선생이 꾸며온 삶의 결을 설핏 엿보았을 뿐이다. 함께 꿈꾸고 용기 내어 하나하나 이루어가고 있다. 느리더라도 여럿이 함께 하고 무리하지 않는다. 선생은 이런 삶들을 담쟁이에 비겼다. 한해 딱 자기만큼만 손을 뻗어 결국 저 담벼락을 모두 뒤덮어버리는 담쟁이들.
그러고 보니 저 몰인정하였던 태풍 곤파스도 담쟁이 덩굴까지 해치지는 못하였다.
글/표재진 회원